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재 Part 1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컹리 Feb 06. 2019

화폐전쟁

#101 쑹훙빙 [화폐전쟁]


p.29

   1694년에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은행에 왕실 특별허가증(Royal Charter)을 내주었고, 최초의 현대적 은행은 이렇게 탄생했다.

   잉글랜드은행의 핵심은 국왕과 왕실 가족의 개인 채무를 국가의 영구적 채무로 변환하는 것이었다. 전 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잉글랜드은행이 채무에 기반을 둔 국가화폐를 발행했다. 이렇게 해서 국왕은 전쟁에 필요한 돈을 확보했으며, 정부도 뜻대로 정책을 펼 수 있게 되었다. 한편 은행가들은 그동안 꿈꿔오던 거액의 대출을 해주고 짭짤한 이자 수입을 챙기게 되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셈이었다. 다만 국민의 세금을 담보로 했다는 점이 옥에 티였다. 이렇게 강력한 새로운 금융 수단이 생기면서 영국 정부의 적자는 수직으로 상승했다. (중략)

   아이러니하게도 이 제도는 국가화폐의 발행과 영구적 국채를 묶어 놓는 구조였다. 그래서 화폐를 신규 발행하면 국채가 늘어나게 되어 있었다. 국채를 상환하면 국가의 화폐를 폐기하는 셈이 되므로 시중에 유통할 화폐가 없게 된다. 따라서 정부는 영원히 채무를 상환할 수 없다. 이자를 갚고 경제도 발전시켜야 하므로 화폐 수요는 필연적으로 늘어날 테고, 그 돈은 다시  은행에서 빌려와야 했기 때문에 국채는 계속해서 불어날 수밖에 없다. 이 채무에 대한 이자 수입은 고스란히 은행가의 지갑으로 들어갔으며, 이자는 국민의 세금으로 부담해야 했다.

   과연 영국 정부는 그때부터 다시는 채무를 갚지 않았다. 2005년 말 현재, 영국 정부의 채무는 1694년의 120만 파운드에서 5,259억 파운드로 늘어나 영국 GDP의 42.8%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토록 거액의 돈을 위해서라면, 국왕이나 대통령이라도 민영화한 국립은행의 길을 막는 사람은 제거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p.60

   금속화폐의 장기적 부족 현상과 대체 실물화폐 이용의 불편이 계속되자 현지 정부는 전통적 사고방식에서 탈피해 참신한 발상을 내놓았다. 즉 정부가 지폐를 발행해 통일된 표준 법정화폐로 삼는다는 아이디어였다. 이 지폐는 유럽에서 유통되는 은행권과 달리 어떤 은행에서도 담보로 실물을 잡지 않는 완전한 정부 신용화폐였다. 한 사회의 일원이라면 누구나 정부에 세금을 내야 한다. 정부가 지폐로 세금을 받아주기만 하면, 그 지폐는 시장에서 유통될 수 있는 기본 요소를 갖추게 되는 것이다.

   새 화폐는 과연 사회경제의 빠른 발전을 크게 촉진했으며, 상품 무역은 점점 번성해갔다.

   이와 동시에 영국의 애덤 스미스도 북아메리카 식민지 정부가 시도하는 새로운 화폐를 주시했다. 그는 이 지폐가 상업에 큰 자극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금속화폐가 부족한 북아메리카 지역에서 신용에 기반을 둔 거래를 할 경우 상인들이 매월 또는 매년 정기적으로 서로의 신용 상태를 결산할 수 있으므로 거래에 따르는 불편을 줄일 수 있었다. 관리하기도 쉬운 지폐 시스템은 아무 불편도 가져오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는 더 많은 장점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담보가 없는 화폐는 은행가들의 천적이었다. 담보로 잡을 채무가 없으면, 정부는 당시 최고의 희소가치를 발휘하던 금속화폐를 은행에서 대출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은행가의 가장 위력적인 수단은 힘을 잃어버린다.

   벤저민 프랭클린이 1763년 영국을 방문했을 때, 잉글랜드은행의 책임자는 그에게 신대륙 식민지가 어떻게 그토록 발달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 그는 그 원인을 이렇게 대답했다. "그거야 간단하죠. 식민지에서 우리는 '식민권'이라는 화폐를 스스로 발행했습니다. 상업과 공업의 필요에 따라 동등한 비율의 화폐를 발행하죠. 그러면 상품이 생산자에서 소비자의 손까지 쉽게 이동됩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 자신의 지폐를 만들고 구매력까지 보장하니까, 우리 정부는 누구에게도 이자를 지급할 필요가 없어졌답니다."

