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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Feb 06. 2019

철학과 굴뚝청소부 - 근대철학의 경계들

#103 이진경 - [철학과 굴뚝청소부]

p.18

   결국 철학은 앞서 있던 것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그런데 넘어서는 것에도, 무엇을 어떤 수준에서 넘어서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최소한 세 가지 수준의 '넘어서기'를 구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첫째, 당시에 지배적인 어떤 사상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이는 자기 앞의 지배적인 철학과 자신의 철학 간의 차이를 정립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앞선 사상을 넘어선다고 할 때 최소한의 필요조건인 셈입니다. 기존의 지배적인 사상 안에 머무는 게 아니라, 혹은 기존의 지배적인 사상 안에서 그것을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새로운 사상을 형성해내는 것이라면 최소한 자기의 앞선 시대를 지배하던 사상을 넘어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칸트의 사상이 지배적이던 시대에 새로운 사고영역을 열었다고 하기는 힘들겠지요.

   물론 칸트의 사상을 넘어섰다고 해서 그 사상이 칸트 것보다 나은 것이라거나 발전된 것이라고 평가하기는 곤란합니다. 여기서 '넘어선다'는 말이 어떤 '발전'이나 '진화'를 뜻하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합시다. 예를 들어 헤겔의 사상이 칸트를 넘어섰다고 해서(이건 사실이지요) 반드시 칸트 것보다 발전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측면에서 발전이란 평가도 가능하겠지만, 다른 측면에선 정반대의 평가도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과학에서와는 달라 철학에서는 아직도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고대철학자가 '살아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새로운 사상은 하나의 흐름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철학에는 몇몇 철학자나 사상가들의 생각을 묶어주는 '흐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대륙의 '이성주의'니 영국의 '경험주의'니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생의 철학'이니 '실존주의'니 '구조주의'니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집니다. 새로운 사상은 때론 이같은 의미를 갖는 하나의 '흐름'을 넘어섭니다. 즉 어떤 흐름을 특징짓는 전반적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것이지요. (중략)

   이런 '넘어서기' 역시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고 경계선을 만들어 내는 것이지만 발전이나 진화, 진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과학과는 달리 얼마든지 역전 가능하고, 얼마든지 반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하나의 시대를 지배하는 특정한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이성주의니 경험주의니 하는 것들은 모두 다 '근대철학'으로 묶입니다. 이처럼 개개의 사상뿐만 아니라 '흐름'들을 하나로 묶는 사고방식이 있을 수 있는 것이고, 철학이 무엇을 넘어선다고 할 때 가장 넓은 차원에선 이런 시대적 사고방식을 넘어서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가 중세철학을 넘어서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연 사상을 세웠다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이런 의미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p.20

   그렇지만 경계를 확인하고 그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철학자의 사상이나 철학적 흐름에 깔려 있는 사고방식 등을 파악할 개념적 도구가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 저는 문제설정이란 개념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일단 생소한 말일테니 예를 들어 설명해 봅시다. 집 대문 앞에 아무 양해도 구하지 않은 채 며칠 동안 계속 주차해 놓은 자동차 때문에 불편을 겪다가 화가 나서 그 얄미운 자동차의 바퀴에 펑크를 내버렸다고 합시다. 그런데 바로 그때 마침 차 주인이 그걸 보고 달려왔습니다. 제게 당연히 항의하겠죠.

   "아니, 차 좀 잠시 주차시켰다고 이렇게 펑크를 낼 수 가 있소? 이건 명백히 불법행위요. 책이밎고 배상해 주시오."

   그러나 그 자동차로 인해 숱하게 불편을 겪은 저로선 그 말에 순순히 응할 리 없을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불법행위'라는 명목으로 고소하려 하겠지요. 그럼 저는 그 자동차 주인을 '불법행위'라는 명목으로 고소하려 하겠지요. 그럼 저는 그 자동차 주인을 '불법 주차'로 맞고소해야겠지요? 그럼 이제 "불법 주차한 자동차에 펑크낸 게 불법행위인가 아닌가"를 문제 삼게 될 것입니다. 자, 얘기는 이만 줄이고 다시 철학으로 돌아갑시다.

   여기서 문제가 어떻게 설정되었나를 봅시다. '불법 주차한 자동차에 펑크를 낸 행위가 불법인가 적법인가?' 그런데 이렇게 문제를 설정하면 그 대답 역시 그 문제를 설정하는 방식에 크게 좌우됩니다. 다시 말해 여기서는 제 행위가 법에 맞는가 아닌가만이 문제가 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봅시다. 자동차와 나, 자동차 주인과 나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는 그 밖에도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예컨대 그 사람은 왜 주차장이 아닌 남의 집 앞에 불편하게 주차해 두었나?─그건 주차장이 모자라기 때문이며, 근본적으로는 도시 교통정책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적 측면에서 접근한 거죠. 혹은 이럴 수도 있습니다. 왜 나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 자동차에 펑크를 냈나?─자동차 없는 것도 서러운데, 남의 차 때문에 하루종일 고생을 했으니 화가 나서 그랬다. 이는 심리적 측면에서 접근한 거죠.

   그러나 이런 대답은 "불법인가 적법인가"를 따지는 문제에선 결코 나올 수 없습니다 그 같은 문제에선, 불법 주차한 차에 손해를 입힌 게 불법인가 아닌가라는 법적 문제만이 대답이 될 수 없습니다. 결국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어떤 종류의 대답은 '대답'이 될 수 없게 되고, 아예 생각하기도 힘들게 됩니다. 대답뿐만이 아닙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도 문제를 설정하는 방식에 따라 크게 달라집니다. 사회적인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해결은 교통정책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불법이니 아니니 하는 건 이 경우에는 끼여들 여지가 없습니다. 심리적 측면에서 문제를 제기하면 그 해결 역시 심리적 차원에서만 가능합니다. 반변 법적인 차원에서 제기하면, 불법행위를 한 사람이 배상을 해주어야 해결이 됩니다. 이 경우 법 자체가 정당한지 아닌지는 결코 문제되지 않으며, 이렇게 문제설정을 하면 기존 법의 올바름은 당연시됩니다. 즉 법 자체를 다시 사고할 수 없는 문제설정인 셈이지요.

   이처럼 문제를 어떻게 설정하느냐에 따라 그 문제를 사고하고 처리하면 대답하는 방식은 전혀 달라집니다. 이런 이유에서 "문제가 제대로 제기되기만 하면 이미 반은 풀린 것입니다"라는 말도 하는 겁니다.


p.41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주체 즉 '나'라는 것이 신이 없어도 스스로 사고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나'라는 주체는 신이 없어도 내장되어 있는 본유관념 때문에 확실하게 사고할 수 있고,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그런 점에서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나'는 신으로부터 독립된 존재고, 신으로부터 독립된 '주체'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신으로부터의 독립 때문에 데카르트의 사고는 '중세에서 벗어나는 사고'라는 의미를 갖게 됩니다. 이럼으로써 철학은 신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합니다.

   따라서 '주체'라는 범주는 근대철학에서 가장 중심적이며 근본적인 범주입니다 '주체'없는 근대철학은 생각할 수 없습니다. 신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서는 독립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주체가 필요했던 것이고, 이 주체는 어떠한 이론적 명제도 이것에 근거해야만 가능하게 되는 출발점이며, 그러한 명제를 구성하는 조직자가 되는 것입니다.

   부연하자면, 여기서 말하는 '주체'는 확실한 지식에 이르기 위한 출발점을 뜻합니다. 그것은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사고의 기초며, 지식을 가능하게 하는 지식의 기초입니다. 즉 모든 지식과 사고의 기초요 출발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를 출발점으로 삼은, 이후의 근대철학을 '주체철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반드시 자기의 '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주체라는 말에는 언제나 '객체' 혹은 '대상'이라는 짝이 따라다닙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고하는 주체'라면, 이 주체가 사고하는 무언가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먹는 내(주체)가 있다면 먹히는 밥(대상, 객체)이 있어야 하듯이 말입니다.

   결국 근대철학의 출발점인 주체는 인간이 신으로부터 독립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피조물인 자연세계(대상)로부터 인간이 분리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이제 인간은 자연세계와는 본질적으로 다른(왜냐하면 전자는  주체고, 후자는 대상이요 객체니까요) 존재가 됩니다. 주체인 인간이 대상인 자연을 지배한다는 생각은 주체/대상의 이런 근대적인 불할에 따른 것입니다. 이럼으로써 다른 자연과 구별되는 특별한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이론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이 나중에는 인문과학으로 발전하게 되지요.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인간이 대상과 분리되고 주체가 대상으로부터 떨어졌을 때, (인식하는) 주체가 (인식되는) 대상과 일치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 벌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실제로 살아있는 벌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보증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로써 주체가 대상을 올바로 인식할 수 있는가라는 '인식론'의 문제가 대두됩니다.

   이건 매우 중요한 문젭니다. 만약 대상에 일치하는 지식, 즉 올바른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면, 이는 진리에 이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즉 주체가 진리에 이를 능력이 없다는 게 됩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세요. 아까 주체가 신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건 '나'라는 주체가 진리에 이를 능력('이성')이 있다는 생각 때문 아니었습니까? 그런데 막상 주체를 독립시켰더니 진리에 이를 능력이 없다는 게 되면 얼마나 우스운 꼴이 납니까? 결국 그건 독립할 능력이나 자격도 없으면서 신에게서 도망친 꼴이 되는 셈이지요. 따라서 데카르트로선, 그리고 이후의 근대철학으로선 진리를 인식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게 가장 중요하고 절실한 문제가 됩니다. '진리'야말로 '주체'에서 출발한 근대철학이 어떻게든 도달해야 할 '목표'였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라는 범주를 독립시키자마자 '진리'라는 범주가 중요하게 따라다니게 됩니다. 즉 (인식)대상과 (인식)주관의 일치라는 뜻에서 '진리'라는 범주가 '주체'라는 범주와 쌍둥이로 등장하게 됩니다.

