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박해천 [인터페이스 연대기]
p.10
일차적으로 전투의 역사는 급격하게 변모하는 지각장의 역사이다. 달리 말해 전쟁은 영토적ㆍ경제적 승리 혹은 그 외의 물질적 승리를 성취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지각장의 '비물질성'을 전유하는 것이기도 하다.
-폴 비릴리오
p.11
냉정한 시선으로 보자면, 프라모델의 세계는 현실에서 좌절한 욕망이 제 허기를 채우려고 마련한 유아적 판타지에 불과하다. 하지만 텃세를 부리는 추억 앞에선 날카롭게 코끝을 찌르던 본드 냄새마저도 정겨운 향취로 각색되게 마련이다.
기억을 되새겨 보건대, 로봇 프라모델과 밀리터리 프라모델은 상이한 매혹의 뇌관을 정착하고 있었던 듯하다. 변신 합체 로봇의 세계가 첨단 테크놀로지에 대한 무한한 동경을 전시했던 반면, 밀리터리 프라모델의 세계는 선과 악에 대한 분별력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심미적 매혹을 발산했던 것이다.
p.12
연합군보다는 나치의 독일군, 절대 악의 화신이 창조해낸 전쟁 기계들의 외형에 더욱 눈길을 보낼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바로 여기에 밀리터리 프라모델의 매혹이 자리하고 있었다. 선악의 도덕적 판단과 디자인의 미적 우열이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소년들은 미량의 죄책감과 함께 그 매혹의 정수를 맛보았던 것이다.
전쟁과 디자인?
전쟁과 디자인, 첫눈에 보기에도 이 둘은 그리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다. 전쟁이 공동체 간의 적대적인 충돌로서 무력을 앞세워 파괴와 살상을 일상화하는 집단적 행위인 반면, 디자인은 공동체가 미래에 대한 낙관적 전망을 공유하며 자신들의 인공 환경을 새롭게 상상하는 사회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디자인 역사가들은 전쟁과 디자인의 관계에 그리 주목하지 않는다.
p.15
그런데 프라모델의 추억을 되새기며 헤스켓의 논의를 뒤따라가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생긴다. 흔히 생각하듯 전쟁에서 디자이너의 역할이란 선전 이미지를 제작하거나 살상무기와 군수물자를 디자인하는 일에만 국한되는 것일까? 이 의문을 제대로 곱씹이 보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개 양상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 전쟁은 특정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종국에는 태평양의 군도에서 아프리카의 사막까지 전 세계로 확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 전략을 수립하는 데 정보의 조직화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지 않았을까? 전장에서 수집된 수많은 정보들을 의사 결정 과정에서 체계적으로 활용하는데, 시각화의 전문가인 디자이너의 도움이 필요하지는 않았을까? 당시 중앙정보부(CIA)의 전신이었던 전략정보국(Office of Strategic Services, OSS)이 'Q-2'라는 암호명으로 진행한 전쟁상황실 프로젝트는 이 같은 의문을 풀기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
OSS의 전쟁상황실 프로젝트
제2차 세계대전 초기만 하더라도 미국은 자체적인 종합정보기구를 갖추지 못한 채, 연합군의 정보력에 의지했다. 지나친 의존도에 대한 경고가 비등했지만, 후발 참전국가였던 미국의 상황은 그리 여의치 못했다. 하지만 1941년, 일본이 기습적으로 감행한 진주만 공습 이후, 미국은 전쟁의 지정학적 다원화에 적극 대처해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주요 참전국의 정보기관에 비하면 뒤늦은 감이 있었지만,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대통령은 결국 친구인 윌리엄 J. 도너반을 불러들여 전략정보국을 창설했다.