   새로운 지폐의 출현으로 미 식민지는 필연적으로 잉글랜드은행의 통제에서 벗어나게 되어 있었다.


p.63

국제 금융재벌의 첫 번째 전쟁

: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1791~1811년)


우리는 적의 군대보다 금융기관이 우리의 자유에 가하는 위협이 더 심각하다는 사실을 확신한다. 그들은 이미 금전 귀족 계급을 창조했으며, 정부를 무시하고 있다. 화폐 발행권을 은행의 손에서 되찾아야 한다. 그것은 당연히 주인인 국민에게 속해야 한다.

-토메스 제퍼슨, 미국 3대 대통령, 1802년


   알렉산더 해밀턴(Alexander Hamilton)은 로스차일드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중량급 인물이다. 영국령 서인도제도에서 태어난 그는 나이와 본명, 출생지를 숨기고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명문가의 딸과 결혼했다.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영수증은 해밀턴이 로스차일드 가의 자금 지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1789년 해밀턴은 워싱턴 대통령에 의해 미국 초대 재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미국 중앙은행 제도의 주요 추진자로 활약했다. 독립전쟁 후 심각한 경제난과 채무의 위기에 직면하자, 1790년 그는 잉글랜드은행과 유사한 민영 중앙은행을 세워서 화폐 발행 직무를 철저히 이행할 것을 의회에 강력히 제안했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다.

   중앙은행은 개인이 소유하며, 본부는 필라델피아에 두고, 각 지역에 지점을 설립한다. 정부의 화폐와 세금 징수는 반드시 이 은행 시스템으로 관리해야 한다. 이 은행은 국가화폐를 발행해 경제 발전의 요구를 충족시키며, 미국 정부에 대출을 해주고 이자를 받는다. 이 은행의 총 자본은 1,000만 달러이며, 개인이 80%의 주식을 보유하고 나머지 20%는 미국 정부가 보유한다. 25명으로 구성된 이사회 중 20명은 주주 중에서 추천하며, 5명은 정부가 임명한다.

   해밀턴은 엘리트 계층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모든 사회는 극소수와 대다수로 무리를 나눈다. 전자는 출신이 좋고 부유한 계층이며, 후자는 프롤레타리아 계층이다. 대중은 휩쓸리고 쉽게 변화한다. 그들은 정확한 판단과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반면 제퍼슨은 대중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해밀턴의 관점에 대한 제퍼슨의 반응은 이러했다. "우리가 믿는 진리는 이것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평등하며, 만물의 창조주는 우리에게 박탈될 수 없는 권리를 부여했다. 그중에는 생존권 및 자유권과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포함된다."

   두 사람은 민영 중앙은행 제도를 둘러싸고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해밀턴은 이렇게 주장했다. "부유한 사람의 개인적 이익과 재산 신용을 모으지 않는 사회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국가의 채무는 지나치게 많지만 않으면 국가의 복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제퍼슨은 이렇게 반박했다. "일개 민간 중앙은행이 국민의 공공 화폐를 발행한다면, 이는 적의 군대보다 국민의 자유를 더 심각하게 위협하는 것이다." "우리는 통치자가 국민에게 영구적으로 채무를 떠넘기는 것을 절대로 용인할 수 없다."

   해밀턴의 방안이 의회 토론에 상정되자마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결국 상원은 약소한 차이로 이 제안을 통과시켰으며, 하원에서도 39대20으로 통과되었다. 이때 심각한 채무의 위기에 짓눌려 있던 워싱턴 대통령은 더 큰 시름에 잠겼다. 그는 당시 국무장관 제퍼슨과 제임스 매디슨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들은 이 제안이 헌법을 명백히 위반한다고 주장했다. 헌법에는 화폐 발행을 의회에 위임할 수 있다고 되어 있으나, 의회가 화폐 발행권을 의회에 위임할 수 있다는 조항은 없었다. 이에 크게 고무된 워싱턴은 법안에 대한 부결권을 행사하기로 결정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해밀턴이 즉시 워싱턴을 찾아가 로비를 시작했다. 재무장관 해밀턴의 말은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만약 중앙은행을 설립해 외국 자금을 주식으로 유입하지 않을 경우, 정부는 얼마 지탱하지 못하고 무너진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발등에 떨어진 위기 해결이 장기적 앞날에 대한 걱정보다 우선되었다. 워싱턴 대통령은 1791년 2월 25일 마침내 미국의 첫 번째 중앙은행을 설립하는 데 서명했다. 유효 기간은 20년이었다.