   요약하면 주체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요, 진리는 그 목표점입니다. 이 두 개의 범주는 근대철학 전제의 기초와 방향을 특징짓는 가장 근본적인 범주입니다. 또한 이것은 근대철학의 모든 질문 자체가 그것에 매일 수밖에 없었고, 그에 대한 대답 역시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지반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주체와 진리라는 범주로써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을 특징지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근대철학의 경계는 이런 식으로 그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p.55

근대철학의 딜레마

지금까지 근대철학은 주체라는 범주를 신으로부터, 그리고 동시에 대상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성립했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분리와 동시에 발생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일치, 혹은 정신과 육체의 일치라는 문제가 그것입니다. 이처럼 대상에 일치하는 인식을 '진리'라고 했으며, 이 '진리'가 바로 근대철학이 도달해야 할 목표였음 또한 보았습니다.

   이것이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만들어지자마자 곧 딜레마(벗어날 수 없는 곤란)에 빠지게 됩니다. 즉 주체가 인식한 것이 대상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다시 말해 진리인지 아닌지를 어떻게 보증하느냐 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p.57

   위의 두 가지 이야기(두 명의 굴뚝 청소부 이야기)는 똑같은 딜레마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딜레마는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나누고, 양자가 일치하는 게 진리라고 한다면, 어떤 지식이나 인식이 진리인지 아닌지는 결코 확인할 수도 없고 보증할 수도 없다는 난점을 가리킵니다. 그게 일치하는지 아닌지 확인해 주는 제3다 ─예를 들면 신─가 없다면 근대철학으로선 이 딜레마를 벗어나는 게 불가능합니다. 주체가 신에게서 벗어남으로써 발생한 근대철학의 '원죄'인 셈입니다.

   이 딜레마는 근대 철학에 고유하게 나타납니다. 중세에서는 그러한 문제가 제기되지 않습니다.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가? 이것은 '창조론'이 설명해 줍니다. 또 무엇이 진리인가? 어떤 게 진리인가? 그것은 '계시론'이 보증해 줍니다.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것은 성서 혹은 계시진리를 따라 살아가면 되는 것이었고, 이를 전하는 교회와 성직자의 말에 따르면 충분했습니다. 이것이 곧 진리를 실천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데카르트의 '주체'가 '선악과'를 따먹은 겁니다. 신으로부터 독립한 거죠. 그렇다면 독립된 '나'라는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 새로이 대답해야 합니다. 이것이 '존재론'이라는 철학의 분과를 만들어냅니다. 또한 예전에는 신의 계시에 의해 보증되었던 주체와 객체의 일치가, 신으로부터 독립함과 동시에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게 됩니다. 이제 철학은 주체가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지, 인간의 인식 능력이 어디까지인지를 대답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인식론'이라는 분과가 성립하게 됩니다. 그리고 삶의 유일한 잣대였던 신의 계시 대신에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를 재는 잣대가 필요하게 됩니다. 이것이 '가치론' 혹은 '윤리학'('도덕론')입니다.

   이리하여 데카르트 이래 존재론, 인식론, 가치론이라는 세 가지의 근대철학의 분과가 성립하게 됩니다. 여기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인식론의 문제이고 진리의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신으로부터 독립해도 좋은 것인지, 그러한 능력이 인간에게 있는 것인지를 입증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즉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게 없다면 신에게서 독립하는 것은 너무도 무모한 짓이 될 게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근대철학에서 중심적인 문제는 대개 인식론적인 형태로 제기되며, 인식론이 가장 발전하게 됩니다. 

   신에게서 독립하려는 이 근대철학자들에겐 등대불 같은 하나의 희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갈릴레이에 의해 본격적으로 급진전되고 있었던 '과학혁명'이었습니다. 과학자들의 얘기를 통해 '세상은 이렇다'는 성경의 말씀은 사실과 다르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오히려 신의 말씀이 아니라, 실제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연구하는 게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신학 없는 철학, 신에게서 벗어난 주체(인간)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바로 이 과학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근대철학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과학주의'가 되었다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러운 것 같습니다. 철학자들은 모두 스스로 과학자가 되려고 했으며, 모든 지식은 과학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즉 근대철학은 과학이란 위성을 가지고 주체/진리란 범주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학주의가 근대철학의 딜레마를 해결해 주진 못합니다. 왜냐하면 과학이 도달해야 할 목표점이 진리라면, 어떤 지식이 과학인지 아닌지는 과학 자신이 확인하고 보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과학이란 지식 역시 주체/진리라는 범주가 야기한 근대철학의 딜레마에 빠져들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명한 것은 주체와 대상 사이에, 진리를 판단해 줄 어떤 절대적 존재로서 제3자가 없다면 양자의 일치(진리)를 보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제3자 역시 진리의 보증자가 되려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절대적 재판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데카르트는 결국 다시 신을 끌어들였던 것입니다. 나중에 보게 될 버클리나 헤겔도 다시 일종의 '신'을 끌어들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보면 근대철학이라고 하는 문제설정, 즉 주체와 대상을 나누고 양자의 일치를 목표로 하는 철학에서는 해결할 수 없는, 해결해야 하지만 그 안에선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으며, 그러한 의미에서 '근대철학의 딜레마'라고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p.73

   이와 관련해 유명한 명제가 있는데, 그(스피노자)는 『에티카』의 2부에서 "진리가 진리와 허위의 기준이다"라는 정리를 제출합니다. 비유하자면 '빛이 빛과 어두움의 기준이다'라는 말을 합니다. 빛과 어두움은 빛이 '있다' '없다'라는 식으로 구별되지, 빛과 어두움 외부에 있는 제3자에 의해 구별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엇이 '있다'/'없다' 역시 존재가 '부재'함으로써 정의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재와 무의 기준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진리가 진리 자체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p.87

   유명론이란 한마디로 말해 '오직 이름일 뿐'이란 뜻입니다. 무엇이 '오직 이름일 뿐'인가? 중요한 건 바로 이것인데, '보편적인 것' (the general)은 오직 이름뿐이란 주장입니다. 예를 들어 '인간'이란 말을 생각해 봅시다. 지금 이 자리에 계신 분 가운데 '인간'이 아닌 분 있으면 손들어 보세요─아무도 없군요. 그렇다면 지금 이 자리에는 백 명 남짓의 '인간'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 중 저도 인간이고, 저기 있는 저분도 인간이고, 저 뒤에 있는 저분들 역시 인간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강의실에 '인간'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요? (생략)

   그러나 이 문제는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특히나 중세의 수도원에서 연구하던 중세 신학자나 철학자들에겐 말입니다. 그들 가운데 한 부류는 이렇게 말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 '인간'이란 존재는 없다. 다만 김xx라는 개인, 이xx라는 개인, 최xx라는 개인들만 있을 뿐이다. '인간'이란 그 개인들에 붙인 이름일 뿐이다."

   그러나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반대로 말합니다. "여기 있는 모든 개인이 바로 인간 아닌가? 그렇다면 이 자리에 인간이 있다는 사실을 누가 감히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인간'이라는 보편자(보편적인 것)는 분명히 존재한다."

   여기서 전자는 보편적인 것(예컨대 '인간')은 오직 이름일 뿐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유명론'이라 하고, 후자는 보편이 실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실재론'(realism)이라고 합니다. 이들 두 입장은 중세 후기에 접어들면서 나타나는데, 나중에 중세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논쟁의 하나가 됩니다(주의할 것은, 근대에 와서 물질이 실재한다는 주장 역시 유물론 혹은 ' 실재론'이라고 불리는데, 이것과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p.102

로크의 입지점

알다시피 로크는 경험주의를 하나의 사조로, 흐름으로 만들어낸 사람입니다. 이러한 로크의 철학을 떠받치고 있는 두 개의 지반이 있습니다. 하나는 데카르트가 새로운 장을 열었던 근대철학의 문제설정입니다. 즉 신에게서 독립한 주체, 그래서 존재와 인식, 가치의 새로운 중심이 되었던 근대적 주체가 로크 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가장 중요한 지반이 됩니다. 진리라는 인식의 목표 역시 마찬가지지요.

   다른 한편 갈릴레이와 뉴턴, 호이겐스 등이 이룩한 과학혁명의 획기적 효과 속에서 그는 사고했습니다. 즉 근대 초의 과학혁명이 로크의 사상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이제 과학은 진리에 이르는 가장 커다란 길, 어쩌면 암묵적으로는 유일한 길로 간주됩니다. 데카르트가 기초를 닦아놓은 과학주의가 탁월한 과학자들의 성공적인 작업으로 인해 반석 같은 위치를 얻게 됩니다.

   따라서 로크는 과학 발전을 가로막는 허구적인 원리나 개념, 사고 등을 제거하는 '청소부'로서의 역할을 자임합니다. 이런 관점에 선 그에게는 경험과 관찰만이 과학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보였습니다. 다시 말해 경험과 관찰이야말로 과학에 이르는 왕도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흔히 '경험주의'라고 부르는 것이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영미철학에선 주류를 이루는 입장입니다.

   이처럼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입장은 같은 과학주의라고 해도 데카르트와는 크게 다른 것입니다. 데카르트는 알다시피 경험과 관찰의 불확실성을 지적하면서, 오히려 이성에 내재해 있는 본유관념과 그것에 의거한 연역적인(예컨대 수학적인) 지식이 우리고 하여금 진리에 이르게 하리라고 생각했지요.

   반면 로크의 생각은 경험이나 관찰에 의하지 않은 지식이나 개념, 예컨대 신학적인 우주론은 오히려 올바른 관찰에 입각한 과학적 지식의 발전에 방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선 데카르트의 본유관념 역시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런데 앞서 우리가 유명론과 연관해서 얘기했던 것을 생각해 본다면, 경험과 관찰을 중시하는 로크의 입장은 분명 유명론적 전통에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유명론자 오컴 역시 영국 출신이었습니다).

   요컨대 로크의 과학주의는 유명론적 전통에 따르면서 데카르트와는 전혀 다른 고유한 흐름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그렇지만 로크의 철학은 데카르트가 마련해 놓은 근대철학의 문제설정 위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즉 독립적인 인식주체를 축으로 해서 신학적 사고에서 벗어났으며, 과학이란 이름의 진리를 목표로 삼아 추구하고 있는 근대적 철학입니다. 이런 점에서 중세적 유명론과는 전혀 다른 흐름이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말해, 유명론과 근대적 문제설정의 결합을 통해 로크는 중세적 유명론과도, 데카르트적 근대철학과도 다른 독자적인 흐름을 철학 안에 만들어낸 것입니다.


p.126

근대철학의 위기와 칸트철학

앞서 말했듯이 '근대철학의 비조'라는, 지금까지도 데카르트가 누리고 있는 영광은 신학의 지배 아래 있던 철학, 신의 지배 아래 있던 인간을 신학과 신으로부터 독립시킴으로써 근대적 사고를 가능케 하는 근대적 문제설정을 기초지우고 방향지웠다는 공적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데카르트로선 자명하고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생각하는 나' 즉 인식주체가 매우 불확실하며, 진리 역시 극히 취약한 기초를 갖고 있음이 흄으로 인해 드러났습니다. 진리는 커녕 인과법칙조차도 있다고 할 수 없으며, 주체가 있는 게 아니라 다만 지각의 묶음만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데카르트가 마련한 근대철학의 전제가, 그 출발점과 목표가 붕괴된 것을 의미하며, 따라서 근대적 문제설정 자체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을 뜻한다는 것은 앞서 말했습니다. 칸트가 자기의 철학적 작업을 시작하는 곳은 바로 이 붕괴와 해체의 지점입니다.

