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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Dec 16. 2023

채우고 비우고

움직임으로 채우고 버림으로 비우는 삶을 실천합니다.


12월의 베트남은 선선한 바람이 아침저녁으로 불어줘

1년 중 가장 지내기가 편한 달이다.


아이들이 독립해 나가고 난 나의 일상엔

남은 생을 위한 작은 준비로

하나씩 채워지는 중이다.


갱년기가 시작되면서

좀 많이 걸었다 싶은 날엔 어김없이 발바닥에서 불이 난다.

아침에 일어나면 굳은 손가락을 주물러주어야 무리가 가지 않고  

오래 앉았다 일어서면 무릎에서 아우성치는 소리도 들린다.

점점 달라지는  나의 몸을 위한 작은 움직임으로 매일 부지런을 떨지 않으면 고통으로 돌아온다.

소중한 것은 잃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은  내 몸도 마찬가지라

매일 50분 걷기와 요가로 뻣뻣한 근육을 풀어주는 게 일상이 되어간다.


30대 후반 갑자기 허리가 아파 한 달 정도 약을 먹고 침을 맞으며 지냈던 적이 있었다.

허리에 복대를 하고 의자에 앉아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해 한참을 고생했는데

그때 추천받은 운동이 요가였다.


요가 매트를 까는 작은 동작만으로 운동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도 편하게 다가왔다.

운동복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별다른 도구가 필요 없이 내 몸 하나만 준비자세에  돌입하면  그만이다.


가부좌는 아픈 무릎 때문에 허락되지 않으니 편하게 앉아

동작 전, 천천히 들숨과 날숨에 집중하며

정신을 모은다.

요가는 오로지 내게만 집중할 수 있는 운동이며  역동적이지 않은 움직임이라 더 좋았다.

호흡을 느끼며 한 동작 한 동작에 신경 쓰다 보면

길게 느껴지던 운동 시간이 끝나고

개운한 나의 몸과 대면하게 되는데

그 시간이 참 좋았다.



가능했던 동작들이 예쁜 자세가 나오지는 않고 있지만

여전히 나의 하루는 요가와 걷기로 채우고 있다.

허리에서 무릎으로

무릎에서 고관절, 견갑골,...

신경도 쓰지 않았던 온몸의 곳곳이 비명을 질러대니

도움 되는 요가 자세가 하나씩 늘어간다.

그나마 그 수고로움으로  나의 몸은 적응해 잘 지내는 편이다.


오전 요가를 마치면 혼자만의 점심을 준비한다.

먹는 건 예전 그대로인데  조금만 과식했다 싶으면 으레 체중계는 오른쪽으로 돌아가 있다.

유행하는 간헐적 단식만큼 쉬운 다이어트는 없다는 생각에, 운동이 끝난 11시쯤 나만의 점심을 먹는다.

단백질로 시작해 비타민, 무기질, 그리고 탄수화물 순으로 섭취를 하라는 철칙을 따르는 편이라

매일 조금씩 변화는 주지만 대충 비슷하게 꾸려지는

나를 위한 식단으로 간단한 점심을 준비한다.



계란 두 개를 깨어 스크램블을 만들고 채소는 냉장고에 남아있는 뭐든 사용가능하다.

버섯이 있으면 버섯으로 흔하디 흔한 상추도 좋은 샐러드 재료가 된다.

오늘은 사두었던 케일을 꺼내

잎만 뜯어 올리브 오일로 살짝 볶아 부드럽게 먹을 수 있게 준비한다.

약간의 견과류를 넣은 수제 요구르트에 강황 가루와 꿀 한 스푼도 추가한다.


착한 빵 먹기도 실천하고 있어  좋은 곡물이 많이 든 사워 도우 빵 한 조각을 올리브오일에 살짝 굽는다.

시큼하고 부드럽지 않은 거친 빵이지만 내 몸엔 부드럽게 소화될 것을 생각하며 선택한 빵이다.

