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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득 Oct 28. 2024

첫 기다림

우리 엄마는 미용사

  내가 국민학교 2학년이 된 어느 날, 엄마는 설렘을 가득 품은 발간 사과 같은 얼굴로 말씀하셨다.


“얘들아. 엄마도 오늘부터 공부한다. 엄마랑 같이 공부 할까?”     


  엄마는 서른다섯에 미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지금의 나보다 열 살이 어린 나이였다. 이제 와 생각해보니 서른다섯에는 뭐든 할 수 있다. 그래서인가. 엄마의 얼굴과 몸짓은 반짝거렸다. 그렇게 내가 구구단을 공부할 때, 엄마는 옆에서 미용 필기시험 준비를 했다. 엄마가 공부하는 모습은 새롭게 보였고, 활기가 넘쳐 나 또한 괜스레 흥분되었다.     


  필기시험에 합격한 엄마는 실기시험 준비를 위해 미용학원을 다니기 시작하셨다. 우리에게만 열성이었던 엄마는 스스로에게 열정을 붓고 있었다. 엄마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해 보였고, 그런 엄마가 더욱 멋져 보였다. 아홉 살 어린 소녀는 엄마를 열렬히 응원했다.       

    

“야. 이것 봐라. 엄마 드디어 합격했다.”         

  

  엄마는 실기 시험에 합격하고 미용 자격증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시며 환한 미소를 지으셨고, 나와 동생은 팔짝팔짝 뛰며 박수를 쳤다. 엄마의 목표가 미용 자격증 취득에서 미용실 개업으로 옮겨간 후 우리 집에는 마네킹 머리가 새롭게 등장했다. 학교에서 돌아와 혼자 집에 있을 때, 자다가 깨서 화장실을 갈 때, 검은 머리털을 덮어쓴 얇은 빨간 입술의 마네킹 머리가 구석구석에서 보일 때마다 얼마나 흠칫했는지 모른다. 무덤 위에서 튀어나와 텀블링을 하며 내 간을 빼먹겠다고 기다란 손톱을 보여주던 귀신 꿈을 자주 꾸었던 것도 그 마네킹 머리 때문일지 모른다.     


  그러던 중 엄마의 미용 연습은 마네킹에서 사람으로 대상이 바뀌어 갔다. 엄마가 미용을 배웠다고 큰소리치며 고등학생 친척언니의 앞머리를 잘라주었다가 언니가 하루 종일 우는 바람에 내가 다 민망해질 지경인 적도, 내 긴 머리카락으로 연습 삼아 파마를 해주셨는데 학교 가서 아줌마라고 어찌나 놀림을 받았는지 엄마에게 제발 풀어달라고 빈 적도 있었다. 엄마의 실력을 보고 나니, 미용사가 되겠다는 엄마가 불안해졌다. 그래도 엄마는 자신만만했다. 그리고 자격증을 딴지 두세 달 만에 큰 목욕탕 안에 딸린 미용실에서 일을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을 가야 하는 그 당시 내게는 먼 곳이었다.          


  그때부터 엄마를 향한 나의 첫 기다림이 시작되었다.         

  

  미용실은 아침 일찍부터 밤늦게까지 영업을 했고, 주말에도 엄마는 일을 나가셨다. 한 달에 두 번 유일하게 쉬는 화요일에는 세미나가 열린다며 새로운 미용 기술을 배우러 가셨다. 엄마의 부재 속에 우리는 모든 것을 스스로 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얻은 자유 속에서 훌쩍 커버린 것만 같았다.      


  나는 이제 남동생을 보살피는 누나로서 배가 고프면 부엌에 있는 냄비 뚜껑을 열어 국에 밥을 말아 주었다. 김칫국에 찬밥을 말아 먹으면 맛이 늘 기가 막혔다. 엄마가 해놓으신 오이지무침, 가지무침 등 내가 좋아하던 반찬도 냉장고에 있었지만, 우리는 놀기에 무척이나 바빠 김칫국이나 미역국에 밥 뚝딱 말아먹고 다시 나가 놀기 일쑤였다.     


