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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1

나는 누구인가

#09 플라톤 아카데미 [나는 누구인가]

by 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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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복 시인)
일상적인 삶은 느낌에서 사실로, 위험에서 안전으로의 끊임없는 이행이다. 예술이 진정한 삶을 복원하기 위한 시도라면 예술은 일상적인 삶과는 반대방향으로 진행할 것이다. 즉, 사실에서 느낌으로 안정에서 위험으로
인문학도 그렇고 철학도 그렇고 모든 예술이라는 것은 그 생경한 느낌의 세계와 위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교육이자 학습을 통해 훈련되는 것
자본주의 핵심은 자본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우위에 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가진 자유는 소비의 자유이다. 다시 말해 내가 자유로운 것이 아니라 돈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핵심은 상품과 화폐이다. 화폐를 가지고 있는 쪽이 우월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가 유효했던 것은 돈만 가지면 자유로운 느낌이 들고, 돈만 가지면 무엇이든 지배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소탐대실의 전형적인 체계입니다.
자본주의를 통제하지 못하면 우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획일화된 노예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연스러운 것, 욕구에 충실한 것이 아닙니다. 순리대로만, 욕구대로만 해서는 사람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큰 대가 없이도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사람들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 연대를 이뤄 살아가는 것이 자본주의의 유일한 대안입니다.
화폐 자체를 없애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다만 돈은 하나의 교환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런 인간 중심적인 사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가급적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공동체의 기본 덕목은 사랑, 연대, 공감입니다.
이성복 시인 '사랑은 생리적인 것을 거스르는 일'
디지털 혁명
1. 육체적 노동으로부터의 자유
2. 강도 높은 쾌감을 누릴 수 있다. 빈부격차가 존재하지 않는다.
3. 모른 앎을 해방시킨다.
욕망과 능력에 간극이 생길 때 우리 몸은 강도 높은 스트레스를 받게 되고, 이는 모든 질병과 번뇌의 원친이 됩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봉착한 몸의 소외 (1. 미련과 집착으로 현재를 온전히 살아내지 못함, 2. 쉬어야 할 때 못 쉼), 욕망과 노동의 간극에서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까?
행복도 훈련받아야 한다. -니체-
내가 화폐에 집착하는 순간, 돈은 수단의 역할에서 벗어나 나를 지배하는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자기 지배력을 가진 화폐, 즉 자본은 무조건 증식합니다.
돈이 목적이 되지 않으려면 서사가 담겨있어야 합니다.
삶의 서사가 없을 때의 돈은 맹목적인 욕망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진정한 성공을 위해서는 돈을 좇기보다는 우정과 지성에 더 많은 마음과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사람이 흘러가는 곳에 돈도 흘러가기 마련이다.
많은 것을 소유하겠다가 아니라 많든 적은 증여와 순환에 참여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 바뀌면 자연스럽게 돈이 벌립니다.
선동가들은 매우 단순한 논리를 사용한다.
왜냐하면 단순해야만 다수의 대중들이 그 선동에 넘어가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로 그저 허겁지겁 살아버리면 사는 맛을 알 길이 없겠지요. 살면서 서로 사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야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용서하여도 잊지는 말자'가 아니라 '잊어버리자. 그러나 절대 용서하지 말자' 가 더 적합하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독재정권, 굶주림과 같은 숱한 상처가 있었기 때문에 자연적, 물리적 멍에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그래서 어느 문화권보다 자연스럽게, 어떤 저항도 없이 디지털 시대로 전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프랑코 베라르디-
상처는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
(한국) 한편에는 극단적인 개인화가, 다른 한편에는 공동의 정신이 서로 연결된, 즉 케이블링 된 사회가 공존하는 특이한 사회.
(강남 스타일)
- 사람들은 혐오하는 것 자체를 즐긴다.
- 역설적이면서도 외설적인 쾌락주의
- 김일성/김정일을 보고 열광하는 모습
- '자기 아이러니'로 인해 집단적인 무아지경과 아이러니가 접목되면서 폭발적 영향
(The Act of Killing)
사람이 진정으로 사악해지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내가 지금 하는 행위가 현실이 아니라 픽션이다'라고 스스로 믿는 구석이 있어야 합니다. '상상 속의 정당화', 간접적으로 사악한 행위였다고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선한 일을 했음에도 그것이 정상으로 간주되지 않고 오히려 의외인 것으로 간주되고 있다니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요? 그건 단순히 사람이 이기주의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무리 선한 일을 해도 이기주의적인 사회적 기준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우리가 한때 공적 영역으로 여겼던 것들을 점점 사적인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노든의 폭로를 통해 우리의 삶이 디지털화됨으로써 공적인 공간이 사유화되어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진정한 지식인은 다른 사람이 정해놓은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 자체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올바른 접근법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인터넷이 위험한 이유?
허구적 투명성 - cloud computing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통제당하고 있다.