부드럽고 고소한 흰 빵을 즐겨 먹었지만 나이 듦은 많은 것을 포기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날그날 맘에 드는  접시 하나를 꺼내

준비한 음식을 차례대로 담는다.

꽃이 좋으면 꽃이 가득한 포트메리온 접시를

색다른 이국적인 멋을 내는 폴란드 접시는 푸릇한 게 청량감을 더해준다.

접시에 맞게 커피잔을 꺼내와

갓 볶은 커피빈으로 한 잔 가득 커피를 내린다.

언제나 기분 좋은 기계음에 이어

온 집안에 배는 커피 향이 나른해진 몸을 감싸면 기분 좋은 식사시간이 시작된다.

북향집이라 해가 잘 들지 않는다.

더운 베트남이라 해를 꺼리기는 해도 간혹  우울한 기분이 들 때면

식탁이 아니라 볕이 보이는 창가 쪽에 자리 잡고 쟁반에 점심을 가져온다.



유튜브에서 찾은 좋아하는 노래 서너 곡과

볕을 느끼며 한낮의 점심을 먹는 이 시간이 나의 소소한 행복이다.



천천히 먹으면  포만감도 천천히오니  덜먹게 된다는 이유로

빵 한 조각을  여러 번 씹어 시간을 늘려본다.

준비하는 데 20분 먹는 데 5분 걸렸던  식사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려가며

천천히 음미하며 먹으려 노력해 본다.

아이들 키울 땐 왠지 모르게  매일 쫓기는 기분이 들어

알지 못했던 숨 고르기다.



서두를 것도

해야 할 일도

그다지 많지 않은  이곳 생활에서

마음을 보듬어가며 현재의 나를 지켜가는 느림의 미학이다.



배부른 식사는 아니지만

나의 몸과 마음을 채워주는 맛과 멋이 함께해

여느 브런치 식당 못지않다.


10년 전쯤 내게도 지갑을 열어 무언가를 끊임없이 사모으던 때가 있었다.


한국에선 남들 시선을 의식해 옷이며 좋은 가방 한 두 개 정도는 구비해 두고 살지만

베트남에 살면 값비싼 옷이며  명품 가방은  크게 필요하지 않다.

지천에 깔린 게 명품에다 브랜드 상품이고 게다가 저렴하기까지.

짝퉁이 판을 치는 곳에 살다 보니

A급 짝퉁 하나를 사서 몇 년을 즐기고

숨은 그림 찾기처럼

싸고 표시 덜나는 이미테이션 사는 걸 재미 삼아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라캉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친구는 가졌지만 나는 가질 수 없었던 것을  채우고자 했던  지난날이 있었다.

인간은  타인을 부러워하며 성장하기도 좌절하기도 하지만

그것이 내게 가능한 일이 되면  기꺼이 시도한다.



지금보다는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않았던  30대.

이웃집에 가면 세트로 진열되어 있던 포트메리온 그릇들.

우리 세대의 로망인 그릇이었다.

옷이며 가방은 눈에 잘 띄지만 그릇은 그 집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진정한 사치재로 여겨졌다.

그 당시 잘 깨지지 않는 그릇으로 통하는 코렐 품을 잘 쓰고 있었지만

예쁜 꽃 그림으로 둘러진 묵직한 무게감이 있는 포트메리온은

그 집의 격을 한 레벨 올려주는 느낌이었다.


비싸서 감히 엄두가 나지 않던 그릇에 눈길이 가면서

한 점 두 점  배송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맘에 드는  브랜드를 몇 개 골라 사들이기 시작하면

또 다른 브랜드의 더 좋은 그릇들이 나오고

내일이면 다시 다른 모델이 나를 유혹하는 개미지옥의 세상이었다.



주방 용품 카페에 가입하는 순간  수려한 자태를 뽐내는 그릇들 때문에  

갈망이 한계치를 넘어선다.

선을 그은 듯 매끈한 곡선의 커피 팟, 현실에도 없을 꽃그림,

장인의 손을 거친 각종 그릇의 매력에 정신 차리기가 어렵다.


