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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써니 Jan 24. 2024

그 해 6월 베트남

코로나 백신 접종



날이 갈수록 당에서 내려오는 지침은 강해져 갔다.

이젠 비행기도 특별기만 운행되어 하늘길은 막혀버렸다.

생전 처음 겪고 있는  이 일에 대해 그 누구도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었다.

혼란스럽기만 한 사실 앞에서 오롯이 개인의 책임과 의무만 강화되고

질병에 대한 단죄로 서로에 대한 불신은 깊어만 갔다..

전 세계적으로  확진자가 늘어나는 추세라 앞으로 이 일이 얼마나 더 걸릴지, 백신접종은  언제쯤 이뤄질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답답한 시간만 흘러가고 있었다.

확진자에 대한 치료 과정도, 늘어나는 사망자에 대한 절차도 어느 곳 하나 투명해 보이지 않고 결국에

개인위생만 철저히 하라는 말이 전부였고 각자 거리 두기를 실천하며 집 안에서 지내기를  권유하고 있었다.

세계보건기구는 코로나로 인한 팬데믹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애 전무후무한 팬데믹.

말로만 듣던 전염병이 창궐하는 시대의 한가운데에 나는 서 있었다.

겪어본 일 없었으니 대책도 몰랐고 많은 직원들이 필요한 공장을 운영하는 내겐 매일이 시소를 타듯 긴장의 연속이었다.

계속되는 검사에도 불구하고 확진자 수는 진정되지 않고 계속 늘어났다.

직원들이 듬성듬성 자리를 비우게 되고 그로 인한 생산 차질로 매일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중 영국과 미국에서 들려온 희소식!

백신개발에 성공했다. 절반의 성공이라도 우리에겐 촛불 같은 희망이었다.


백신이라는 것이  여러 임상 단계를 거쳐 대중에게 내려오는 게 정상이지만 지금 같은 비상시국엔 모두 소용없는 논란일 수 있겠다.

어지러운 이 혼란을 잠재워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고 각국들은 앞다투어 접종을 서두르고 있었다.

아스트라제네카와 화이자 백신이 자국민에게 우선적으로 주어졌다.

돈 많은 미국과 영국 등지의 선진국은 자국민을 위한 백신 확보에 혈안이었다..

한국 정부도 나름의 자구책을 쓰고는 있지만 백신확보에 실패하며 여론의 뭇매를 맞고 있는데 외국에 있는 우리들이 보기엔  어린아이들 어리광 같다.

모든 치료가 정부 부담으로 이뤄지고 격리자들에겐 경제적인 지원도 주어진다.

그런 혜택을 꿈꿀 수도 없는 재외국민에겐 오로지  질병에 걸리지 않는 방법 외 다른 기대는 사치였다.

게다가  베트남 정부에서  언제쯤 백신을 확보하고 자국민이 아닌 우리에게도 접종이 가능할지.

정부의 입만 바라보는 상황이라 기대감은 접고 있었다.



6월 19일

일본에서 아스타라제네카 백신이  베트남으로 건너왔다.

호찌민 공단 내 직원들에게 우선적으로 혜택이 주어졌다.

접종을 위한 우선적인 검사를 위해  보건소직원들이 방호복을 입고 공장 마당에 텐트를 설치했다.



일본이 안 맞는다고 거부한 백신이다,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백신이다 등 확실하지 않은 소문들이

무성했지만 검사할 때마다 확진자가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라 마다할 형편이 아니었다.

호찌민 일반 시민에 앞서 공단 직원에게 우선적인 혜택을 주는 것에는 경제적인 이유가 컸을 것이다.

잘 사는 나라에서야 보조금을 수조씩 날리는 등 자구책으로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고자 했지만

베트남에서 그런 도움을 기대하긴 어려웠으니.

확진이 되면 3주 동안 일을 할 수 없었는데 그 기간 동안 인민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이 매우 컸던 것이다.


6월 23일

검사 결과 양성이 나온 직원들은 재검을 하게 했고 문자로 출근을 금했다.

음성으로 증세가 없는 직원들은 이른 아침부터 줄 서서 백신 접종을 했다.

나 또한 접종을 했고 외국인인 나에게도 혜택이 주어지는 데 대해 감사했다.

아스트라제네카가 뭔지도 모를 인민들에 비하면 우리는 행운이었다.


물백신이니 유통기한 다 된 폐기물이니 떠들어대도

이런 혼란의 상황에선 감사할 따름이었다.

접종 후 열이 나거나 붓는 경우도 있다지만 나는 별다른 증상 없이 하루를 잘 넘겼다.

직원들은 하루 정도는 결근이 허용되었다.


그렇게 진정되기를 바랐다.

우리 직원들만이라도 무탈하게 , 더 이상 확진자가 많이 나오지 않기를 염원하며 고사도 지냈다.

