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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Dec 09. 2023

새알심미역국

스무 살 가마골 소극장

8스무 살

말만 들어도 가슴 설레는 나이.

인생에 있어 스무 살이 주는 설렘은

봄날 교정의 향긋한 꽃내음과 나른한 아지랑이, 봄볕과 함께 왔다.



여중 여고만 6년을 다니다

남녀공학 대학 캠퍼스에 발을 들였을 때

어지러울 만큼 두근대던 내 심장... 나대지 마!


캠퍼스 가득한 개나리, 철쭉들은 풋내기 신입생들을 더 설레게 해 주고

발그레한 어린 뺨에선 웃음이 절로 배어 나왔다.


청춘들로 가득하던 그 캠퍼스에

신입생인 내가 있었고

맘 속에 가슴  뛰는 선배 한 두어 명을 품어 보기도 했었다. 아무도 모르게.


그렇게 우리들 대학생활은 풋풋했었다.


1학년 겨울 방학을 앞두고 미팅을 통해 만난 A

A는  다른 학교 학생으로 고등학교 지인의 동아리 선배였다.

흔히 말하는 교회 오빠인 그를 따라 교회 가서 예배도 드리고

어디선가 들어본 찬송가를 따라 불러보기도 하고

통성 기도라는  울부짖는 믿음도  접할 수 있었다.


우리의 연애는

남포동 어느 찻집에 앉아

`기억 메모`노트를  사이에 두고

 짧은 문구를 나눈 데서 시작했다.


서로에게 하고 싶거나 기록에 남기고 싶은 말을 글로 남겨 두기도 하고

각자 읽어보고 싶은 책을 선물하고 간단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A가 한 줄 적으면

내가 한 줄 적어 답을 하고

내가 먼저 적은 날엔

A가 이어서 답을 적어주는......


``우리가 잠시라도 시간을 보낸 장소에는 우리 영혼의 일부가 남는다.``



뭐 저런 재미없는 커플이 다 있나 싶을 만큼

흔한 데이트  풍경은 아니진 않았을까.


부산의 성지곡 수원지는  어린이 대공원을 끼고 수원지가 있어 관리가  잘 되어 있는 공원이다.

경사도도 완만해서  주변에 사는 지역민들이 운동을 하거나 산책 코스로 많이들 찾는다.

성지곡 수원지

A와 나는  이 산책길을 즐겨 찾았고

숲 속의 맑은 공기 마시며  걷기를 즐겨했다.

보통의 대학생들이 자주 찾는 곳은 아니었던,


지금도 그렇지만

어르신들이나 어린아이들과 부모들이  즐겨 찾는 그곳을  A는  자주 가고 싶어 했다.

집 근처의 산책길이라  어릴 적부터 자주 다니던  곳이어서 ,

산행을 하기도 나쁘지 않아서 좋아한다고 했다.


암벽 타기와 겨울 산행을 즐기고

아픈 어머니를 위해 기도를 열심히 하며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었다.




신입생 티를 막 벗어난  내가 바라던 이상형은 아니었지만

영화 보고 얘기 나누고, 책을 선물해 주면 같이 읽어보고 메모를 남겨

우리의 시간을 글로 남기는 그의

조금은 색다른 데이트 방식이 나쁘지는 않았다.


겨울 어느 날

우리 둘은 연극을 보러 가기로 했다.


부산의 광복동 ``가마골 소극장``

그 당시 100명 정도 수용 가능한 작은 소극장이 젊은이들 사이에 인기가 많았는데

한 번도 가보지는 않았었다.

출처 가마골 소극장 홈페이지


``연극 본 적 있니?

가마골 소극장에서 ***하는데

재밌을 것 같아. 같이 가 볼래?``


``난 연극은 첨인데.

보고 싶네요. 가봐요.``


``영화도 좋지만 연극은 새로운 멋이 있어. 가보면 좋아할 거야.``


평일 7시로 예약하고  A와 나는 지하철을 타고 공연 시작 1시간 반 전에 광복동으로 갔다.

2시간짜리 공연이니 미리 저녁을 먹고 관람하기로 했다.


``여기 근처에 새알심 미역국이 있는데 그거 먹을까?``

``난 안 먹어 봤어요.

그게 뭐죠?``

``팥죽에 넣는 새알심을  미역국에 넣어 끓이는 건데,

나 믿고 먹어봐. 맘에 들 거야.``



좁은 실내는 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다.

나이 드신 분들도 많았고 우리처럼 연극 공연 전 미리 식사하러 온 젊은이들도 많이 보였다.

