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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Mar 03. 2019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110 주현성 [지금 시작하는 인문학]

p.76

   형태의 본질을 추구하라, 폴 세잔

   20세기를 입체주의cubism가 주도하면서, 촌구석에서 혼자만의 그림을 그리다 세상을 등진 세잔은 당당하게 현대 회화의 아버지로 등극하게 된다. 과연 무엇이 그를 현대 회화의 아버지라고 칭하게 했을까?


   폴 세잔은 인상파가 지나치게 빛의 현상만을 추구하면서 흩트려놓았던 형태에 대해 불만을 가진다. 신인상파는 점묘법을 통해 형태를 다시 살려내려 했고, 세잔은 이 시점에서 진정한 형태를 찾아내려 했다. 다시 말해 빛에 의해서도 결코 변하지 않는 사물의 본질, 사물 자체가 가진 형태와 색을 찾아 화폭에 담으려고 한 것이다.

   세잔의 이러한 노력은 사물들을 원구, 원통, 원뿔 등의 기하학적인 원형으로 환원하는 것으로 나아갔다. 즉 사과 하나를 그려도 사과와 다른 것을 구별해주는 형태, 그러면서도 사과의 결코 변하지 않는 형태인 원구와 붉은색으로 파악해 화폭에 담는 것이다. 그의 그림들이 인물들까지도 딱딱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런 원래적인 형태만을 추구했기 때문이다.

   사물의 본래적 형태를 표현하려는 노력은 원근법의 시점과 명암을 붕괴시키는 데까지 나아갔다. 원근법의 기본은 고정된 시점이다. 즉 한곳에서 사물과 풍경을 바라보고 그려내야 한다. 그렇지 하지 않는다면, 그림은 사실성 자체를 쉽게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세잔은 이 기본적인 원리를 파괴해버린다. 그의 정물 그림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듯이, 그림 속의 사물을 바라보는 곳이 서로 다르다. 어떤 것은 정면에서 봐야만 볼 수 있는 모습이, 어떤 것은 위에서 봐야만 볼 수 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에게 한 시점에서 사물을 표현한다는 것은 이미 영원하지 않은 순간만을 그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물이 화가가 바라본 한 시점에 멈추어져 있는 것이며, 그것은 인상파가 추구한 빛의 순간을 파악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결국 그는 눈앞의 순간이 아닌 영원히 변치 않는 형태를 그림으로 재현해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떤 면에서 그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사물의 모습을 구현하는 것이 되어버린다. 머릿속에 사물들을 배열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점은 파괴되고, 이에 따라 명암의 위치도 분산된 시점들을 따라가면서 일관성을 잃어버린다. 이런 단초는 미술계에 커다란 혁명을 가져온다. 그것은 원근법을 파괴한 것뿐만이 아니라, 사물과 대상을 보고 재현해낸다는 기존의 그림 관을 붕괴시키고, 머릿속에 있는 사물을 재현해낸다는 주지주의의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더 놀라운 것은 그의 혁명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으 변하지 않는 사물을 재현하려는 노력은 화폭 자체의 조화라는 원리까지 나아간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사물들을 그려내는 것은 결국 그 순간의 사물을 그려내는 것 이상이 아니기에, 변하지 않는 사물을 그려낸다는 것은 바로 그 사물들 사이의 변하지 않는 조화까지 그려내야 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사물과 사물이 놓인 위치조차 하나의 변하지 않는 원리 안에 넣었고, 이는 화폭 안에서 화폭만의 조화 원리를 추구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이것은 또 하나의 대혁명의 발아가 된다. 이제 화가들은 현실을 재현하는 데서 오는 아름다움이 아닌, 그림 자체만의, 그림 내부의 미학까지 생각하게 됐다는 이야기다.

   어찌 보면 그의 새로운 그림에 대한 추구는 흡사 논리적으로 사물을 파악해내는 철학책처럼 되어버렸다. 논리와 분석에 많은 비중을 두었던 20세기 초는 어쩌면 그와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p.204

   자발성을 내포한 문화, 그리스

   그리스 문명의 뿌리인 에게문명은 4대 문명보다 비교적 늦게 시작되면서 오리엔트문명, 즉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문명의 세례를 받았다. 신화 속 미노타우로스로 유명한 미노스 왕 때 전성기를 구가한 크레타문명을 시작으로, 트로이전쟁의 승리 이후 지중해와 흑해 일대를 장악하며 절정을 이룬 미케네문명까지 이어져 내려온 에게문명. 그러나 그들은 큰 화재와 북쪽 도리스인들의 침략으로 어느 날 갑자기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때의 그리스 세계는 그 어떤 나라와의 무역도, 역사적 기록도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암흑시대'라고 불린다.

   암흑기가 지나고 기원전 8세기가 되자 이 지역에 서서히 폴리스들이 생겨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 폴리스의 환경은 곡물 생산에 적합하지 않아 흑해 연안과 아프리카 해안까지도 그 세력 범위에 넣게 된다. 이 과정에서 지중해 교역이 촉직되고 상공업도 발달하면서, 평민들 중에도 돈을 꽤 모으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된다. 우리는 이때 등장한 붕한 평민에 좀 더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그리스는 식민지를 적극적으로 전개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완전한 힘과 재정 능력을 갖춘 왕권이 존재하지 않았고, 이에 부유한 평민들은 식민지 확장을 위해 스스로 무기를 준비하고 중장보병으로 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바로 이런 상황이 평민의 정치적 목소리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었다. 이들의 목소리는 재산에 따라 정치적 권리를 준 솔론의 금권정치부터 독재 가능성이 있는 자를 추방하는 도편추방법 등으로 이어지면서 민주정치의 초석을 다지게 된다.


p.287

   육지 사이의 바다, 지중해. 어떻게 해서 이 작은 바다가 서양철학의 출발점이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단지 지지받고 있는 몇 개의 추론이 있을 뿐인데, 그중 두 개만 소개해보자.

