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정론적 세계에서 신이 모든 일을 결정해 놓았다면 나는 신에 대해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 신이 이미 모든 일을 결정해 놓았으므로 그 결정의 수레바퀴가 돌아가는 것을 경험하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결정론적 세계에서도 신의 개입은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신의 섭리를 이해하고 이를 바탕으로 나의 생활과 사고를 정립해나가려는 노력을 해야 하는가?
생활철학의 관점에서도 신의 존재가 요청된다는 점을 고려할 때, 결론은 후자임을 예상할 수 있다. 즉, 신은 결정론적 세계 속에서도 우리의 삶에 개입할 수 있고 우리에게 교훈을 줄 수 있으며, 우리의 운명을 안내할 수 있다.
그런데 신은 어떻게 결정론적 세계에서 우리의 삶에 개입할 수 있는 것일까? 최초의 설계 이후에 후속하는 설계 즉, 최초 설계의 수정이 있을 수 있을까?
최초의 설계에 오류가 없다면 우리는 이 설계와 한치의 차이 없이 살아갈 것이며 죄를 짓는 일도 도덕적인 행위를 하는 일도 미리 결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후속 설계, 즉, 설계 수정의 필요성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설계에 오류가 있다면, 즉 신의 무오류성이 부정되고 신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이 인정되다면 설계의 수정은 필요한 일이 되고, 이러한 설계의 수정에 의해 신의 개입이 가능하며 우리의 삶은 신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 혹시 신에 의한 설계의 수정은 결정론적 세계관에 순환 논증을 발생시켜 모순을 일으키는 것은 아닌가? 그렇지 않다. 설계의 수정은 미리 결정되어 있던 어떤 말을 철회하고 새롭게 결정하는 것일 뿐이다. 비록 수정 전과 후의 경계지점에 매끄럽지 못한 불연속성이 발생 산다고 할지라도 이는 결정론과 또 다른 결정론의 결합일 뿐, 비결정론의 개입을 초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신의 무오류성의 부정은 신의 유한성이라는 개념과도 부합하는 것이다. 즉, 신도 유한한 존재이므로 오류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세계에 개입하여 그러한 오류를 수정하고자 할 것이다. 단, 특정 사건의 발생이 최초의 설계에 의한 것인지 수정된 설계에 의한 것인지 구별할 수 있는 방법이 우리에겐 없다.
그렇다면 설계의 수정은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 설계의 수정이 우리 삶에 작동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세계가 목적론적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신이 세계를 설계한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세계의 설계 뒤에는 이를 설계한 이유를 자연스럽게 묻게 된다는 것이다. 즉, 설계라는 개념은 목적론적 사상을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가 목적론적이라면 모든 사건은 목적론적이라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작은 사건들은 큰 사건을 이루거나 발생시키고, 큰 사건 중 어느 이상의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목적을 명시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은 사건들도 결국은 큰 사건이 만드는 목적의 흐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 된다. 즉, 세계는 신의 큰 목적에 의해 창조되었고 우리가 겪는 삶의 다양한 사건들은 이러한 목적에 기여하기 위한 것이 된다.
그런데 우리의 행동이 신의 목적과 부합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일이 발생하겠는가?(물론 그러한 행동도 최초에 신이 설계한 것이기는 하다) 신은 이렇나 행동을 교정하기 위한 방법을 사용할 것이다. 그리고 그 대표적인 방법이 우리가 행한 잘못에 대하여 벌을 주는 것이다. 벌이란 어떻게 가해지는 것인가? 벌은 죄에 대해 가해지는 것이다. 죄와 벌의 개념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통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죄를 지었다는 것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죄 지음을 인지하게 되는 형태는 심리적, 감정적, 직관적 모습을 띨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만약 죄 지음의 인식이 어떠한 기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라면 그 기준의 근거를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고, 실제로도 죄 지음은 고도의 객관적인 사유를 통해 통찰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죄 지음의 인식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죄를 저지르는 즉시 혹은 머지않아 일어나는 심리적, 정신적 반향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다. 이는 비교적 단기간에 아는 것이 될 것이다. 둘째는 고통을 통해 벌을 받고 있다는 인식에 이르고 과거를 성찰함으로써 죄를 지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는 비교적 장기간에 걸쳐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첫 번째 방식 즉, 심리적, 정신적 반향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같은 행위를 하고도 개인에 따라 그것이 죄인지를 알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으며, 개인 안에서도 시기에 따라 그것을 죄라고 인식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는 최초에는 죄라고 인식하고 있다가 나중에는 그것이 죄가 아니라고 다시 인식할 수도 있다. 즉, 개인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에 따라 죄를 죄라고 인식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두 번째 방식 즉, 고통을 통해 벌을 인식하고 과거를 성찰하여 죄 지음을 알게 되는 방식은 위와 같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사람이 달라지던, 개인이 다른 시기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놓이던, 그가 고통을 받았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두 번째 방식을 통한 죄 지음의 인식은 확실하고, 항구적인 것이 된다. 개인이 죄 지음을 다르게 인식하려고 하여도 엄연하게 존재하고 있는 고통이 그러한 임의적인 변화를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단, 모든 고통이 벌인 것은 아니다. 어떠한 고통은 그 고통의 요인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 외부적 스트레스나 내부적 갈등이 고통을 유발한다면 우리는 그러한 고통에 대해 원인을 분명히 알고 있으므로 그것이 벌이라는 인식을 하지 않게 된다. 가령 나에게 우울증이 발병했을 때를 살펴보면 첫 번째 우울증과 두 번째 우울증은 외부적 스트레스가 요인이므로 나는 그것이 벌임을 인식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 번째 우울증이 발명했을 때 나에게는 우울증이 발병할 결정적인 요인이 없었으므로 나는 이 우울증이 벌로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신이 우리의 죄 지음을 알게 할 때 선호하는 방식은 위의 두 번째 방식이 될 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벌을 인식하게 하여 결국 죄 지음을 성찰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도덕적, 윤리적인 길로 인도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