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이나 어린, 이상형도 아닌 나의 최애작가
오랫동안 달리다가 멈춰 선 사람에게는 고요하고 느린 시간이 주어진다. 멈춰 선 사람은 그 시간 속에서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뜨는 해와 지는 해, 냉장고 속 식재료들, 새삼스러운 내 몸, 이상한 순서로 기억나는 과거의 일들을 멋쩍은 얼굴로 바라본다. - 이슬아"창작과 농담", 170p
글쓰기를 오랫동안 해 온 사람의 필력은 역시 다르다. 특히 이 영역도 '조기교육의 성과가 남다른 것일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이슬아가 담아내는 세상을 글로 접하면 마음이 초록해졌다가 몽글해지고 다시 차분해지기를 반복한다. 한편으로 '나는 왜 내 안의 세상을 이렇게 글로 표현할 수 없을까?'싶은 짜증도 피어오른다. 마치 추억의 물속 링 끼우기 게임기 같다. 가라앉은 링들을 수면으로 띄워 올리듯 숨거나 케케묵은 나의 소중한 것들이 이슬아의 글을 통해 마음에 한껏 나부낀다. 그녀를 책으로 처음 접했던 것은 '부지런한 사랑'이었다.
'부지런한 사랑'에서 이슬아는 글쓰기 선생님이다. 그가 어린 시절 글쓰기를 선생님께 배운 것처럼 자신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 이야기를 책에 담았다. 글쓰기 수업에서 아이들이 만들어낸 세상은 솔직해서 즐겁고 더 감각적이다. 이슬아는 그래서 그 글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듯하다. 아이들의 이야기가 작은 종이 위에서 더 넓은 세상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애쓴다. 이슬아가 미리 경험했던 세상 그러나 누구에게난 곧 들이닥칠 그 사건들이 아이들을 관통해서 어떤 오색찬란한 색으로 빚어질지 그 설렘을 담았다. 설렘의 온기가 내게도 전해져 책을 읽는 내내 독자이자 글방의 또 다른 학생이 돼버렸다. 이선생님의 글을 좋아하게 된 계기였다.
부지런한 사랑을 시작으로 '새 마음으로', '창작과 농담'을 단번에 읽어 내려갔다. 일주일 안에 두 권을 호다닥 읽어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인터뷰 녹취록 모음집 형식이라 쉽고 빠르게 속독이 가능했다. 다독에 대한 의무감? 갈증? 이 있었는데 며칠 만에 두 권을 읽었다는 사실에 무척 기쁘기도 했다. 두 권 중 하나는 이웃 어른들을 나머지는 자신이 속한 회사의 창작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했는데 나는 이웃 어른들의 이야기(새 마음으로)가 더 마음에 든다. 삶과 일에 대한 이야기, 기구하거나 혹은 불행했던 각자의 서사들을 담백하게 풀어내는 어른들의 말씀이 주옥같다. 물론 신파로 빠지지 않도록 중심을 잘 잡은 인터뷰어(이슬아)의 질문 덕분이다. 돌아서면 까먹지만 그들의 세상에 빠져있을 때 반성 꽤나 했다. '진짜 어른들의 이야기', 그들의 숭고한 삶의 태도가 게으르게 잔잔했던 백수의 호수에 파문을 일으켰다. 마음 한 켠을 새것으로 다시 써야겠다는 푸른 다짐이 샘솟았던 시간이었다.
이슬아와 중년의 나는 MZ세대로 묶여있다. 소비한 문화가 다르고 살아내는 삶의 채도가 명백히 다르지만 공명하는 무엇이 있기에 내가 그녀와 같은 세대에 함께 속하는 이유라고 믿는다. 밀레니엄 끝자락에서 어떻게든 그와 엮이려는 애처로움이 있을지 몰라도. '창작과 농담'이라는 제목을 통해서 그와의 간격은 더 벌어질까 염려되었다. '창작', 이와는 한참 떨어진, 상상력이 빈곤한 꼰대로서 자신 없는 제목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창작의 세계에서 창작창작 하는 인터뷰이들의 이야기가 도통 어렵지 않았다. 일에 대한 진정성과 프로페셜널리즘, 그 촘촘한 간격을 만드는 것은 역설적인 유머와 여유가 책에 대한 내 감상이다. 특히 ‘장기하’의 에피소드가 가장 마음에 와닿는다. 쉬어가는 삶에서 경험한 일상의 이야기가 백수인 내게 공감되었고 그렇게 위로받았다. 의식 없이 빠르게 흐르던 세상에 잠시 멈춰 선 세계가 맨 서두에 적은 글이다. 쉬어가는 시간에 불안과 두려움은 사라지고, 볼 수 없었던, 그래서 더 봐야 하는 것들이 고요하게 눈에 담긴다. 부족하거나 덜어내지도 않을 딱 그만큼의 담백한 감상이 내게 충만함으로 이어진다. 이슬아의 손끝을 좋아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중년의 순정을 깨우는 그의 작품을 계속해서 읽어보려고 한다. 그가 그리고 그의 스승이 칭찬한 책도 읽어볼 예정이다. 그들의 시선을 통해 이제는 희미하게 느껴진다. 느리게 기어가는 거북이가 쏜살같이 내달리는 토끼의 빠른 세상을 짐작할 수 없듯이, 지금껏 내 삶의 단층은 절대로 읽어낼 수 없었다. 내밀하면서 감각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삶의 또 다른 차원을. 이제 나는 이슬아를 통해 담벼락 너머 그 정의되지 않은 세계를 진지하게 들여다볼 예정이다.
#이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