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도
남편은 1995년 베트남으로 공장을 이전해 한국과 베트남을 오가며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함께 이주하기엔 베트남 환경이 열악하기도 했고 아이들이 너무 어려
차일피일 합가는 미뤄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큰 아이가 4학년, 작은 아이가 1학년 때가 되자
여러 제반 사항이 적절하다고 여겨져
우리는 베트남으로의 이주를 결정하게 되었다.
다니던 학교에 해외 이주를 말씀드리니 제적을 해야 한다고 하셨다.
제적이라니... 처음 듣는 무서운 단어였던 기억이 난다.
학교에서도 재외국민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거의 처음이었던지
절차를 잘 모르고 있었다.
일단은 1학기를 마쳐야 학기 인정이 되니 학기를 마치고 제적상태로 전학을 가야 한다고 했다.
한국 학교에서의 일은 일단은 진행시켜 두고
5월 중순쯤 베트남으로 가서 학교 입학을 위한 절차를 밟기로 했다.
2학기 시작과 함께 전학이 이뤄져야 했기에
학제가 한국이랑 동일한 베트남 한국 학교에 문의했지만 TO가 없다고 했다.
미국계, 호주계, 영국계의 큰 국제 학교 세 군데서도 한국인 TO가 없다고 답변이 왔다.
마지막으로, 시험을 치러보라고 연락 온 데가 ABCIS였다.
영국 학제를 따르며 베트남인 , 한국인이 대부분이고 그 외 홍콩, 대만 , 영국, 미국 국적의 학생들로
전교생은 1000명 정도 되는 학교였다.
4학년이던 큰 아이의 영어 실력은
음,,,,,읽고, 단어 외고, 짧은 단문장 쓰는 정도
1학년인 둘째는
영어 유치원을 1년 다녔고 첫째와는 달리 언어습득이 좀 빠른 편이라
어느 정도 안심이 되었었다.
5월 중순, 입학시험을 치르러
베트남으로 향했다.
과목은 영어, 수학 두 과목인데
영어는 지문을 읽고 답을 고르기와 에세이 쓰기,
인터뷰로 진행되었다.
수학은 4학년 아이도 풀 수 있을 정도의 평이한 수준이었다.
총 2시간 정도 걸리는 시험으로 두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입학시험 전, 정보를 구하고자 했으나
지금은 널린 입학에 관한 정보가 그 당시엔 정말 하나도 없었다.
`국제 학교 입학` `베트남 국제 학교`
`입학시험 ``베트남 학교 입학하기`
인터넷을 아무리 뒤져도
어떤 키워드를 두드려도 나오는 거라고는
베트남이 어쩌고 저쩌고..
이렇게 단 몇 줄 정도의 일상적인 내용이 다였다.
정보 구하기는 포기를 하고
일단 두 번의 기회가 있으니 처음은 가볍게 시험을 보고 안되면 다시 준비를 하기로 했다.
한국의 여름 태양과 사뭇 다른 베트남의 뜨거운 공기.
그 태양 아래, 인조 잔디가 펼쳐져 있는 운동장에서 아이들은 축구를 하고 있었고
건물 안 벽면엔 아이들의 작품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가 ``admission test를 보러 왔다``고 하니 아이들을 한 교실로 안내해 주었다.
잘 치르고 와! 오, 하나님!!!
테스트는 뭐든 긴장되고 두렵다.
쭈뼛거리며 따라가는 아이들을 보니 내가 더 긴장이 되었다.
일정에 맞추어 아이들의 전학이 순조롭게 진행되길 바랐다.
그저 무사통과 해주길.
뭐, 어찌 되겠지..
2시간 정도 지난 뒤
나이가 지긋한 뽀글 머리 여자 교장선생님이 우리를 맞아 주었다.
결과는 딸아이는 ``pass``
큰아이는 `` I am sorry.one more time~~~~``
밖에서 기다리는 아이들에게 걸어가면서 어색한 웃음으로
``철수야, 넌 7월에 한 번 더 시험 봐야 할 거 같아.. 우리 좀 더 준비해서 오자.
