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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울과 철학 Jul 18. 2021

무한과 우연성, 그리고 신의 존재

우연성, 즉, 어떠한 일이 랜덤 하게 일어나는 것은 무한이라는 개념을 내재하고 있다.

어떠한 수열이 불규칙적인지, 규칙적인지는 그 수열의 끝까지 가봐야 하는데 그 수열이 영원히 계속되는 수열이라면 규칙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기 위해 무한히 수열을 따라가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떠한 사건들에 규칙성이 있는지 알기 위해서는 이들을 반복하여 시행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 사건들이 불규칙적이다 즉, 우연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사건들을 무한히 시행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한이란 무엇인가? 무한이 우주에 존재하는 것인가? 무한은 실제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머릿속, 즉, 사고 체계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무한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 개념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즉,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영원한 시행이 필요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한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것에 대해서는 막연한 느낌만을 가지고 있을 뿐인 것이다. 무한은 알지 못함, 증명할 수 없음이라는 개념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진화를 통해서 무한이라는 개념을 현재 유한이라는 개념을 포착하듯이 포착할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의 이성은 물건을 뜨는 뜰채와 비슷한 것이다. 뜰채가 촘촘할수록 그 사이로 빠져나가는 것이 적어지는데, 현재 인간의 뜰채는 무한이라는 개념을 뜨지 못하고 틈 사이로 빠져나가게 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여 보자. 개미와 같은 하등 동물에게는 인간만큼 큰 수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 이들이 숫자에 대한 감각을 느끼는 것은 이들의 생존과 관련된 상황이다. 장맛비속 개미들에게 흙덩어리가 끼얹어지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이들을 공격하는 흙덩어리가 한 개인지, 두 개인지, 세 개인지는 중요할지 모른다. 하지만 이들을 공격하는 흙덩어리가 10개 이상이라면 더 이상 숫자를 세는 것일 의미가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들에게 10 이상의 수는 무한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인간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이 무한을 무한으로 느끼고 있는 것은 개미가 10 이상의 수를 무한으로 느끼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즉, 인간보다 더 상등의 동물에게는 인간이 무한이라고 느끼는 수가, 인간이 유한이라고 느끼는 수를 느끼듯이 여겨질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인간이 더 진화하여 이성의 뜰채가 더 촘촘해지면 인간은 무한이라는 개념을 현재 유한이라는 개념을 포착하듯이 포착할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문제는 진화의 개념에 있다. 진화에 방향성이 있다고 말하기 위해서는 변화에 규칙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진화는 본질적으로 무작위 한 변화를 전제하고 있다. 생물이 진화하는데 방향성은 없는 것이다. 방향성이 없다면 동물이 가지고 있는 이성의 뜰채가 더 촘촘해지는 방향으로 변화하리라고 쉽게 기대할 수도 없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인간이 진화하여 무한이라는 개념을 현재 유한이라는 개념을 포착하듯이 포착한다는 것도 허상의 것이 된다. 즉, 인간에게 무한은 영원히 알 수 없는 것, 증명할 수 없는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무한이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알 수 없는 것, 증명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무한이라는 개념을 내재하고 있는 우연성도 알 수 없는 것, 증명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어떠한 일도 그것이 불규칙적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모두 규칙적이라고 가정하면 어떨까? 다소 급진적인 가정이긴 해도 세계의 우연성을 말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나름대로 개연성이 있는 가정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모두 규칙성을 가지고 있다면 앞으로 일어날 일이 무엇인지 예상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즉, 어떠한 일들도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의 실종과 연결이 된다. 모든 일이 결정되어 있다면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이는 결정론적 세계관과 일맥상통하게 된다.

결정론적 세계관, 모든 일의 예측가능성은 신 존재에 대한 긍정의 사고를 할 수 있도록 인도한다. 모든 일이 결정되어있는 이유는 신이 그러한 일들을 설계하여 미리 정해 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결정론은 그러한 결정의 주체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우리는 무한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고를 바탕으로 세계의 규칙성을 발견하게 되었고, 다시 신을 발견하게 되었다. 하지만 전통적으로 신은 무한의 개념을 내재하고 있는 존재이다. 즉, 신은 모든 일을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으며,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인 것이다. 신이 무한한 존재라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우리의 전제는 바뀌게 된다. 우주는 유한한 존재만으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유한한 존재와 무한한 존재가 공존하는 곳이 된다. 유한과 무한이 공존한다면 세상의 일들은 규칙적이기도 하고 불규칙적이기도 할 것이다. 규칙성과 불규칙성이 혼재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계가 결정론적이라는 앞의 결론이 훼손되게 되고, 결정론적이기 때문에 신의 존재를 도출한 논리도 순환 논증이 되어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우리의 결론은 ‘신은 존재하되 유한성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 될 것이다.

신의 모습이 어떠해야만 유한성을 가진 존재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신의 능력에는 제약이 존재하는 것일까?

신이 유한성을 가진 존재라면 신 역시 무한한 시행이 필요한 일은 하지 못할 것이다. 가령, 과거에 이미 일어난 일을 바꾸거나 미래의 일을 변경시키는 것 같은 것은 직관적으로 보기에도 무한한 시행이 필요한 일로 여겨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의 지위가 인간의 지위로 격하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무한한 시행이 필요한 일을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유한한 시행이 필요한 일이더라도 어떠한 일은 하지 못할 것이다. 반면 신은 유한한 시행이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실행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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