풀 세트로 다 사다간 집안이 거덜날것 같아

커피잔 4인조, 파스타 접시 4개, 브레드 접시 4개......

활용도가 높은 구성으로 가족 인원수만큼  구매했더니

식탁 위엔 각양각색의 그릇들이 올라온다.


그릇장 가득  유약의 반짝임으로 유리로 된 장식장은 눈이 부시다.

늘어나는 그릇들만큼 내  행복수치도 올라가는 줄 알았다.

아이들의 독립으로  꺼내 보지도 못하고 세월의 더께가 낀 그릇들이 부지기수인데.


젊어서 그랬던 것인지, 나의 소비 성향에 과소비라는 것이 숨어 있었던 건지.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짜리 가방도 아닌데 뭐 어때? 내가 쓰면 될 그릇들인데..

라며 자기변명을 하다 보니 어느새 5년이 훌쩍 흘러 있었다.

흐른 시간만큼 그릇 놓을 곳도 비좁아져 갔다.


``소유한 것에 대한 탐욕은 내면의 평화를 파괴한다``--명예 헤라스

``세상은 물건으로 가득 차 있지만 , 만족을 가득 채우기엔 부족하다.``--쇼펜하우어


내게 행복을 주던 그릇이 한 장씩 크랙이 생기고

실수로 깨지기라도 하면

미신적인 불안과 상실감이 함께 밀려왔다.

가지고 싶던 것을 소유하는 것만 생각했지 다른 생각이 나를 사로잡을지는 몰랐던 것이다.


이가 빠진 접시는 버려야 되고

그릇이 깨지면 나쁜 기운이니 서쪽으로 침을 세 번 뱉어라. 블라 블라~~

미신을 맹신하진 않지만

지금까지 내게 온 나쁜 일들이 꼭 그것 때문인 거 같아

기분이 좋을 수는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생각으로 불운을 준다는 것들은 치우고 살아왔다.

조화는 나쁜 기운이니 치워라, 현관은 집안으로 운이 들어오는 공간이니  깨끗하게 두어라.

머리는 동쪽이나 남쪽으로  두고 잠을 자야 한다.

등등 따지려 들면 머리 아픈 미신이지만 생활 속에 작은 실천이 가능한 것들은 지키며 지내왔다.

거기에 그릇이 끼어 있어 내 선택에 대한 책임이 짐스럽게도 느껴졌다.



게다가 늘어만 가는 짐들로 인해 집은 점점 비좁게 되고



가끔 소파에 앉아있으면

선반 가득 채워진 물건들에 질식될 듯한 느낌을  받고는 한다.


비움의 미학.

미니멀리스트 까지는 되고 싶지 않지만

머릿속을 비워내듯

정리를 통해 나의 주변을 치우고 싶은 생각은 날이 갈수록 커졌다.


세월에 따라 취향도 바뀌어

채우는 재미로 살았던 시간이 있는가 하면

비워 내 자리를 더 늘여가는 게 즐거움이 될 때가 온 것 같다.

1년 동안 한 번도 입지 않은 옷은 과감히 버려라(지금 안 입으면 유행 지나 못 입는다)

색이 바래거나 살이 쪄 못 입는 옷은 버려라(절대 예전 몸무게가 될 수 없다.)

발이 아파 안 신는 신발은 버려라.(네 발에 맞지 않으면 고통으로 돌아온다)

오래 두면 삭아버려 못 신게 되니  욕심내어  여러 켤레 사두지 말아라.



물건을 정리하는 시간은

신경 쓸 문제들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고

비워진 공간만큼  들어차는 삶의 여유가 보여 좋았다.


옷은 나눠주고 버리고 팔기도 했지만

그릇들은 어떻게 처리가 안 되는 상태라

다른 물건들을 비워낸 빈 공간에 옮겨 보이지 않게 치우는 중이다.


여전히 버림으로 가벼워지는 즐거움을  온전히 내 것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하지만

언젠가는 비워 낼 그날을 위해~~


한낮의 브런치와 비워지는 수납장을 보는 내 하루는 소소한 즐거움으로 가득 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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