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내가 과거의 네게
아침 운동을 위해 탄천길을 나선다. 딱 예상한 정도의 차갑고 상쾌한 바람이 피부에 스치면서 오전의 생생한 에너지를 전한다. 코 평수 한껏 넓혀 큼지막하게 공기를 양껏 들이마신다. 다만 촘촘하게 선 코 털들이 보이지 않는 미세먼지를 잘 걸러내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내가 걷는 탄천길은 이른 시간부터 꽤 분주하다. 잘 차려입었지만 무표정한 얼굴로 걸음걸이가 빠른 이들은 분명 직장인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걷다 보면 빌딩 숲이 보이는 이유를 그 단서로 짐작했다. 집 앞 탄천을 걷다 보면 판교 IT 회사들이 즐비하게 서있는 빌딩 숲을 만난다. 이곳으로 일 다니는 회사원들은 복도 많다. 지옥철과 만원버스의 숨 막히는 출퇴근 시간을 잊은 채 푸른 탄천을 따라, 아름드리나무를 벗 삼아 걷다 보면 어느새 회사, 집으로 다다르니 말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표정이 무채색이거나 회색인 것은 어찌 보면 그들도 내가 경험했던 출, 퇴근길의 직장인 그 이상일 수 없기 때문일까?
시선을 저 멀리 두고 걷다 보면 문득 낯설지만 또 익숙한 모습의 빌딩 하나가 눈에 담긴다. 찡그려 자세히 들여다보면 중간층에 위화감 없이 조성된 큰 테라스에 손톱만 한 사람 하나가 작게 보였다. 가까워지는 거리에 그를 바라보니 왠지 모를 익숙함이 묻어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른 오전부터 무슨 이유로 바람을 쐬러 나왔는지, 난간에 팔을 걸치고 구부정히 기대어 있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은 없지만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던 이유이다. 담배 한 모금에 고개 들어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는 그가 왠지 모르게 과거의 나와 닮아서.
벌써 회사를 떠나온 지 몇 달이란 시간이 흘렀다. 직장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십수 년 아무 생각 없이 표류한 회사원, 그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회의는 이제 조 금씩 희미해져 가는 중이다. 다만 사무실을 뛰쳐나와 지내는 요즘도 불현듯 목을 죄는 은은한 압박감을 느낄 때가 있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세웠던 명분, 그 굳건했던 결심이 더 이상 색 바랜 종이마냥 눈에 띄지 않을까 봐, 또 그렇게 낡아서 그냥 흘러가게 될까 심히 염려가 되었나 보다. 왠지 모르게 나를 닮은 그와 조우하면서 미래에 대한 막연함과 두려움을 바라본다.
테헤란로의 어느 빌딩 고층에서 통창으로 내다보이는 빼곡한 빌딩과 그 아래로 끝없이 줄지어선 도로 위 차량, 그 옆으로 무채색의 슈트를 차려입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어디론가 바쁘게 움직이는 뻔한 모습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촘촘하게 들어선 빌딩 사이로 이색적인 작은 근린공원도 보인다. 한낮에 볕을 쬐며 그곳을 거닐던 어떤 사람, 벤치에 앉아 느긋이 독서를 하는 이,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그들을 통해서 상상했던 그곳의 내가 있었다. '언제가 이 빌딩 감옥을 탈출할 수 있을까? 나도 공원의 저들처럼 여유 속에 숨 쉬는 그런 날이 오기는 할까?' 의미 없는 독백과 망상을 쏟아내며 한숨짓던 그때가 오버랩된다. 테라스에 기대어 하염없이 하늘을 응시하는 그의 시선을 통해 과거의 나와 마주했다. 바쁘게 지나치는 직장인들을 뒤로하고 한가롭게 탄천길을 걷고 있는 내게 그가 천천히 읊조리듯이 말을 건넨다.
"내가 그토록 바라왔던 네게 묻는다. 너는 지금 어떠니?, 분명 잘 지내고 있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