   애시당초 칸트가 발딛고 있던 곳은 이성주의 철학이었습니다. 즉 칸트는 이성이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을 갖고 있따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나 칸트는 주체 자체가 이성의 자명한 출발점이 아니며, 진리에 이르기에는 지극히 취약한 기초라는 흄의 비판을 받아들입니다. 그는 "흄의 비판을 통해 독단주의의 잠에서 깨어났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자명한 것으로 가정된 '주체'라는 출발점이나,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주체'의 능력이 사실은 근거없는 독단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칸트는 처음부터 질문을 다시 던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한마디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고 질문합니다. 즉 인간─이전에는 '주체'라고 했는데, 칸트는 '인간'이라고 표현합니다─에 대해,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라는 세 가지의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첫째 질문인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게 『순수이성 비판』입니다. 둘째 질문인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는 인간의 행동, 당위, 도덕 등에 관한 문제인데, 이것을 다루고 있는 게 『실천이성 비판』이지요. 셋째 질문인 '인간은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라는 것은 인간의 목적개념에 대한 질문인데, 이것을 다루고 있는 것이 『판단력 비판』입니다.

   결국 이 세 가지 질문은 인식-행동-목적이라는 인간의 가장 중요한 세 가지 활동이, 이성에 의해 즉 인간이란 주체 자신에 의해 근거지어질 수 있는 것인가를 다시 묻는 것이었습니다. 칸트는 이렇게 함으로써 '주체'라는 지반에 새로이 기초공사를 하려고 합니다.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보건대, 주체가, 신에게서 독립한 '인간'이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면 '철학'이나 과학은 불가능한 것이었지요.

   따라서 동요하고 깨져 버린 주체를 어떻게 위기에서 구해낼 것인가, 불가능하다고 판단된 참된 지식, 진리를 어떻게 새로이 기초지울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근대철학자 칸트가 보기엔 가장 시급하고 절박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근대적 주체로서의 인간과 진리를 확고하게 재건함으로써 근대적 사고의 기반을 다시 다지고, 근대철학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제 칸트는 '주체가 출발점이 될 자격이 있는지, 자격이 있다면 무엇 때문인지, 주체가 참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려고 합니다. 이를 위해 칸트는 주체를, 이성을 피고로서 법정에 세워보자고 합니다. 그래서 피고인 이성이 무엇을 알 수 있는지, 어디까지 알 수 있는지, 나아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시험해 보자고 합니다. 이것이 칸트의 '이성 비판'이라는 계획입니다.

   이것은 흄이 극한적 형태로 제기했던 문제를 다시 근대적 틀 안으로 끌어들이면서 근대적으로 재배치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칸트는 근대적 문제설정을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주체가 어떻게 가능한가'란 질문을 통해 다른 형태로 전환시키려는 것입니다. 데카르트가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출발점으로 삼았던 것들을, 그게 어째서 출발점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연구하려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 칸트는 경험들, 지각경험들, 감각경험들 이러한 것들을 기초짓는 선험적 기초가 있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선험적 주체'가 무엇인지를 찾아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확실한 주체를 재건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칸트의 이 계획 속에서 주체(인간)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중심의 자리로 복귀하게 됩니다. 이것이 칸트철학이 누릴 수 있었던 영광의 이유이기도 합니다. 철학사에서 칸트가 차지하는 독보적인 위치는 이처럼 '근대철학의 위기' 속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는 위기에 처한 근대철학을 구해내 튼튼한 기초 위에 재건함으로써 근대적인 사고의 기반을 확고하게 해주었던 것입니다.


p.143

   그렇다면 이제 '신'은 어떻게 되는가?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에서 신을 증명하려는 모든 시도가 성공하지 못했고, 진리를 추구하는 순수이성의 영역에서 신은 증명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로써 데카르트도 쫓아내지 못했던 신을 이론적인 이성의 영역에서 쫓아냅니다.

   실천적인 이성의 영역에서도 가장 근본적인 원리를 보편적인 도덕원칙이 차지함으로써 신이 개념적으로 들어설 자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들을 보편적 가치에 따라 행동하게 하는 데 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도덕철학적인 필요에 의해 실천이성이 신의 존재를 '요청'한다는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도덕행위란 신에 대한 실천적 긍정"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신의 존재가 '실천이성의' 요청에 의한 것이란 점입니다. 즉 이성의 필요에 의해 신의 존재가 받아들여진다는 것은, 이성이란 신의 피조물이요 그것을 인식하는 수단이었던 시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전환을 담고 있는 것입니다. 과감하게 말하자면, 신이 이제는 이성의 필요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고, 신이 이제는 이성에 의해 포섭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로써 종교 자체가 근대적인 윤리학을 위해 복무하는 도덕철학이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칸트는 근대적 윤리학의 확리밪요 완성자임에 틀림없으며, 칸트철학은 '근대철학의 승리'를 선언하는 것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새로운 난점들 : 영광의 그늘

칸트는 흄에 의해 전면화된 '근대철학의 위기' 속에서 작업했습니다. 그는 위기 속에서 붕괴된 근대철학의 지반을 새로이 복구하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근대적 문제설정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기둥으로서 '진리'와 '주체'를 새로운 형태로 재구성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한 칸트의 전략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진리의 주관화입니다. 즉 진리를 외부의 사물이나 대상에서 찾을 게 아니라 주체 자체 내부에서 찾자는 것이지요. 둘째는 주체(주관)의 객관화입니다. 즉 모든 주체가 선험적으로 갖고 있으며, 경험이나 인식의 기초가 되는 필수적인 형식을 주체 내부에서 찾아냄으로써, 그것이 모든 주체에 공통된 것임을, 따라서 객관적인 것임을 보여주려고 했습니다.

   이 두 과정의 복합으로 인해 진리는  주관화되면서 동시에 주관적인 데 머물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는 어떤 의미에선 주관과 객관, 주체와 대상의 통일을 이루기 위한 칸트적 길이었던 셈입니다. 어쨌거나 칸트는 이런 방식으로 주체와 진리를 되살려내는 데 성공한 것이빈다. 이로써 근대철학의 위기를 극복하고, 근대철학을 확고한 지반 위에 새로이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칸트 철학이 향유했던 그 '영광'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로써 칸트철학은 근대적 물제설정의 딜레마를 해소하고 위기의 요인을 근본적으로 제거한 듯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뿌리깊은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해결은 새로운 방식으로 문제를 생성시키거나 '전이' 시킵니다. 칸트철학 자체 내에는 이미 새로운 위기의 요소들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앞서처럼 세 가지 차원에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습니다.

   첫째, 진리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는 진리를 주관화하는 전략과 관련된 것입니다. 칸트는 현상이란 우리가 지각하고 인식한 것이고, 따라서 주관 안에 있는 것이라고 하지요. 대신 주관 밖에는 '사물 자체'를 남겨두고 말입니다. 사물 자체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남겨두고, 우리의 인식을, 진리를 단지 현상에 관련된 것으로 제한합니다.

   그럼 우리가 인식하는 '현상'과 '사물 자체'는 어떤 관계를 갖는가? 물론 칸트는 그건 아무도 모른다고 합니다(이게 바로 근대철학의 딜레마지요!). 따라서 현상에 대한 지식은 사물 자체와 어떤 연관을 갖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진리란 오직 주관의 형식으로만 정의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진리라고 간주하는 지식(예컨대 선험적 종합판단)은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그것은 경험하기 이전부터 "누구든 오인하는" 선험적 허위, 선험적 허구일 가능성은 없는가? 모든 사람이 공유하는 '선험적 허위'라면 그것이 진리로 간주되어도 좋은가? 그건 마치 고대에는 모든 사람이 해가 도는 것을 옳다고 생각했으니 천동설이 진리라고 말하는 것과 유사하지 않은가?


p.191

역사유물론과 주체철학

맑스가 실천이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야기된 철학적 지반의 변경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진리'라는 근대철학의 목표는 물론, 대상 자체도 그냥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단지 파괴하는 데 머무는 것만이 아닙니다. 물질개념 자체조차 역사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이론으로서 역사유물론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역사유물론으로 진전됨에 따라 이제 맑스는 근대철학의 출발점이었던 주체(또는 인간)개념에 대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사고를 할 수 있게 됩니다.

   맑스는 '인간'이란 개념 자체를 해체합니다. 그는 '인간'이란 포이어바흐처럼 사랑이나 의지를 본질로 하는 존재로 정의될 수 없으며, 데카르트처럼 '이성'과 '정념'을 가진 존재로 정의될 수도 없다고 하죠.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이 갖는 수많은 특성 중 몇 가지를 추출해서 인간의 본질이 그거라고 선언하는 데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이라면 사람마다 인간은 다르게 정의될 수 있을 겁니다.

   맑스가 보기에 정말로 중요한 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개인들이 어떤 사회적인 특징을 갖고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변하는가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적으로 말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고 말입니다.


p.195

   결국 그는 상이한 사회관계 속으로 밀려들어감에 따라 시종으로서 살아가게 된 겁니다. 마치 아프리카의 자유인이 백인 손에 잡혀 미국으로 옮겨지는 순간, 좋든 싫든 노예가 되듯이 말입니다. 요컨대 인간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정의된다면, 사회관계가 달라지면 그 본질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맑스는 순수한 '인간', 항구적이고 불변적인 '인간' 개념을 해체해 버립니다. 사회적 관계에서 동떨어져 인간을 정의하거나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장은 근대철학의 출발점 자체를 근본적으로 뒤집어엎는 것입니다. 자명하고 확실한 출발점, 항구적인 기초인 '주체'가 따로 없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반대로 '주체'란, '인간'이 그렇듯이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구성물이요 결과물이란 겁니다. 동일한 사람이 20세기엔 호텔을 경영하는 주체로서 존재하지만, 중세로 밀려가선 시종이란 주체로 존재하게 되듯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주체가 '사고'하는 내용이나 방식 역시 크게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중략) 이래서 맑스는 개인들이 갖고 있는 의식이나 관념은 사회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데카르트의 말처럼 생각하기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어떤 사회적 관계에 속하느냐에 따라 사고 자체도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회적 존재가 사회적 의식을 규정한다"고 말합니다.