   지중해의 바다는 여느 바다와는 다르게 작아서, 그만큼 큰 두려움 없이 쉽게 바다로 나아갈 수 있었다. 여기에 앞선 이집트 및 메소포타미아문명까지 근거리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바다로도 육지로도 쉽고 원할하게 앞선 문명을 흡수할 수 있었으며, 해상무역과 육로상의 교역 또한 활발히 전개할 수 있었다. 이러한 원할한 경제ㆍ문화적 교류는 합리적인 사고가 자리 잡을 수 있는 기반이 되어주었고, 또한 원할한 경제활동을 통해 얻은 막대한 부는 지적 호기심을 펼칠 수 있는 여유와 적극적인 정치 참여라는 여건을 선물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이유도 지리적 특성과 관련되어 있다. 수많은 섬과 해협, 좁은 산등성이 등으로 이루어진 이 지역의 특성이 중앙집권화를 어렵게 했다는 것이다. 쉽게 거대한 왕에게 통합되지 못함으로써 논의와 합의를 통해 연합체를 움직여나가야 했던 것이다. 이는 수평적인 담론을 만들어냈으며, 민주적인 의사결정을 유도해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런 민주적 제도의 추진에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스스로 무기를 가지고 출전하는 중앙 보병의 역할도 컸을 테지만 말이다.

   어쨌든 지중해의 지리적 특성과 어울리며, 그리스 세계는 다른 곳과는 다른 다양한 철학적 의견이 개진되거나 살아남을 수 있었다.


p.292

   그렇다면 파르네미더스는 무슨 철학을 보여준 것일까?

   그는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생성과 변화가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하여 추적해가기 시작한다. 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존자핸다는 것에 대하여 추적해가기 시작한다. '존재하는 것'이 있다고 하자. 이 존재하는 것이 만약에 헤라클레이토스가 말한 것처럼 생성된 것이라면, 이 존재가 무에서 나와야 한다. 즉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존재가 나와야 하는데, 이 무에서 무엇인가가 나올 수 있다면 이 무는 '무엇인가를 내포하고 있던 무'라는 것이다. 결국 이 무는 완벽한 무가 아니라 무엇인가가 이미 존재해 있던, 또는 어떤 속성이 존재하는 무가 된다. 결국 무가 무가 아닌 것이 되므로, 소멸 또한 같은 논리로 불가능하게 된다. 존재했던 것이 스스로를 무화시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다는 것, 그것 또한 납득하기 힘든 논리이기 때문이다. 이제 존재는 생성도 소멸도 할 수 없다. 이 말장난 같은 논리의 전개로 철학사는 발칵 뒤집히고 만다. 이제 무에서 존재가 만들어질 수는 없다. 존재한다는 것은 이미 존재했기 때문이며, 소멸도 불가능하다. 그 결과 세계는 무에서 생성된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것일 수밖에 없다. 생성도 소멸도 하지 않고 늘 존재하는 것뿐이며, 이미 존재했던 세계만이 있는 것이다. (중략)

   그렇다면 두 번째 가설이었던 존재와 존재 사이에 무가 없다고 가정해보자. 이것도 같은 결과를 초래한다. 존재와 존재 사이에 아무것도 없으니, 존재는 하나의 덩어리가 된다. 이것이 바로 그가 말하는 그 유명한 '파르메니데스의 일자一子'다. 나누어지지도 분리되지도 않는 오직 하나의 덩어리. 이 일자의 탄생은 철학사에서 너무나도 큰 의미를 제공한다. 이제 존재는, 아니 세계는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일 뿐이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변화와 운동을 한다는 것도 모순적인 것일 뿐이다. 세상은 거대한 하나의 덩어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변한다 해도 그저 거대한 덩어리일 뿐이고, 운동을 한다 해도 그저 거대한 덩어리일 뿐이다. 결국 진정한 존재의 변화와 운동이란 있을 수 없으며, 스스로 영원하며, 불면하고, 충만한 것이다. 이 변화와 운동에 대한 부정은 이후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키지만, 그의 존재의 절대성과 일자 개념은 이후 많은 철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며 감각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새로운 세계를 상정하게 만든다.

   즉 우리가 생성과 소멸, 변화와 운동을 파악하는 세계는 감각의 세계일 뿐이고, 오직 이성으로만 파악되는 진정한 세계는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처럼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성으로만 파악되는 로고스의 세계가 현실 세계와 분리됨으로써 서양철학만의 특징이 더욱 선명해지게 된다. 또한 파르메니데스의 이러한 논리적 전개를 통한 세계 파악의 시도는 밀레토스 학파에서는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인식론적 접근을 열어준 것이기도 하다.

   정리해보면, 어떤 면에서 극과 극을 이루는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를 화해시키는 노력이 서양철학을 추동하는 힘으로 작용했닥도 할 수 있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변화와 운동, 그리고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와 같은 불변의 존재, 이 둘을 조화시켜 설명해내기 위한 노력이 이후 유물론자뿐 아니라 서양철학의 거장이라 할 수 있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주 과제였기 때문이다.


