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이가 쓰는 이유

왜 쓰는지, 어떻게 읽혀지고 싶은지

by 바람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온 세상은 매우 좁은 시야에 넣을 만큼 작았으며 안정되고 정형화되어 있었다. 쉽게 말해 입체적이지 못한 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보았다. 고정관념과 선입견의 아주 두꺼운 층의 껍질을 두르고 있는 렌즈 말이다. 그렇게 바라본 세상은 이해하기에 매우 단조롭지만 도처에 오해의 늪이 자리해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 역설적으로 많이 존재한다.


고등학교 시절, 남자 학생들끼리 모여 같은 반 친구, 어느 이쁘장한 여자애를 두고 잡담을 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한 친구가 그녀를 좋아했고, 우리는 그녀의 얼굴에 대해서, 패션 혹은 착함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논쟁하며 때론 놀리고 서로 낄낄댔다. 어린 나는 이런 말을 던졌다. "근데 그 아이 머리에 비듬이 잔뜩 있던데 그래도 좋은 거지?"라고 그녀를 좋아하는 친구에게 꼽을 주려는 못된 마음이 있었다. 예상치못한 친구의 반응, 그는 무심한 듯 "비듬?, 그건 그냥 털거나 씻으면 그만이지 뭐가 어때?"라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고 되레 무안한 쪽은 나였다. 어린 마음에 비듬이 정말 큰 결점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친구의 의외의 반응은 아직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나의 작은 세계에서 '비듬'은 그녀를 이루는 거의 전부였을 테니. 세상을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면 나도 그 친구와 같이 그녀를 많이 좋아했을지 모른다.


사실 비듬 사건은 지금의 글쓰기와 어렴풋이 연결되어 있다. 단조롭고 좁은 시야로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도록, 세상의 빛이 프리즘을 통해 굴절되어 뻗어가는 여러 색들을 보기 위해 나는 글쓰기에 관심을 두었는지 모른다. 두 눈에 비춘 것, 입으로 넣은 것, 피부에 닿은 것, 귀에 흐르는 것, 코 끝에 묻은 냄새를 감각하는 것부터가 시작이었다. 이를테면 오감으로 들어오는 감각을 바라보되, 객관화시키는 작업은 글쓰기를 통해 가능했다. 그 순간의 기민한 감각을 잊지 않도록 다시 활자로 풀고 복기하면서 2D로 머물던 세상을 다시 3D, 4D의 입체적 세계로 가져간다. 그 공간에서 다양하게 사유할 수 있는 힘은 조금씩 나의 감각으로부터 대상과 타인으로 점점 확장되어 나간다. 끝없이 이어지는 삶의 장면들을 마치 하나의 프레임에 담아 섣불리 오해하지 않으며, 연속으로 이어지는 다양한 삶의 장면들을 힘 빼고 바라볼 수 있는 힘, 그것이 글쓰기로부터 온다고 믿는다.


학부시절 어느 괴짜 심리학 교수님 말씀이 떠오른다. 분홍색 분필의 흔적이 채 지워지지 않은 청록색의 칠판 위에 흰색분필로 작은 점 세 개를 그리신다. 왼편에 그린 하나의 점을 중심으로, 약간의 거리를 띄워서 하나를, 나머지는 훨씬 거리를 두고 저 반대편에 다시 점을 찍으셨다. 그러고는 대뜸 질문하셨다. "거리는 관계성을 의미합니다. 가까운 두 점을 잇는 법은 모두가 알 테지만 멀리 떨어진 두 점까지의 거리는 어떻게 이어야 할까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모두가 어리둥절했지만 교수님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는 이랬다. 뻔하고 단조로운 이야기 말고, 전혀 관계가 없을 듯 저 멀리 있는 점들과 연결할 수 있는 삶을 살아라, 그러면 풍요로워질 것이라고. 그 당시는 '역시나 괴짜 교수'라는 수식어로 흘렸던 한 장면의 기억이 불현듯 이 시점에 떠오르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저 멀리 있는 점을 향해 손을 뻗었고, 더디지만 삐뚤빼뚤 이어나가는 선이 내게는 글쓰기이다.


책 속의 어느 인상적인 문장을 기억하라고 하면, 한 장면이 떠오른다. 어떤 꼬마아이가 엄마, 동생과 함께 작은 부엌에서 쿠키를 굽던 장면이었다. 오븐의 주황색 빛이 문틈 사이로 빼꼼히 삐져나와 코끝에 묻으면 엄마는 전자파 나온다며 아이를 뒤로 잡아끈다. 어쩌다 동생은 엄마 등에 작은 밀가루 반죽을 붙이고 깔깔대며 웃던 날의 행복한 기억을 묘하사하고 있었다. 잠깐이지만 책을 읽는 그 순간 그날의 따듯했던 분위기와 냄새를 맡았고, 그들과 함께 서로의 얼굴 이곳저곳에 흰 반죽을 묻히며 함께 웃을 수 있었다. 비록 활자로 읽었지만 그리움이 묻어있는, 행복했던 그날의 기억이 내게 생동했던 순간이다. 문장이 전하는 온기에 젖어, 이내 보이지 않을 듯한 입가의 미소가 번지는 그런 글을 나도 써보고 싶다. 내 안에 이리 지리 흩어지거나 숨어서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을 끄집어 내 풍요로워질 수 있는 그런 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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