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들에 내재하는 모순성

by 철학적 생각들

상대주의자들의 주장은 모든 것은 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진리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것이 상대적이다'라는 말도 진리가 아니라는 것일까? 모든 것이 상대적이라면 그 문장 자체도 상대성을 가져야 하고 그렇다면 어떤 것은 절대적이라는 논리가 성립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절대적이라면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주장은 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는 러셀이 말한 이발사의 모순과 똑같다. 한 마을에서 스스로 머리를 깎는 사람을 제외하고 이 이발사가 모든 사람의 머리를 깎는다면 이발사 자신은 누가 머리를 깎는 것일까?

러셀은 이러한 모순이 집합론의 멱집합에서 동일하게 발생한다고 하며 이를 언어의 층위가 다른 것을 언어 자체가 구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개념들 자체에 이런 모순이 내재하고 있다고 본다. 개념은 꽤 정확하다. 개념은 진화론적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발전해 온 휴리스틱의 정수이다. 경험적으로 상당히 정확하고 유용한 것이다. 언어는 이러한 개념을 지칭하는 상징에 불과하다.

수학에서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괴델은 러셀의 이러한 개념을 더 심화하여 '수학 원리'에 따른 수 논리 체계에서 힐베르트 프로그램을 적용했을 때, '참이지만 증명할 수 없는 명제'가 존재한다는 불완전성 정리를 증명하였다.

이러한 모순은 도처에 널려 있다. 크레타인은 모두 거짓말쟁이라고 말하는 크레타인, 서로 거짓말을 하는 상황에 놓인 두 사람- 이 경우 화자는 상대가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거짓말을 하고, 상대는 화자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화자도 알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모르는 척한다, 돈이 돈을 번다는 말이 가지는 불합리한 그럴듯함 등등...

어떤 수학자는 확률에도 이러한 모순이 존재함을 이야기했다. 동전을 던지면 앞면이 나올 확률이 1/2이라는 것을 누구도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마술사나 도박꾼들을 동전의 어떤 면이 나올지를 충분히 조작할 수 있다. 주사위를 던지면 1이 나올 확률이 1/6이라고 하지만 이는 이상적인 경우에서다. 실제로는 주사위의 미묘한 흠집에 의해서도 특정 숫자가 더 높은 확률로 나올 수 있다. 완전한 등방의 주사위를 가정할 때도 이러한 문제는 계속 남아있다. 주사위 각 면이 1/6의 빈도로 출현한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주사위를 무수히 던져 통계적으로 1/6의 확률이 나옴을 눈으로 봐야 하는데, 실제 세계에서 무한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해당 시행을 위해서는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므로... 랜덤믹하다는 것(무작위성)의 정의를 하고자 하는 시도가 수없이 많았고, 어떤 시도도 완벽한 정의, 문제점을 내포하지 않는 정의를 내리지 못한 것이 이를 반증한다.


개념들 자체에 모순이 있다. 이는 인간이 진화론적으로 개념화하는 능력을 발달시키면서 필연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외계인은 어떨까? 인류와 다른 진화 경로를 겪고 사물과 개념을 인식하는 능력이 이질적인 존재, 인간보다 더 발달한 두뇌를 가지는 존재에게도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가 성립할까? 멀리 외계인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동물들의 경우는 어떨까? 그들에게도 개념화의 능력이 있을 것인데, 그 안에도 논리적 모순이 숨어 있을까? 개념에 무한을 도입할 때 발생하는 수많은 모순들이 그들의 개념들 속에서도 나타날까? (언어적인 층위의 문제를 가지고 있을까?)