전략정보국의 책임자로 임명된 도너반은 영국 특별작전본붘(SOE)의 도움을 받아 정보 수집ㆍ분석ㆍ연구, 첩보, 선전ㆍ선동, 심리전 공작, 파괴ㆍ전복 기획 등의 업무들을 체계화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도너반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한 가지 난제에 부딪치고 말았다. "매일 전 세계의 전장에서 워싱턴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가공되지 않은 데이터들"을 어떻게 명료하게 정리하게 대통령에게 브리핑하느냐는 문제가 그것이었다.
p.34
거대 시공간 기계
20세기 초반 유럽에 메트로폴리스는 무질서의 혼돈에 허덕여야만 했다. 산업화라는 "백 년 동안의 불의의 습격"에 시달린 결과였다. 이런 상황은 당대의 모더니스트 건축과와 디자이너에게 시급하게 해결해야만 하는 과제로 인식되었다. 이들이 제안한 다양한 해결안 중 가장 주목받았던 것은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 계획안이었다. 그는 과거의 도시를 "썩어가는 유골들로 가득 찬 납골당"에 비유하며, '거대 시공간 기계'로 재구성된 산업 시대의 메트로폴리스를 상상했다. 그에 따르면, 주거의 안전과 교통의 흐름을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해선 평면의 그리드 위에 직각의 고층 건물과 직선의 도로망이 도심을 축으로 하여 입체적으로 배치되어야 했다. 물론 이 같은 접근이 도시의 기능적 측면에만 치중했던 것은 아니다. 르 코르뷔지에는 현대적 도시를 경험의 미디어로 간주하고, 그것이 갖춰야 할 시각성의 논리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를테면, 그는 마천루들의 스카이라인을 수평적으로 바라보면, 감각적 혼돈의 피로감을 말끔히 씻어내고 "무념무상의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 스카이라인에 내재한 "수학의 냉정한 정신"을 마주하며 "세상을 질서 있게 지배하는 감시자가 된 것 같은" 기분에 빠져든다고 덧붙였다. 르 코르뷔지에가 구상한 거대 시공간 기계란, 도시인들에게 독특한 질서의 감각적 경험을 전하는 시각성의 인터페이스이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르 코르뷔지에가 이 같은 접근법을 발상하는데, 그리고 그것이 당대의 건축가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무엇보다도 포드주의 생산 라인이었다. 이를테면 스위스 태생의 건축가 한네스 마이어가 르 코르뷔지에와 비슷한 전략을 취해 1925년에 발표한 입체 구성물 <코업 비트라인 Co-op Virtine>은 도시에 대한 모더니즘적 상상력의 원천을 보여준다. 마이어는 이 작품에서 대량생산 제품의 포장 상사, 그리고 상표가 부착된 통조림통으로 입체 구조물을 만들어냈는데, 유리 상자에 담긴 이 구조물을 보는 시점에 따라 모양새가 달라진다. 가까이 다가서서 클로즈업의 시선으로 보면 마치 컨베이어 벨트가 깔린 포드 자동차 공장의 내부처럼 보이지만,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전체를 살피면 레고 블록으로 쌓아 올린 현대 도시의 축소 모형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공장의 생산 라인과 도시의 공간 배치 간의 유비 관계를 가시화하면서, '거대 시공간 기계'라는 은유의 기원과 그것이 지닌 강한 호소력의 근거를 넌지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르 코르뷔지에는 도로를 "일종의 긴 공장과도 같은 통행용 기계 혹은 통행 순환 기관"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가 건축가의 시선을 "세상을 질서 있게 지배하는 감시자"의 수평적 응시로 묘사할 때, 그것은 컨베이어 벨트 앞의 노동자를 감독하는 관리자의 시선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포스트 히로시마 시대의 도시 계획
그런데 새로운 메트로폴리스를 꿈꾸던 건축가의 시선은 전후 냉전의 시대를 맞이하면서, 원대한 포부를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주춤거리게 된다. 핵전쟁 발발 시 생존 가능성을 예측하기 위한 가상 시뮬레이션이 게임 이론의 수학적 모델에 근거해 되풀이되었고, 적의 표적으로 유력시되는 대도시를 방어하기 위한 대비책들도 양산되었다. 이에 따라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포스트 히로시마 시대의 도시 계획은 모더니스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었다.
