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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울과 철학 Jul 02. 2021

에밀 시오랑의 고통과 글쓰기

고통은 외부의 요인이나 신체기관의 동요가 아니라 우리 의식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느끼는 방식에 따라 측정된다. 그런 의미에서 고통의 크고 작음을 나누는 일은 불가능하다. 인간 각자가 절대적이고 끝없다고 믿는 자신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한다……모든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죽는 순간 위안을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른 사람들이 과거에 혹은 현재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해서 위로를 받는 것도 아니다……그러므로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해서 고통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고통이란 외부의 어떤 것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는 정신적 고독의 상태이므로 비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에밀 시오랑 저) 中


 에밀 시오랑은 루마니아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몇 권의 책을 낸 후 파리로 유학하여 남은 생을 보냈다. 평생 한 번도 직업을 가져보지 않은 아웃사이더였던 그는 스무 살에 시작된 불면으로 고생한 후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은 회의를 느끼고 파편화된 단상만을 글로 옮기며 소위  '폐허 속의 철학자'로써의 삶을 살게 된다. 시오랑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객관성을 거부한 채 '피와 살과 신경'을 통한 주관적 경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철학적 에세이를 다수 남겼다. 그의 글에는 특히 우울증, 불면, 장애 등에 대한 통찰이 담겨 있는 글들이 많은데, 위의 글도 (신체적 고통을 포함한) 고통들이 객관화될 수 없으며 그 고통의 크기는 개개인마다 다르게 평가되어야 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참으로 잔인한 것이다. 이들은 우리의 통제하에 완전히 있지 않으면서 외계의 사건들과 영합하여  자신의 신경을 다 갉아먹고 끝없는 절망감에 빠지게 한다.

 고통의 크기, 강도는 개인마다 다른다. 어떠한 고통이 유발하는 정신적 혼란과 방황은 사람마다 그 종류 및 강도, 시간에 있어서 차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왜 작은 고통이 그 사람에게 큰 변화를 일으키는가라고 묻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작은 파란도 큰 변화의 물결을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우울증은 우리의 존재 양태와 연결되어 있다. 물리계의 사건의 인과관계는 우울증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아니라  우울증 그 자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건과 우울증이 합치된 사람은 만사가 불안하고, 콤플렉스 덩어리가 된다.



존재를 유기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진실이란 헛된 사변이 아니라, 생생한 내적 고통에서 우러나오는 그 무엇이다. 그것이 가능한 사람만이 진지할 수 있다. 삶의 안정이 깨어졌기 때문에 생각에 잠기는 사람은,  생각하는 기쁨만으로 지성을 가동하는 사람들과는 전혀 다르다……인간의 표면적 균형이 흔들리기 시작하고 본능적 순진무구함이 깊은 번민으로 변하는 순간에 형이상학적 발견이 시작된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에밀 시오랑 저) 中


 우울증을 위로하는 방법 중 하나는 철학하기이다. 불안을 느끼는 조건, 강도는 개인마다, 같은 개인이라도 그가 처한 상황, 시간마다 다르다(여기서 불안은 막연한 심리적 상태가 아니라 구체적인 어떤 사건의 발생을 염려하는 것). 어떤 사람, 어떤 상황에서는 전혀 불안하지 않은 미래의 사건이 다른 사람, 다른 상황에서는 매우 불안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는 가능성의 존재를 인식하는가 인식하지 못하는가 하는 점에 있다. 어떠한 일도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가능성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과 인식할 수 없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다.

우울증은 비록 개인에게 극한의 고통을 주기도 하지만, 세계와 우주에 대한 민감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관을 찾을 수 있게 해 준다. 많은 철학자들이 고민했던 인식의 문제, 윤리의 문제, 미학의 문제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해주는 것이다. 외계의 불행과 장애는 인간을 형이상학적 진지함으로 이끈다. 철학적 사유의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표면적 균형의 상실은 우리의 본능적인 신념체계를 무너뜨린다. 우리는 살기 위해, 즉 죽지 않기 위해 믿어야 할 무엇인가를 찾게 되고 철학적 번민이 시작되는 것이다.


삶의 한계에 부딪히고 난 후에는, 그 위험한 경계선에 잠재된 어떤 것을 격렬하게 경험하고 난 후에는, 일상의 행위와 몸짓에서 매력이 사라진다. 그래도 살고 있는 것은 끝없는 긴장을 객관화하면서 진정시켜주는 글쓰기 덕분이다. 창작은 죽음의 마수에서 우리를 일시적으로 구원한다

「해뜨기 전이 가장 어둡다」(에밀 시오랑 저) 中


 이러한 철학적 번민을 거친 사람을 자신이 이해한 바를 기록하고자 하는 욕구를 느끼게 된다. 진정한 글쓰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글쓰기는 어떠한 깨달음을 객관화된 기록으로 옮김으로써 우리 안에서 그것이 견고함을 가지고 자리 잡게 해 준다. 그리고 글을 쓰는 동안에 우리는 긴장의 진정을 느끼게 된다.

 본질을 생각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구원받은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의 위험조차 전혀 알지 못하는 마당에 구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에 대한 특별한 민감성을 갖는 이에게 글쓰기는 우울증을, 영혼의 떨림을 치료하는 특효약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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