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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Nov 30. 2023

아버지의 뒷모습 -3

시골 청년이 성공담

``위대한 것을 이루려면 우리는 행동할 뿐 아니라 꿈도 꾸어야 하고 , 계획할 뿐 아니라 믿기도 해야 한다.``

<아나톨 프랑스>


부마항쟁 (출처 네이버)



청년이 가진 것은 고등학교 졸업장과 10년 넘게 쌓은 경험을 바탕으로  한 신발에 대한 열정,

그리고 좋은 인연들이었다.

성실하며 정직했던 청년은  부산시 금사동에 있던 삼화고무로 이직하면서  실력을 인정받아 과장, 부장까지 진급하게 되었다.

이 즈음 주변에서 경력을 쌓은 동료들이 하나둘 사업을 시작하여  돈을 잘 벌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되었다.  

그러한 얘기들은 청년에게도 의지를 불어넣어 사업에 대한 꿈을 꾸게 했고

자금이 어느 정도 모아져 여력이 생기자 청년은 일을 도모하게 되었다.


부산에서 최대의 공업단지로 일컬어지는 사상공업단지에 작은 공장 터를 사서 공장을 짓고 ,

신발 아웃솔 업무를 주로 하는 하청업체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동안 비즈니스 관계에 있던 이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어렵지 않게 오더는 확보할 수 있었다.

성실함과 정직함으로 일해 왔던 청년을 믿고 도와준 분들이 많았고 신발 산업으로 부산은 해방 이후 전성기를 누리는 시기를 잘 탔던 이유도 있었다.


``어머나, 사모님.. 오늘도 오셨어요?

도대체 사장님이 뭐 하시는 분인데 이렇게 돈을 잘 버시나요?``


``아휴, 요... 이제 좀 먹고살만하니 돈을 모으는 거죠.

은행 이자가 높으니 저도 기분이 좋네요.``


그 당시 은행이율은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안될 만큼 높은 20%가량 되던 때라

다른 재테크를 하지 않고 은행에 돈을  맡겨만 두어도 이자로 살아갈 수 있을 정도였다.

경제개발이 활발할 때라 제조업이 정말 경기가 좋았었다.

눈 앞에서  불어나는 돈을 보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있을까!

눈도장 찍은 은행원들이 청년의 아내를 깍듯이 대할 만큼 청년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고 있었다.

무일푼으로 부산으로 상경해 떠돌이 생활하던 청년에겐 인생 역전드라마가 실로 펼쳐졌던 것이다.



 두 칸짜리 전세로 있던 신암동에서  이사와 처음으로 내 집도 사게 되었다.


``우와, 마당에 화단도 있네~~

아버지 ,집이 너무 좋고 넓어요.. 이게 우리 집 맞아요?``


``그래, 이게 우리 집이다.

좋으나?ㅎㅎㅎ``



재개발로 이주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이주민터인 이곳은 주택이 밀집돼 있어

옆집에서 어떤 걸 먹고 무슨 말을 하는 지도 알 수 있을 만큼 붙어 있었다.

고급진 동네도 좋은 주택도 아니지만 청년은 자신의 노력으로 일군 이 집이 자랑스러웠다.

 위를 헤매고, 식당 의자 위에서 쪽잠을 자던 청년은 이제 자기 이름이 새겨진 문패 달린 집을 갖게 된 것이다.


수년 뒤

청년은  그 터에 집을 새로 지어 그 동네에선 청기와 부잣집으로 불리게 되었다.


말의 힘은 대단한 것이어서

힘에 부친  시간 속에서도 청년은 ``성공``이라는 단어를 마음속 깊이 각인시키며 이를 악물고 버텨내었다.

무시당하며 고생하는 부모, 가난을 벗어나려는 의지가 안 보이는 동생들,

집도 절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자신이지만

본인에게 수도 없이 되뇌었던 그 말 덕분에

청년은 버티고 나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신에게 묻곤 한다.`왜 나에게는 이것밖에 주지 않는 걸까?`

그러면 신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한다.`이것만이 너를 네가 원하는 것에게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

청년이 자신이 못 가진 것에 대한 불만으로만 살았다면 이룰 수 없었을 일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나아갈 길을 개척해 나간 청년은  약하기만 한 자신의 무기하나로 세상과 맞서 싸운 것이다.

그것만이 자신을 ``성공``의 길로 인도해 준다고 믿었기에.





부모님이 계신 도서라는 곳은 1980년대 초 당시에도 TV나 냉장고는 구경도 못하는  오지마을이었다.

그런 동네였지만 가난했던 부모를 이웃들이 멸시하고 천대했던 일을 청년은 가슴 아프게 보고 있었다.