수학자 노버트 위너가 제안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한 방어 계획'은 이런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 대표적 사례였다. (중략) 이 기사는 미국의 대도시에 원자폭탄이 투하되는 상황을 전제하고, 도시 계획의 차원에서 민간인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방법을 묻고 있었다.
위너가 보기에 모더니스트들이 꿈꾸던 도시는 핵전쟁에 대비하기에는 너무도 치명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제어탑 역할을 담당하는 도시의 중심부가 핵공격으로 파괴되면, 도시 전체의 기능은 마비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이제 도시 계획은 원자폭탄의 파괴력, 더 나아가 핵폭발 이후 교통 시스템과 통신 네트워크의 붕괴가 가져올 대혼란의 패닉 상태에도 대비해야 했다.
위너의 해법은 도시에 대한 은유로 인간의 신경망을 끌어오는 것이었다. 즉 뉴런들이 천여 개의 시냅스로 서로 연결되듯이, 도시의 기관들 역시 풍부한 여분의 교통로와 통신망을 확보해 다층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워너는 도시 외곽에 띠를 두르듯이 순환 도로망을 건설하고, 그 주변의 요충지에 대피소, 병원, 통제 본부 등을 구축하고자 제안했다. "생명 벨트life belt"로 명명된 이 시설물들은, 도심의 인구 밀집 지역에 핵공격이 가해진 경우 주변의 생존자들이 빠른 시간 내에 외곽의 안전지대로 대피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위너의 제안은 핵전쟁에 대비한 도시계획을 상상하는 데 일종의 시발점 역할을 했다. (중략)
이러한 계획들은 냉전의 불안과 원폭의 공포라는 1950년대의 시대 분위기를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었다. 르 코르뷔지에의 도시 계획이 시각적 차원의 투명성을 추구했던 반면, 노버트 위너의 도시 계획은 커뮤니케이션 차원의 투명성을 선취하려 했다. 하지만 이 두 가지 투명성은 완연하게 다른 색채를 띠고 있었다. 전자의 투명성이 모더니즘의 유토피아적 전망 속에서 전능한 통제의 시선으로 도시의 공간 배치를 유토피아적 전망 속에서 전능한 통제의 시선으로 도시의 공간 배치를 계획하려 했던 반면, 후자의 투명성은 그러한 전망이 고갈된 상황에서 출발했다. 모더니티의 도구적 합리성이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쳐 핵전쟁의 대량 학살이라는 파국에 도달하려는 순간, 커뮤니케이션의 투명성은 그 파국을 모면하려는 절박함의 산물로 잉태되었던 것이다. 인류의 전멸을 막기 위해 파괴의 시나리오에 근거해 탈중심화의 가능성을 타진해야만 하는 기이한 아이러니, 그것은 전전戰前의 모더니스트들이 미처 상상하지 못했던 모더니티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p.59
먼저 벤투리는 라스베이거스로 향하는 관광객 상당수가 이용할 법한 66번 도로에 주목한다. (중략) 그는 66번 도로의 주변 경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고속도로 변의 간판들은 조각적 형태 혹은 도상적 실루엣, 공간의 위치, 그 변형된 모양, 그래픽적 의미를 통해 메가텍스처(megatexture)를 정의하고 통합한다. 그것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단지 몇 초의 시간 동안 수많은 연상들을 유발하고 복합적인 의미들을 커뮤니케이션하면서, 공간을 가로질러 구어적이고 상징적인 연결점을 만들어낸다. 상징이 공간을 지배한다. 건축만으로는 역부족이다. 공간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형태보다는 상징이 더 큰 역할을 한다. 그런 이유로 이 경관에서 건축은 공간 내부의 형태라기보다 공간 내부의 상징이 된다. 건축은 대부분 아무것도 정의하지 못한다. 건축은 대부분 아무것도 정의하지 못한다. 거대한 간판과 조그마한 건물은 66번 도로의 법칙이다. 간판이 건축보다 중요하다.