p.295

   하지만 고대철하게 있어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디데스 두 사람의 논쟁을 가장 조화롭게 화해시키면서도, 오늘날의 과학과도 매우 유사하게 설명해낸 이는 기계론적 유물론materialism을 선보인 데모크리토스다. 그는 파르메니데스의 생성과 소멸을 하지 않는 불변의 존재를 수용하고 그 존재를 원자라고 못 박았다. 이 원자는 파르메니데스가 설정한 참된 존재처럼 영원한 불변성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 원자를 하나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다수로 상정하고, 형태ㆍ크기ㆍ위치 등을 지닌 구체적 물체로 생각했으며, 운동도 한다고 정의했다. 그는 그것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파르메니데스가 무라고 했던 비존재의 공간을 빈 공간으로 바꾸어놓았다. 즉 있으나 마나 한 제거해버려도 아무 상관이 없는 언어적 의미의 무리는 공간에서 넓이를 가지고 실재하는 빈 공간을 설정함으로써 하나의 덩어리가 아닌 다수의 존재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제 우리가 보고 있는 물체들은 파르메니데스의 일자에서 허상으로 떨어져 나온 환상이 아니라, 미세한 존재들의 덩어리들이 다양하게 뭉쳐진 것이 된다. 오늘날 원자와 분자가 뭉쳐 공기나 철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이는 그동안 밀레토스 철학자들이 설명한 변화와도 다르다. 그들은 물이나 공기가 질적 변화를 가져온다고 했지만, 그는 존재들의 덩어리가 만드는 양적인 조합의 변화로 설명해내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다 그는 원자 자체가 가지는 운동 능력까지 상정한다. 그는 외부의 힘이 아닌 원자 자체에 운동 능력을 부여함으로써 원자가 스스로 뭉치거나 흩어지는 운동을 통해 물체가 생성되거나 소멸하며, 원자들의 집단적 움직임을 통해 물체들의 운동까지도 설명할 수 있게 된다. 이는 추상적인 생성과 변화 운동 논리가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생성과 변화 운동 논리로 변하면서 좀 더 물질적이고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생성과 변화 운동 논리로 변하면서 좀 더 물질적이고 유물론적인 전제를 갖게 된 것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점들이 데모크리토스를 기계론적 유물론의 창시자이며, 고대 유물론 철학의 완성자라고 하는 이유다. 또한 언어적 무에서 공간적 무로의 전환은 마치 관념론적인 무가 유물론적인 무로 설명되는 듯한데, 이는 철학사의 영원한 대립인 관념론idealism과 유물론materialism의 대립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p.309

   그(아리스토텔레스)는 또한 과학은 하나의 사실로부터 다른 사실을 알아낼 수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는데, 이때 유용한 논리적 추론 방법으로 내세운 것이 바로 삼단논법syllogism이다. 이는 어떤 전제들을 통해 결론을 이끌어내는 연역적 방법 중 하나다. 가장 흔한 예를 들어보자.


모은 인간은 죽는다. (대전제)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소전제)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결론)


   이때 대전제와 소전제가 참이라면 결론도 참임을 추론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논법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소전제의 술어에 해당하는 '인간'은 대전제의 주어인 '모든 인간'에 포괄되어야 한다. 결국 이 논법이 참이 되려면 꼭 지켜야 할 형식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저서 『오르가논Organon』에 소개된 이 삼단논법은 논리적 추론에서 형식적 부분에 대한 탐구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는 형식논리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며 이후 많은 과학적인 연구에 힘을 보태게 된다.

   그런데 아무리 삼단논법에 따라 참을 구한다 해도 그 전제가 틀리면 그 결과는 과학과는 동떨어진 결론이 나오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분명히 하고 있다. 그는 올바른 전제에서 출발해야만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이때 사용되어야 할 전제들은 꼭 참이어야 하며 이를 제1원리라고 불렀다. 즉 논리적 추론이 참이 되기 위해서는 참된 제1원리들을 전제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제1원리들은 연역적 방법으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못 박고, 사물에 대한 다양하고 지속적인 관찰을 통한 귀납적 방법만이 기본원리를 얻을 수 있다고 역설했다. 그가 여기서 분명히 하고 있는 경험적이고 귀납법적인 지식 습득의 중요성은 스승의 철학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경험 과학적이고 현실적인 면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루는 중요한 특징으로, 이후 경험론과 유물론 철학은 물론 근대 과학적 방법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역할까지 하게 된다.

   그는 윤리학과 정치학에서도 그의 스승과 커다란 차이를 보여준다. 플라톤은 선의 이데아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그런 선의 이데아라는 것은 애매한 것이며 그것을 깨달은 사람이 정말 뛰어나리라는 보장도 없다고 주장한다. 이에 그는 선은 모든 사물과 개체가 추구하는 '목적'이라 보고, 그 목적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사람들의 목적이 '진정한 행복'이기에 선 또한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된다. 물론 그에게서 행복 추구는 방탕함이 아니라 사색이나 중용과 같은 덕과 함께하는 것이다.

   이런 두 사람의 차이는 특히 정치학에서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선 플라톤에게서는 스승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물고 간 민주정에 대한 불신과 귀족 신분이었던 그의 보수적 성향을 읽을 수 있으며, 그만큼 철인 왕이라는 한 개인의 판단에 의존하는 국가를 상정하고 있다. 반변 목적론에 입각해 세상을 파악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의 목적이 인간의 선한 삶을 보장해주는 것으로 여겼다. 이에 현실에서 국가의 통치자들이 모든 사라을 위한 선한 정치를 하지 않는 경우 문제가 생길 수 있으며, 이 때문에 정치에서의 정의와 평등은 중요한 전제가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그는 중간 계급을 국가의 중심으로 보고 그들이 정치에 더 많이 참여할수록 국가는 인간의 선한 삶을 더 잘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스승과 반대로 민주주의적인 색채를 강하게 내포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진보적 성향으로 인해 그의 철학은 종종 진보적인 주장들에 인용되어 왔다.


p.319

   그리고 여기에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대가인 아퀴나스가 등장함으로써 온건 실재론은 한 번 더 자리 굳히기를 시도한다. 그는 먼저 이데아 같은 보편자가 존재한다고 말한다. 중요한 점은 사람들, 사자들, 해바라기들, 장미들, 아름다운 것들, 정의로운 것들이 있기 전에 이것들을 식별할 수 있게 해주는 보편자가 신의 정신 안에 미리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이로써 보편은 사물의 외부에 존재하지만 신의 정신 안에서 신성한 이데아로 존재하게 된다. 그의 보편자에 대한 설명이 여기서 끝났다면 그는 단순한 실재론자로 중재자의 역할을 달성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뿐만 아니라 아벨라르두스의 논리까지 모두 섞어 넣었다. 그는 "또한 보편은 모든 개체들에 구체적이고 개별적이 본질로 사물 내에 존재하고, 이 개체들에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본질로 사물 내에 존재하고, 이 개체들에서 보편 개념으로 추상된 후에는 정신 속에서 존재한다"고 덧붙인 것이다.