   이러한 철학적 전환의 결과 근대철학의 출발점을 이루던 주체개념은 해체되고, 근대적 문제설정에서 연유하는 '주체철학'은 전복되고 맙니다. 이는 맑스가 근대적 문제설정을 넘어서는 또 하나의 결정적인 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주체철학의 지반을 떠나자마자 역사 개념 또한 변하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 역사는 어떤 주체─그게 '절대정신'이든 '인간'이든 간에─가 자신의 목적에 따라 만들어내는 무엇이 아닙니다. 역사 역시 이젠 사회적 관계에 의해 정의되고, 그것의 변화와 대체 과정에 불과한 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역사란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알튀세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196

   헤겔과는 달리 맑스에게는 소외되거나 실현되어야 할 목적이나 정신 같은 것은 없습니다. 물론  초기의 소외론적 저작은 소외의 해체라는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으로 역사를 이해한다는 점에서 목적론적 관점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본』과 같은 '맑스적' 저작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다만 자본주의에서 자본축적의 역사적 경향만을 도출하고 보여줄 뿐입니다.

   흔히 이러한 입론을 공산주의라는 이상적 상태를 목적으로 가정하는 '목적론'이라고 바핀합니다만, 이는 목적론의 개념을 남용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경향을 말하는 것이나 어떤 상태로 되리라는 서술 자체가 목적론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적론은 그렇나 경향이 어떤 이념이나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있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죠. 스피노자 말마따나 원인을 목적으로 대체하는 것, 즉 어떤 일의 원인을 정해진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간주하는 게 목적론이지, 어떤 경향을 갖는다는 게 모두 목적론은 아님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p.199

   그러기 위해선 근대적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 자신의 사상을 '번역'해 주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근대적 개념을 통해 자신의 새로운 사고방법을 설명하는 작업이었습니다. 즉 맑스 자신이 자신의 사상을 근대화해야 하는 역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이 정말 말 그대로 '번역'이기만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속에 자신의 사고가 포섭되지 않는 그런 '순수한 번역'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맑스철학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적인 요소들을 포함하고 잇는 것은 이런 점에서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맑스는 진리에 대한 근대적 개념을 비판하면서도, 자신의 이론이 '과학'일 것이라는, 혹은 과학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즉 과학주의라는 근대적 사고방식에 스스로 갇혀 있습니다. 누구나 어떤 이론이든 과학일 때만 정당한 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시대에, 자신의 이론은 과학이 안 되어도 좋다고 생각하는 게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더구나 그가 대중과의 결합을 추구한 사상가라면 말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실천의 개념 역시 '근대화'됩니다. 즉 진리를 실천의 문제로 파악하려는 맑스의 명제는, 물질적 대상과 지식이 일치하는가의 여부를 실천을 통해 검증한다는 지극히 근대적인 의미로 해석되게 됩니다. 레닌이나 심지어 엥겔스 역시도 이 점에서는 벗어나지 못합니다. 과학주의 안에서 실천개념이 차지할 수 있는 자리는 아마 거기말고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이후에는 유물론을 옹호하는 과정에서 '철학적 유물론'─이는 근대적인 대상, 물질개념에 기초하고 있는 근대적 유물론이지요─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p.207

무의식과 주체철학

무의식의 발견은 정신분석학의 최대 업적이고 정신분석학이 존재하게 되는 근거입니다. 그런데 프로이트의 무의식 발견은 근대철학과 어떤 관련을 가지고 있을까요?

   결론적으로 말하면 무의식이란 개념은 철학의 영역에 들어오자마자 근대철학으 기초를 해체하는 강력한 작용을 합니다. 근대철학에서 주체는 의식과 동일시되었고("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보세요), 통일성을 갖고 있었으며, 따라서 당연히 투명한 존재였지요. 또한 주체가 모든 대상에 대해 판단하고, 대상에 의미를 부여하며, 대상을 지배하는 중심이었습니다. 요컨대 근대적 주체는 의식적 주체며, 통일성과 투명성, 중심성을 갖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데카르트나 칸트에게서 아주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데카르트에게 세계가 확실한 것은 '내'가 사고할 수 있개 때문이었지요. 칸트에게 세계나 진리는 (선험적)주체 안에 있는 것이었고요. 그리고 이런 특징은 흄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났습니다. 그가 '자아'를 지각의 다발로 해체시킬 때조차도 그것은 지각이나 인상, 혹은 관념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지요. 그것들이 아무리 변덕을 부린다 해도 판단의 주임이 '자아'인 건 분명했습니다. 그것들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확실하게 반복될지는 모르지만, '자아'가 볼 수 없는 어떤 영역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무의식이란 개념이 끼여들자마자 난감한 일들이 발생합니다. 첫째로, 이제 주체는 의식과 동일시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커다란 부분은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생각하는 나' 이외에 '생각하는 나'가 알지 못하는 '나'가 인간 내부에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나'는 더 이상 투명한 존재가 아닙니다. 신경증 환자의 행동이나 꿈을 생각해 보세요. 내가 왜 하는지도 모르는 행동을 하고, 내가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장면이 의식이 잠든 사이에 눈앞을 스쳐갑니다. 따라서 내가 알지 못하는 행동을 내가 하며, 내가 알지도 못하는 욕망을 내가 갖고 있다면, 그래서 무의식에 의식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철조망이 쳐져 있다면,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게 됩니다. 무의식이란 의식의 접근이 봉쇄되어 있는 일종의 블랙박스인 셈이지요. 또 앞서도 말했지만, 인간의 정신 활동에서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무의식이라고 합니다. 무의식은 의식에 영향을 끼치며, 의식이 사고할 수 있는 가이드 라인이기도 합니다. 즉 자아는 거시기와 초자아가 말들어 놓은 경계선 안에서 작동할 뿐입니다. 때로는 자아(의식)가 손을 쓸 수 없는 행동을 야기하기도 하고, 때로는 의식이 몰두할 자리를 만들어 주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제 더 이상 자아(의식)가 중심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중심성을 상실하게 된 겁니다.

   더 나아가서 초자아는 내 욕망이 아닌, 그러나 내가 따라야 할 무엇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분명히 '타자'입니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있었으며, 내 의사나 욕망과 무관하게 만들어진 것, 그리고 내가 받아들이도록 나를 설득하거나 강제하는 것이 바로 초자아로서 내 안에 정착됩니다. 나의 성과 이름이 그렇고, 또 내가 해선 안 될'짓'들이 그렇고, 내가 남들의 인정을 받으며 살아가기 위해 받아들여야 하 도덕과 가치가 그렇습니다. 사회적 질서를 의미하는 이 '타자'가 오히려 내 안에 정착되어 나를 움직이는 중심으 거리를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나' 혹은 '자아'라고 부르는 존재는 단일하고 일관된 성격을, 통일성을 갖지 않는다는 게 분명해집니다. '주체'는 서로 대립되며 상충하는 부분들로 분열되어 있다는 거죠. 최소한 서로 대면하지 못하는 의식과 무의식, 서로 충돌하며 싸우는 거시기와 초자아로 나뉘어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주체란 통일적인 중심이 아니라 매우 이질적인 '복합체'이고, 자명한 출발점이 아니라 하나의 '결과물'이라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인간'이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통해서 만들어지는 거이며, '주체'란 (초자아라는) '타자'가 요구하는 규칙을 받아들여 행동함으로써 구성되는 결과물이란 것입니다. 이로써 근대철학의 지반이 해체되는 또 하나의 경로가 그려집니다.

   이런 점에서 프로이트의 발견은 애시당초 철학의 영역 밖에서 행해진 것이었고, 철학적 주체와 관련된 것도 아니었지만, '주체철학'이라는 근대철학의 지반을 철저하게 허물고 깨뜨리는 발견이었습니다. 더구나 그가 제공한 다양한 임상적 사례와 문헌적인 분석들은, 해체가 일단 시작되면 끝까지 밀고 가도록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습니다.


p.215

   니체의 고유한 문제설정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니체의 '질문방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 같습니다. 니체는 다음과 같은 질문방식을 비판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예를 들면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는 식의 질문이 그것입니다. 그에 대해 누군가가 "이른 봄 거리를 화려하게 수놓은 벚꽃이나 저녁에 곱게 지는 노을, 늘씬하게 빠진 젊은 여인의 몸매가 아름답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칩시다. 만약 플라톤이나 소크라테스라면 이렇게 대꾸할 것입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네. 그런데 그것을 모두 아름답다고 한다면 거기에 공통된 아름다움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바로 그게 무어냐는 걸세."

   이는 아름다움의 '본질'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즉 꽃이나 노을, 몸매 같은 것들은 가상이고 그 근저에는 그것을 아름답게 만드는 본질이 있다는 것이죠. 이러한 질문방식은 플라톤 이래 서양철학 전체의 주된 흐름이 되어 왔던 질문방식이며, 흔히 서구 형이상학의 뿌리로 간주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니체는 이러한 질문을 바꾸어 버립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게 아니라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라고 질문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는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않고 "진리란 어떤 것인가?라고 묻습니다. 이는 진리의 예를 들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핵심은 '진리'를 포괄적으로 정의할 걸 요구하는 플라톤식의 질문과 달리, 이는 "진리라는 것을 사로잡고 있는 힘은 대체 어떤 것인가? 진리를 점령하고 있는 의지는 어떤 것인가? 진리라는 것 속에는 어떤 것이 표현되거나 숨어있는가?"를 묻고 있다는 것입니다.