   국제 금융재벌들은 드디어 중요한 첫 승리를 거두었다. 1811년 외국 자본은 1,000만 주 가운데 700만 주를 차지했다. 잉글랜드은행과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미국 중앙은행(The First Bank of the United States)의 주요 주주가 되었다.

   해밀턴은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 중앙은행은 뉴욕 맨해튼은행과 함께 월스트리트에서 제일가는 은행이 되었다. 맨해튼 은행은 1955년 록펠러의 체이스은행과 합병해서 체이스맨해튼은행이 되었다.

   돈에 목마른 정부와 정부의 채무를 갈망하는 민영 중앙은행이 손발을 맞추게 된 것이다. 중앙은행이 설립된 1791년부터 1796년까지 불과 5년 동안 미국 정부의 채무는 무려 820만 달러로 증가했다.

   제퍼슨은 1798년 격노해서 말했다. "헌법은 수정해서라도 연방정부가 돈을 빌릴 수 있는 권리를 빼앗고 싶다."

   제퍼슨은 미국의 3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재선되어 연임하는 동안 (1801~1809년) 중앙은행을 폐지하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썼다. 1811년에 은행의 유효 기간이 만료되자 쌍방의 각축전은 극에 달했다. 하원은 한 표 차인 65대64로 은행의 화폐 발행권 연장안을 부결했다. 한편 상원은 17대17로 같은 표가 나왔다. 이때 부통령 조지 클린턴이 경색 국면을 타개할 부결표를 던짐으로써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은 1811년 3월 3일자로 문을 닫았다.

   런던에서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네이선 로스차일드는 그 소식에 격노했다. 그는 이렇게 위협적인 말을 했다. "은행의 발행권을 연장하지 않으면 미국은 심각한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래도 미국 정부 쪽에서 아무 반응이 없자, 네이선은 다시 말했다. "방자한 미국인을 확실히 손봐서 식민지 시대로 돌아가게 할 것이다."

   그 결과 몇 달이 지나지 않아 영국과 미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1812년부터 3년이나 지속되었다. 로스차일드의 목적은 확실했다. 미국 정부를 빚더미에 앉혀 결국 무릎 꿇고 투항하게 함으로써 자신들이 장악한 중앙은행을 계속 운영하는 것이었다. 과연 미국 정부의 채무는 4,500만 달러에서 1억 2,700만 달러로 증가했으며, 마침내 미국 정부는 1815년 굴복하고 말았다. 미국의 4대 대통령이 된 제임스 매디슨은 1815년 12월 5일 두 번째 중앙은행 설립을 승인했고, 1816년 두 번째 은행(The Bank of the United Strates)이 탄생했다.



p.77

국제은행가들이 다시 손을 쓰다

: 1857년 경제공황


두 번째 중앙은행이 1836년에 폐쇄되자, 국제 금융재벌들은 활발하게 손을 써서 미국에서 유통하는 금속화폐의 돈줄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이 조치로 미국은 5년 동안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어야 했다. 1841년에 국제 은행재벌의 대리인이 두 차례나 민영 중앙은행 제도의 부활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양측의 관계는 경색되었으며, 미국의 통화 긴축 상태는 1848년에 가서야 조금씩 완화되기 시작했다.

   물론 상황이 호전된 이유는 국제 금융재벌들이 자선을 베풀어서가 아니다. 1848년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거대한 금광 '샌프란시스코'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중략)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골드러시'는 유럽 금융재벌들에 의한 금 공급량의 절대적 통제 구도를 단번에 뒤엎었다. 화폐 공급량에 발목이 잡혀 있던 미국 정부는 비로소 긴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양질의 화폐가 대량 공급되자 시장의 자신감도 되살아났다. 은행은 다시 신용대출을 대폭 확대했으며, 미국의 중요한 공업, 광산, 교통,기계 등 국가 자산에 가장 중요한 인프라도 호시절을 구가하던 이때 구축되었다.

   금융 억제 수단의 약발이 먹히지 않자 국제 은행재벌들은 일찌감치 새로운 대책을 준비했다. 그것은 금융을 통제하고 정치적으로는 분화하는 조치였다.

   위기가 끝나기 전에 그들은 미국의 우량 자산을 저렴하게 흡수하는 데 착수했다. 1853년에 이르러 미국 경제가 승승장구하고 있을 때 외국 자본, 특히 영국 자본은 이미 미국 연방 국채의 46%, 각 주 채권의 58%, 미국 철도 채권의 26%를 잠식하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미국 경제에 다시 올가미를 씌웠다. 일단 중앙은행 제도가 재출범하는 날이면 미국 경제도 유럽의 다른 나라처럼 은행재벌의 손에 좌지우지될 판이었다.  