p.65
그렇다면, 벤투리에게 '움직이는 시선'을 건네준 자동차 인터페이스의 독특한 효과는 무엇일까? 일단 자동차 인터페이스는 운전자에게 쇳덩어리를 움직이는 감각의 생생함을 안겨준다는 점에 주목해보자. 운전석 주변에 집중적으로 배치된 주행과 관련된 각종 장치들이 그 역할을 떠맡는다. 핸들과 속도계, 가속 페달과 블레이크 페달 등은 운전자에게 차제의 움직임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다는 확신뿐만 아니라, 직접적인 인터랙션을 통해 차체와 일체화하는 감각을 제공한다. 그 덕분에 운전자는 자동차를 자신의 신체적 확장물처럼 느낄 수 있게 된다.
다음 단계는 시선의 동질화인데, 여기서 운전석과 탑승객 좌석은 극장의 관객석 같은 역할을, 차체 유리창은 일종의 여과 장치 역할을 떠맡는다. 전자는 거리를 바라보는 시선의 위치를 특정한 방향으로 고정하며, 후자는 실제 거리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여타의 외부 자극으로부터 시각적 자극을 분리해낸다. 청각이나 후각의 이물질을 걸러낸 채, 정면과 측면에서만 도시의 경관을 바라보는 차체 내부의 시선, 여기에 질주의 속도감이 결합되면, 이제 '움직이는 시선'이 완성된다. 그리고 이에 덧붙여 노면의 요철을 흡수하면서 발생하는 차체의 진동은 메마른 엔진 소음과 어울려 이 시선의 현실감을 배가하는 역할을 한다. 이 단계에 진입하면, 폴 비릴리오의 지적대로, 차체 공간의 창은 "새로운 속도의 차원에서 세계를 경험하게끔 해주는 일종의 스크린"으로 기능하게 된다.
p.69
벤투리가 제도판을 떠나 원색의 페인트 통을 들고 도로 환경 미화작업에 나선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그는 이미 경험을 통해 드보르나 보드리야르의 지적을 체득하고 있었다. 움직이는 시선을 인스톨한 아스팔트 키드들에게 커튼월의 마천루는 더 이상 흥미로운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질주하는 속도의 시선에 마찰만을 일으킬 뿐이었다. 오히려 이 시선에게 쾌락의 원천은,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에서 교외의 레빗타운까지 자동차를 몰면서 도로변에 늘어선 빌보드와 네온사인 간판들과 함께 찰나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황홀경에 빠져드는 것이었다. 여기에 록 스타들의 히트 넘버 메들리가 카오디오 스피커를 쥐고 흔들며 차체 내부의 공기를 뜨겁게 달군다면, 더할 나위 없었을 터였다. 아마도 르 코르뷔지에라면 마천루의 펜트하우스에 머물면서, 자신이 좋아하던 바흐의 음악을 들으며 "판테온의 정신"을 명상했겠지만 말이다.
따라서 벤투리가 건축의 상징적ㆍ재현적 요소들이 종종 형태, 구조, 프로그램과 모순되기 때문에 "프로세스나 형태보다는 이미지를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해도 그리 이상할 것은 없다. 확실히 벤투리가 보기에, 맨 몸으로 도시와 교감할 기회가 점차 줄어드는 시대에 건축의 핵심 문제는 공간의 구조가 아니라 파사드가 연출하는 하이퍼리얼리티의 표면일 따름이었다.
