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써니 Nov 25. 2023

아버지의 뒷모습

뻔해서 재미없지만 어느 아버지의 이야기. 1

누구나 얘기하고 싶은 옛날이야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죠.

아픈 얘기, 즐거운 얘기, 신나는 얘기, 슬픈 얘기


해외에 살면서 친정 식구들과는 고작  1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게 전부인데

어느 날 언제나 우리 집 기둥으로 당당하게만 보이던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게 됐어요


항상 건강한 모습으로

우리 세 딸 잘 키워내시고

부모, 형제 잘 챙겨주시던

든든한 아버지의 등이

굽은 노인의 고단함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 아버지 얘기를 좀 할게요.



``가난하게 태어난 것은 당신의 잘못이 아니지만 , 가난하게 죽는 것은

당신 책임이다-빌게이츠``



청년은 1939년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과 더불어 부산으로 귀환해 터를 잡았다.

형편이야 말로 설명하지 못할 정도로 찢어지게 가난한.


식민지를 막 벗어난 땅에서 기댈 것 없는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청년의 가족은 근근이 끼니를 이어가고 있었다.

청년이 국민학교 4학년일 때 6.25가 일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전쟁에 참전해야 했다.

가장의 부재는 남은 가족의 안위에도 위협이어서 남은 가족들은 밀양에 있는 본댁으로 들어가기로 하고

청년은 고모님의 배려로 국민학교 과정을 부산에서 마치기로   고모님 댁에서 지내게 된다.

넉넉하지 않은 형편이었지만  고모님은 학교를 마칠 때까지  2년여를 돌봐주셨다.



부모보다 더  정이 넘쳤던 고모님께는 지금도 감사한 마음이라고  말을 잇는다.

``그 고모님이 얼마나 고맙던지.

고모님 편찮으시다는 말 듣고 내가 약 사서 대구에도 몇 번이나 갔잖아.

다 먹고살기 어려운데 2년이나 맡아 주는 사람이 어디 흔하나?

참 고마운 분이시지``


졸업 후엔 청년도 밀양으로 가 가족들과 다시 생활하게 되었다.


전쟁이 휴전으로 끝나며 돌아온 아버지는 청년과 의견대립이 잦았고  잠시나마 떨어지고 싶었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A야.. 이거 가져가서 탁주 한 주전자 사온나.퍼뜩~``

``아버지, 밥도 못 먹는데  와 자꾸 술만드시능교? 부지런히 일해도 먹고살기 힘든 거 알잖아예.``

``이 자식이, 어디서 아버지한테 대드노? 사 오라면 사 올 것이지.

막걸리 사 오고  논에 가서 꼴이나 베라. 버르장머리 없는 놈``


오늘도 막걸리 타령에 두 사람은 신경전이다.

이해를 할 수 없는 가장의 술버릇에 청년은 정말 정나미가 떨어진다.

하지만 중학교도 가야 하고 아버지의 보호가 없이는 어려운 나이라 묵묵히 술심부름을 나선다.


``네 아버지 또 술사 오라고 그라나?  아이고 내 팔자야.!!

저 인간. 어쩌려고 맨날 술이고. 논에 가서 일이라도 좀 하소.

속이 천불이 난다 , 진짜로``

밭에 갔다 들어오는 길에 마주친  청년의 모친은 인상이 구겨진다.

자주 머리가 아픈  청년의 모친은 오늘도 술에 취한 남편에게 시비를 걸어 한바탕 싸움이 난다.


매일매일 반복되는 모습에 진저리 쳐진다

막걸리를 가져다 드리고 청년은 시끄러운 집을 뒤로하고 밖으로 나섰다.

학교를 가야 하는데 도저히 돈 나올 구멍은 없고..

답답한 마음에 소리도 질러보고 야트막한 언덕 위로 달려가 팔을 베고 누웠다.

푸른 하늘이 시리다.


그 이듬해 아버지를 졸라 중학교를 가게 된 청년은 낮엔 학교 가서 수업을 듣고

귀가 후엔 밤늦도록 집안일을 도우며, 힘들었지만  학교에 갈 수 있음에 감사했다.

어렵게 중학 과정을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있었지만 집안 형편을 잘 아는 청년에게

고등학교는 꿈과 같은 일이었다.


``A야, 이제 입학 원서 쓸 때가 됐는데 넌 진학 생각이 없는 거야?``

``아니요. 형편이 어려워 학비를 낼 수가 없어서예.

고등학교는 가고 싶은데 엄두가 안 나네예``.

``고등학교 졸업장은 있어야 사회에 나가서도 인정을 받아 출세도 할 수 있지 ,

중학교 졸업장 가지고는 살아가기 어려워.``

``잘 알고 있긴 한데......``

.

.

.

.``그럼 일단 시험이라도 치자. 그 뒷일은 나중에 생각해 보고.

네 성적이면 이 학교는 가능성 있는데 아깝다. 해볼래?``

``....... 그럼 , 일단 시험 먼저  치볼께예. 저도 배우고는 싶어예.``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던 청년은 담임의 배려로 입학 원서를 내게 되고,

합격 통지를 받아 집에 내밀었지만  학비를 내어줄 형편이 안 되는 그의 아버지는 탐탁지 않아 했다.


``아버지,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치고 합격했는데예..

근데 회비가 **이라.....``

어렵게 입을  뗀 청년을 아버지는 말없이 지켜보다

``내가 돈이 없어서

니 고등학교 보내줄 형편이 안된다고.