   국제 금융재벌들은 다시 자신들의 특기를 발휘했다. 먼저 신용대출을 남발하고 거품을 조성하는 방법으로 국민과 기업들로 하여금 기를 쓰고 재산을 불리도록 유도했다. 그런 다음 갑자기 대출의 고삐를 죄어 많은 기업과 국민을 파산지경에 몰아넣으면 은행가들은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수확의 계절이 차츰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국제 금융재벌들과 그들의 미국 측 대리인은 신용대출을 회수했다. 이것이 1857년 경제공황의 시작이다. 그런데 은행재벌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 효과는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의 국력이 20년 전과는 달리 훨씬 강해졌기 때문이다. 결국 1857년 경제공황은 미국에 큰 타격을 주지 못한 채 1년 만에 경제가 원기를 회복하면서 끝이 났다.

   점차 미국의 실력이 강해지고 금융 통제가 어려워지자, 내전을 책동하고 미국을 분열시키는 것이 국제 금융재벌들에게는 시급한 과제로 떠올랐다. (미국 남북전쟁의 원인 : 유럽의 국제 금융 세력)


p.80

   사실 19세기 중엽까지만 해도 미국의 노예 제도에 관한 논쟁에서는 경제적 이익이 최우선이고 도덕성은 차후 문제였다. 당시 남부의 경제를 떠받치는 두 기둥은 목화산업과 노예 제도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할 경우 농장주는 백인과 똑같이 높은 임금을 과거의 노예들에게 지급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산업 전체가 적자를 면치 못할 테고, 결국 사회경제 구조는 붕괴하고 말 것이다.

   전쟁이 정치적 투쟁의 연속이라면, 정치적 이익이 충돌하는 이면에는 반드시 경제적 이익을 둘렀단 힘겨루기가 있다. 이러한 경제적 힘겨루기는 표면적으로 남부와 북부의 경제 이익의 차이로 나타났으나, 그 알맹이는 국제 금융 세력이 신생 미합중국을 대상으로 벌이는 '분열과 정복' 전략이었다.

   당시 로스차일드 가문과 친분이 두터웠던 독일 수상 비스마르크의 말은 이 사실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미국을 남부와 북부 두 약세 연방으로 분열시키는 것은 유럽의 금융 세력이 남북전쟁이 반발하기 전부터 오랜 시간 치밀하게 준비해온 시나리오였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런던, 파리, 프랑크푸르트를 주축으로 하는 금융재벌들이 미국 남북전쟁의 배후 세력이었다.

   국제 금융재벌은 미국의 내전을 촉발하기 위해 오랜 시간에 걸쳐 용의주도한 전략을 세웠다. 미국 독립전쟁이 끝난 후 영국의 방직산업과 미국 남부의 지주 계급은 점점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유럽의 금융재벌은 이들 세력을 이용해 남북 충돌을 일으키기 위한 인맥을 은밀히 형성했다. 당시 남부 곳곳에는 영국 금융가의 대리인들로 넘쳤다. 이들은 현지의 정치 세력과 손잡고 연방에서 이탈할 계략을 짜고, 각종 뉴스를 뿌리는 등 언론 플레이에 고심했다. 이들은 노예 제도와 관련한 남북 양측의 경제적 이익을 교묘하게 이용해 당시 별 관심을 끌지 못하던 노예 제도를 화제의 쟁점으로 부각시켜 결국 남북의 첨예한 갈등으로 비화하는 도화선이 되도록 했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치밀하게 끝낸 국제 금융재벌은 이제나저제나 전쟁이 일어나기만 기다렸다. 전쟁만 일어나면 막대한 재산이 국제 금융재벌에 흘러 들어오게 되어 있었다. 전쟁을 책동하는 과정에서 이들이 상투적으로 쓰는 수법은 전쟁 당사자 양쪽을 동시에 공략해 각각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어느 쪽이 승리하든 상관없이 거액의 전쟁 경비를 지출하는 정부의 채권은 어김없이 금융재벌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금융재벌에게 전쟁은 산해진미로 가득한 밥상이었다.


 p.87

링컨의 러시아 동맹자

유럽의 국왕들은 1861년 남북전쟁 발발을 전후해 대규모의 군사를 미국에 파병함으로써 미국의 분열을 획책하고 있었다. 이때 링컨은 유럽 군주들의 숙적인 러시아를 떠올리고, 즉시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에게 특사를 파견해 원조를 청했다. 알렉산더 2세는 링컨의 편지를 받아보고 바로 개봉하지 않은 채 손으로 만지작거리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 편지를 열어서 내용을 보기 전에, 먼저 요구를 들어주겠소."