p.93
여기서 벤야민이 주목하는 것은 카메라의 인터페이스가 그 결속을 성취하는 방식이었다. 일반적으로 사진사는 뷰파인더에 맺힌 상을 지각한 후, 거의 동시에 손가락으로 셔터버튼을 누름으로써 기계 장치의 연쇄 작동을 촉발해, "하나의 사건을 무한대의 시간 동안 이미지로 고정"한다. 카메라의 인터페이스는 순간적으로 사진사의 시각적 지각과 촉감적 행위를 연결함으로써, 즉 눈과 손의 협응을 적극적으로 유도해냄으로써 찰나적 시간성의 서명을 간직한 사진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p.98
컴퓨터의 개념 역시 변화했다. 이제 컴퓨터는 소프트웨어의 시뮬레이션을 위한 블랙박스 하드웨어에 그치지 않고, 인터넷과 연결되어 다양한 시청각 콘텐츠를 중개하는 미디어 터미널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상황이 이렇게 진전되자 도스의 집지가 좁아졌다. 결국 마이크로소프트도 매킨토시의 GUI를 모방해 자사의 윈도우즈Windows를 업그레이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잠깐. 여기서 미국 케이블 TV용 영화 <실리콘밸리 전쟁>의 DVD를 플레이어에 밀어 넣고 플레이버튼을 눌러보자. 빌 게이츠와 스티브 잡스가 1970년대 소규모 벤처 회사에서 출발해 IT 산업의 총아로 등극하는 과정을 다루는 이 영화의 한 장면 GUI의 개발에 대한 흥미로운 사실을 담고 있다. 그 장면은 대충 이렇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매킨토시의 맥OS를 베껴 윈도우즈를 발표하자, 화가 난 잡스가 옛 친구 게이츠를 찾아와 따진다. 이에 대한 게이츠의 응대.
"너도 그거 훔친 거잖아!"
p.120
이런 식의 접근이 제안하는 인터페이스란 근본적으로 큰 스크린과 수많은 버튼들을 정착한 리모트 컨트롤에 다름 아니다. 터일러주의가 노동자의 신체적 동작을 효과적으로 통제해 컨베이어벨트의 생산성을 높이려 했다면, 사용자-친화적 접근은 사용자의 정보 검색ㆍ처리를 조건 반사의 직관적 프로세스로 정형화하려 한다. 전자가 재화의 물리적 생산에, 후자가 정보의 인지적 소비에 초점을 맞춘다는 차이가 있긴 하다. 하지만 양자의 접근법은 에너지의 최적화된 소비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유사하다. 미디어 이론가 폴 비릴리오는 이런 상황을 비판하면서 "인간과 컴퓨터의 공진화"의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한다.
인터랙션의 사용자 친화성, 이것은 단지 지능적인 기계에 인간을 정교하게 종속시키는 상황에 대한 은유일 뿐이다. 인간과 컴퓨터의 프로그래밍된 공생, 그 내부에서 보조 나팔수처럼 떠벌리는 '인간과 기계의 대화'는 중요한 전제를 필사적으로 숨긴다. 그것은 개인을 제한적인 도구로 규정하면서, 인간의 지위를 총체적으로 그리고 조용히 박탈한다.
p.197
디자인의 10년, 위기의 10년
영국의 디자인 역사가 페니 스파크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독일은 과학의 이름으로 디자인을 팔며, 이탈리아는 예술의 이름으로, 북구는 공예품의 이름으로 디자인을 팔고, 미국은 비즈니스의 이름으로 디자인을 판다." 1983년에 출판된 그녀의 책 <컨설턴트 디자인>에 담긴 이 표현은 당시 서구 디자인 산업의 현황을 함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실제로 이 시기 서구의 선진국들은 제조 산업의 지정학적 분업화라는 조건 속에서 문화적ㆍ역사적 전통을 자양분 삼아 자국 디자인의 독특한 상품성을 세공해가고 있었다.
p.198
그런데 잠깐. 앞서 인용한 스파크의 표현이 21세기 서구 디자인 산업의 지형을 설명하는 데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일단 독일과 이탈리아는 여전히 제자릴 지키고 있는 듯 보인다. 물론 변한 것도 있다. 뛰어난 가구 디자인으로나 디자인 서적에 언급되던 북유럽 국가들 상당수가 IT 산업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고, 아일랜드도 여기에 가세해 단단히 한몫을 챙기고 있다. 그러면 20세기 서구 디자인계의 패권을 장악했던 영미권의 상황은 어떤가?