너 오늘 시험 친 거 내용 기억나지? 엄마한테 얘기해 주면 한국 가서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아``
``네.``
기고만장한 딸아이를 자제시키고
큰아이를 다독여주며 7월의 시험에 대비한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난다.
영어 지문은 어느 정도길이며, 인터뷰는 무슨 내용을 물어봤고
수학 수준은 어느 정도였는지..
아들은 조금은 생소했던 경험을 찬찬히 얘기해 주었다.
지문 내용이 다소 길고 이해하기 어려웠으며 에세이 적는 부분은 뭔지 몰라 두줄 정도 썼다고 했다.
수학은 쉬워서 금방 다 풀 수 있었는데 인터뷰 때 무슨 말하는지 제대로 들은 게 몇 문장이
안되어서 좀 당황스러웠다고.
아마도 11살이었던 아들에겐 둘째 보다 좀 더 버겁게 느껴지는 시험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한국말도, 학교 생활도 한국식이 더 편한 아이였을 테니.
영국계 국제학교에선 한국의 4학년은 이미 Y6(Y7부터 중등과정에 해당됨)에 해당되므로
어느 정도의 수준을 요구했다.
그렇게 처음으로 영어의 날카로운 실패를 경험한 아이는
실망과 아쉬움을 뒤로하고
7월을 기약했었다.
10줄 정도의 지문이 나오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문제는 사지 선다형과 문장 완성형으로 출제되었다.
수학은 한국 아이들이 풀기 어려운 문제는 없을 만큼 기초적인 개념을 요하는 문제 위주.
한마디로, 영어가 입학 조건이라는 것이다.
일단 한국으로 돌아가서
영어 문제집을 찾아보았다.
서점에 가서 아이에게 보여주니 비슷한 유형으로 된 원서가 많이 보였다.
아이 수준에 맞게 두어 권을 사서
답 찾는 방법은 내가... 찾아주기로 했다.
일단 입학이 우선이었기에
아이의 독립성은 차치하고......
지문을 모두 이해하고 답을 찾는다는 건 두 달 만에 해내기 어려운 일이었기에...
우선 , 질문에 나온 단어를 지문에서 찾는다.
아예 이해가 어려운 정도는 아니었으니 질문의 요지를 파악하면서
그 단어가 나온 문장 중심으로 답을 찾으라고 했다.
처음엔 버거워하던 아이도
한 문제 한 문제 거듭될수록 읽고 이해하는 게 조금씩 나아져 갔다.
기말고사까지 잘 마치고
전학절차를 마무리 한 뒤
짐을 먼저 부쳤다.
이삿짐이 도착하려면 2주 정도 시일이 걸리니 짐이 우선 내보내져야 했다.
우리가 살 집은 푸미흥(한인이 많이 거주하는 호찌민 7군)에 있었지만
남편의 숙소는 공장과 가까운 반탄박이라는 곳이었다.
남편은 다른 직원들과 빌라에서 방 한 칸씩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짐이 오기 전 우리 가족은 모두 그 방에서 지내야 했다.
남편이 지내던 빌라는 문을 열면 나오는 골목길로 오토바이가 하루종일 지나다니는 길가에 있었고,
출퇴근 때 이외에는 찌어이(집 안일 도와주는 아주머니, 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를 부르는 말)들이 대문을 닫아두고 있었다.
외출 한 번 하려 해도 대문을 열어주는 수고로움이 있어야 했고, 수많은 오토바이 때문에 걸어 다니는 게 두려운 일이 되곤 했다.
슈퍼마켓을 가는 게 그렇게 무서운 일이었다니......
길을 한 번 건너야 나오는 슈퍼는 멈추지 않고 달려오는 오토바이 때문에 가기가 두려운 장소였다.
절대 뛰면서 건너면 안 된다는 남편의 말에 눈 질끈 감고 천천히 걸었다.
그러면 희한하게 오토바이는 내 옆을 물 흐르듯 지나쳐 갔다.
모든 건 때가 있다.
입학시험은 3주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남편은 주변지인들의 조언에 따라 입학시험을 도와주는 한인 학원을 하나 소개받았다.