통계에서 중요한 것은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개념이다.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는 개념은 신뢰성 얼마의 구간에서 얼마의 확률로 당해 사건이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그렇지만 직관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유의미하다는 개념을 다시 통계적 가정에 의존하여 정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유의미한 것은 유의미한 것이라는 자기 순환적인 지칭을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물론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그 층위는 다를 것이다. 하지만 이는 러셀이 말한 언어적 층위가 다른 정도에 지나지 않다. 유의미하다라는 정의를 유의미하다라는 개념을 배제한 채 정립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라는 명제가 실생활에 유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오작동율이 10%인 장치보다 1%인 장치가 훨씬 쓰기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는 우리의 감각과 관련이 있다. 통계적으로 낮은 오작동율을 가진 장치는 우리에게 행복감을 준다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통계적으로 의미 있다는 것은 우리의 감각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극단적으로 말해 어떤 것이 의미 있다는 것을 우리 감각에 기반하여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다시 장치에 대해 이야기하면 오작동율을 적게 할수록 우리가 행복해진다고 할 때, 오작동률이 현저히 낮다라는 유의미한 결과는 우리의 감각이 그만큼의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닐까? 물론 여기에도 문제가 존재한다. 사람마다 행복감을 느끼는 정도는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오작동율이 5%만 낮아져도 행복하다고 느끼는 반면, 어떤 사람은 10% 이상 오작동율이 낮아져야 행복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통계적인 개념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 다시 신뢰도 얼마의 구간에서 얼마 이상의 사람이 소정의 행복감을 느낄 때, 행복감이 증가한다라고 약속하는 것이다.

결국 유의미함은 인간의 감각에 따르고, 그 감각의 정도를 정할 때 다시 통계적 유의미함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순환론적 구조에 들어서게 된다.


불교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사물의 모순적인 양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불교에서는 꽉 찬 상태는 비어있는 상태고 비어있는 상태는 꽉 찬 상태라고 말하고 있다. 도교에서는 도라고 말하면 이는 그대로의 도가 아니라고 한다. 앞서 살펴본 개념들이 내재하고 있는 모순성을 볼 때 이는 매우 그럴듯한 명제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지적하는 것은 언어의 내재적인 한계를 말하는 것일 뿐일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위에서 말했듯이, 모순은 언어가 아니라 개념이 내재하고 있다. 개념은 매우 합리적이고 유용하다. 이러한 유용성을 가진 개념들 자체에 모순이 내재하고 있다고 본다. 언어들 간의 충돌은 부차적인 측면일 뿐이다.

그렇다면 개념들은 어디서 유래할까? 진화의 과정 동안 인간의 감각은 이러한 개념의 형성을 이루어 왔다. 개념은 감각의 표현형이다. 개념의 모순성은 감각의 모순성을 그대로 유전한 것일까?


마조히즘은 고통 속에서 쾌감을 얻는 상태를 말한다. 물론 어떤 이들은 마조히즘의 쾌감은 고통을 당할 때가 아니라 고통이 끝난 후 위로받을 때에 느껴지는 게 크다고 하지만, 극단적인 형태의 마조히즘은 고통 그 자체의 순간에 쾌감을 느낀다고 본다. 도벽은 어떤가? 도둑질은 긴장감과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 속에서 수행되는데 도벽을 가진 많은 이들이 그 과정에서 아드레날린이 솟고 쾌감을 느낀다. 비디오 게임을 하는 게이머도 마찬가지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 시뮬레이션의 총알 밭에서 아드레날린과 도파민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는 것이 게이머들이 게임에 더 빠져들게 만든다. 역설적인 감각의 모습을 보여주는 예들이다.

그렇다면 앞서의 종교 선각자들이 발견한 사물의 모순성은 이러한 감각의 모순성을 지적한 것에 지나지 않을까? 분명한 것은 언어의 모순성을 지적하는 정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이들의 종교적 체험은 개념의 모순성 이상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실재 자체가 모순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색즉시공이나 도가도비상도가 지시하는 바는 실재의 모순성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두뇌는 아직 이러한 사물의 모순성을 모순 없이 볼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인류와 다른 진화의 경로를 겪은 생물들은 어쩌면 우리가 인지하는 이러한 모순을 모순이라고 느끼지 않고 그럴듯함을 느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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