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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는 스토리가 되고, 스토리는 화폐가 된다.

월가를 등쳐먹은 자가 주는 카타르시스

by 별빛

뉴욕 23 St 역을 나오자마자 눈앞에 보인 281 Park Ave S, 그리고 그 순간 떠오른 Inventing Anna 넷플릭스 시리즈.

범죄는 스토리가 되고, 스토리는 화폐가 된다. 선량함보다 더 잘 팔리는 건 ‘월가가 당했다’는 통쾌함. 그 이야기로 애나는 유명인이 되었고, 비슷한 서사가 없는 선량한 보통 사람들보다 더 잘 살게 되었다.

이야기의 시장에서는 죄가 때로 덕보다 비싸다. 대개의 흥행작엔 악당이 있다(이를테면 마블 시리즈). 모두가 선한 세계는 경이로울지 몰라도, 흥미로운 이야기로는 잘 엮이지 않는다. 우리는 선량함을 지향하면서도 정작 돈을 내고 보는 건 갈등과 카타르시스가 있는 서사다. 그래서 애나의 사기 수법은 (당하는 입장에서는 불쾌하지만) 보는 입장에선 “저게 된다고?” 하며 흥미롭다.

이쯤 되면 사기꾼을 두둔하는 기분이라 반론하자면, 그렇다고 기록되지 않은 선량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판매 영수증은 없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기록되지 않은 지불 (노력, 배려, 책임 등)에 의해 유지된다. 대다수의 우리는 팔리는 이야기는 없지만 더 큰 것을 지키며 산다. 만약 애나 같은 사기꾼들이 많았다면, 세상은 금세 폐허가 되었을 것이다.

선의는 팔리는 이야기보다 조용하고, 또 오래 남는다. 그래서 나는 선하게 살려 애쓰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존경한다.


주소까지 외울 만큼 아끼던 곳. 한때 내가 애정하던 루프탑이 있던 옛 Fotografiska 건물을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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