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소우주라고도 한다.
생각을 글로 적는 일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님을 알고 있지만, 매 번 쓰고자 하는 의지가 유튜브의 연속되는 쇼츠를 이기는 일은 단연코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오랜만에 타자 앞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은 지난하게 이어지는 주말의 무료함으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아니 어쩌면 더 이전의 무엇인가로부터 시작된 듯 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가늠이 어렵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집어 들자 수정체를 거쳐 전기신호로도 변환되지 못한 채 각막에 튕겨나가는 활자들은 마치 초코쿠키 부스럼 같다. 의미 없이 발 밑으로 빠르게 떨어진다. 그가 책에서 풀어낸 이해할 수 없는 저 내면의 심연은 도저히 닿을 수 없는 관념들의 심오한 세계였다. 무려 40년 넘게 살아내고 있는 내 시간들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책 앞에서 아무짝에 쓸모없는 느낌이 들어 허무했다.
표현하기 무척이나 어려운 답답함, 지난한 무료함의 연속된 시간에서 문득 나의 안타까운 문해력이 평균이하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아내에게 큰소리로 몇 페이지를 읽어주었다. 다행히 그녀도 평균 이하일지도 모르는 문해력 어딘가의 범주에 있음을 확인하고 안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시답잖은 주말의 한 낮 오후의 침대에 누웠다. 기시감이 드는 9월의 무더운 여름, 눅눅해지고 끈적거림을 피부로 감각하고 마음으로 지루함을 담아내는 순간 타자 앞에 앉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찰나, 데일 카네기의 '자기 관리론'에서 읽었던 '기도'에 대한 생각을 글로 풀어 정리하고자 하는 의지가 꺼지기 직전의 불꽃처럼 일렁였다.
인간을 소우주라고도 한다. 우주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미지의 영역이며 신은 이와 같은 속성을 같는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신성을 몸 어딘가에 품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심장에 있는지 쓸개에 얼마나 담겨있는지 알 길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안에 담겨있다. 다만 촉감으로 닿을 수 없는 그 신성한 영역이 너무 어려워 발딛기 어려울 뿐.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대한 내 서평이 들어맞는 대목 이기도하다. 러시아님도 그 신성의 세계를 글로 드러내고자 했으니까. 그처럼 태곳적부터 인간은 그 미지의 영역 어딘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직감적으로 이해하고 또 지난하게 설명하고자 했던 것이다.
'기도'는 그 신성(무한한 가능성)에 닿기 위한 하나의 주문과도 같은 것이라고 이해했다. 아주 근접하지 않더라도 먼발치서 까치발이라도 그 신성을 오감에 담아내기 위해 최대한 몸부림치는 것이 기도라고 이해한다. 보통 우리는 난관 앞에서 기도를 왼다. 그렇게 말로 뱉으면서 문제는 구체화된다. 기도에 문제를 담는 것부터 우리는 수동에서 능동형으로 탈바꿈된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 공감을 받으며 위로를 받고 힘이 난다. 이제 그 난관은 기도 이전보다 한결 쉽게 다가온다.
자기 관리론의 '기도'에 대한 효과는 오늘 내가 타자 앞에 앉아 브런치 작성할 수 있던 이유이기도 하다. 비록 나는 무늬만 천주교인 이다. 이제라도 저 먼발치에서 신성에 닿는 일이 자주 있기를 소망한다. 지난했던 주말이 어느새 지나가버린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