1. 인터넷이 바로 국가기밀과도 연계될 수 있다. 그러나 이 데이터가 접근 금지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2. 디지털 통제를 통해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모든 개인의 사생활을 모두 들여다보고 있다. 하지만 정부 당국이 너무 많이 알아서 걱정이 아니라 너무 몰라서 문제라는 것이다.
내부 고발자들을 바로 간트가 말한 공적 이성을 유지시키는 선동자이다.
사회적 역동성을 살펴보면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변화가 촉발되어 점차 거대한 산사태와 같은 변화가 이뤄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항상 자신이 지켜야 하는 가치와 이념의 기준을 외부에 두고 있는 사람이나 사회는 자신이 직접 기준의 생산자로 등장하는 데 상당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다.
이 세계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은 사건이다. 이론은 모두 사건을 정리해놓은 기록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건의 기록인 이론은 정지해있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접촉하는 것은 사건이다. 우리가 생종하는 공간, 우리의 지혜가 발휘되는 공간은 사건의 세계이지 이론의 세계가 아니다. 이론은 하나의 사건을 정리해놓은 것이고, 우리가 그 이론은 공부하는 까닭은 다음에 일어날 사건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사건에 부합되는 이론은 어떤 것 일지를 예측할 수 있는 힘을 갖기 위해서이다.
즉 이 세계에서 우리가 진짜 접촉해야 할 것은 이념이나 이론이 아니고 바로 사건이고 감각이다.
사건을 담당할 주체로서의 '이론'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담당할 주체로서의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는 '주체력'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신의 주인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가 공유하는 보편적 이념에 해락하고 그 보편적 이념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나만의 고유한 활동성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나만의 고유한 힘, 나만의 고유한 욕망을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사건을 발동시킬 수 있는지가 자신의 주인으로 살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한다.
양주
"내 정강이에 난 털 한올을 뽑아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이 털 한 올을 뽑지 않겠다."
개개인의 자발성에 나온 힘으로 이뤄지지 않은 사회는 약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천하는 이념의 집행자이며, 이념은 정해진 한쪽을 선택하는 것이므로 이 이념에 집중하면 사회는 경색된다는 것이다.
자유는 전체라는 집단에 적대적으로 대항했을 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자발적 생명력, 내적인 활동성을 근원으로 해서 내 삶은 주도적으로 끌고 갈 수 있을 때 나타나는 것이다. 이 자유의 개념만이 내가 나 자신의 주인임을 확인시켜준다.
보편적 이념을 뚫고 일어나 자발적 생명력을 가지려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어느 한쪽에 서게 하지 않고 운동의 경계적 상황에 그대로 맡겨둡니다.
이렇게 경계에 서서 욕망의 활동성에 자기 자신을 맡길 때 사람은 비로소 강해질 수 있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경계를 품은 사람은 유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의 이념을 선택한 사람은 그 이념에 갇히게 되지요. 그런데 그 선택한 이념의 가치는 일정한 상황 속에 정지해있다. 저기에 있는 이념과 신념에 갇힌 사람은 경직될 수밖에 없다.
경계의 중첩이 운동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나를 표현하는 것입니다.
표현의 동력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배움은 경계를 품는 것이 아니라 이념의 한쪽에 서는 것과 같습니다. 표현의 동력을 만들어 낼 수 있을 때 인간의 눈빛은 야성을 되찾습니다.
이때 주의할 것은 충고와 규칙을 구분하는 일입니다.
자신이 도달한 그 깊이와 높이의 간격만큼 이 곧 자기 자신의 함량입니다. 그만큼의 세계가 내 것ㅇ 되는 것입니다. 그 함량을 지탱하는 것은 이념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힘이며 이 힘은 곧 욕망입니다. 이 힘을 가진 주체, 모든 사건의 주인이 되어 이 힘으로부터 출발하는 사람이 바로 자신의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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