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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1

생명이 자본이다

#10 이어령 [생명이 자본이다]

by 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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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 숫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데마르크의 말처럼 생명은 항상 보편화하거나 시스템화하거나 통계 숫자화하면 사라진다.
희랍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생물학자들이 엄격한 이성으로 종, 속, 과, 목과 같은 분류의 벽 안에 모든 지상의 생명을 분류하고 가둔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는 감옥 같은 두꺼운 의식의 벽이 생긴다. 하지만 서로가 '야-'하고 부르고 인사를 나누는 순간,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하나의 생명권 안에서 아주 쉽게 그 담벽을 넘어선다. 그리고 손을 내민다. 이것이 겨울의 추위가 만들어낸 프리즌 브레이크의 드라마이다. 추위의 관심에서 얻은 생각의 시작이 바이오 필리아에 당도하는 숨고르기이다.
(앨빈 토플러)
제2의 물결로 등장한 기계는 노동자의 바로 그러한 호흡과 노래를 침묵시키고 말았다. 생물학적인 자연의 리듬은 톱니바퀴와 컨베이어 벨트가 들어가는 기계의 균질적인 고동소리로 바뀐다. 사람들은 기계와 함께 일하면서 일과 일 사이에 삽입되는 멈춤의 '이기야'를 읽고 '차'자만을 외친다. 이것이 성장하지 않으면 죽는 줄 아는 산업자본주의, 한시도 멈추지 않고 이자를 낳고 무는 금융자본주의 속성이다.
그래서 동사자들은 대개가 다 혼자이다. '성냥팔이 소녀'처럼 그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혼자 얼어 죽는다. 동사자들의 죽음은 추위 때문이 아니라 외로워서, 곁에 사람이 없어서, 결론은 사랑이 없어 죽은 게다.
그렇구나. 물고기의 생명을 기리고 지켜주는 것은 자연의 품이지 결코 사람의 품이 아니구나. 적어도 인간이 만든 문명의 가슴이 아니라는 거다. 칸트 데카르트의 철학서가 꽂혀 있는 내 방안에서 살아온 금붕어들을 하마터면 얼어 죽일 뻔하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연보호'라는 말을 함부로 쓴다. 누가 누구를 보호한다는 말인가. 지구가 생기고 나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연이 인간을 보호했지 인간이 자연을 보호한 게 아니었다.
애이불상-"슬퍼는 하되 마음을 상하게 하지 말라"
애덤 스미스의 시장주의 경쟁이론은 약육강식의 비정한 경쟁사회를 전제로 한 것이 아니다. 남의 슬픔이나 고통을 느끼고 배려하는 도덕적 감정이 내재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시장인 것이다.
바른대로 말하자면 내 독서 목록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서재 밖의 세계 전체가 변한 것이다.
하늘에는 비가 내려야 아름다운 무지개가 뜬다고 했지만 인간의 마음에는 눈물이 흘러야 영혼의 무지개가 뜬다.
지금까지 그 역사의 자국마다 고인 땀과 피는 번영과 함께 고통과 갈등의 앙금을 남기고 있다. 어떻게 풀랴. 산업화의 땀과 민주화의 피를 어우르고 정화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위로의 눈물, 공감의 눈물 그리고 감동의 눈물일 것이다.
역시 참치 맛은 붕어 맛 하고는 다른 글로벌 시대의 미각 상징이다. 외국 것과 남의 말에 가위눌리던 시대가 지나고, 업신여기던 내 토박이 말이 조금씩 어깨를 펴던 산업화, 민주화 시대의 맛이 그랬다.
여기서 진실한 부가 무엇이고 허구의 부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광산에서 캐낸 금, 그것은 허구의 부이다. 그러나 열심히 일하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무역하고 공업을 일으키면 그 부는 진실한 부가 된다. 브라질의 광산은 포르투갈을 몰락시켰고, 멕시코와 페루의 광산은 스페인을 몰락시킨 것이다.
인간은 자연을 파괴할 수는 있어도 보호할 수는 없다. 또 자연이 인간을 지금까지 보호해주었지 인간이 자연을 보호해 준 것이 아니다.
인공적인 미를 추구하는 모습도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생명에 무언가 인위적인 타격을 가하는 것, 이것을 바로 문화 물질이라고 하는데,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문화적인 인위성이 위력을 떨칠 때에도 한국에서만은 그것을 금기시한 것이다.