   '의미'를 발견한다는 건 주어진 대상을 점령하고 있는 '힘'(force)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것이든 지배적인 힘과 피지배적인 힘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어떤 힘이 지배적인 것인가 아닌가를 구별해 주는 것이 '의지'라고 합니다. 역으로 이러한 의지는 힘들간의 관계에 의해서 정의되는 셈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이 의지가 힘들간의 관계에 의해서 정의되는 셈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이 의지가 힘들간의 관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니체는 이 의지를 '권력에의 의지'라고 합니다. 줄여서 '권력의지'라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세속적인 의미에서 권력을 추구하거나 욕망하는 의지와는 별로 상관이 없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p.216

(그림 4-16)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샤세리오의 그림 「에스더의 화장실」The toilet of Esther이다. 오해하지 말라. 이 시기 프랑스의 화장실(toilet)은 우리처럼 대소변을 보는 곳이 아니라, 씻기도 하고 화장도 하며, 때론 몰래 찾아온 애인을 만나기도 하는 곳이었으니까. 그러니 옆에 시중 드는 하인이 있는 것도 당연하다. 그런데 세 명 중 누가 제일 예쁜가? 물론 주인공인 가운데의 에스더일 것이다. 이유는? 사실 아름답다는 느낌에 정확한 이유를 대기는 어렵다. 그래도 니체처럼 묻자. "어떤 것이 아름다운가?" 갸름한 얼굴, 쌍커풀이 있는 큰 눈, 높고 늘씬한 코, 얇고 붉은 빛이 도는 입술, 긴 목 등등. 다시 묻자. "어떤 것이 그가 제일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는가?" 그것은 백인의 얼굴을 아름다움의 척도로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척도가 저 사람을 아름답다고 느끼게 만든다. 사실 아름다움의 척도는 대개 익숙한 것과 결부되어 있다. 못 보던 것은 사람이나 동물이나 모두 기괴하고 두렵게 느껴진다. 애르 키우는 부모는 대개 자기 자식의 얼굴이 가장 예쁘다고 느낀다. 익숙해진 나머지 자신의 아이가 미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째서 쌍커풀도 없고 찢어진 듯한 눈을 가진 전형적인 누런 황인종의 얼굴이 아닌 백인의 얼굴을 아름다움의 척도로 갖고 있는 걸까? "무엇이 백인의 얼굴을 아름다움의 척도로 삼게 만들었나?"


p.219

   계보학이 정의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지요. 그는 진정한 '비판철학'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하지만 그가 보기에 칸트의 비판철학은 진정한 비판철학이 아닙니다, 즉 가치와 의지에 대해 묻지 않고 '순수한' 인식능력만을 '순수하게' 인식하려는 것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니체는 진정한 비판철학은 어떤 대상의 가치와 그것이 의미하는 의지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니체는 진정한 비판철학으로서 '계보학'을 제시합니다. 계보학이란 어떤 대상이나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디서 연유하는지를 묻는 것입니다. '좋다' '나쁘다' '선하다' '악하다' 혹은 '참' '거짓'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봄으로써, 그것이 어떤 의지의 산물인지를 보려고 합니다. 즉 '참' '거짓' 같은 자명해 보이는 개념을 권력의지에 연루시켜서, 어떤 권력의지가 작동하고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바로 계보학의 과제란 겁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필수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하나는 모든 것을 가치에 연결시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을 더 밀고 나가 가치 자체를 만들어내는 것, 따라서 가치를 이해하려면 그것에 조회해야 하는 기준점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권력의지지요. 이런 점에서 계보학이란 '가치의 철학'이요 '권력의지의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요약하면, 니체는 힘과 권력의지라는 개념을 핵심적인 개념으로 도입함으로써, 주어진 대상의 의미와 가치를 비판적을 사고하고 평가할 수 있는 새로운 '비판철학'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니체의 새로운 질문방식, 새로운 문제설정이 도달한 창조적인 귀착점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p.211

반(反)근대적 비판철학

가치의 철학, 권력의지의 비판철학으로서 계보학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려는 근대철하겡 대해 새로이 근원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왜 그들은 자명한 것을 추구하는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을 추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자명하고 확실한 것 을 통해 그들은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라는 질문 말입니다.

   니체가 보기에 '자명한 것'이나 '확실한 것' '절대이성' 등은 모두 어불성설(contradictio in adjecto)입니다. '자명한 것'이란 말이 성립되는지, 그게 있는 건지가 문제되고 있는데, 따라서 '자명한 것이란 말'이 결코 자명하지 않은데, 그 자명하지 않은 말로써 어떻게 자명한 것에 도달하겠냐는 겁니다. 즉 확실하지 않은 말로써 어떻게 자명한 것에 도달하겠냐는 겁니다. 즉 확실하지 않은 말로 확실한 것에 어떻게 도달하겠냐는 것이고, 절대적이지 않은 말로 이루어진 '절대이성'이 과연 절대적이겠냐는 겁니다. 마치 '사물 자체'에 대해 이미 말하고 있으면서, 사물 자체에 대해 아무것도 인식할 수 없다는 말이 어불성설이듯이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명한 것'을 찾아나선다면,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자명하고 확실하다"고 말한다면, '자명한 것'을 통해 무언가 하려는 바가 있는 게 아니냐는 것입니다. 자신의 주장이 자명하고 확실하다는 주장을 통해 자기 주장을 정당화하려 하거나(데카르트도, 칸트도 모두 그렇습니다), 당신 주장은 자명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고 아무 소용도 없다고 거부하고 반박하려 하는 거겠죠. 혹은 자명한 것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면 어떤 사상도, 지식도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효과를 가질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명한 것'을 추구하는 자신의 사상이야말로, 심지어 아직 자명한 데 이르지 못했다 해도, 최고의 가치를 갖는 것이고, 이를 위해선 다른 어떤 방해도 용납할 수 없다는 확신을 주겠지요. 이런 걸 니체는 진리의지(진리에의 의지)라고 합니다. (중략)

   이러한 비판은 근대철학의 자명한 출발점이었던 주체 개념에 대한 해체 작용을 합니다. 즉 근대적인 주체 개념은 더 이상 자명하지 않으며, 또한 출발점이 아니라 권력의지가 구성해내는 결과물이란 것입니다.

   다른 한편 자명하고 확실한 것에 대해 퍼붓는 니체의 공격에는 '진리'라는 목적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카르트 이래 진리란 자명하고 확실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자명한 주체뿐만 아니라 자명한 판단, 자명한 지식이 불가능하다면 대체 진리란 게 어떻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도 그는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계보학적인 방법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이죠. 즉 "어째서 진리가 필요한가?" "어째서 진리를 가지려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왜 지식은 꼭 진리여야 하는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왜 지식은 꼭 진리여야 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진리의 '의미'와 '가치'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지요.

   이러한 물음에 대해 니체는 "진리는 없고 진리의지만이 있다"고 말합니다. 진리를 욕망하게 하고, 진리를 추구하게 하는 의지가 바로 진리의지입니다. 더불어 그는 이러한 진리의지가 어떤 가공할 효과를 야기할 것인지도 분석합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것은 유혹"입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진리라는 환상으로의 유혹이고, 내가 추구하고 있는 진리에 다른 거짓된 지식을 복종시켜야 한다는 의지로의 유혹이며, 또한 거짓으로부터 사수되어야 한다는 착각으로의 유혹이고, 이걸 사수하기 위해선 다른 거짓을 전파하는 자들과 결연히 싸워야 한다는 신념으로의 유혹입니다.


p.227

   이리하여 지식에 대한 질문 자체가 바뀝니다. 근대철학은 오직 진리일 때만 지식은 정당화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즉 진리(과학)가 아니라면, 더군다나 진리(과학)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어떤 지식도 있을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기선 어떤 지식이 참이냐 거짓이냐가 가장 결정적이고 중요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니체 말처럼 진리란 반박되지 않는  종류의 거짓이라면 대체 이런 질문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니체처럼 진리가 아니라 진리의지만 존재한다고 하면, 그래서 지식이나 판단을 진리의지란 차원에서 파악하게 되면, 어떤 지식이 진리인가의 여부가 아니라 그 지식이 어떤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가, 어떤 효과를 의지하고(willing) 있는가 하는 게 중요해집니다. 결국 이 질문을 통해 지식의 문제는 그것이 무엇을 지향하고 있고,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며, 어떠한 효과를 야기하는가 하는 문제로도 전환됩니다.

   그리고 니체는 칸트에 의해 완성된 근대적 윤리학, 즉 계몽주의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비판의 망치를 휘두릅니다. 칸트는 우리가 더 이상 누군가를 따르기 원치 않을 때, 신이나 국가, 아버지를 따르려 하지 않을 때, 우리 자신을 따르도록 요구한다고 합니다. (실천)이성이 바로 이 새로운 복종을 지휘하는 새로운 군주인 셈이지요. 즉 칸트가 말하는 계몽주의적 이성은 외부의 어떤 강력한 권위들이 무너지게 되자 새로이 권위를 내부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니체에 따르면 이는 결국 우리를 유순하게 복종하도록 설득하는 작용을 할 뿐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복종 속에서만 인간을 합리적 존재로 나타나게 하는 계몽주의적 이성은 인간의 삶을 지배학 통제하려는 권력의지를 표현하는 것인 셈입니다.


p.230

   이들 세 사람(맑스, 프로이트, 니체)이 근대적 문제설정을 해체시키는 방식에서 볼 수 있는 공통성과 차이를 간략히 일별해 보는 것도 무용하진 않을 것 같군요. 한마디로 말하면, 이들의 공통성은 주체와 진리라는 개념을 기둥으로 삼아 만들어진 근대적 문제설정 자체를 해체한다는 점입니다. 정도의 차이가 적지 않지만 거기 내재된 근대적 사고방식으로서의 주체철학과 과학주의, 그리고 계몽주의에 대한 비판과 거부 역시 이들의 공통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주체의 개념과 관련해서 이들이 보여주는 공통성은 별도로 지적될 만한데, 그것은 주체란 자명한 출발점도 아니며 통일성을 갖는 확고한 중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그것은 주체 외부의 관계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며, 이질적인 복합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결론을 통해 이제 주체는, 그리고 그 주체의 사고와 행동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요소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동태적으로 파악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반면 이들의 차이는 한마디로 해체를 수행하는 데 사용하는 개념이 다르다는 것이며, 그 결과 창출해내는 새로운 문제설정 역시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맑스의 경우 핵심적으로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대상과 주체, 진리와 정치 문제 전반을 해체하고 다시 정의내리며, 그 결과 역사유물론이라고 하는 새로운 문제설정이 형성됩니다. 프로이트의 경우는 무의식이란 개념을 통해 특히 주체의 개념을 철저하고 강력하게 해체하고, 이 무의식을 대상으로 하는 이론으로서 정신분석학을 만들어냅니다. 니체는 의미와 가치, 힘과 권력의지란 개념ㅇ르 통해 근대철학으 뿌리를 노출시키고 해체시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체의 사고방법을 좀더 발전시켜 계보학이라는 또 하나의 비판철학을 만들어냅니다.