  추운 겨울에는 연탄불을 갈았다. 엄마는 갈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지만 왠지 연탄불을 갈고 나면 어른이라도 된 것처럼 스스로가 대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루 빨리 어른이 되고 싶은 동생과 나는 서로 연탄불을 갈려고 했다. 한번은 연탄불이 꺼져 번개탄을 피우기도 했는데 연기가 어찌나 많이 나는지 불이 났는 줄 알고 동네 사람들이 몰려 온 적도 있었다.  

    

  밤 열시 정도가 되면 여덟 살 동생과 버스 정류장에 나가 손을 꼭 잡고 엄마를 기다렸다. 드문드문 다니는 버스가 언제 올지 몰랐다. 21번 버스가 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며 버스가 오는 쪽만 쳐다보고 있자면 버스 정류장 앞 과일가게 아주머니가 “오늘도 엄마 기다리니?” 하며 과일을 하나씩 쥐어 주시기도 하셨다. 멀리서 오는 버스 안에 비치는 엄마의 실루엣을 우리는 귀신같이 알아챘다. “아, 저기 엄마다!” 엄마가 내리는 것을 보며 우리는 반가워서 깡총깡총 뛰었다.      


  가끔씩 엄마가 늦게까지 안 오시면 정류장에서 기다리기를 포기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우리 먼저 잠이 들기도 했다. 한번은 자다가 새벽에 깼는데 엄마가 옆에 안계셨다. 혼자 밖으로 나가 어두컴컴한 밤속에서 엄마를 부르며 찾아 다녔다. 정류장에서 기다리기도 해보았지만 버스가 다니지 않는 시간이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걱정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보니 엄마는 작은 방에서 주무시고 계셨다. ‘에이, 참. 엄마 집에 있었잖아.’ 머쓱한 마음으로 그제야 안심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에 엄마가 부엌에서 도마에 마늘을 콩콩 빻는 소리에 잠이 깼다. 엄마가 있다는 생각에 아침이 달콤했다.     

 

  엄마는 일을 나가시며 우리를 돌보지 못하는 것에 대해 많이 안타까워하시며, 밤늦게까지 공부를 시켜 주셨다. 연산 문제를 빈 종이에 내 주시고 풀도록 시키시면 낮에 내내 신나게 놀았던 동생과 나는 경쟁하듯 문제를 풀어냈다. 우리는 늦게까지 공부를 하고 보상으로 그 당시 고급 아이스크림인 '빵빠레'와 '찰떡 아이스'를 사다가 먹으며 행복하게 하루를 마무리했다.     


  엄마는 일 년 뒤 집 근처에 미용실을 차리고 원장님으로 불리셨다. 엄마는 예쁘게 머리를 하고 화장을 하고, 유행하는 치마를 입고 미용실에서 사람들과 웃으며 일하셨다. 미용실 밖에서 보이는 엄마는 항상 사람들에 둘러싸여 활기차고 밝게 웃고 있었다. 밤새 우는 날이 있어도 낮이면 웃으셨다. 나는 그런 엄마의 모습을 보는 것이 좋았다. 그렇게 미용사는 엄마의 평생 직업이 되었다. 엄마는 다른 사람의 머리를 예쁘게 꾸며주고 그 돈으로 우리를 이만큼 키우셨다.


  엄마가 미용실을 그만둔 지 삼십 여년이 지났는데 엄마는 여태껏 화장대를 버리지 못하셨다. 아직도 집 한쪽에 남아있는 화장대 앞에서 엄마는 지금도 우리 아이들의 머리를 손수 이발해 주신다. 화장대는 대체 언제 버릴 거냐는 말에 무덤까지 가져갈 거란다. 엄마가 미용 자격증을 딴 건 신의 한수였다. 징징대지 않고 기다림을 잘 하던, 엄마처럼 씩씩하던 그때의 나를 칭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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