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장판에서 밤새도록 익은 몸둥아리가 호빵을 닮았다.
이불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아쉬워하는 나를 안아주곤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팡팡이를 들고서 마당으로 나간다.
올 겨울엔 가뭄이 심했다.
날씨도 영하로 내려가는 날이 많아서 물주기를 놓쳐 화단의 나무들이 바싹 말라 비틀어진 모양새다.
그래도 계절은 못 속인다.
봄이라는 이름값을 한다.
봄햇살의 녹녹함에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들리고 봄바람의 살랑거림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나무들을 보노라면 나의 마음도 달큰해진다.
내가 태어난 집은 양철지붕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의 비소리는 여러모양으로 찾아와서 무섭게도 즐겁게도 해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비소리는 센 바람이 비를 몰고오는 소리다.
아주 잠시 들리는 소리지만 지금도 기억속에 저장이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분명히 재미진 소리다.
처음엔 후두둑 떨어지는 소리가 둔하게 들리지만 온 양철지붕이 비로 덮이면 맑은소리로 찾아온다.
내 귀엔 실로폰 소리였다.
그시절에 실로폰을 본적은 없지만 결혼하여 딸램을 낳고 딸램의 유치원시절에 사준 실로폰 소리가 양철지붕의 빗소리로 들렸다.
아마도 나의 마음속에 즐겁고 기분좋은 소리로 고여있다가 나를 만나러 와준것은 아닐런지.
지금 집으로 이사하면서 베란다를 달아내고 창고와 세탁실을 넣으면서 천장을 유리로 덮은 이유도 양철지붕의 빗소리를 듣고 싶어서였다.
유년시절을 보낸 나의 집은 동네에서 높은곳에 자리를 잡았고 나의 기억에는 마당도 학교운동장처럼 넓었다
한쪽으로는 쇠마구간과 할아버지 사랑채가 있었고 헛간도 있었다.
마당에는 앵두나무와 큰 감나무들이 있었고 마당끝에 있는 돌계단을 오르면 그네가 달린 단감나무가 있어서 친구들이 부러워했다.
그 시절엔 단감나무가 귀했다.
도시로 이사를 와서는 곧 새집을 지었다.
집도 컸고 마당도 넓었다.
엄마가 꽃을 좋아하여 철마다 여러종류의 꽃들이 가득했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요즘 지은 집들과 비교해도 어색하지 않을만큼 튼튼하여 오빠부부가 아직도 살고 있고 꽃들도 여전히 피고진다.
자주가지는 않지만 어쩌다 명절에 한번씩 들여다 보면 나의 시간이 투명하게 묻어있는 모습들이 남아있어서 반갑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아파트는 답답하다.
주택은 손이 많이 가기도하고 아파트 같은 편리함도 모자란다.
이 집을 구입하여 리모델링을 하겠다고 하니 친구들이 나를 말리기도 했다.
신도시는 아니라도 돈에 맞추어 살만한 아파트가 있고 남은 돈으로 여유를 누리면 될터인데 굳이 낡은 건물을 구입하여 고생을 사서 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주택을 선택했다.
인생은 그런건가 보다.
자신이 그리워하는 삶에다가 아쉬움의 시간을 더하여 조금씩 발전시키며 살아가는 그런것.
모태에서의 유전보다 더 지독한 것이 그리움인걸 지금에서야 알았다.
어린날의 현장들은 이미 지워진 그림자임에도, 어느날 문득 떠오른 낡은 기억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가 선명한 점 하나를 찾아내어 아파하며 막다른 골목길에 내려앉아 쓰러져 가는 볕바라기를 즐기는것.
그것이 어떤것이라 할지라도 내것으로 누려보고 싶은, 감정이나 물건이나 시간도 마찬가지이리라.
봄이다.
마당에 내려서니 나무들이 아우성이다.
이제는 먹어야 할 때라고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겠다며 야단법석이다.
겨울내내 묶어 두었던 고무호스를 풀어 샤워기능에 맞추고 시원스레 물을 뿜어준다.
마른 가지마다 물방울이 맺힌 모습에 실을 꿰면 수정목걸이가 된다.
물먹은 가지들이 통통하게 살이 차는듯 하다.
주택의 맛은 이런것이다. 언제든지 호스를 들고 유리창에 물을 뿌리고 찾아오는 계절을 향하여 마음껏 소리를 내고 안아주는 그런곳이다.
몇 안되는 꽃나무가 키를 뽐내기도 하고 키작은 여린 풀꽃들을 그늘진 곳으로 품어주는 자연의 조화로움도 가끔 누리고 배우기도 하는.
아젤리아와 흰철쭉의 꽃망울은 탄력이 더 해졌고 수국도 마디마다 잎이 봉긋봉긋 꽃망울처럼 예쁘다.
어린 이파리로 뿌리내린 홍단풍도 해마다 내키를 넘어서서 가지를 잘라주지만 하늘이 높은 것을 아는 모양이다.
이들이 열살 스무살 서른살 나이를 들어가는 시간을 온전히 내것으로 즐기며 살아가는 행복을 이 작은 마당에서도 누릴수 있고 어린날 맡았던 흙내음과 꽃향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기에 불편을 감수하고서도 나는 주택을 고집하나보다.
하늘이 말갛다.
양손 가득히 하늘을 담아 본다.
마당에 봄이 가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