   이들이 보여주는 공통성은 이들이 서 있던 근대적 지반의 공통성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즉 이들이 사용하는 개념과 방법은 달랐지만, 이들이 서 있던 지반은 공통된 것이었고, 따라서 해체의 결과는 공통성을 강하게 갖게 됩니다. 반면 이들이 보여주는 차이는 각자가 근대적 지반에 대해 취하는 입장과 태도의 차이에서, 그리고 그것을 해체하는 데 사용한 방법의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차이는 각자가 집중적으로 착목하고 있던 지점, 그리고 힘을 모아 돌파해야 할 지점이 달랐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p.237

   그렇다면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원칙이 확실한 것은 사실 문법적인 규칙 때문이란 말도 가능합니다. 다른 식으로 말할 수 없고, 바로 그래서 다른 식으로 사고할 수 없는 겁니다. 확실한 것은 다른 식으로 사고할 수 없는 것이란 뜻이니 말입니다. 주어 없는 문장을 사용할 수 없기 때문에 '주체'의 존재는 확실하다고 할 수 있는 거지요.

   여기서 언어와 철학의 관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입장이 나타납니다. 그것은 니체나 (초기의) 비트겐슈타인이 지적하듯이, 철학적 확실성이란 문법의 환상이라고 보는 입장입니다. 나아가 분석철학자들이나 논리실증주의자들이 극단적으로 주장하듯이, 모든 철학적 문제는 언어의 문제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철학적 문제란 바로 확실한 것을 찾는 문제거나,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 등에 대한 문제인데, 이는 모두 언어가 제공하는 것(일종의 환상)이며, 따라서 언어적인 문제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논리실증주의자들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들은 문제가 모두 언어에서 야기되는 것이라면 언어상의 혼란을 제거하고 일관되게 만들면 모든 철학적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생각하죠. 심지어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일상 언어가 구제불능이라면, 어떤 편견도 배제된 일관되고 명확한 언어를 만들자고 합니다. 수학적인 기호들로 말입니다.


p.239

   이처럼 언어마다 사고를 제한하는 나름의 규칙이 서로 다르게 내장되어 있다면, 각각의 언어는 세상을 나름대로 파악하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사고방법은 이전의 사람들이 세상을 보던 사고방식이 언어에 새겨진 채 남아 있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든, 어차피 언어에 새겨진 규칙과 사고법에 따라 우리가 사고할 수밖에 없다면, 오히려 언어가 확실한 것을 제공해 주니 주지 못하니 하는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차라리 사람들이 어떻게 사고하고 판단하는지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통해 파악할 수 있으리란 생각이 가능해집니다.

   여기서 언어와 사고, 언어와 인간의 관계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입장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언어 속에서 사고할 수밖에 없다면, 결국 이 언어를 연구함으로써, 혹은 사람들이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가를 연구함으로써 인간의 삶과 사고에 대해 알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소쉬르나 촘스키의 언어학이 이런 방향에 크게 영향을 미쳤는데, 그 영향 아래서 형성된 구조주의자들은 언어를 통해 인간에 대해 다시 사고하려고 합니다. 이와는 다른 흐름으로,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언어적 실천에 기초한 새로운 문제설정을 만들어냅니다. 또한 오스틴과 같이 의미를 언어가 사용되는 상황으로 환원해서 파악하려는 입장도 있습니다.

   이제부터 주로 주목할 것은 이 두번째 입장과 연관된 견해들입니다. 이는 언어와 의미뿐만 아니라, '주체'를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을 가르쳐 주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맏 근대철학을 해체하는 또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


p.248

   실제로 서구의 논리학에서 가장 근본적인 법칙조차도 진리이거나 자명한 게 결코 아니란 점은 자주 지적되어 왔습니다. 니체는 동일률이나 모순률이 진리란 것을, 혹은 누구나 그것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대체 누가 증명한 적이 있느냐고 질문합니다. 아무도 그것의 보편타당성을 입증할 수 없으면서도 그것을 지켜야 하다는 논리학의 규칙, 여기에는 진리를 향한 의지조차 없으며, 단지 모든 걸 동일한 틀에 꿰어맞추고 지배하려는 권력의지만이 있을 뿐이라고 니체는 갈파합니다.

   한편 동일률, 모순률과 함께 가장 기본적인 규칙으로 간주되어온 '배중률'은 직관주의 대표자인 브루베르(L. Brouwer)라는 수학자에 의해 부정되었습니다. 배중률이란 어떤 게 A가 아니면 ~A(not A)지 그 중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거칠게 말해 "기면 기, 아니면 아니지 중간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 배중률은 왜 부정되었을까요?

   원주율인 π의 값을 컴퓨터로 계산하면 다음과 같이 나옵니다.

   π=3.1415926535897932384626……13499999999837

   π는 아시다시피 무리수여서 불규칙하게 수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소수점 아래 762번째 자리부터 9가 연속해서 6개가 나옵니다. 그런데 무한히 계속되는 이 수의 배열에서 다시 9가 연속해서 6개 나오는 경우가 있을까요? 혹은 이 수의 배열에서 9가 연속해서 10가 가오는 경우가 있진 않을까요? 확률상으론 나올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렇지만 수가 무한히 계속되므로 안 나온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따라서 그런 수가 나올 수 '있다'고도, '없다'고도 하기 곤란합니다. 바로 여기서 배중률은 난파하고 맙니다. 이처럼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경우가 있다면 이제 모순률도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주장도 모두 거짓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문법을 달리하는 우리의 언어와 사고구조를 단지 서구의 논리학적 규칙에 끼워맞추려는 시도에 대해 근본적인 반성이 필요한 건 아닐까요? 좀더 나아간다면 우리의 언어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우리의 논리학적 규칙조차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건 아닐까요?

    

p.305

타자의 욕망 : 도둑 맞은 편지

다음으로 라캉은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desire)이라고 합니다. 이 말을 이해하려면 몇 가지 다른 개념을 함께 알아야 합니다. 그는 욕망을 욕구(need), 요구(demand)와 구별합니다. '욕구'는 식욕, 성욕처럼 가장 일차적인 충동입니다. 만족을 추구하여, 그걸 충족시켜 줄 대상을 찾고자 하는 충동이죠. 이는 다른 사람에게 만족시켜 달라는 '요구'로, 대개는 '사랑의 요구'로 나타납니다. 거칠게 말하면 요구는 욕구를 표현한다고 해도 좋겠습니다.

   그렇지만 이 요구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것으로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어머니와 자고 싶다는 욕구가 그대로 표현될 수는 없습니다. 즉 어머니에게 결혼을 '요구'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지요. 한마디로 말해 요구는 사회적 질서와 언어적(상징적) 질서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만 나타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욕구는 언제나 요구를 통해서 표현되고 충족되어야 하기에 그 충족은 늘 불충분합니다. 즉 욕구와 요구 사이에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다는 말입니다. 욕구와 요구 사이의 이 격차로 인해 욕망이 생겨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결핍'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결핍을 메울 대상을 찾아나서지만 결코 만족될 수 없는 것이기에 또 다른 대상으로 끊임없이 치환됩니다. 즉 대상이 끊임없이 치환되는 '욕망의 환유연쇄'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여기서 욕망은 생물학적인 충족욕이 아닙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사랑의 대상'으로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며, 다른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를 라캉은 '음경'penis과 구분하여 '남근'phallus이라고 합니다)으로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인정 욕망'입니다. 예컨대 어머니를 '욕망'한다는 것은 어머니로부터 자신이 '남근'임을 인정받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망은 허용될 수 없으며, 계속 추구한다면 거세되리라는 위협 앞에서 꺾이고 만다고 합니다. 거세 콤플렉스를 통한 이러한 억압과 그로 인해 야기되는 욕망의 환유연쇄가 바로 인간의 무의식을 구성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무의식이란 타자(다른 사람, 사회적 용인, 사회적 질서)의 인정을 받고자 하는 인정 욕망이란 거지요. "무의식은 타자의 욕망"이란 말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p.308

(그림 6-9) 거울 앞에서 누드를 그리는 화가

그래서 우리는 나의 행동거지가 타인의 눈에 드러나는 공간과 달리 그것을 프라이버시의 형태로 감추고 은폐할 수 있는 '사적 공간'에서 쉽사리 편안해진다. 더구나 '아이'도 '가족'도 없는 나만의 방이라면, 혹은 옷을 벗어버리고 욕망의 움직임에 몸을 맡겨도 좋은 내밀한 공간이라면. 하지만 푸코는 집요하게 거기서도 타인의 시선이, 그 기선을 대신하는 나의 시선이 존재함을 보여준다. 여기서 그 시선의 주인공은 탑 위의 감시자가 아니라 의사다. 17세기에 기독교는 자신의 은밀한 욕망과 행위, 느낌까지 말하도록 했던 '고해'라는 장치를 통해, 신부의 시선으로 침실 안에서 자신의 신체를 보게 했다. 그런데 그 시선이 19세기에 이르면 의사의 시선으로 대체된다. 이를 위해 19세기 의사들은 어린이의 자위가 얼마나 육체와 정신에 해악을 끼치는지를 주장하고, 여성의 성욕은 자궁의 경련에 기인하는 히스테리(그리스어로 '자궁'을 뜻한다)의 일종임을 '증명'하며, 다양한 변태적 욕망과 도착적 행위들을 찾아내서 일종의 '정신병'으로 규정한다. 독일 의사 크라프트-에빙이 쓴 『성의 정신병리학』은 1870년대의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따라서 이제 사람들은 자신의 성욕이 너무 빈번히 느껴질 때면 "이거 병이라던데…"하며 자신의 신체를 보게 되고, 배우자가 '이상한' 체위를 하자고 하면 "저거 병이라던데…" 하며 그의 신체와 욕망을 보게 된다. 이로써 "건강을 염려하는" 의사의 시선이 내밀한 침실 안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다. 에곤 쉴레Egon Schiele가 그린 위 그림 「거울 앞에서 누드를 그리는 화가」에서 모델은 화가의 시선을 위해 포즈를 취하며, 화가의 시선이 요구하는 바에 따라 움직인다. 만약 저 화가를 의사로 바꾸기만 한다면, 그 시선 안에서 옷을 벗고 서 있는 모델이 바로 침실안의 우리 자신이라고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p.310