    아퀴나스는 신의 실재 여부와 관계된 이 보편 논쟁을 이 정도에서 마무리 짓고, 오히려 경험적 사실에 근거하여 신의 존재 증명을 접근해갔다.

   이 경험적 사실이란 지식은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부터 시작하여 합리적 이해로 나아간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입각한 것으로, 그는 방법 역시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전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는 먼저 모든 사물이 운동 속에 있다고 말하면서, 그 운동들이 가능하려면 최초의 운동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 최초의 운동자를 신이라고 증명한다. 두 번째는 '작용인'을 통한 증명으로 책상의 작용인은 목수, 목수의 작용인은 목수의 부모 등으로 작용인을 찾아 계속 타고 올라간다. 그리고 그 결과 제1의 작용인이 신이라고 증명해낸다.

   다음은 필연적 존재를 통한 증명인데, 이는 세계의 사물들은 가능성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전제한다. 하지만 이런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우연적인 것이 생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연적인 것이 존재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바로 이 필연적인 것이 바로 신이라고 증명한다.

   다음은 존재의 완전성을 통한 증명이다. 그는 사물들은 제각각 완전성 정도가 다르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그 사물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비교기준이 되는 완전한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완전한 비교기준이 바로 신이라고 증명한다.

   다음은 존재의 완전성을 통한 증명이다. 그는 사물들은 제각각 완정성 정도가 다르다고 말하면서, 우리가 그 사물을 비교할 수 있는 것은 비교기준이 되는 완전한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리고 그 완전한 비교기준이 바로 신이라고 증명한다.

   마지막으로 세계의 목적을 통한 증명이 있다. 그것은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질서 정연하게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간다는 것을 전제로 한 것으로, 사물들을 목적으로 인도하는 지성적인 존재가 바로 신이라고 증명한다. 이렇듯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신을 증명해낸 그의 증명에는 누구나 쉽게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아리스토텔레스의 흔적이 강하게 스며 있다. 사실 아우그티누스가 신플라톤주의를 통해 세운 논리들은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상들이 유입되면서 흔들렸고, 중세의 가장 큰 논쟁인 보편 논쟁으로까지 이어졌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아퀴나스는 바로 그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용해 논쟁을 일단락시켰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 신을 증명해 보임으로써 그때까지의 신학을 재정립해 보인 것이다.

   바로 이런 점이 그의 신학을 더욱 신뢰하게 만들었으며, 그를 아리스토텔레스에 기반을 둔 스콜라철학Scholasticism의 완성자로 칭할 수 있게 했다. 하지만 그의 위대함은 어쩌면 전혀 다른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철학을 이용해 많은 것을 증명해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철학이 모든 것을 증명할 수 없다고 못 박은 것에서부터 기인한다.

   그는 철학이 신의 존재나 영혼의 불멸성 등을 증명할 수 있지만, 계시나 삼위일체, 부활, 최후의 심판과 같은 기독교적 진리들을 증명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그것들은 오직 초자연적인 존재를 성서의 권위로 뒷받침하는 신학의 몫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방법에 있어 철학은 창조된 사물에서 출발하여 하느님에게 이르고, 신학은 하느님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둘이 서로 방법이 다를 뿐, 둘 다 하느님에게서 나오기 때문에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고 못 박았다. 그 결과 교리들은 초이성적일 수는 있어도, 비이성적일 수는 없다. 즉 이성에 배반되는 교리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관계 속에서라면 철학과 이성은 신학과 신앙에 도움을 줄 수 있게 되며, 서로 조화로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 시점이다. 그는 이렇게 신앙과 이성을 조화시키며 두 영역 모두의 정당성을 부여하게 되는데, 이는 그동안 줄곧 신앙에 의해 무시되어 온 이성의 영역에 힘을 실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제 철학과 이성은, 아니 신이 아닌 인간의 이성은 독자적인 논리로 신앙과 양립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의 탄생을 준비하는 것과 다름없는 것으로, 신의 영역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 이성의 탄생, 그리고 신앙과 철학의 분리가 준비되기 시작한 것이기도 하다.


p.323

   이런 스코투스의 바통은 날카로운 면도날로 알려진 오컴의 윌리엄이 이어받는다. 그의 별명이 면도날인 것은 그의 논리가 면도날이기 때문이다. 그는 논리를 전개하고 설명하는 데 있어 쓸모없는 것들을 모두 잘라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논증에서 꼭 필요한 최소한의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며, 동일한 현상을 설명할 때 복잡한 설명보다 단순한 설명이 더 정확한 설명일 수 있ㄷ고 역설했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원리를 먼저 신학 문제에 적용했다.

   그는 모든 신학은 계시된 것이므로 인간이 다양한 가설을 세울 수는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이런저런 설명이 들러붙은 가설일 뿐, 신에 의해 계시된 그 진리를 이성을 가지고 확립할 수는 없다고 못 박았다. 이는 그동안의 다양한 가설들을 통해 제시된 많은 명제들을 믿기 했어도, 증명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것과도 같은 이치다. 사실 복잡한 가설들을 제거해버리고 나면 현실 세계가 필연적 존재에 의존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의존한다 할지라도 그 필연적 존재가 하느님인지도 알 수 없으며, 하느님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런 속성들을 가지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오컴에 의해 이제 신학은 인간의 이성으로 볼 때 어떤 법칙이나 원리에 의한 것도 아니며, 인간의 이성 또한 신학의 견지에서 볼 때 전혀 소용없는 말 만들기일 뿐이다. (중략)