내가 얘기했지 않았나.``

``근데 선생님이 내 성적이면 아깝다고 하시고

나도 고등학교 가고 싶어서.``

.

.

.

``그럼 일단 학교는 가서 어찌해 보자.

대신에 잘 못하면  바로 학교 그만두는 거대이.``

``예. 한 번 해볼께예.가마니라도 짜서 그걸 팔아 보태든가, 남의 집 일손을 돕든가 ,, 함 해볼랍니더``



일단 입학을 하면 어떻게든 되겠지란 생각으로 입학을 하고 중학교 때처럼

낮엔 학교에서, 돌아오면 논이며 밭을 찾아 일을 도왔고 저녁엔 가마니를 짜서 장에 내다 팔았다.

틈날 때마다  수업내용을 보고 외우고 영단어를 익혔다.

닥치는 대로 외우고 또 외웠다. 하지만 수업 따라가는 것도 벅찼고 수업시간에 졸기도 많이 했다.  

결국엔 학비 조달이 안되니  이 학교에서 쫓겨나면 저 학교로, 또 다른 학교로 옮겨가며 다녀야 했다.

눈치도 많이 받고 퇴학도 당할 뻔했지만 그때마다 사정사정해 근근이 2년 동안은 버틸 수 있었다.


하지만 2학년을 마치고는 힘에 부쳐 자퇴를 할 수밖에 없었고 7~8개월  농사일을 도우며 지냈다.

억울한 맘에  부모 원망도 많이 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참을 수밖에 없었다.

여름이 가고 가을에 접어들자 청년은

`3개월만 다니면 졸업을 할 수 있을 텐데 `라는 생각에   학교 측에 서류를 들이밀며 생떼를 써 간신히 전학을 허가받게 되었다.(자세한 과정은 개인사라 생략합니다)

고교 졸업장에 대한 열망으로 혈액을 팔고, 가마니를 팔고 , 돈이 되는 것은 뭐라도 해서 학비를 마련했다.

그리고   마침내 졸업장을 손에 쥐게 되었다.

수업 일수가 모자랐지만 전산이 잘 되어 있않던 시절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 졸업장으로 인해 청년은 새로운 환경에서 승진의 기회도 잡게 되고 사업가의

기틀을 세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인 청년에게 졸업장 하나는 큰 무기였던 셈이다.



 청년은 졸업 후 바로 군대를 갔고 제대 후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보이지 않는 가난의 굴레에 고민이 깊어갔다.

작은 땅에  1년 농사 지어 빚 갚고 나면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가정형편.

동생들은 그나마 제대로 된 교육의 의지도, 뒷받침도 없이 그저 하루하루 살아내고 있었다.


``느그들은 시간 날 때마다 이것도 배우고 외우고 해라. 공부 안 하면 앞으로 먹고살기 어려울 끼다``

``행님아. 내는 공부는 취미 없다. 이 집구석이나 벗어나면 좋겠다, 마!``

``오빠야, 학교를 가야 공부를 하지``


시골 오지에서 무일푼의 청년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여기를 벗어나 취직을 하고 돈을 벌어 가족들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아버지, 저 부산 가야 되겠심더``

``돈이 없는데 도회지에 나가서 살아가겠나.

도와줄 형편도 안되는데``

``그래도 부산 가면 공장에라도 취직해서 일하믄 여게 보다야 안 낫겠습니꺼.

동생들 학교도 가야 되고 농사해서 빚 갚고 나면 남는 것도 없다 아입니꺼``

.

.

.

두 사람은 말이 없어진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대화 도중에 오는 침묵은 너무도 버겁다.


``그래, 뭐 여 있다고 뾰족한 방법이 있는 거는 아니니까.

그래 어디서 살 생각이고?``

``그거야 가봐야 안 되겠슴니꺼.

믿고 한 번 보내주이소``

``잘해야 한대이.네 몸 잘 건사하고.....

도와주지 못해 미안타.``

성인이 된 아들 뒷바라지 못해준 게 마음이 아픈 아버지는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기억들로 또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켠다.


능력이 없어 가족들 잘 챙기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마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시대가, 형편이 사람을 주눅 들게 했고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일을 해도 8남매 잘 키워내기가 어려웠던 촌부일 뿐이었다.

이제 다 큰 맏아들이 새로운 인생을 찾아 품을 떠난다니

미안함과 걱정만이 앞선다.


청년은 작은 옷가방을 하나 달랑 들고 길을 나선다.

꼬깃꼬깃 구겨진 돈을 손에 쥐어 주며

잘 버티라고

잘 지내라고

청년의 부모는 눈을 훔친다.



그랬다.

그런 노력으로 일궈낸 가정에서 나는 따뜻한 아랫목에 누워

따뜻한 밥을 먹으며

구김살 없이 잘 자랐다.

아버지의 그런 노고를 모르고

그런 빈한함을 들어본 적도 없이

처음부터 잘 살았던 것처럼

우리 가족은 그 부를 누리고 살았다.


이런 스토리를 알게 된 건 몇 년 전  아버지 팔순 때

직접 쓰신 이야기를 딸들에게 카톡으로 전해주셔서였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이야기라

아버지가 지어내신 , 드라마 보고 각색하신 건가 싶을 만큼

피눈물 나는 성장 스토리였다.


그런 아버지의 당당함 뒤에 숨었던 아픔을 하나씩 꺼내어 글로 적어본다.

아버지의 사연을 스틸하는 딸.



숨어 보는 이야기 하나.-to be continued







작가의 이전글 그럴 수 있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