(그림 6-10) 디즈니랜드

포스트모더니스트로 간주되는 보드리야르는 감옥은 하나의 '시뮬레이션' 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우리가 사는 이 곳이 감옥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저기 따로 있는 것이라고. 마치 미국 전체가 디즈니랜드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즉 허구적 환상 속에서 현실을 잊고 사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디즈니랜드가 저기 따로 있는 것처럼. 그는 걸프전이 터졌을 때도 그것을 시뮬레이션이라고 말했다가 많은 진지한 사람들의 빈축을 샀다. 아마도 컴퓨터 시뮬레이션처럼 조작되는 무기와 생방송으로 중계되는 새로운 전쟁의 양상을 지칭하는 것이라고들 생각해서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시뮬레이션이란 그의 개념을 이해한다면, 그가 말한 것은 차라리 이런 의미였을 것이다. "걸프전은 마치 전세계가 항상-이미 미국이 벌이는 잠재적 전쟁 속에 있지 않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거기 따로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걸프만에 퍼부어지는 미사일을 보면서, 우리가 거기 없다는 사실에 안도하지 않았는가! 제7함대의 미사일과 폭격기는 언제든 어디로나 떠날 채비를 하고 잇는데도. 이런 점에서 그가 말하는 시뮬레이션이란 개념 또한 시선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대상을 보게 함으로써 일상적인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을 보지 못하게 하는 특별한 종류의 시선의 이름이다. 그런데 거기서 그 시선의 '주인', 그 시선의 발원지는 누구일까?


p.322

둘째로, 과학으로서 맑스주의를 정립하려는 기획과 동시에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개념적 발전을 기획합니다. 그것은 이데올로기를 '대중들의 무의식적 표상체계'로서 정의하는 것입니다.

   '표상'은 representation을 번역한 말인데, 알다시피 represent는 '표상하다'는 뜻말고도 '재현하다' '대표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표상한다는 말은 '눈앞에 떠올린다'는 뜻인데, 예컨대 '자동차'란 말을 듣고 그에 상응하는 물건을 떠올리는 경우나, 역으로 어떤 물체를 보고 '컴퓨터'라는 단어를 떠올리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는 단어를 통해 사물을 눈앞에 재현하거나, 사물을 보고 그에 상응하는 단어를 머릿속에 재현하는 것이지요.

   그럼 표상체계란 무엇일까요? 예컨대 이 물건을 보고 '책'이라고 판단함으로써 우리는 이 물건에 대한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못 먹을 것'이란 개념만으로 판단하는 어린 아기라면 그걸 입으로 가져가겠지요. 또 제가 지금 이렇게 강의하는 것은 여러분에 대해 제가 강사라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떠올리지' 않는다면 아마 불가능할 겁니다. 한편 어떤 행동을 하거나 판단을 하는 것은 언제나 특정한 표상과 함께 진행됩니다. 일관된 표상이 없으면 일관된 판단이나 행동을 할 수 없습니다. 예컨대 제가 지금 이 자리를 연극무대라고 떠올린다면, 또 잠시 후엔 선거연단이라고 생각한다면 제 행동은 어떤 일관성도 동일성도 갖지 못한 채 뒤죽박죽되고 말 것입니다. 이처럼 무언가를 떠올리도록 해주는 개념이나 상상, 판단의 체계를 '표상체계'라고 합니다.

   이러한 표상체계는 개인마다 약간의 편차는 있지만 대개 집단적으로 유사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지거나, 학교나 교회 등 제도적 장치 속에서 만들어지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식당에서 흑인을 보고 등을 돌리는 남부의 미국인이나, 십자가를 보면 자세를 가다듬는 기독교도들을 생각해 보세요. 남부의 미국인라면 대개 다 그럴 거고, 기독교도라면 대개 다 그럴 거란 것을 알 수 있지요.

   또한 이런 표상체계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합니다. 예컨대 방 청소를 한다고 합시다. 바닥에 있는 책을 보고 "이건 책이고, 책은 책장에 꽂혀 있어야 하니 이건 책장에 꽂아두자" 하진 않을 겁니다. 「미시시피 버닝」이란 영화에는 어린 꼬마들도 흑인은 하찮은 존재고 경멸받아 마땅하다는 태도를 보이는 게 나옵니다. 이건 그 아이들이 사고하고 의식해서 하는 판단이 아닙니다. 의식은 이 표상체계 안에서 일어나며 표상이 의식에 선행합니다. 즉 표상체계는 무의식적으로 작동합니다.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를 '대중적인 표상체계'라고 이해합니다. 이 이데올로기 속에서 대중은 '나는 한국인이야' '나는 대학생이지' '나는 김씨 가문의 아들이지' 따라서 '나는 이렇게 해야 해'라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돈을 받았으니 그만큼 일을 해주는 건 당연해' 라는 판단도 그렇습니다.

   맑스주의에서는 이데올로기를 지배계급의 이념으로, 따라서 그것은 피지배계급에선 '허위의식'이요 거짓이고, 지배계급이 없어지면 사라질 것으로 보았지요. 또한 그것은 의식적인 것으로서, 계급의식의 종으로서 파악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본 것처럼 알튀세르는 이것이 무의식적인 것임을 주장하며, 또 그것 없이는 이 사회에서 내가 선 자리는 무엇이고, 거기서 무얼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어느 사회(심지어 공산주의사회)에서도 이데올로기는 없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알튀세르는 맑스주의에 없는 무의식 개념을 프로이트에게서, 아니 좀더 정확하게는 라캉에게서 끌어옵니다. 그리고 대중적인 표상체계인 이데올로기 속에서 개개인이 어떻게 주체로 만들어져 가는가를 분석합니다. 라캉이 무의식(타자)을 통해서 어떻게 개개인이 주체로 되어 가는지를 분석한 것과 마찬가지로 말입니다.

   요컨대 이데올로기 없는 주체는 없으며, 이데올로기 없는 실천도 없다는 것입니다. 표상체계로서 이데올로기는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사라질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이데올로기는 현실에 대한 상상적인 체험이기에,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변형시키고 왜곡시켜 보여주지요. 이래서 알튀세르는 현실은 결코 투명하지 않다고 합니다. 만약 그의 말처럼 이데올로기가 영원한 거라면 이러한 변형과 왜곡 역시 영원하단 말이겠지요?


p.326

   이제 이데올로기에 대한 알튀세르의 중요한 명재들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그는 "이데올로기─이것은 '이데올로기 일반'을 뜻합니다─는 역사가 없다"고 합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는 영원하다는 말로, 어떤 사회에도 이데올로기는 있을 거라는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이데올로기를 무의식에 비유합니다. 물론 개개의 이데올로기들이야 역사를 갖겠지만 말입니다.

   둘째, "이데올리기는 현실적 존재 조건에 대한 상상적 관계의 표상"이라고 합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나 현실관계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이럴 것이다'라고 당연시되어 있는 방향으로 변형된 관계를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있는 그대로가 아니란 뜻에서 이러한 '비현실적' 관계를 마치 '있는 그대로의 현실적 관계'로 상상하고 오인토록 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유럽에서 실업문제가 심각해지자, 취업문이 좁아진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그렇게 된 게 외국인 노동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사실 자본가들이 노동력을 싼값에 풍부하게 구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을 끌어들였고, 경기가 나빠지자 고용을 줄여서 그런 것이지요. 그러나 노동자들은 개인으로서 자본가와 계약하기 때문에 자신이 고용되지 못하는 것을 마치 다른 노동자, 특히 외국에서 이주한 노동자들 때문이라고 '오인'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고용되고 개인적으로 해고되는 걸 당연시하는 '표상체계'에 의해 상상된 관계요. 거기서 정해놓은 허구적 관계를 인정하는 '오인'입니다.

   셋째,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물질적인 효과를 갖는 물질적 존재며, 물질적 장치를 통해 존재한다"고 합니다. 이는 결국 이데올로기가 물질적 장치를 통해 제도화된 특정한 방식의 실천을 통해 존재하고 작동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무릎 꿇고 기도하라. 그러면 믿을 것이다"는 파스칼의 말을 인용합니다.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단순한 '믿음'이나 '관념'이 아니라, 매주 교회에 나가고, 가서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실천을 통해 작동하는 물질적 존재라는 겁니다. 이처럼 특정한 실천들을 지속화하는 장치를 알튀세르는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라고 합니다. 학교나 교회, 가족 등등이 그것입니다.

   넷째, "이데올로기는 항상-이미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한다"고 합니다. 이는 그의 이데올로기론에서 매우 핵심적인 주장인데, 예컨대 "너는 신의 어린 양이다" "너는 누구의 아들이다" 또는 "너는 한국인이다" "너는 백인이다"와 같이 '너는 누구'라고 불러주는 것이 호명(interpellation)입니다. 그 뒤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너는 (한국인이니) 이걸 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의 말 말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런 장면이 매우 많지요? 신의 부름을 받은 모세나 다른 선지자들이 그 부름에 따라 무언가를 합니다. 즉 신이라는 호명한 주체에 복속되어 그가 지시하는 바를 따르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건 '신의 백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집니다.


p.330

   알튀세르가 이런 비판에 대응하기 위해 제시하는 개념이 바로 '계급투쟁' 입니다. 즉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로 존립하고 작동하는 게 아니라 계급투쟁을 통해 변화되고 그것을 통해서만 작동한다"는 테제를 제시합니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는 그 자체가 대중에 대한 계급투쟁이며, 대중의 투쟁을 투섭하여 수용가능한 것으로 전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대중들이 가진 이데올로기 역시 계급투쟁을 통해 가변화된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는 또 다른 난점을 야기하게 됩니다. 다 접어두고 근본적인 것만을 본다면,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에 따르면 "이데올로기 없이는 어떠한 실천도 불가능"합니다. 그건 표상체계 없는 판단, 무의식 없는 의식이 불가능한 것과 마찬가지지요. 그렇다면 이데올로기 없이는 어떠한 계급투쟁(실천!)도 불가능한 것이 됩니다. 계급투쟁은 이데올로기 외부에 있지 않으며, 이데올로기에 의해 작동되고 설명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새로이 추가한 테제는 이 계급투쟁이 이데올로기의 성립고 변화를 설명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면 이데올로기는 계급투쟁에 의해, 그리고 계급투쟁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악순환에 빠지고 맙니다. 이는 "이데올로기의 외부는 없으며 이데올로기 없는 실천은 없다"는, 라캉적인 이데올로기 개념으로선 결코 잘라낼 수 없는 테제와 계급투쟁을 중심에 두는 맑스주의의 테제가 서로 근본적인 모순에 처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의 커다란 주제와 관련지어 요약하면, 알튀세르는 근대적인 주체철학과 인간주의에 대해 명시적인 반대의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근대적인 출발점을 벗어납니다. 그리고 거꾸로 주체나 인간이란 사회적 관계의 효과로써 만들어지는 결과물이란 점을 분명히 합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라는 명제를 이데올로기 개념의 발전을 통해 개개인이 주체화되는 메커니즘에 대한 이론으로 발전시켰습니다.