달리 방법이 없어 홀로 부산에서  살아내면서, 성공하면 반드시 우리 부모님 위신을 세워주리라 결심한 터였다.

사업 전, 직급이 올라가고 형편이 좀 나아졌을 때  청년이 제일 먼저 한 일이 TV와 냉장고를 사드린 것이었다.

40여 가구가 모인 동네에 그야말로 야단법석이 났다.

배운 것 없고 지지리 못 사는 ##영감네에 TV랑 냉장고가 들어왔다고,, 구경이나 가 보자고,,,


``구 씨, 당신 그 소리 들었나?,,##영감 아들내미가 TV랑 냉장고를 사보냈다메.

아이고마, 희한한 일도 다 있네.

그 아들이 도회지 나가서 고생한다는 말만 들리더니만 언제 그렇게 돈을 벌었는고..

대견하구마,마!``


``핵교 핵비가 없어갖고 우리 집에서 일도 도와주고 그 돈 모아서 핵교 댕길 때부터 저놈아가 뭔 일이라도 하겠다 싶더마는...

아~덜이 다 못쓰겠더만 큰 놈은 잘 키아 났네..``


처음 보는 TV 앞에 옹기종기 아이들도 모이고 어른들도 모여 밤이면 밤마다 문지방이 닳곤 했다.

청년의 아버지는 한 껏 기분이 좋아져 또 막걸리 한 사발에 웃음 짓는다.

땡전 한 푼 없이 보낸 아들이 부산에서 자리를 잡고 돈을 벌어 체면치레 해주는 것이 싫지 않다.

살아생전 무시만 받다 지인들로부터 공치사 듣는 것도 새로운 경험이다.


청년은 모으고 아낀 돈으로 소작농으로 일하는 아버지께 600평의 땅을 사드렸다.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 떳떳하게 살아가시길 소원하면서.

뒤에 알게 된 거지만

오래지 않아 청년의 아버지는 그 600평을 말도 없이 팔아버리고 말았다.

청년은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다그치지 않고 입을 닫았다.

`막걸리 사 잡수셨나 보다, 내가 할 도리는 했으니 그걸로 됐다`

피눈물이 났지만 아버지를 탓하지 않았다. 후에 이 사실을 안  청년의 큰삼촌이  아버지를 대신 나무라주셨다.

한 명이라도 응원군이 있다는 사실로 위안을 받으면서......


사업이 어느 정도 괘도에 올라서면서 청년은 땅 한 마지기 없는 부모를 위해 다시 3000평의 농지를 사드렸다.

농부에게 있어, 아니 우리 국민들에게 있어 땅이라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말 안 해도 안다.

밥 먹지 않아도 배부른 그 기분으로 아버지는 오늘도 막걸리 한 사발..


농사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던 셋째 매제에게 맡기면서 수익금의 **%를 부모님께 드리라고 했다.

하지만 가끔 아버지께 물어보면 매제가 돈을 주지 않는다는 걱정만 들렸고, 독촉을 하면 ``큰처남에게  돈 달라고 하세요``라며 적반하장이었다고 했다.

부모님을 모시고 있다는 이유로, 농사를 짓는다는 이유로  좋은 말로 타일러  돈을 받도록 했으나 여동생조차 부모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았다.


같이 사는 여동생은   어릴 때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해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 성인이 된 후 청년의 도움으로 수술을 하게 되었다.

인공뼈가 국내에 없어 독일에서 가져와 수술을 했으며 수년 뒤 그 부위에 다시 이상이 생겨 재수술을  할 당시에도 청년이 수술비를 대주었다.

그런 상황이었지만 동생은 부모를 모시고 산다는 것을 구실 삼아, 부모님께 드릴 돈도 제대로 드리지 않고 청년에게만 책임을 떠 넘기려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청년의 사업은 날로 번창했지만  시대의 흐름에 따라  공장에서는 노동자의 인권문제가 불거지면서

학생들과 노동자의 자유 물결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정권에 따라 진전과 후퇴를 반복했지만 부마 항쟁 직후인 1980년 초에는 다른 지역보다 부산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노동쟁의가 발생했다.

그 이후 1987년 6월 민주 항쟁으로 노동자 운동은 들불처럼 확산이 되었다.

소규모 사업장이었지만  거세게 휘몰아치는 노동 운동은 청년에게도 예외는 아니어서

청년은 많은 고민 끝에 결단을 앞두게 되었다.


소소하게 일어나는 작업장 내 사고도 , 노동인권을 외치며 많은 임금을 요구하는 노조들과의 갈등에도 회의감이 들던 터라 청년은  공장을 닫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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