   러시아의 알렉산더 2세가 미국의 남북전쟁에 군사적으로 개입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같은 처지의 미국이 당하면 자신들에게도 화가 미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알렉산더 2세 시기에 유럽을 휩쓴 국제 금융 세력은 이미 크렘린까지 그 손을 뻗치고 있었다. 은행가들은 유럽의 '앞서가는' 금융 경험을 받아들여 민영 중앙은행을 세우라고 러시아에 요구했지만, 그 배후의 음모를 이미 간파한 알렉산더 2세는 이 요구를 즉각 거절했다. 이런 상황에서 국제 금융 세력을 반대하는 링컨이 위험에 빠진 것을 보고 손을 내밀어 돕지 않는다면,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는 것이 불을 보듯 훤했다.

   두 번째, 남북전쟁이 발발하기 전인 1861년 3월 3일 농노해방법을 선포한 알렉산더 2세는 노예제 폐지에 대해 링컨과 같은 입장이었다. 또한 1856년에 막 끝난 크림전쟁에서 러시아는 영국과 프랑스에 패배해 설욕의 기회만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리비스키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 함대는 1863년 9월 24일 선전포고도 없이 뉴욕 항에 입항했다. 포포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 태평양 함대는 10월 12일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러시아의 행동에 대해 키딩 웨일즈는 이렇게 평했다. "그들은 남부가 유리하고 북부가 가장 저조한 시기에 도착했다. 이들의 출현으로 영국과 프랑스가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링컨은 국면 전환의 기회를 포착했다."

   남북전쟁이 끝난 후 미국 정부는 720만 달러에 달하는 러시아 함대의 출동 경비를 지급하는 데 우여곡절을 겪었다. 헌법에는 대통령이 외국 정부의 전쟁 비용을 지급한다는 조항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앤드루 존슨 대통령과 러시아는 러시아 알래스카의 토지를 구입해 전쟁 비용을 지급한다고 협의했다. 이 일을 두고 사람들은 '슈어드의 바보짓(Seward's folly)'이라고 불렀다. 슈어드는 당시 미국 국무장관의 이름인데, 국민들은 720만 달러나 주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불모지를 사들였다며 미국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링컨과 같은 이유로 알렉산더 2세도 1867년에 피격을 당했으나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 후 1881년 3월 1일에 알렉산더 2세는 마침내 자객의 손에 세상을 떠났다.


링컨 암살은 진범은 누구인가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링컨은 의회에서 권한을 부여받고 국민에게 국채를 팔아 자금을 조달했다. 이렇게 해서 정부와 국가는 외국 금융재벌의 올가미에서 빠져나왔다. 국제 금융재벌들이 자신들의 손아귀에서 미국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을 때 링컨의 죽음도 멀지 않았던 것이다.


   흑인 노예를 해방하고 남부를 통일한 링컨은 남부 정부가 전쟁 중 진 빚은 모두 무효로 한다고 선포했다. 전쟁 동안 남부에 줄곧 거액의 금융 지원을 해온 국제은행은 참담한 손실을 보았다. 국제 금융재벌들은 링컨에 보복하고, 나아가 링컨의 화폐 정책을 뒤집기 위해 링컨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을 모아 치밀하게 암살을 준비했다. 열성분자 몇 명만 보내면 링컨 하나쯤 암살하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p.116

   문제는 미국에 민영 중앙은행을 줄곧 반대하는 정치 세력과 민간 세력이 상당하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공업계와 중소업주들 사이에서 뉴욕 금융계 인사들의 평판은 아주 형편없었다. 의원들은 은행가들의 민영 중앙은행 설립 제안을 몹쓸 전염병이라도 되는 양 피해 다녔다. 이 같은 정치 분위기에서 은행가에게 유리한 중앙은행 법안을 통과시키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이나 어려웠다.

   이렇게 불리한 정세를 뒤엎기 위한 거대한 금융위기는 다음과 같은 배경에서 구상되었다.