   다른 한편 초기의 과학주의에 대한 자기비판을 통해 과학주의라는 근대적 정당화주의를 벗어납니다. 그는 심지어 인식론이란 분과 자체가 부르주아적이고 법적인 정당화주의임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이데올로기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통해 진리/허위의 근대적 이분법을 깨뜨립니다. 이로써 어떤 지식이나 관념들을 하나의 현실적 실재로 간주하고 그 효과를 사고하는 이론적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스주의를 과학으로서 추구하려는 태도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았고, 그 결과 당파적 과학이라는 역설적 정의를 도입하게 되었지만 말입니다.

   결국 이러한 알튀세르의 시도는 이데올로기 개념을 통해 근대적 문제설정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노력으로 요약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도는 재생산을 넘어 항상-이미 존재하는 체계의 전복을 사고하기 곤란하다는 난점에 부닥칩니다. 그리고 보다시피 이 난점을 계급투쟁이란 개념을 통해 극복하려고 합니다. 마치 맑스가 '실천'이란 개념을 통해 근대적 문제설정을 넘어서려 하듯이 말입니다. 하지만 그가 발딛고 있는 라캉적인 이데올로기 개념은 계급투쟁 개념과 근본적으로 상충되는 모순적 요소였기에, 이러한 극복의 시도는 해결하기 힘든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하는 셈입니다.


p.337

   물론 판단은 병원과 의사가 하지요. 하지만 잭 니콜슨은 광기와 정신병을 고치려는 그들의 '치료'를 받고는 구제불능의 '병자'가 되지요. 의사들이 정상인을 정신병자로 만든 겁니다. 사라 코너를 가둔 의사들의 판단 역시 그걸 보는 우리에겐 아무런 신뢰도 주지 못합니다. 사실 그들이 사람을 병원에 수용하고 내보내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습니다. 병원에서 퇴원했다고 반드시 정상인인 것도 아니고, 병원에 있다고 반드시 환자인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 정신병원의 의사들도 정기적으로 다른 의사들에게 정상인지 아닌지 검사를 받는다고 합니다.

   요컨대 푸코는 이런 식의 매우 심술궂은 질문을 통해서 정상인과 광인 사이의 경계가 과학과 진리가 보증해 주는 확실한 게 결코 아님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경계를 허묾으로써 동일자의 외부, 정상인의 외부에 대해 사고하고자 합니다. 이는 정상인의 관점에서 광인을 사고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차라리 광인에 대해 올바로 사고하지 못하게 막고 있는 정상인으 관점, 정상인이란 환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비로소 광인의 목소리를, 타자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잇으리란 것입니다. 동일자에 의해 어둠 속에 갇혀 버린  침묵의 소리를 말입니다.

   이처럼 경계를 허묾으로써 푸코는 무엇을 하려는 걸까요? 배제된 타자에게 다시 '동일자'의 자리를 주고 복권시키려는 것일까요? 병원에 수용당하길 거부한 광인이나 차별에 고개숙이길 거부한 흑인, 혹은 규율에 따르길 거부한 범죄자를 새로운 정상인의 모델로 승화시키려는 것일까요? 물론 그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처럼 경계를 허무는 작업을 통해 기존의 동일자에 가려서 보이지 않던 영역, 비정상과 동일시되던 '외부'여서 생각할 가치도 없다고 간주하던 영역을 다시 사고할 수 있을 것이며, 우리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동일자를 새로이 사고할 수 있으리란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경계를 허물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존에 정상적이라고 간주되던 것이 얼마나 일관되지 못하고 불안정한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즉 '동일자' 내부의 균열을 드러냄으로써 동일자 자체를 해체시키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이는 주로 데리다가 사용하는 방법이지요.

   다른 하나는 동일자에 의해 배제된 타자, 그리하여 강요된 침묵 속에 갇혀 버린 타자의 목소리를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 동일자 자신이 그어놓은 경계선을 의문에 부침으로써 양자 사이에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 경계선이 어떤 식으로 그어졌나를 통해 타자와 동일자 간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푸코가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p.346

경계선의 계보학

앞서 우리는 포쿠의 기획이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뒤집으면, 그 경계선을 만들어내고 유지하려는 힘과 권력이 있다는 말이 도비니다. 그것은 분명 동일자 자신이 갖고 있는 권력입니다. 예컨대 광기와 이성 간의 경계선을 유지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그래서 광인을 가두거나 환자 취급하는 일련의 조치들이 행해지지 않는다면, 이 경계선은 결코 유지되지 못할 것입니다. 자신이 그은 경계선이 정당함을 입증하기 위해 이성은 그 경계선을 유지하는 기술자들에게 '의사'란 직책을 주며, 그것을 위한 담론(dicours;여기서는 정신병리학이란 지식을 말합니다)에 '과학'이란 이름을 제공합니다.

   나아가 이 담론을 통해 정신병이나 광인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 '주체'는 오직 의사뿐이며, 광인은 그들이 판단하고 처리하는 대로 따라야 할 '대상'이라고 정해줍니다. 정신병원에서 하는 광인들의 얘기는 어떤 것도 미친 소리일 뿐이라는 것이죠.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에서 잭 니콜슨이 간호사에게 여러 가지 항의도 하고 부탁도, 조언도 하지만 간호사는 그 어느 것에도 귀기울이지 않습니다. 그건 '미친 소리'로 정의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 의사가 취하는 조치는 심지어 그것이 '환자'를 다치게 하거나 얼빠진 사람으로 만드는 경우가 있다 해도 '치료'로서 정당화됩니다.

   그렇다면 정신병리학이란 담론이 의사와 광인(환자)을 각각 주체와 대상으로 정의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주체와 대상은 담론 안에서, 담론에 의해서 정의됩니다. 또한 정신병리학이란 담론은 의사가 환자에게 취하는 모든 조치를 정당화해 주고, 나아가 그런 조치를 강제로라도 집행할 수 있는 권력을 줍니다. 따라서 담론 안에는, 다시 말해 정신병리학이란 지식 안에는 '권력'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 지식은 권력을, 그 권력의 행사를 정당화해 줍니다. 반대로 지식 역시 자신의 정당성을 유지하기 위해 그러한 권력을 필요로 합니다. 피룡한 조치를 강제로라도 취할 수 없다면, 정신병리학이 환자들에게 어떻게 과학의 권위를 획득하고 유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래서 푸코는 '지식-권력'(savoir-pouvoir)이란 말을 합니다. 지식과 권력이 뗄 수 없는 하나의 복합체란 뜻이지요. 결국 '담론의 질서'란 담론 자체에 권력이 내장되어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담론 자체가 권력에 의해 작동하며 정당화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다른 한편 담론만으로는 이러한 권력을 유지할 수 없습니다. 정신병원이나 수용소라는 물질적 장치들이 없다면, 그래서 환자들이 당연히 수용되어야 하고 수용된 환자들에 대해선 어떠한 조치도 '과학'의 이름으로 취할 수 있는 제도와 장치들이 없다면, 담론이 제공하는 권력은 무력하게 될 것입니다. 학교라는 제도적 장치, 즉 기존 질서를 가르치며,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는가를 끊임없이 감시하고 거기서 벗어날 때면 어김없이 징벌이 가해지는 학교라는 장치가 없다면,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지식이 무력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계보학'이란 이처럼 동일자가 경계선을 긋고 유지하기 위해 작동시키는 권력의 존재를 드러내고 그것이 미치는 효과에 대해 분석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보학은 또 하나의 비판적 문제설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는 경계선이 만들어진 역사를 추적하고 침묵의 소리를 들으려는 고고학적 시도와 구분되는 것이지만, 경계선을 찾아내고 허물려는 푸코의 전체적 기획에서 보면 일관된 것이며, '고고학적' 시도를 보충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p.355

   그런데 근대적 문제설정을 벗어나려는 흐름들을 전반적으로 특징짓고 있는 '가족유사성'이 있다면, 다음의 두 가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하나는 근대철학에서는 '주체'라는 범주가 선험적인 출발점이었는데, 탈근대적 물제설정들에서 주체는 여러 가지 요인들에 의해 결고물로서 구성되는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입니다. 예컨대 그 요인이 사회적 생산관계(맑스)든, '타자'로서 무의식(프로이트/라캉)이든, 권력의지(니체)나 생체권력(푸코)이든, 혹은 이데올로기(알튀세르)든 간에 말입니다. 물론 이들이 이처럼 구성되는 주체에게 부여하는 기능이나 작용, 이론상의 위치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잊어선 안 된다는 단서를 달아야 하지만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지식을 파악하는 방식입니다. 근대철학에서 그것은 인간의 인식이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이었고, 따라서 '참된 지식'으로서만 다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탈근대적 문제설정들에서 지식은 주체를 구성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담론'으로 정의되며, 지식은 그게 참이든 거짓이든, 그게 야기하는 효과가 무엇인가를 통해 사고됩니다.

   따라서 어찌보면 주체와 지식의 관계가 근대의 그것과는 반대로 뒤바뀌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지식이 효과를 야기하는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고, 주체는 그 결과 구성된 것이 된 셈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지금가지 살펴본 입지점에서 본다면 이 두 가지 요소가 근대철학의 문제설정과 그것을 넘어서는 문제설정 사이에 경계를 그어주는 특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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