먼저 미국의 경우를 보자. 미국의 디자인은 '비즈니스'라는 단어를 꺼내기 민망할 정도다. 실제로 미국 디자인 산업의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실제로 미국 디자인 산업의 좋은 시절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내구 소비재 시장의 이윤율 하락의 압박이 어김없이 미국의 기업들을 찾아왔다. 1970년대 이전까지 "값싸고 형편없는 제품의 대명사"로 불리던 일본 제품들이 오일쇼크 이후 중소형 자동차를 첨병으로 내세워 북미 대륙 침공을 감행하자, 미국의 제조 산업은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 생산 시설을 저임금의 제3세계 국가로 이전해야만 했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80년대 이후, 미국의 제조 산업을 떠받치던 자본의 상당수는 점차 레이거노믹스의 엄호 아래 일본에서 유입된 막대한 정부 차관과 뒤섰인 채로 자신들의 정신적 고향이나 다름없는 군산복합체로 퇴각하거나 기존 생산체계를 희생시켜 단기적인 투기 이윤을 얻을 목적으로 정크 본드를 남발하며 금융 자본으로 진화를 시도했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 자본들은 1990년대 이후로는 자질구레하게 신경 쓸 일이 많은 민간 시장의 내구 소비재와 그 디자인에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들이 조금이라도 디자인에 주목했다면, 주주 총회에 참석한 투자자들에게 전년도 사업실적을 설명해줄 애뉴얼 리포트의 편집디자인 정도가 아니었을까?
p.234
부르주아들은 사회 전 영역에 걸친 탈신비화 과정을 주도하며 '진보'라는 관념을 발명했다. 이 관념에 따르면, 역사는 시계의 기계적 리듬과 공명하며 선형적 궤도를 타고 앞으로 질주한다. 이 궤도에 올라탄 이상, 반복은 불가능하며 이탈은 상상하기 어렵다. 진보의 방향도 이미 결정되어 있다. 시간의 흐름은 합리적 계획에 따라 미래라고 불리는 예정된 목적지를 향할 것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진보의 속도일 뿐이다. 즉 우리가 얼마나 빨리 미래에 도착할 수 있는가가 문제인 것이다. 철로 위를 질주하는 기관차가 진보의 은유로 등장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였다. 그렇다면 이 기관차의 에너지원은 무엇인가? 이 질문의 해답은 상품이 쥐고 있었다. 생산과 소비가 서로 꼬리를 물고 나선형의 궤적을 그리며 회전하는 상품의 순환이야말로 철마를 달리게 만드는 원동력이었다. 이렇게 상품에 의해 추동되는 시간의 질서가 진보의 이름으로 신화화됨으로써, 화폐는, 더 나아가 그 집적물인 자본은 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정당화할 수 있었다. 그것들은 상품 교화의 매개물로서 진보의 윤활유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화폐가 더 이상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가? 결국 진보의 기관차는 탈선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 이후 역사는 목적지를 잃은 채 표류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p.236
그렇다면 나를 포함한 독일의 대중들이 자발적으로 파시즘의 격렬한 파동 내부로 빨려 들어갔던 까닭은 무엇이었나? 화폐는 동질화된 세계를 구축하려고 노력하지만, 역으로 착취로 인해 계급 갈등의 단초를 제공한다. 이 갈등을 완화하기 위해 부르주아들은 의회라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민주주의라는 정치 이념의 수립에 몰두한다. 그들에게 민주주의란 이해관계의 사소한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을 조정하는 의사 결정의 형식이었다. 그들은 다양한 입장들이 만들어내는 정치적 지형으로부터 그 형식의 규범을 추출하고자 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정치적 입장들의 집산지로서의 의회였으며, 그 입장들을 조율하는 원리로써의 대의제와 다수결이었다. 하지만 부르주아의 민주주의는 그럴싸하게 포장된 대의명분에 불과했을 뿐이다. 대의제는 당파의 입장과 유권자의 견해의 차이, 즉 기표오 기의의 차이가 빚어내는 말장난에 찌들어갔고, 다수결은 정치적 판단을 시장 바닥의 흥정과 협잡으로 타락시켰다. 결국 의회는 특정 계급과 집단의 대변인임을 자처하는 부르주아들이 노회한 감각으로 연기하는 권모술수의 무대가 되고 말았다.
