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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Nov 28. 2023

아버지의 뒷모습 2

1963년 부산행 버스에 몸을 실으며 청년은 한 가지만 결심했다.

성공하기 전에 고향 땅을 다시 밟지 않겠다는.


막상 떠나기로 했지만 어디서 잠을 자며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미래는 불안 그 자체였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청년은 불안과 두려움, 일면은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가진 것이라곤 건강한 신체와 살아야 한다는 의지뿐인 청년의 부산 상륙기가 시작된 것이다.



하지만  버스에 내려서는 어디로 가야 할지 , 무엇을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잠잘 곳도 밥 먹을 곳도 없고 직장도 구할 길이 막연했다.

땅을 파봐라 10원 한 장 나오나.. 란 말도 있지......

청년은 땅을 팠다. 무작정.

못이 나왔다.

어쩌다 쇠붙이 큰 게 나오면 그날은 좀 더 나은 밥을 먹을 수 있었다.

고물상에다 땅에서 파 온 것들을 팔아 근근이 하루 한 끼나 운이 좋으면 두 끼를 먹어가며  



여름엔 노숙을 하고 겨울엔 밥을 사 먹은 식당에서 의자를 이어 붙여 거기서 잠을 청하며 버텨 내었다.

인심 좋은 주인을 만난 날은 다행히 식당에서 잠을 잘 수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날은 그나마 바람이 적은 곳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그야말로 거지 같은 생활을 1년 반에서 2년 정도를 했다.

패기롭게 도전한 부산 생활은 죽지 못해 사는 떠돌이 생활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아는 분 소개로 진양고무에 공원으로 입사를 하게 된다.

당시에 부산은 신발산업이 막 태동하던 시기라 고무공장 아니면 들어갈 데도 없었고

이마저도 지인 소개가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는 구조였다.

박봉에 처우랄 것도 없는 공원이었지만   찬밥 더운밥 가릴 일이 아니었다.



공장 취직 후에는 노숙생활을 끝내고 공장에서 숙식을  할 수 있으니 그 또한 다행이라 여겼다.

적은 임금이지만 어느 정도 자금이 모아 졌을 때

범내골 언덕 위에 흙으로 지어진 세모난  모양의 방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한 사람 누우면 꽉 들어차는 흙방.

곰팡이 냄새에  희한하게 생긴 방이었지만 길거리에서 잠을 청하지 않을 수 있어 다행이라 여겼다.

그곳에서 이 땅의 청년은 작은 희망을 키우며 참아내었다.


손재주가 있었던 청년은  성실히 기술을 익혔다.

돈을 벌어 가족들 부양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남들만큼 하는 것은 청년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남들보다 더, 선배 공원들에게 꼼꼼하고 집요하게 묻고 또 물어가며  한시라도 빨리 익히고자 했다.


진양고무에서 익힌 기술은  다른 곳에서 자신을 이끌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때 부산에서 제일 큰 신발회사는 국제고무였는데  청년은 자신이 익힌 기술을  바탕으로  `기술자`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다행히 합격을 했고  기술자로 정식 직원이 되어

좀 더 나은 급여를 받게 되면서  돈도 전보다 많이 모을 수 있게 되었다.

아끼고 아껴 모은 돈으로  세모난 흙방을 벗어나 이사도 할 수 있었다.

작은 안식처가 되어 주었던 애증의 흙방을 벗어나면서 작은 희망은 조금씩 불씨를 살려가게 되었다.


노숙생활, 식당의자에서 쪽잠 자기, 세모난  흙방을 벗어나 작지만 자신의 몸을 편히 누일 공간이라 청년은 너무 행복했다.

청년이 홀로 상경해 갖은 고생을 할 동안 시골 본가의 형제들 형편은 나아질 기미가 없었고

박봉을 쪼개 가족을 도왔지만 깨진 독에 물 붓기밖에 안되었다.

아버지는 연일 술로 시름을 달랬고 동생들은 학업엔 관심 없이 마지못해 사일을 도우며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청년은 고민 끝에 동생 두 명을 부산으로 오게 해서  일을 하면  한 입이라도 덜 수 있을 것이라 여겨

삼 형제가 함께 살게 되었다.

방 한 칸에서 다 큰 어른 셋이 같이 사는 게 쉬웠을 리가 있을까.


세 살 터울의 둘째는 어릴 때부터  사는 데 불만이 많아 청년과는 불화가 잦았고

셋째는 그나마 청년이 시키는 것을 군말 없이 따라와 주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다툼은 늘어가니

셋째는  함께 못 있겠다고 나가버리고 둘째는 취직을 시켜주면 나와버리고

또 나와버리고, 그러다 직장에서  다른 공원과 싸움이 나 회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느그들 내가 왜 부산으로 불렀는지 모르나. 형제는 많제 .밥 먹고 살 길은 없제.

같이 있다가는   다 같이 죽는 길 같아 불러들인 건데.

좀 참고 일 열심히 해서 돈 벌 생각을 와 몬하노.

B 니는 회사에서도  쌈질해 갖고 합의금 물어주고

그동안 일한 거 말짱 도루묵 돼버렸다 아이가.


지금 고향 내려가 봤자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쩔 생각이고? 학교를 안갈요량이면 밥벌이라도 해야 안되나. 소개해 준 사람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말썽을 자꾸 부리면 우짜노 말이다.``


``......``


``C 니는 밖에 나가 살믄 돈이 배로 나가는데

집에 들어 온나,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한 푼이라도 아껴서

우리도 살고 가족들도 살아야제``


다독이기도 하고

야단도 쳐가며

청년은 동생들을 이끌고 살아갔다.


그렇게 결혼 전 4년 동안 함께 생활을 이어갔다.


직장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던 시기에 청년은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신암동 언덕배기 방 두 칸짜리 집에서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먼저 올라와 있던 시동생 두 명과 아버지의 재혼으로 혼자 동떨어져 지내던 사촌 시동생, 대학교에 진학하는 막내 시동생까지 모두 4명의 시동생을 한 집에서 데리고 살았다.

보일러도 세탁기도 없던 시절, 갓난쟁이를 등에 업고 연탄불에 밥하고 그 많은 빨래를 해 온 아내에게 청년은 너무도 고맙고 미안함을 느낀다.

청년 한 사람만 보고 시집온 아내는 남편말을 잘 따라주는 고마운 사람이었다.



함께 지낸 지 2년째 되던 해 말썽 많던 둘째 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의 능력으로는  결혼시킬 형편이 안되니 청년이 모아둔 돈으로 결혼 자금에 보태었다.

그 뒤로도 동생들 결혼 자금은 청년의 몫이 되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청년의 아내는 그 모든 것에 동의해 줄 만큼 순종적으로 청년을 따르는 사람이었다.


동생들을 결혼시키고  청년이 부장까지 진급하며 경력을 쌓게 되어 인정도 받을 즈음,

청년은 공장을 나오게 된다.

고무공장 돌아가는 상황도 웬만큼 알게 되고 인맥도 쌓아뒀으니 사업체를 경영해보고 싶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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