불교 국가인 베트남에선 집집마다 제단(반터, ban tho)을  마련해 아침마다 향을 피우고 초를 밝혀 조상신께 기도를 드린다.

어떤 일을 시작할 때나 소원하는 게 있을 때는 길거리에서도 향을 피우며 기도하는 것을 자주 보고는 했다.


신에게 기도한 적이 언제였을까! 신이란 존재에 대한 믿음을 크게 두지 않고 지내왔다.

나 자신을 믿고 나의 신념대로만 살다 보니 신을 찾는 일도 신을 의지해 본 기억도  별로  없다.

그랬던 내가 직원들이 만든 고사상에 향을 피우며 진심을 다해 기도란 것을 했다.

어서 이 어지러운 상황이 끝나기를 간절히 염원하면서.

그들의 바람과 함께 무신론자인 나도 이 일이 얼른 끝나기만을 다 같이 기도했다.


직원들이 차린 고사상. 향을 피우고 초를 밝혀 기도를 올린다.


어떤 신에게라도 빌고 싶은 마음이었다.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일까!

그럼에도 세상의 환란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7월 3일

오토바이를 타고 출근하는 김 이사가 아침부터 진기침을 하고 있다.

중국에 있을 때부터 오토바이 출근이 일상이었던 그는 제법 먼 거리지만 차량이용을 마다하고 오토바이로

출퇴근하고 있다.

오늘따라 유달리 매연이 심한 오토바이 뒤에 붙어 와서 그런지 목상태가 나쁘다며 일말의 의심스러운 마음을

꼭꼭 숨겨둔다.


주변에서 기침을 하거나 열이 나면 경계부터 하는 습관이 생겨버렸지만

이미 출근했고  다른 한국 직원들과 점심도 같이 먹은 후였다.

아무 일 없겠지. 이전에도 잔기침은 자주 했었으니 별일이야 있겠어. 열도 안 나고 있잖아.

제발 무탈하기만 바랬다.


퇴근시간이 되어도 상태는 별반 달라지지 않아 오토바이는 공장에 두고 함께 차량으로 이동했다.

낌새가 안 좋았지만 애써 외면하며 그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나쁜 징조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법이니... 사람의 직감이라는 게 이성보다 예리할 때가 많다.


일요일인 다음 날,  영업이 모두 정지된 미용실 이용은 불가했고 집으로 출장 오는 이발사가 있다는 정보를

단톡에서 보고는 부랴부랴 연락을 했다.

다행히 방문이 가능하다는 연락이 왔고 가능한 한 짧게 머리를 깎았다.

언제 다시 이발이 가능할지 모르는 일이라 기회가 있을 때 뭐든 해두어야 했다.



``열이 납니다, 오한이 오네요. 검사를 해봐야 정확하겠지만 열이 나는 건 좀 의심스럽습니다.``

한가한 휴일  저녁. 듣고 싶지 않았던 전화가 걸려왔다.

가족들도 별로 상황이 안 좋다는 말과 함께.

식은땀이 흐르면서 당황스러웠다. 일단 코로나 검사를 해보도록 얘기하고 앞으로의 일을 고민해봐야 했다.

접촉자들은 F1, F2, F3등으로 분류되며 재검받고 추적 관찰하게 되어 있었고 출입이 금해졌다.

나 또한 격리를 해야 하지만 일단 회사에는 출근해야만 했다.

질병에 대한 자세보다 중요한 건 생업이 걸린  생산 현장에 내가 있느냐 없느냐였다.

회사에 갇히게 되면 언제 집으로 올지 알 수 없기에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해놓아야 했다.

옷가지 몇 개와 생필품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


7월 5일

김 이사의 확진으로 접촉했던 한국 직원들은 모두 회사에서 숙식해야 했다.

집에서 격리하는 호사는 줄 수가 없었다.

모든 생산 활동에 차질이 빚어지는 상황에

직원들의 부재는 곧 공장 문을 닫는 것이어서

그 상황만큼은 막아야 했다.

사무실에 한 사람씩 들어가 업무를 지시하고 사무실에서 밥을 먹고 잠을 잤다.

직원들에게 부탁해  간이용 침대도 들였다.

군대 생활을 연상케 하는 극기의 나날이 시작되었다.

7월 초 베트남에선 ,

음성으로 생산이 가능한 직원들이 돌리는 기계음과  언제라도 그 기계를 멈춰버릴 코로나 검사가 계속 진행되었다.

위태롭게 공원들의 손은 바삐 움직였고 흥건하게 뿌려대는 소독약과 마스크착용에도 불구.

확진자는 늘어나고 있었다.

도저히 막을 방법이 내겐 없었다.

그저 모든 건 순리대로 신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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