대중들은 무엇보다도 수치심을 알지 못하는 의회주의의 천박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리고 정치가 마땅히 지녀야 할 엄숙성을 보존하기 위해 새로운 권력의 질서가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공유했다. 대중들은 주체할 수 없는 열정으로 교환될 수 없는 가치의 교환을 욕망했으며, 화폐 공리계의 표면을 꿰뚫고 융기하는 강력한 권력을 상상했다. 파시즘은 바로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켜 주는 듯 보였다. 괴벨스의 지적처럼, 파시즘의 정치학은 대중이란 원재료를 민족의 확고한 구조로 정제하는 권력의 연금술이었으니 말이다. 따라서 대중들이 선택해야 할 것은 명확해 보였다. 아니,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애당초 다른 선택은 불가능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라는 실존적 자아의 허물을 벗어 던지고, '우리, 파시스트'의 대열로 합류하는 존재의 이전. 그리하여 나는 우리로 다시 깨어났다. 보르헤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는 아무도 아닌 자가 되었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우리에게 권력은 더 이상 지배와 복종의 위계 관계로 표면화되지 않았다. 오히려 권력은 중심 없는 수평적 관계의 기능이자, 그것이 만들어내는 효과에 가까웠다. 근본적으로 권력은 '교환'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이 교환 과정이 민족 구성원의 자발적 의지에 따라 진행되길 원했다. 총통이라는 존재가 예외적인 세계사적 개인으로 등장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관계의 바깥에서 권력 교환의 체계성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총통은 권력의 중심도, 지배의 주체도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아돌프 히틀러라는 한 개인의 실존으로 환원될 수도 없었다. 오히려 그는 개인사의 모든 기억을 지워버린 자리에서 게르만이라는 혈연 공동체의 모든 것을 의마하는 동시에, 내부 구성원들 간의 모든 차이를 무화하는 초월성의 인격화된 기호였다. 물론 이때의 초월성은 화폐의 초월성을 압도하는 정치적 권력의 초월성이며, 소외와 불안으로 지쳐 있던 대중들에게 부르주아의 질서와는 전혀 다른 매혹과 쾌락을 안겨주는 교환의 초월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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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측면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소해야 할 문제는 부르주아의 낡은 유산인 밀실과 광장의 구분이었다. 부르주아는 대공황 훨씬 이전부터 계급혁명의 공포와 테크놀로지의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그들은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 사이에 견고한 경계를 세운 후 그 경계를 교묘하게 넘나들면서, 한편에서는 착취의 정당화를 위해 프로테스탄의 금욕적 노동 윤리를 설파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나르시시즘에 손쉽게 반응하는 쾌락의 기술들을 개발했다. 이 위선적인 이중생활을 통해 부르주아들은 밀실 안에서라면 언제나 스스로 보호받고 있다는 환상에 취해 지낼 수 있었다. 그들은 이를 위해 남몰래 즐길 수 있는 자폐적인 욕망의 장치들을 발명했는데, 그 중 하나가 갖가지 식물성의 스타일들을 조악하게 결합한 아르누보의 장식미학이었다. 아르누보의 기형적인 이미지들은 부르주아들이 끝없이 분출하던 리비도적 에너지의 자화상이었다.