   이 후기 스콜라철학자들의 도전으로 더욱 견고해진 유명론은 이데아 같은 추상적인 개념보다 구체적인 현실 사물에 대한 관심을 강화시켰을 뿐 아니라, 개별 사물을 인지하면서 인식의 전개를 시작하는 근대의 경험론이 열리는 길을 만들어주었다. 또한 신의 의지와 이성의 논리를 별개로 본 이들의 시도는, 신학과 철학을 완전히 분리해내는 역할을 했다. 신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철학, 신앙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이성, 이 역시 근대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대화법을 시작으로 엄밀한 언어의 정제 과정을 추구했던 소크라테스로부터 시작된 철학은 플라톤에 이르러 보편이라는 실재론을 만들어냈고, 이것이 결국 유명론에 의해 송두리째 흔들려버리는 과정처럼 보인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당연한 것으로 형성된 신과 이성을 하나로 보는 관점이 그 스스로 한계를 드러내는 과정으로도 보인다. 그래서일까? 신을, 그리고 신의 교리를 애써 증명해 보이려던 중세의 철학은 어떤 면에서 왠지 부질없어 보이기까지 한다. 그렇다면 이 중세철학은 무엇을 남긴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좀 더 촘촘해진 논리와 형식, 다양한 인식론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 신앙과 이성이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것들을 알아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p.330

   그렇다면 이렇게 찾아낸 공리들이나 공리들을 통해 전개하는 세계에 대한  지식은 과연 신뢰할 만한 것일까? 나의 존재를 증명했다고 해서, 나 이외의 다른 것들에 대한 지식은 과연 명확한 것이 될 수 있을까?

   데카르트는 바로 이런 물음에 답하기 위하여, 중세인들이 그러했듯이 다시 신의 존재를 불러들인다. 그는 의심하고 있는 자신으로부터 불완전성을 쉽게 자각할 수 있는데, 이 불완전성을 자각한다는 것은 역으로 완전성에 대한 인식을 함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즉 완전성이라는 기준이 존재하기에 불완전성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것으로, 완전성은 오직 완전한 존재인 신으로부터 온다고 본 것이다. 이런 식으로 신의 존재를 증명한 데카르트는 인간의 지성 또한 신이 부여한 것이기 때문에 명석판명하며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신이 선하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이 달라붙게 된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슬프게도 그의 모순과 한계성을 목격할 수밖에 없다. 한때 자신의 생각이 악마의 조정을 받는 것일 수도 있다고 전제한 그가 어느새 신의 확실성 안에 놓이게 되는 순환 논리에 빠져 있게 된 점과 무엇보다 '신은 선하다'라는 중세의 기본전제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신이 중세의 신처럼 인격신을 지칭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서 신은 절대적이면서도 이성의 근거가 되는 추상적 신이 된다. 그는 신의 존재 증명을 중세처럼 신을 위해 철학을 봉사시키려는 의도가 아니라, 인간 지성의 명석판명함과 신뢰를 확보하기 위해 신을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렇듯 신을 활용해 인간의 정신에 대한 확신을 얻어낸 다음, 정신과 물질에 대한 이원론을 전개한다. 그는 물질은 정신에서 나올 수 없고, 정신 또한 물질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정신은 '사유'를 특징으로 하는 것이기에 공간을 점유하는 개념인 연장을 가질 수 없고, 물질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공간을 차지하는 연장을 가질 수 없고, 물질은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공간을 차지하는 연장을 꼭 갖게 된다는 것이다. 즉 물질의 특징은 연장이 되는 것이다. 결국 이 둘은 각각이 전혀 다른 실체이며, 그렇기 때문에 전혀 다른 법칙의 지배를 받게 된다는 것. 이로써 물질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만들어놓은 수많은 범주의 늪에서 걸어 나올 수 있게 된다. 이제 물질을 탐구할 때는 형상이나 질료, 목적인이나 작용인 등을 논하지 않고, 오직 수학과 기하학 등의 명확한 과학적 탐구방법에 입각해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물리학의 시각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 이 기계적 세계관은 근세 세계관을 대표하는 특징 중 하나로, 데카르트의 공헌에 힘입은 바가 크다 하겠다.


p.357

철학자의 상징이 된 칸트

그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빈틈없이 종합해냈고 이성의 한계를 명확히 하면서 철학의 거장이 되었다.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하는 법을 배워라"라고 말한 그는 최초의 직업 철학자이면서 철학자의 상징이며, 이성의 상징이기도 하다. 오늘날에도 그 영향력이 사그라지지 않고 있다.


p.356

   순수이성비판, 합리론과 경험론은 통합 가능한가?

   칸트는 대륙의 합리론에 심취해 있었다. 인간은 경험에 의하지 않고도 이성의 힘으로 보편타당한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는 합리론, 이를 충실히 따라가던 칸트에게 경험론 철학은 충격이었다. 특히 경험만이 인간 지식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주장을 넘어 '인간관계'마저 부정해버린 흄을 만났을 때, 그의 철학세계는 요동쳤다. 그래서 그는 "흄이 자신을 독단의 잠에서 깨어나게 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경험론자들을 완전히 동조한 것은 아니다. 경험론은 여전히 반드시 옳다고 주장할 만한 근거를 찾지 못해 회의적인 것이었고, 합리론이 주장한 이성의 명료함이나 본유관념 또한 그 가능성이 그대로 살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두 철학의 통합을 시도한다.

   『순수이성비판』은 '왜 형이상학은 대접받지 못하고 있는가?'에서부터 시작한다. 그의 눈에 철학은 근대에 이르러 커다란 성과를 보인 수학과 자연과학에 비해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합리론과 경험론으로 나뉘어 논쟁만 벌일 뿐 갈피를 못 잡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는 이 두 이론 모두 전혀 성과를 내지 못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수학의 성과는 합리론의 도구를 훌륭하게 사용한 결과이며, 자연과학의 성과는 경험론의 전제들을 성공적으로 적용시켜나간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만큼 그들의 전제와 방법의 가치는 인정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형이상학은 실패하고만 것일까? 이에 그는 "과연 형이상학이 가능하긴 한 거인가?"라고 물으며 이를 파헤쳐가겠다고 포문을 열었다.