생명은 이렇게 거슬러 오르려는 역 엔트로피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우연성과 도전성을 함유한 것이 곧 생명의 법칙, 사람의 본성이다. 바람과 물의 힘, 중력의 힘을 이용한 다음에 언젠가는 우리가 사랑의 힘을 이용할 때가 올 것이다. 그날은 바로 인류가 세계사에서 두 번째로 불을 발명하는 날이 될 것이다.
평등하다. 생명가치가 똑같다는 것이다. 생명의 위기 속에서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는 그때, 거기에는 모든 위계가 사라지고 종과 유도 사라진다. 이렇게 평등이란 개념은 생명력, 사랑으로부터 태어난다. 인간과 짐승, 인간과 식물, 심지어 물건까지도 사랑하게 되면 살아있는 것처럼 존중하게 된다.
그것은 생명의 자본이 아니라 물질의 자본이고 그것이 항상 사람들을 불안과 갈등으로 몰아넣는다. 그렇다면 이들을 서로 연결하는 힘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함께 구하고자 하는 임무의 수행, 이것이 생명자본이라는 것이다. 그 임무는 사람들을 협동으로 이끌어간다. 물질자본은 그들을 흩어놓고 생명자본은 그들을 결합시킨다.
(생택쥐페리)
- 사랑은 서로의 눈을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
- 그것이 관습이든, 한 가족의 자취이든, 추억의 집이든 좋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돌아올 것을 지향하면서 떠난 다는 것이다.
- 그 미소가 나를 해방시켰다.
그 얼어붙은 마음을 녹인 영혼의 눈 맞춤, 그것은 남을 살리고 또한 나를 살린다. 그 미소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단, 여기서 '인간'이란 말은 협소한 어느 종의 명칭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생명'으로 바꿔야 하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면 운다. 또한 사랑하면 웃는다. 사랑은 덮어주고 끌어안으며 또한 한 걸음 뒤에서 바라봐준다. 사랑은 내 것을 주고도 기뻐하며, 종과 유와 모든 울타리를 뛰어넘을 뿐 아니라 그 경계를 단숨에 지워버린다. 때로 적으로 만날지라도 사랑은 식지 않는다. 그러한 사랑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그 사랑은 쟁취해야 할 무언가가 아니라 생명의 한 본성으로써 우리에게 자리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대한 사랑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사랑은 늘 소중한 것이다. 그것은 생명이므로, 또한 남을 살리고 나를 살리는 원동력이므로, 사랑이란 나만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유레카인 것이다.
바로 여기서 사랑(Love)은 좋아하는 것(like)과 구분된다. 좋아하는 것은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사람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가령, 재산과 집안을 보고 결혼했다면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라이크의 감정이다. 그러나 눈앞의 가난을 들여다보면서도 결혼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하면 거꾸로 나의 것을 내주게 된다.
인간은 생물 가운데 생물권을 파괴하고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에 의해서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힘을 획득한 최초의 종이다.
계급사회가 위험한 것이 아니라 계급과 계급 사이에 통로가 없는 것이 위험하다.
人人人人 : 사람이면, 사람이냐. 사람이어야 사람이지.
물질 이상의 것이 존재한다는 유일한 증거는 사랑 속에서 발견된다.
이렇게 산업 금융자본주의는 '자연계의 모든 물질은 유한한 것인데 돈만은 무한'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끝내 승복할 수 없었듯이 돈은 생물이 아닌데도 이자를 통해서 자기증식을 한다. 그래서 금융자본주의는 세계에서 유통하는 실태 없는 300조 불이라는 돈이 불어나게 했다. 모든 나라의 실제 GDP는 합계 30조 달러밖에 되지 않는다. 이 갭을 메우기 위해서 끝까지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현재의 자본주의 경제다.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이상 -날개-
바다에 사는 아기 물고기가 물었습니다.
"엄마, 바다라는 게 뭐야?"
그러자 어미 물고기가 대답했습니다.
"그래, 다들 바다, 바다, 하는데 누구도 그게 무엇인지는 모른단다. 이따금 누군가 바다를 보았다는 소문은 있는데 글쎄, 한 번도 그 물고기가 돌아왔다는 말은 듣지 못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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