이처럼 밀실이 부르주아의 나르시시즘적 영혼이 기거하는 키치의 박물관으로 변모하는 동안, 메트로폴리스의 광장은 홉스적 군상들이 맨 몸으로 뒹구는 정글로 변해갔다. 비록 그 대기 위로 노동 윤리에 대한 계몽주의적 설교가 장황하게 반복되긴 했지만 약육강식의 생존 논리를 압도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중들은 빈곤과 소외에 찌든 야성의 짐승으로 변모해 메트로폴리스의 거리에 스스로 방목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장으로 흘러나온 수많은 상품들은 대중들을 감각 과부하의 상태로 내몰고 그들의 지각에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켰다. 당시 유행어가 되다시피 한 '판타스마고리아phantasmagoria'는 이러한 마찰의 에너지가 집결된 메트로폴리스의 상황을 묘사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밀실에서는 쾌락을 좇는 이교도의 언어가 반복되었던 반면, 광장에서는 야수들의 굶주린 비명만이 소란스럽게 메아리칠 뿐이었다. 특히 1929년 미국의 증권시장 붕괴로 발화된 세계적 규모의 대공황의 거센 파도가 독일에 당도할 무렵 그 아우성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부르주아의 이중적 도덕률이 지배하던 판타스마고리아의 황량한 대지, 그곳이 바로 우리가 발 딛고 일어서야 할 곳이었다. 일반적으로 생활공간의 질서는 특유의 집합적 리듬을 통해 대중들이 세계를 이해하고 표현하는 방식을 규정한다. 따라서 이러한 질서가 불확실성의 혼돈에 휩싸인 채 대중들을 소외의 나락으로 빠트리는 결과를 초래한다면, 그것은 적자생존의 세계에서 독일 민족의 생존력을 거세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시대의 잔재를 완전히 청산하고 타민족과의 생존 경쟁을 위한 전초기지로 생활공간을 탈바꿈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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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소실점을 보는 자는 무한의 깊이를 보는 자이며, 무한의 깊이를 보는 자는 인간의 육체를 벗어 던진 자다. 여기서 그는 일시적으로나마 신의 눈을 소유한 자가 된다. 소실점의 무한성이 지각의 초월성과 대구를 이루며 가시성의 권능을 현실화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환영에 불과하다. 소실점은 화폭에만 존재할 뿐,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투시도가 재현한 공간은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는 현실의 공간과 매우 유사함에도 불구하고 그와는 전혀 다른 질서를 지닌다. 파노프스키가 투시도법을 역사적으로 특수한 재현의 상징 형식으로 정의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파노프스키의 지적처럼, 투시도법을 그저 한 시대를 풍미한 재현의 소우주로 치부해버리면 그만인 것일까? 르네상스 이후 수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투시도법에 의지해 세상을 바라보고 그의 원리에 따라 건축물을 설계하며 그림을 그리지 않았던가? 투시도법이 그런 지속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가 주목한 것은 투시도법의 내적 원리가 지닌 정합성 여부가 아니라, 특정한 재현 모델이 감각의 생산 양식으로서 자연스럽게 주체의 신체에 기입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이었다.
심약한 딜레당트였던 롤랑 바르트는, 파졸리니의 영화 <살로 혹은 소돔의 120일>을 비편한 <사드-파졸리니>라는 글에서 파시즘을 "구속하는 대상"이라고 정의한다. 바르트에 따르면 그 구속하는 대상은 강요하는 권력이기도 한데, 파시즘은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정확하게, 분석적으로, 정치적으로 생각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이 강요하는 권력에 대해 자신의 재현 모델로 저항하지 못한다. 파시즘에 대해 예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파시즘을 믿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 파시즘이 어디서 왔는가를 증명해주는 것"일 뿐이다. 말하자면, 파시즘에 관련해서라면 예술은 파시즘의 본질적인 폭압성을 폭로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 자체의 무기력이라기보다는 파시즘이 창줄해낸 치명적인 매혹의 공간 때문이다. 파시즘과 관련을 맺은 한, 예술은 그저 파시즘의 프로파간다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바르트로 하여금 이렇게 비관적인 어조로 파시즘과 예술의 관계를 말하도록 만든 매혹의 공간이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볼 때 재현 모델은 예술의 근간으로서 원래 종교적 초월성에 의존하는 것이었다. 만일 우리가 종교적 초월성을 정치적 초월성을 대체하는 데 그쳤더라면, 바르트는 우리의 미학을 그렇게 위험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는 기존의 재현 모델을 폐기하고, 수용자의 신체적 감각을 재조직화하는 극장의 형식을 새롭게 창조했다. 재현의 전복만으로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와 같은 초월성의 극장, 이것이 바로 바르트가 파시즘을 구속하는 대상으로, 강요하는 권력으로 정의했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