   먼저 신문과 언론에 새로운 금융 개념을 홍보하는 글을 대량으로 게재했다. 1907년 1월 6일에는 '우리 은행 시스템의 결점과 과제'라는 제목으로 폴의 글이 발표되었다. 이때부터 폴은 미국 중앙은행 제도 설립을 제창하는 선봉에 섰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야곱 쉬프는 뉴욕 상공회의소에 "신용 자원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는 중앙은행을 세우지 않으면 장차 심각한 금융위기를 겪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1837년, 1857년, 1873년, 1884년, 1893년과 마찬가지로 금융재벌들은 경기가 과열되는 과정에서 심각한 거품 현상을 발견했다. 이렇나 현상 또한 시중에 돈을 많이 풀어서 생기는 필연적 결과였다. 이 모든 과정은 금융재벌이 어항 속에 물고기를 키우는 것과 같았다. 금융재벌들은 마치 어항에 물을 붓듯 시중에 돈을 풀어 경제주체에게 대량으로 화폐를 주입했다. 돈을 풀면 각계각층에서 더 많은 돈을 벌 욕심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해서 부를 창출하는데, 어항 속의 물고기가 각종 양분을 열심히 흡수해 점점 살이 오르는 것과 같다. 금융재벌들이 수확의 시기가 왔음을 알고 어항의 물을 빼면, 물고기들은 잡혀 먹히는 순간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항의 물을 빼고 고기들을 처분하는 시기는 몇 개의 대형 은행들만 알고 있었다. 한 나라가 민영 중앙은행 제도를 설립한 이후로는 은행재벌들이 물을 대고 빼기가 더 수월해지므로 수확도 한층 많아질 것이다. 경제의 발전과 쇠퇴, 재산의 축적과 증발은 모두 은행재벌들이 진행하는 '과학적 사육'이 가져온 필연적 결과다.

   모건과 그의 배후에 있는 국제 금융재벌들은 이번 금융위기로 예측되는 성과를 정확하게 계산했다. 첫째, 미국에 중앙은행이 없는 사회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사실'로 증명할 것이다. 둘째, 소규모의 경쟁 금융기업을 도산시켜 합병한다. 특히 자산신탁회사, 즉 투신사는 은행가들의 눈엣가시였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오랫동안 군침을 흘려온 중요 기업을 손아귀에 넣는 것이다.


p.148

   전쟁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규모가 큰 전쟁일수록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누가 누구의 돈을 쓰는가 하는 것이다. 화폐 발행 권한이 없는 유럽과 미국 정부는 은행가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다. 전쟁은 물자의 소모 속도를 가속화한다. 또한 전쟁 당사국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버텨내야 한다. 전쟁으로 모든 대가를 치른 정부는 조건을 따질 틈도 없이 은행재벌에 융자를 신청한다. 그래서 전쟁은 은행재벌이 가장 좋아하는 호재다. 그들은 전쟁을 책동하고 부추기며, 전쟁에 자금을 지원한다. 국제 금융재벌들의 호화로운 건물은 무수한 주검과 폐허 위에 지어진 것이다.

   국제 금융재벌이 큰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의 하나로 경제 불황의 조작이 있다. 그들은 먼저 신용대출을 확대함으로써 경제적 거품을 조장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투기에 집중하게 한다. 그런 다음 통화량을 갑자기 줄여 경제 불황과 재산 가치의 폭락을 유도한다. 그리고 우량 자산의 가격이 정상가의 10분의 1, 심지어 100분의 1까지 폭락하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나서서 말도 안 되는 싼 가격에 사들이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국제 금융재벌들끼리 통하는 전문 용어로 '양털 깎기(fleecing of the flock)'라고 한다. 사유 중앙은행이 설립된 이후 양털 깎기는 규모 면에서 사상 최고에 달했다. 가장 최근의 양털 깎기 행위는 1997년에 아시아의 '네 마리 작은 용'을 상대로 일어났다.


p.186

   케인스는 황금을 '야만적 유산'이라고 표현했다. 케인스가 황금을 죄악시한 동기는 무엇일까? 인플레이션을 극구 반대하던 케인스가 어떻게 해서 황금의 천적으로 변했을까?

   앨런 그린스펀은 40세 때까지만 해도 금본위제의 변함없는 옹호론자였다. 그런 그가 연방준비은행 총재에 취임한 후부터 황금 문제에 대해 딴소리를 하기 시작했다. 2002년까지 여전히 '황금은 모든 화폐의 최종적 지급 수단'이라고 인정은 했지만, 1990년대 서방 중앙은행 재벌들이 연합해서 황금 가격을 인하한 음모를 '방관'했다.

   국제 금융재벌들과 그들의 '어용' 이론가들은 왜 그토록 황금을 혐오했을까? 무슨 이유로 케인스의 염가화폐 이론은 그토록 환영을 받았을까?

   국제 금융재벌들과 그들의 '어용' 이론가들은 왜 그토록 황금을 혐오했을까? 무슨 이유로 케인스의 염가화폐 이론은 그토록 환영을 받았을까?

