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0

제1장: 0과 1이 닿지 않는 문장

by 별빛

2060년의 여름은 모든 것을 얼려버릴 것만 같던 지난겨울과 다르게, 사막처럼 뜨거운 아지랑이가 지표면에서 피어올랐다. 붉은 먼지를 머금은 폭우가 쏟아져 도심은 거대한 찜통처럼 달궈졌지만, 중앙 철제 도서관 내부만큼은 기묘할 정도로 차갑고 정적만이 감돌았다. 천장의 긴 홈을 통해 내려앉은 가느다란 햇빛은 마치 도서관이라는 거대한 감옥을 창살처럼 가로질렀다.


시아는 입자(G) 구역의 복도를 걸었다. 착용한 특수 렌즈를 통해 허공에 죽은 자와 산 자들의 생애가 실시간으로 재구성되어 홀로그램처럼 떠다니고 있었지만, 그녀는 이를 무시한 채 며칠 전부터 신경 쓰이던 디스크가 꽂혀있는 철제 숲의 끝으로 향했다. 그 디스크를 발견하고는 멈춰 서서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데 저 멀리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존감 부서의 휘였다. 쓸모를 잃고 방황하는 인간들에게 자존감을 채워주거나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자살 방지를 돕는 담당자였다.


"오늘 입자(G) 구역에서만 4만 건의 퇴고 명령이 내려왔어. 알고리즘이 용량이 아깝대."


숨을 몰아쉬며 휘가 말했다. 오늘따라 목소리에 피로감이 묻어있었다. 요즘 그는 "당신은 가치 있는 데이터 생산자"라며 거짓 위로를 처방하는 본인에게 진저리가 난 상태였다.


"퇴고가 아니라 삭제겠지. “


시아가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그녀의 세대에게 데이터는 곧 존재였다. 기록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삭제되는 것은 살해당하는 것과 같았다. 시스템은 용량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입자'들의 사소한 기억부터 지워나갔다.


"이번엔 뭘 지운대?"

"비 오는 날의 흙냄새, 낡은 가죽 지갑의 감촉, 그리고 1990년대 길거리에서 들리던 소음 같은 것들. '재현 가치가 낮은 저 순도 노이즈'라고 판단한 모양이야."


눈앞의 이름 없는 디스크 하나를 쓸어내렸다. 삭제되는 기록의 주인은 평생 비가 오기 직전의 그 비릿하고도 달콤한 흙냄새를 맡으며 위안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그 감각은 어디에도 남지 않게 된다.


"넌 가끔 궁금하지 않아? 이 디스크들에 기록되지 않은 것들 말이야."

"기록되지 않은 건 존재하지 않는 거야. 10년 전 미디어 전쟁 때 봤잖아. 서버가 날아가니까 사람들은 자기 과거조차 제대로 기억 못 해서 울부짖었어. 데이터가 없으면 우린 아무것도 아니야."


그의 말은 옳았다. 데이터 유실로 과거가 거세된 인류는 공포에 질려 이곳 도서관으로 기어 들어왔다. 그렇게 인류는 스스로 AI의 품 안에서 자발적인 입자(G)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퇴근길, 무인 택시 안에서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막 지어진 새 건물에 머리가 희끗한 노동자들이 달라붙어 일부러 인위적인 흠집을 내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진짜 세월을 살아온 그들은 가짜 세월을 입히는 동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작업이 끝난 옛 건물들을 지나치며 할머니를 떠올렸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시아의 고사리 같은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며 늘 말씀하셨다. 진짜는 전기가 없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라고. 종이에 꾹꾹 눌러쓴 글자나 손때 묻은 책장 냄새처럼, 시스템이 '노이즈'라 부르며 삭제하는 그 사소한 감각들이야말로 한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라고 말이다. 도서관이 자랑하는 결정(C) 등급의 데이터들이 기괴할 정도로 완벽하고 매끄럽게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간파할 수 있었던 것도, 할머니가 알려준 그 투박한 아날로그의 세계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지금을 ‘인텔리전스 시대'라 불렀다.

AGI 이전, 인간의 근육과 뇌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던 시대는 끝났다. 정부가 주는 배당금을 받고 살아가는 지금, 인간은 AI가 결정해 주는 행동을 따르기만 하면 됐다. 사고하지 않아도 됐고, 노동 없이 도파민을 채우며 즐기면 됐다.

유토피아인지 디스토피아인지, 그런 이분법적인 질문은 의미가 없었다. 각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는 굳이 지옥을 살았다.


잡다한 생각을 하는 동안 목적지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려 좁은 골목에 위치한, 간판도 없는 오래된 책방의 문을 두드렸다. 전자기기 차단막이 설치된 이 공간에 들어서는 순간, 관자놀이를 누르던 미세한 기계적 압박감이 사라졌다. 뿌옇게 변해버린 특수렌즈를 빼자 선명해진 세상이 보였다. 벽난로의 장작 타는 냄새, 오래된 종이 냄새, 그리고 잔잔히 서려 있는 담배 냄새를 맡으니 비로소 긴장이 풀렸다.


"오늘도 도서관의 차가운 냄새를 묻혀왔구나.”


구석진 소파, 산처럼 쌓인 누런 종이 뭉치 사이에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할머니와 한 시대를 공유했던 그는 깡마른 체구에 거북등처럼 굽은 등을 가졌지만, 눈빛만큼은 이 도시의 어떤 젊은이들보다 날카로웠다. 그의 손가락은 수십 년간 펜을 쥐어온 탓에 중지가 기묘하게 뒤틀려 있었고, 손등에는 검버섯과 함께 잉크 자국이 문신처럼 박혀 있었다.


노인은 예전에 어떤 이유에서인지 시스템 강제 삭제 대상이 된 할머니의 디스크를 몰래 빼돌린 뒤, 며칠 밤을 새워 아날로그 문서로 남긴 다음 도서관에 갖다 두었다. 노인은 할머니의 기억을 지켜준 은인이자, 데이터 너머의 세상을 가르쳐준 사람이었다.


“그래, 오늘은 뭘 가져왔니?”


노인의 물음에 품 안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손가락 끝에도 노인의 것처럼 푸른 잉크가 묻어 있었다. 이어 종이 위에 서툰 글씨로 적기 시작했다.


[기록: 비 오는 날의 흙냄새를 사랑했던 이의 생애]


단순히 후각적인 기억이 아니었다. 비가 오기 전 기압이 낮아지며 땅바닥에서 솟아오르던 생명의 냄새였고, 가난했던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걷던 골목길의 냄새였다. 효율성을 위해 거세된 이 서사를 시아는 종이 위에 온기를 담아 살려냈다.


0과 1이 닿지 않는 곳에서 데이터의 침묵을 깨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얼얼한 손가락에게 휴식을 주고자 핫코코아를 만들어 머그잔에 부어 들고는 창틀로 향했다.


하늘 위로 수많은 별이 빛나고 있었다. 진짜 별인지 버려진 수천 개의 인공위성 더미인지 알 수 없었지만, 별의 비중이 더 크리라 믿기로 했다.

자발적 상상의 믿음 또한 이 시대에 얼마 남지 않은 조작 불가 항목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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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에 글 쓰는 걸 좋아해서 기존에 관심 많던 ’AGI와 공존하는 미래‘를 상상하며 썼습니다. 읽을만한지 어떤지 더 쓰는 게 맞는지 고민하다가 올립니다. 피드백은 언제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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