   그는 이 모험을 시작하기 위해 먼저 분석판단과 종합판단이라는 두 가지 판단을 제시한다.

   우선 분석판단은 주어가 이미 술어를 포함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즉 '공은 둥글다' 같은 명제로, 공이란 이미 '둥글다'라는 술어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서, 주어의 속성을 분석하여 판단할 때 바로 답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분석판단은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를 알기 위해 여러 공을 조사하러 다닐 필요가 없이, 논리적 관계만을 비교 판단하면 된다.   

   반면 종합판단은 '공이 노랗다'와 같은 명제로, 문장의 주어와 술어를 비교하는 것만으로 그 진위를 알 수 없고, 그 사실 여부를 경험 세계에서 확인해야만 하는 판단을 말한다.

   이 중 분석판단은 경험과는 문관하게 논리적 관계를 따지므로, 합리론자들이 주장하는 선험적 원리에 해당한다. 그러나 분석판단은 이미 술어가 포함된 주어의 논리적 관계만을 따질 수 있으므로, 새로운 사실이나 새로운 지식을 추가할 수가 없게 된다. 단지 분석판단은 인식을 명료하게 해줄 뿐인 것이다. 역으로 종합판단은 주어가 반드시 술어의 내용을 담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많은 사실들을 다룰 수가 있다. 그리고 경험ㅇ르 통해 비교판단함으로써 많은 지식을 확장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이는 경험ㅇ르 통해 사실 여부를 판단하는 경험론자들의 원리에 부합한다. 그러나 종합판단의 단점은 보편타당한 지식을 획득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보편타당한 지식을 경험을 통해 얻으려면, 베이컨이 주장한 대로 모든 경험을 빠뜨리지 않고 수집하고 일반화해야 하는데, 그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제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의 장점들만을 취함으로써 확실한 지식에 도달하고자 했다. 그에게 확실한 지식이란 합리론처럼 선험적이면서도, 경험론처럼 종합판단적인 것이어야 했다. 그러므로 선험적 종합판단이 성립한다면, 선험적이기 때문에 보편적이고 필연적일 것이며, 종합판단이기 때문에 지식을 계속적으로 확장시켜나갈 수 있는 것이었다. 이에 그는 확실한 지식의 예로 '7+5=12'라는 수학적 명제를 들고, 이를 선험적 종합적 판단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주어인 '7+5'는 술어인 '=12'를 개념적으로 포함하지 않기 때문에 종합판단적이며, 주부와 술부의 결합이 경험에 의존하여 파악되기보다 순수한 직관에 의해서 인식되기 때문에 선험적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선험적 종합판단의 가능성을 확인한 그는, 이제 자연과학과 형이상학에도 그것이 가능한지를 추적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이 추적 작업을 시작하면서 과거 인식에 대한 탐구들이 가지고 있던 한계를 보게 된다. 그동안 합리론자와 경험론자 모두, 외부 사물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듯 그 사물을 본뜬 모습을 마음속에 만들어낸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것은 과거 모든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과거 모든 철학자들이 외부 사물에 대해 정신은 수동적으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칸트는 그 반대라고 주장한다. 마음이 단순히 외부세계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활동에 의해 외부 세계가 구현된다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마음에 어떤 모양의 그릇이 있어 외부 사물과 경험들이 그 그릇에 담기며 그스의 모양에 따라 형체가 정해지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인간에게 선험적으로 인식 형식이 있고, 인식의 재료가 되는 경험들은 이 주관적인 인식 형식과 결함됨으로써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인식과 경험은 일치를 이루고 그만큼 명료하고 객관적인 지식이 보장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전혀 새로운 관점은 결국 고대로부터 시작된  철학의 전형적 인식을 뒤집고 새로운 인식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훨씬 견고하고 정밀한 발판이었으며, 철학사적으로 가장 큰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이었다. 그의 명성은 바로 이런 거대한 전환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p.368

   근대를 완성한 체계

   이제 헤겔은 사물의 법칙들을 뛰어넘어 생명을, 특히 인간과 인간만이 갖는 의식을 통해 세계의 변화와 역사의 발전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런 만큼 의식은 사물이 아닌 생명을, 그중 인간의 독특한 의식을 대상으로 변증법적 작용을 시작하게 된다.

   의식은 인간을 대상으로 하면서, 상대방이 자신을 바라보듯 자신을 바라본다. 그로 인해 '자기의식'이 생긴다. 문제는 내 의식의 주체인 자기의식은 타인을 동등한 자기의식을 가진 존재로 대하지 않고, 자기의식이 없는 생명처럼 취급하려고 한다. 결국 자신의 자기의식만 인정받기를 바라는 인간들은 치열한 투쟁을 시작한다.

   투쟁에서 승리한 자는 주인이 되어 자신의 자기의식을 인정받고, 패한 자는 주인의 명령에 따르며 목숨을 연명하는 노예가 된다. 주인은 놀고먹고 즐기며, 노예는 어쩔 수 없이 노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 노동은 노예에게 있어 더없이 중요한 것이 된다. 노예의 노동은 자연의 원상태를 부정하고 자신의 뜻대로 자연을 변형하는 것이다. 노예는 노동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자연 속에 투영하고, 자연은 노예의 뜻대로 변해간다. 노동으로 인해 인간의 본질인 자기의식이 자연 속에서 실현되는 것이다. 이로써 노예도 스스로 자기의식을 인정받고 주인의식을 획득하게 된다. 반면 주인은 그동안 노예의 노동에 의존해 살아옴으로써 독자성을 잃고 의존하게 된다. 이로써 헤겔이 말하는 주인이 노예가 되고 노예가 주인이 되는 변증법적 반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식을 획득한 노예는 주인도 자신도 자기의식이 있음을 안다. 즉 누구나 자기의식이 있음을 인정하는 보편적 자기의식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주인도 자유로워야 하지만, 자신도 인간이기 때문에 자유로워야 한다는 '보편적 자유'의 이념도 함께 깨닫고, 노동을 통해 그 이념을 실현해나가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주인의 자유'에서 '보편적 자유'로 나아가는, 전근대적 인간관계에서 근대적 인간관계로의 변화를 보게 된다.

