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에게 삶의 결핍은 '풍요로움'이라 했다.
어제는 이슬아 작가를 대면으로 처음 접한 날이다. 어느 날 문득 그의 토크 콘서트를 무심코 예매했다. 시간이 많았던 백수의 나날에는 그를 많이 애찬 했었다. 다만 열두 달의 오랜 쉼이 끝나고 일상으로 복귀하면서 그 반짝이던 감정은 무채색 속으로 빠르게 침전되었다. 마음을 살찌게 했고, 마시멜로처럼 말랑한 생각들을 이끌었던 그 문학의 영역들에 대한 관심은 마치 여름 한 철 싹 틔우고 빠르게 시들어버린 꽃과 같았다. 하루하루 성실하게 게을러져 멀어졌다. 그래서일까, 작가와의 만남은 꽤 신선했다. 다소곳하게 앉아 글쓰기에 열중했던 문학중년이 두 계절만의 긴 잠에서 다시 깨어난 시간이었다.
오직 활자를 통해 만났던 그의 시간과 경험들, 삶에 대한 다양성, 솔직하고 펄떡이는, 그 풍요로운 그의 세계를 소비하며 즐거웠다. 그 덕에 백수라는 시간은 결핍이 아닌 충만함으로 정의될 수 있었다. 수채화처럼 흰 종이에 색 번져가던 다채로운 시간들이 생각나서, 혹시 활자가 아닌 전면의 그는 다른 모습이 아닐까 걱정도 되었다. 동시에 그를 향한 게을러진 마음이라 대수롭지 않기도 했다.
예상만큼 왜소한 그녀는 대중 앞에 서 자신의 속도를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지켜나갔다. 조곤조곤, 논리적으로 청중들에게 그녀의 이야기를 풀어냈다. 작가가 된 계기, 작가의 시공간에 연결된 관계, 문학에 대한 그의 생각, 현재 생활들을 조금 더 현장감 있게 그렸다. 많은 청중 앞에 징그러울 정도의 침착함을 보여준 그녀가 새삼 대단하게 느껴졌다. 활자에서 만났던 이슬아가 넘치는 풍요로움이었다면, 전면에선 그는 농밀하게 정제된 단단함이었다. 그녀를 멀리했던 한 해에 그는 또 성장을 이뤄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지난날의 나는 지금 그대로 이기에 그녀의 성장이 더욱 눈에 띄었는지 모른다.
Q&A 시간에 질문을 던져볼까 하는 마음에 입안까지 콩닥거림을 느꼈다. 나는 그 참새 마음이 싫다. 손가락 끝은 온도를 잃어 차갑고 입술은 바짝 마른다. 하지만 결국 손은 들지 못한다.
작가에게 삶의 결핍은 '풍요로움'이라 했다. 더한 가난과 슬픔을 경험한 동료작가에게 향했던 질투가 지금의 이슬아의 글을 만들었노라 했다. 그녀의 고백은 아주 조금 위로가 된다. 그를 향한 질투가 느껴진다. 한참이나 어린 그의 배포, 당당함, 그가 뱉어내는 세계와 말, 그런 것들에서 떨어져 나온 내 결핍. 풍요의 퍼즐이 채워지기에 필수적인 그 결핍의 조각들에 어떤 희망을 가져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