   국제 금융재벌들은 황금이 결코 보통 귀금속이 아니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 본질적으로 황금은 유일하고, 고도로 민감하며, 역사적으로 계승되는 '정치 금속'이다. 황금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세계적으로 금융위기가 일어난다. 정상적인 사회 상황에서 금본위제도를 폐지하면 틀림없이 심각한 사회불안이 일어나고, 심지어 폭력 혁명을 불러오기도 한다. 국민은 극단적이고 특수한 상황에서만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천부적 권리를 잠시 포기하는데, 은행가들이 심각한 위기와 불경기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기와 경기 쇠퇴의 위협 아래 국민은 가장 쉽게 타협하고 단결력이 쉽게 무너지며, 여론도 쉽게 오도할 수 있다. 사회의 주의력은 쉽게 분산되고, 은행가의 권모술수도 가장 쉽게 실현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도 위기와 금융의 쇠퇴는 은행가들에게 정부와 국민을 상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되풀이되어 사용되고 있다.

   1929년 이래의 심각한 경제위기는 국제 금융재벌들에게 정상 상태에서는 어려운 '금본위제 폐지'라는 대업을 완수할 절호의 기회였다. 이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으로 향하는 금융의 길을 미리부터 닦아놓았다.


p.192

1932년의 대통령 선거

미국 대통령 선거가 불경기 속에서 그 막을 올렸다. 실업자 1,300만 명과 25%라는 실업률은 현직 대통령 허버트 후버에게 큰 압박이었다. 다른 민주당 후보와 경쟁하는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28년 이후의 경제 정책에 맹공을 퍼부으며, 후버 대통령과 월가 은행가들의 세력이 결탁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후버 대통령은 이에 침묵으로 일관했는데, 자신의 비망록에 진심을 털어놓았다.


루스벨트가 1929년의 투기 열풍에 책임을 지라는 성명을 냈을 때 나는 어떻게 반박할지 고심했다. 연방준비은행이 1925~1928년 유럽 세력의 영향 아래 고의로 인풀레이션을 조장한 사실을 폭로해야 하는지 말이다. 당시 나는 이 정책에 반대하는 쪽이었다.


   후버 대통령이 억울한 심정을 토로한 것도 이해가 간다. 그는 대통령이라는 귀한 몸이지만 경제 정책과 화폐 정책에는 별로 영향력이 없었다. 정부에 화폐 발행권이 없었으므로 민간이 보유한 뉴욕 연방준비은행이 협조해주지 않으면 어떤 정책이라도 탁상공론에 그치고 말았다.

   후버 대통령이 월가로부터 외면당한 이유는 독일 배상 문제에서 은행가들의 방침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1929년 모건이 계획한 '영플랜'은 독일의 채무 부담 가중을 대가로 하는 것이었다. 월가에서 독일 채권을 발행하는 방식으로 독일에 전쟁 배상금을 모집해주고 자신들이 채권 발행을 맡는 과정에서 큰돈을 챙기자는 의도였다.

   1931년 5월, 이 계획이 실행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금융위기가 찾아왔다. 로스차일드은행과 잉글랜드은행의 구제 행동으로는 위기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 모건 등 월가 은행재벌들은 이제 막 출범한 영플랜을 중도에서 그만두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모건 사의 라몬트 사장은 후버 대통령에게 전화를 했고, 미국 정부가 독일 정부의 전쟁 채무 상환을 잠시 중지시키고 독일 금융위기가 잠잠해지면 다시 상환을 재개하도록 요구했다. 라몬트는 만일 유럽 금융 시스템이 붕괴하면 미국의 경제위기도 더 심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후버 대통령은 프랑스 정부에 독일 전쟁 배상금 관련의 문제를 처리할 때는 먼저 프랑스 정부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겠노라는 약속을 했다. 정치가로서 자신의 약속을 뒤집을 수 없었던 후버는 라몬트의 말에 단호하게 대답했다. "그 일이라면 고려를 해보겠소. 그러나 정치적 각도에서 고려할 때 이번 일은 현실에 맞지 않소. 선생은 뉴욕에 있기에 한 나라의 입장에서 정부 간 채무에 대한 감정이 어떤 건지 이해하지 못할 거요."

   라몬트가 대답했다. "며칠 동안 대통령도 들으셨겠지만, 1932년의 공화당대회에서 대통령의 후계자를 세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 계획대로만 해준다면 그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에는 라몬트가 당근 작적으로 나갔다. 일이 잘될 경우 모든 공을 완전히 대통령에게 돌리겠다는 말이었다.

