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요로운 오늘을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린 그 어른들의 그을린 시간들
공휴일, 일터를 잊고 평온한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무심코 tv에서 방영하는 프로그램을 지켜보다 묵념의 시간이 찾아와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비록 사각팬티와 메리아스만 입고 소파에 앉은 광경이 그다지 진지해 보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지금껏 단 한 차례 오늘의 휴일에 감사하며 순국선열을 기리기 위한 진지함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싶었다. 이례적인 내 모습에 스스로 감명받을 즈음 한 가지 뇌리를 스치는 개념이 있었다. 그것은 '공감'과 관련된 것이다.
우연히 유튜브에 올라온 실화탐사대 데이트 폭력에 대한 내용을 보고 있었다. 피해자의 심각한 공포 그리고 그 부모의 억장이 무너지는 괴로움과 슬픔, 완벽하게 대조되는 피의자 부모의 인터뷰. 가해자 부모의 태도와 인터뷰 내용을 들으면서 피꺼솟을 경험하며 분노가 서리는 것을 느꼈다. 피의자 부모는 자식의 범죄사실, 피해자의 피해사실에 비해 과도하게 부풀려진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어 억울하다는 모양이다. 그 광경을 보며 '저것은 과도한 공감능력의 결여'가 아닌가 생각했다. 자녀란 존재가 인간의 선택적 공감과 결여를 촉진시키는가? 에 대한 질문은 자녀가 없는 내게 어려운 지점이다. 다만 그 가해자 부모를 통해 공감의 결여가 된 인간의 모습에서 멀어져야 함은 분명하다는 것을 온전히 깨닫는다.
늦잠을 자고 일어난 광복절 아침, 잘 떠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제일 먼저 향한 곳은 발코니였다. 자랑스러운 태극기를 꽂아두고 무더위 속 한 줄기 바람에 흩날리는 깃발에 흐뭇했다. 혼인신고를 마치고 받았던 태극기를 매 해 7번 게양한다. 이 활동의 정의는 사실 공감능력을 키우기 위한 훈련의 일환이다. 오늘의 평온함과 안락함 아래 순국선열의 거대한 슬픔과 고통이 묻혀있음을 잊지 않고 공감하기 위함이다. 내 풍요로운 오늘을 꽃피우기 위해 거름이 되어버린 그 어른들의 그을린 시간들. 사소한 우주의 티끌 같은, 게으른 공휴일 오전의 나의 오분을 희생하여 그들의 희생과 정신을 꽃피운다. 그렇게 하나 둘 공감하기 위한 티끌의 노력은 우리가 서로 비참해지거나 슬퍼지는 일들을 조금은 줄이는데 작은 보템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는 오늘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