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앞에서
얼마 전 지인과 철학 이야기에 발만 살짝 담갔을 뿐인데, 내 폰이 언제 엿들었는지 유튜브 알고리즘이 나를 그 길로 끌어당겼다.
덕분에 운동 두 시간 내내 철학 영상을 봤다. 대부분은 니체와 소크라테스 얘기.
지금의 현기증이 운동 때문인지, 아니면 고유의 사상들을 가차 없이 부수는 중인 니체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소크라테스 편이 끝나고 나서 생각했다.
모른다는 자각이 나를 불편하게 만든다. 미처 보지 못한 사실들과 그로부터 비롯된 ‘무지의 평온’ 위에 눌러앉고 싶지는 않다. 도리어 반발하고 싶다.
다만 심연을 오래 들여다볼수록 혼란과 박탈감이 짙어져 나를 집어삼킬까 두렵다. 더 알게 되어서든, 결국 이해하길 포기해서든, 그 과정에서 가라앉는 마음을 나는 아직 다룰 줄 모른다.
알아가려는 충동과 살아내려는 마음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면 다양한 관점의 책들로 나를 단련해야겠지만, 도파민의 노예는 몇 장 넘기기도 전에 화면에 뜬 알림을 누른다.
얼마나 지났을까, 무지의 평온에 눌러앉은 도피자가 뒤늦게 변명을 늘어놓는다.
깊이 파고들지 않아도 삶을 살다 보면 자연스레 쌓이는 지혜를 사랑한다고. 이해하지 못해도 좋아할 수 있다고.
하.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떠올랐다.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만 머리로는 끝내 이해하지 못해, 주기적으로 다시 찾아보게 되는. 아마 앞으로도 이해하지 못할 테지만 그 이야기 자체는 계속 좋아할 것이다. 언젠가 삶의 끝에서는 ‘무지’의 끝에도 닿기를 바라며.
논점은 이게 아닌데 설득당해 버렸네.
어떻게 마무리를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