   어찌 보면 역사는 왕이라는 한 사람의 자유에서 시민사회라는 모두의 자유로 확대되어가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자유가 확대된 시민사회를 헤겔은 노예가 주인이 되는 사회라고 말하고 있다. 시민사회에서는 각 구성원이 다른 사람이 소비한 상품을 공급한다는 면에서 노예이고, 다른 사람이 소비할 상품을 공급한다는 면에서 노예이고, 다른 사람이 생산한 상품을 향휴한다는 면에서 주인이 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헤겔의 이 변증법은 그렇기 때문에 시민사회 창출의 논리로서의 역할을 한다. 이는 또한 변증법을 통해 노동이 인간의 본질이며 의식이 발전해가는 원동력임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로써 철학이 노동의 중요성과 가치에 대해 언급하기 시작한 것이며, 이후 마르크스가 이를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발전시켜나가게 된다.

   이제 인간의 자기의식은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거쳐 보편적 자기의식으로 진화했다. 이 보편적 자기의식이 이성이다. 이성은 주인과 노예 모두에게 타당한 보편적 의식이며, 인식을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공통된 의식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모든 개개인이 갖고 있는 칸트의 이성이다. 헤겔은 이제 본격적으로 칸트의 이성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비판을 가하기 시작한다.


p.379

   망치를 든 철학자 니체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깊은 감명을 받으며 자신의 새로운 철학ㅇ르 전개한 니체. 그는 헤겔의 거대한 체계에 반기를 들었다기보다, 서유럽의 모든 지적 전통에 반기를 든 철학자라 할 수 있다.

   그는 젊은 시절 유럽 문명의 기원을 논하면서부터 유럽 문명에 대한 비판을 시작했다. 그는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타나는 그리스 사회의 미적 가치를 설명하면서 제법 조화로운 것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를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신들의 이름을 빌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설명해내고 있다.

   여기서 아폴론은 태양신으로 질서와 이성, 냉철함을 상징하며, 그리스 조각과 조형예술에서 볼 수 있듯이 형식적 질서 속에서 미를 창조해내는 것을 대변한다. 반면 디오니소스는 술과 축제으 신으로 광기와 정열, 감성을 상징하며, 삶의 무한한 생명력과 혼돈 속에서 미를 창조하는 것으로 음악에서 그 예를 쉽게 볼 수 있다. 이 둘은 조화를 이루며 혼합되는데, 그 좋은 예를 그리스의 비극에서 찾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 위대한 조화는 이성을 중시하는 소크라테스의 등장으로 무너져버렸다고 한다. 이제 창조적 정열의 힘은 사라지고, 질서만을 강조하는 경직된 이성만이 만연하게 된다. 여기에 기독교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 불균형은 더욱 악화되고 고착화되어 나갔다고 그는 역설했다.

   바로 이런 근거를 시작으로 그는 서구 유럽 사회를 지배하는 기독교와 도덕 체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나선다. 그는 모든 사람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도덕 체계는 존재하지 않으며,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 보편적인 도덕 기준을 들이댈 수는 없다고 주장했다. 특히 기독교야말로 신의 이름으로 보편적인 도덕을 앞세워 인간의 생명력을 말살하곡 변변치 못한 삶으로 추락시켰으며, 심지어 노예의 도덕을 갖게 했다고 역설했다. 본디 강한 사람의 도덕인 주인의 도덕은 선악에 지배받지 않으며, 넓은 도량과 고매한 영혼, 영기 등을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은 삶을 긍정하는 힘을 갖게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반대로 주인의 도덕을 시기하며 이에 대항하기 위해 나타난 노예의 도덕은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이 결여된, 고대의 어리석은 노예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한다. 이 힘없는 약자들의 도덕은 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동정, 박애, 자비와 같은 덕목을 선이라고 주장하는데, 그 진실은 용감하게 행동할 용기가 없는 두려움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이며, 그 결과 그 덕목들 속으로 숨어 들어가려는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제 그는 비겁자의 도덕이요 노예의 도덕인 기독교의 도덕을 부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현재 유럽 사회에서 통용되는 선악의 구별은 거짓이며, 인간성을 특징짓는 것일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오히려 인간을 특징짓는 것은 자신을 개선하고 환경을 개선하려는 의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권력에의 의지'라고 불렀다. 이것이야말로 자기를 실현하고 자기의 환경을 지배하여 더욱 강하게 성장하고자 하는, 모든 존재가 가진 가장 근원적인 힘이며 내적인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의 눈에 유일한 실재는 생성하며 솟구치는 자연이었으며, 생의 유일한 원리는 힘을 갈망하는 권력에의 의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이러한 힘을 부정하고 비겁자를 만듦으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거짓을 자행했다고 말한다. 이에 그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갈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기독교 도덕이 붕괴되어버린 곳에서 시작되는 것이나, 그렇다고 도덕 그 자체를 부정하는 허무주의는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직 강자의 도덕이며, 권력에의 의지가 마음껏 발휘될 수 있는 초인의 시대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가 불러낸 초인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그가 말하는 초인은 자연 진화를 넘어선 '예외적인 인간'이며, 주인의 도덕을 가지고 권력에 의지를 그대로 행하는 강한 자이다. 그는 모든 가치를 스스로 재평가하는, 그래서 아무런 내적 거리낌을 갖지 않는 자유로운 인간이며, 그렇기에 실로 진정한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이며, 심지어 영겁회귀를 끌어안을 만큼 무한한 긍정을 가진 자라 할 수 있다. 영겁회귀eternal recurrence란 일체의 사물이 그대로 무한히 되풀이되는 것으로, 그와 같은 인식의 발견도 무한히 되풀이됨을 의미한다. 자, 한번 생각해보라. 매번 똑같은 일이 무한히 되풀이되는 이 지겹고 고통스러운 삶, 그것조차 직시하며 받아들이며, 무한한 긍정으로 맞받아치는 초인의 강인함을…….