따뜻한 실내로 들어서자 안경은 이내 뿌옇게 김이 서리고

더운 실내 공기가 얼굴을 휘감았다.

안경을 벗어 김을 닦아내고 자리에 앉자 나이 지긋한 주인 할머니가 주문을 받아 가신다.

이 집의 메뉴는  단출해서

테이블 위엔 거의 새알심 미역국만 놓여 있는 듯했다.

김치 한 접시와 새알심 미역국.


따뜻한 보리차를 따라 마시니 금세 나온 미역국.

1. 냄비를 불 위에 올려 어느 정도  달궈준다.

2. 소고기를 붉은 기가 없어질 때까지 잘 볶는다.

3. 불린 미역을 잘  씻어 물기를 꼭 짜고 소고기와 함께  볶아준다.

4. 냄비에 물을 가득 채우지 말고 1/4 정도만 부어 20분 정도  잘 끓여 진한 맛을 우려낸다.

5. 국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냄비에 물을 양껏 붓는다.

6. 참기름을 둘러 고소한 맛을 첨가한다.(우리 어머니들은 참기름에 고기를 볶았지만 참기름을 센 불에 계속 볶으면 해롭습니다.ㅜㅜ)


  

하얗고 동그란 새알심이 미역 사이사이로 언뜻언뜻 비치는 게

처음 보는 비주얼이다.

동지 팥죽으로만 먹는 줄 알았던 새알심이

미역국에...


평소에 미역국을 그다지 즐기진 않지만

맛이 궁금했다. 한 숟가락 떠서 입에 넣으니

목 안을 타고 내려가는 짭조름하면서 고소한 바다향 미역국.

추운 날씨가 무색해지는 따뜻한 국물이다.


어떤 음식을 어디서 누구와 먹느냐에 따라 똑같은 음식도 다르게 다가오고

맛도 달라진다는 걸 그때 알았다.

미끌거리며 특별할 것 없는 미역국인데

왜 맛있지?

이 하얗고 말랑말랑한 새알심은 또 왜 별미인가?


새알심이 하나씩 없어질 때마다

아 ,, 몇 개 더 먹고 싶은데

아.. 이제 몇 개 안 남았어.

어떡해, 다 먹었네.


원래 먹성이 좋기도 하고 떡을 좋아하지만

미역국과 새알심의 조합은 처음이라

너무 신선하고 특별하게 다가왔다.


만족한 저녁을 먹은 후 극장으로 향했다.


A와는 내 인생에서 처음인 것이 참 많았다.


연극도 처음이었고..

손  뻗으면 닿을 듯한  무대 위에서   연기자가 걷고, 울고, 말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생동감이 넘쳐흘렀다.

다소 과장된 말투와 행동도 연극 무대 위라서 거부감 없이 즐겨지는

``행복한 경험``이었다.

연극을  보는 것도, 지하철을 타고 극장을 찾아 가는 길도  모두

 서툰  우리의 연애 거리를 좁혀주고 있었다. 



연극 제목도 내용도 기억나지 않지만

좋은 기억으로 연극을 추억할 수 있는 건

그날 먹은 새알심 미역국의  따뜻한 목 넘김과

쫄깃한 식감

연극을 처음 나에게 보여준 A에 대한 풋풋한 추억이 함께 해서일 것이다.




어떤 순간을 떠올릴 때

우리는 함께 먹었던 음식이 기억 속에서 소환되기도 한다. 

아이들과 함께 놀이동산에 가서 먹은 핫도그

학교 앞  친구들과 먹었던 떡볶이

엄마랑 벚꽃놀이 갔다 먹은 번데기


그날의 음식이  생생하다면

그 느낌과

그날의 기분

함께한 인연의 추억이 녹아 있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맛 

추억하게 되는 것 같다.


A와는 그 이후로도 몇 번을 더 연극을 보러 가마골 소극장을 찾았고

새알심 미역국도 먹었다.

어떤 날은 미역이 덜 퍼져있었을 때도  

어떤 날은  새알심이 더 적었던 적도 있었을 테지만


처음 연극 본 날 먹은 새알심의 추억은

다른 무엇보다  생생하다.


그 특별했던 겨울날

서리 낀 안경을 닦아내며

따뜻한 보리차 한 잔에 언 손을 녹이고

고소하며 짭짤했던 미역국과

어두운 소극장,  조명이 켜진 무대 위

아주 근거리에서 공연을 하던 배우들

그리고 조금은 설레었던 A.





길 따라 걷다보면

배어드는 기억하나

책갈피에 꽂아 둔

그대 얼굴 꺼내어

어여쁜 꽃잎 붙여

소식 전해 띄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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