   1932년 7월, 라몬트는 백악관으로 사람을 보내 독일의 전쟁 배상금 문제 연기를 다시 고려하라고 독촉했다. 이번에는 후버도 참지 못하고 분노를 토해냈다. "라몬트는 일을 망치고 있네. 국민이 반대하는 이런 계획(독일, 영국, 프랑스가 미국에 대한 채무를 사면해주거나 연기하는 일)은 국민의 이익을 해치는 거라네. 라몬트는 은행가들에 대한 전국적인 분노의 정서를 알지 못하는군. 그들(은행가)은 우리(정치가)도 공범이 되어달라고 요구하고 있네. 어쩌면 은행가들이 이미 독일인과 보상 문제에 협의했는지도 모르지. 그것도 가장 치사한 방식으로 말일세." 결국 후버는 월가의 요구를 거절했고 프랑스는 채무를 연체하는 상황이 되었다.


p.200

금본위제의 폐지 : 은행가들이

루스벨트에게 역사적 사명을 부여하다


 금본위제의 제약 아래 유럽 각국은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미 심각한 채무를 졌다. 연방준비은행이 미국의 금융 자원을 집중적으로 조절하지 않았다면, 전쟁은 그저 국지전의 규모에 그쳤을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국제 금융재벌들은 큰돈을 벌 기회라며 흡족해했다. 그러나 미연방준비은행이 생겼다 해도 금본위제의 엄격한 제약으로 금융 자원은 한계를 드러냈고, 또 하나의 세계적 전쟁을 지탱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구미 각국 은행가들에게 금본위제의 폐지는 시급히 해결해야 할 발등의 불이었다.

   금은 인류 사회의 반만년 역사에서 세계 각국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화폐의 최종 형식으로 변했다. 황금과 재산에 대한 사람들의 필연적 관계는 생활의 자연스러운 논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정부의 정책과 경제 형세를 옳지 않게 보는 순간 대중은 수중의 지폐를 금화로 바꾸고 좋지 않은 형세가 호전되기를 기다렸다. 지폐를 자유롭게 황금으로 바꾼다는 것은 실질적으로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경제 자유의 기초가 되었다. 모든 민주나 기타 형식의 자유는 이런 기초 위에서 비로소 진정한 의의를 지니게 된다. 정부가 지폐를 황금으로 교환하는 천부적 권리를 강제로 박탈할 때, 국민의 가장 기본적인 자유도 박탈당한다. (중략)

   1812년, 미국 최초의 중앙은행이 폐지된 사건은 로스차일드의 보복을 불러왔다. 그 결과 1812년의 영미전쟁이 일어났으며, 미국 정부의 굴복으로 전쟁이 끝나면서 미국의 두 번째 은행이 탄생했다.

   1837년, 잭슨 대통령이 미국의 두 번째 중앙은행을 폐지하자 은행가들은 즉시 런던에서 미국 채권을 투매하고 각종 대출을 회수했다. 그 결과로 미국 경제는 심각한 불경기에 빠져들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1848년까지 지속되었다.

   1857년, 1870년, 1907년, 국제 금융재벌들은 미국 정부로 하여금 민영 중앙은행을 부활하도록 압박을 가하기 위해 다시 경제 불황을 만들어냈다. 결국 민영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은행의 탄생으로 미국의 화폐 발행을 전면적으로 장악했다.

   1929년 대공황의 궁극적 목적은 금본위제도를 폐지하고 염가화폐 정책을 실시함으로써 금융업계에 제2차 세계대전을 향한 탄탄한 대로를 깔아주는 것이었다.

   1933년 3월 4일,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미국 32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루스벨트는 취임하자마자 월가와의 대립을 가치로 내걸었다. 그는 취임 당일 전국 은행들에 3월 6일부터 영업을 중지하라고 선포하고, 장부에 대한 감사가 끝난 후에 영업을 재개하도록 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전국의 은행이 처음으로 문을 닫는 조치로, 미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세계 최대의 경제주체인 미국에서 은행 영업이 거의 완전히 중단된 초유의 사태는 적어도 열흘간 지속되었다.

   곧이어 루스벨트는 후버 시대에 이미 시작된 월가에 대한 조사 작업도 늦추지 않고 공격의 방향을 모건 가 쪽으로 돌렸다. 일련의 청문회에서 잭 모건과 회사 대표는 미국의 전 국민이 지켜보는 가운데 크게 체면을 구겼다.

   루스벨트는 월가 은행가들에게 가하는 공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잡담이 능력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