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가 자아의 존재에 대해 방법적 회의를 했을 때 그 접근은 매우 센세이셔날 했다. 하지만 그 후 데카르트의 명제에 대해 더 회의하고 의심하는 철학자들이 계속 등장한다. 인식론이란 의심을 반복하는 학문이 아닐까? 어느 정도 의심하고 다시 더 의심하고 더 의심하고... 무한 의심의 루프를 어디서 종결할지는 그 사람의 고유한 몫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 학문이 인식론인 것 같다. 흄의 인과에 대한 의심 같이 그 깊이는 끝을 모른다. 어느 지점에서 종결을 선언해도 그 후계자들이 계속 파고든다.
무엇가를 인식할 때, 또는 무언가를 생각할 때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인식의 주체와 객체이다. 생각을 할 때라면 그 생각 자체가 있고 그 생각의 주인이 있다. '코기토 에르고 숨'. 그러나 생각 또는 의심의 주체가 '나'라는 근거는 없다. 생각하니까 생각하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것만 알 수 있다. 그리고 생각하는 무엇인가는 연속하는 존재인지도 불명확하다. 파편화된 존재가 지속적으로 연관 없이 생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들이 쌓이다 보면 주체는 추론을 하게 된다. 생각과 생각이 미치는 영역, 사건과 사건을 제어할 수 있는지의 여부...
이러한 추론이 쌓이다 보면 주체는 자아의 경계를 파악하게 된다. 생각이 미치는 영역에는 경계가 있는 것이다. 그 경계를 서서히 파악해 나가는 과정에서 자아가 파악되게 된다. 그러나 자아가 하나만 존재하는지는 불분명하다. 두 개의 자아를 상정할 수도 있다. 두 개의 자아가 생각하고, 생활하며 나라는 주체를 구현할 수도 있다.
다중인격자에게는 자아는 복수로 존재한다. 다중인격자가 존재하는 점은 자아가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자아개념은 수많은 시행착오와 추론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명확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다.
통계적인 데이터에 의해 자아는 완성된다.
그러나 자아개념이 건강하지 않게 형성될 수도 있다. 정신질환은 자아에 큰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자아개념에 상처가 생기고 고장 난 상태는 정신질환을 유발한다. 간혹 극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다 일순간에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있다. 불교에서 말하는 돈오이다. 불교 경전을 읽지 않았어도 불교의 교리를 몰라도 깨달음을 얻는 사람이 있다. 현대에도 이러한 사례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이들이 증언하는 바는 자아개념의 상실과 관련이 있다. 견고한 자아의 무로의 환원이 자유로운 인식을 준다. 자아의 소멸은 나라는 존재의 무의미함을 지시한다. 생각의 점별들만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이다.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도 허상에 불과하다...라고 그들은 주장하고 있다.
모든 존재에 대한 인식이 허상에 불과하면 생에 대한 위협, 죽음에 대한 인식도 허상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이 없다면 자아의 개념은 지속된다. 현실계에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자아는 지속된다. 영혼은 계속 자아를 붙들고 있다. 불교에서는 버리지 못한 자아는 윤회한다.
생각을 모두 분쇄하면 어떤 일이 생길까? 자아의 비존재를 분명히 인식한다면 세상은 소멸하는 것일까?
열반, 적멸은 어떤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