그때 처음 들었던 ``특례 입학``
처음 듣는 입학절차였다.
해외에 나온 아이들이 한국 대학 갈 때는 좀 더 다른 루트를 통한다는 사실.
특례는 다른 대입 전형보다는 혜택이 많다는 사실.
하지만 나는 대학교가 문제가 아니었기에
그 학원장이 얘기해 주는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선생님. 입학시험 준비는 영어만 해도 될 것 같은데 , 수학은 쉽다고 했거든요.``
``네. 한국 애들이 수학은 잘하죠.``
``집에서도 해오긴 했는데 좀 부족한 것 같아서요. 이 책으로 공부하고 있는데 한 번 봐주세요.``
`` 좋은 책이네요, 어머니.
일단은 저희가 해 온 교재가 있으니 이걸로 한 번 해보시죠.``
``내일부터 시작하면 되나요? 수업은 몇 분 정도 하나요?``
``오늘은 선생님이 다른 수업이 있으니 내일부터 하시고요. 수업은 매일 2시간씩 하면 됩니다.``
``그럼 합격 가능할까요? 한 번 떨어졌더니 애가 자신감이 좀 떨어지더라고요.
말하는 게 부족한 데 걱정이네요.``
`` 말하기 연습은 필리핀 선생님이 도와주실 거예요.``
``네. 잘 부탁드릴게요.``
아이는 군말 없이 잘 따라와 주었고
2주 동안 열심히 답 찾는 연습을 했다.
방에서 큰아이는 시험공부를 준비하고, 작은 아이와 나는 아빠의 퇴근시간만 기다리고 있었다.
좀 더 빨리 베트남에 왔더라면 큰아이가 수월했을까?
영어도 힘든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다고 잘 적응이 될까?
오만가지 불안한 생각이 다 들었지만
이젠 되돌릴 수 없는 시간이었다.
그저 순리대로 아이를 믿어주는 수밖에.
드디어 시험 날, 다시 그 인조 잔디가 깔린 운동장을 가로질러
학교 사무실로 올라가 ``Admission test``를 보러 왔다고 하고 안내에 따라 시험실로 들어갔다.
두 시간 뒤 일전의 노랑 뽀글 머리 교장 선생님과 마주했다.
``Patrick passed``
결과는 통과.
물론 수업을 바로 따라가긴 어려우니 영어는 EAL 수업을 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게 대수냐.
일단 일정에 맞게 입학하게 되어 너무 다행이었다.
의기소침했던 큰아이도 활짝 웃으며
베트남에서의 학교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큰 아이가 인조 잔디 위에서 아이들과 축구하는 모습이 그려졌다
작은 아이의 솜씨가 벽면에 달리게 되는 날이 기다려졌다.
어떤 시험이든 우리는 시험 앞에선 작아진다.
큰아이가 치른 두 시간짜리 시험은 두 시간 동안 두 번 치러졌다.
낯선 공간, 낯선 언어로 시작된 아이들의 학교 생활이
언젠가는 부모에게 원망 어린 말로 돌아오기도 했고
언젠가는 자랑스러운 말로 남기도 했다.
지금생각해 보니
아이들에겐 좋은 경험이었고
해외 생활을 겁내지 않아도 좋을 좋은 기회였는데
어린아이들이 감당하기 버거운 시간들도 있었음이 사실이다.
요즘 베트남엔 국제학교가 아주 많이 늘어서
많은 아이들에게 기회를 제공해주고 있다.
경제상황에 비해 높은 학비와 그에 못 미치는 교육 수준도 의심되지만
낯선 이국에서 낯선 언어로 생활하고 공부해 나간다는 게 참 대견하게 느껴진다.
약간의 수정이 더해졌겠지만 지금도 시험은 동일하게 치러지고 있다.
저학년의 경우는 영어 지문 읽고 답하기
수학,
그리고 중학교 이상은 과학 과목 시험을 치러야 한다.
입학 시험지는 가져올 수 없고 시험비용도 나날이 올라
비용이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이름난 몇 군데는 영어 실력이 안되면 아예 기회조차 안주는 곳도 많으니 준비가 잘 되어 있어야 한다고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