   우리는 이 시점에서 왜 니체를 현대 철학의 거장이라고 칭하는지, 그 의미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자라투스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그의 책을 통해 우리가 너무 많이 들어 익히 알고 있는 "신은 죽었다"라는 말은 이제 그 의미가 더욱 풍부해져 있다. 그는 단순히 신의 죽음만을 의미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을 지탱하던 이성이, 그 위에 세워진 서구 유럽의 모든 것이, 근대를 지탱하던 인간에 대한 확신이 모두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외치고 있는 것이다. 


   p.386

   졸업 후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의 편집진으로 들어갔지만, 이 신문이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발간 금지 처분을 받자 망명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이후 그는 파리에서 급진적 정치사상을 접하면서, 마침내 자신만의 사상을 정초해내기 시작했다. 그는 먼저 헤겔이 인간의 본질로 파악한 노동의 개념을 수용하고 노동의 가치를 옹호했다. 그 또한 헤겔처럼, 인간이 노동을 통해 자연을 자신의 의지대로 변형하며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의 노동은 불행히도 자유를 얻는 노동이 되지 못한다고 꼬집었다. 그는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는 우선 분업을 통해 그의 노동으로부터 소외된다고 주장했다. 자신이 하나의 상품을 온전히 완성해내지 못함으로써, 시장에 나와 있는 상품 속에서 자신의 노동의 가치와 의미를 확인하지 못하고 소외되어버린다는 것이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만든 것이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하고 자본가의 소유물이 됨으로써 소외된다는 점이라고 그는 강조하고 있다. 고급 승용차를 생산하는 것은 노동자들이지만 정작 그런 차는 부유한 사람만이 향유함으로써 생산물로부터 완전히 소외되어버리는 것이다.

   결국 인간은 자유를 얻는 노동이 아니라 단지 생존하기 위해 힘겨운 노동을 지속해야 하는 상황에 몰린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이 이 소외를 극복하고 인간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 경제의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에 그는 평생의 동지가 된 엥겔스와 함께 『독일 이데올로기』를 펴내면서부터, 유물론을 철저히 적용시키지 못했던 헤겔좌파 및 기존의 사회주의자들의 사상과 결별하고, 과학적 공산주의의 길을 열게 된다.


p.431

   이제까지의 철학은 (   )에 넣어두어라

   후설은 이 질문을 끝없이 물고 늘어진 결과, 심리적으로는 결코 입증될 수 없는, 아무런 것을 전제하지 않아도 자명하게 말할 수 있는 진리라는 것이 오직 한곳에서 입증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의식이라는 곳이다. 적어도 우리의 의식 위에서만큼은 수학적 진리나 논리적 진리가 진리로서 명료하게 입증되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그는 이 의식이 의식하는 대상과 이런 대상들을 의식하는 의식 자체의 작용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볼 때 그동안의 철학의 역사는 이런 의식이 의식하는 대상의 실체를 알고자 노력해왔으며, 그러기 위해 대상에 인과관계와 같은 인위적 인식 틀을 계속 투입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자명한 것도 순수한 경험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에게 자명한 것은 이런 대상을 의삭하고 있는 의식 자체의 작용이었다. 그 작용은 바로 의식이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으로서 지향적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누가 뭐라 해도 우리 머리 안의 의식 속에서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이었다.

    이제 그는 과거의 철학과 그동안에 가장 커다란 성과를 거둔 과학보다, 더 명증된 것을 얻었다고 확신했다. 생각해보라. 과거의 철학은 우리 눈앞의 대상이 실체인지 아닌지, 실체라면 그것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를 멈추지 않았다. 과학 또한 실험과 검증을 거쳐 몇 가지 원리들을 알아낼 뿐, 진정한 실체의 모습을 파악하거나 입증하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눈앞에 대상, 의식의 대상이기도 한 이것들은 논쟁만 거듭할 뿐 명료하게 입증될 수도 완벽하게 경험될 수도 없는 것이었다. 이제 후설은 이러한 논의를 (   )에 묶어 넣어버리라고 말하고, 이를 판단정지Epoche라고 명명했다. 그는 그동안 해왔던 대상에 대한 논의 또는 모든 형이상학적 논의와 형식은 괄호로 묶은 채 넣어두고 일단 생각하지 말자고 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명료한 것, 믿어 의심치 않는 것에 대해 논하자고 역설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이런 대상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 우리의 의식이 무엇인가를 지향하며 끝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그것에 대해 기술하자는 것이다. 이렇게 무엇인가를 지향하며 의식 속에 흐르는 사유야말로 우리가 직접 경험하면서도 의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과학보다 더 정확한 앎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그것은 우리 머릿속에 드러나기 때문에 주관적인 것이지만, 의심할 수 없이 순수한 경험이기 때문에 가장 경험적인 사유라고도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현상학phenomenology이다. 대상에 대해 또는 무엇인가에 대해 우리의 머릿속에 일어나는 현상, 결국 대상의 본질보다는 대상이 우리의 의식에 노출시키는 현상과의 관계만을 이야기해야 하는 현상학,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다면 더없이 본질적인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이 사물의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p.435

   이제 그는 현상학을 이용해서 이 존재란 무엇인지를 탐색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 존재에 대해 묻고 논할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다른 존재자가 아닌 의식을 가진 인간이라는 존재자뿐이다. 결국 이 탐색의 시작은 인간이라는 존재자에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이에 그는 인간을 '거기에 있음'을 의미하는 '현존재'라고 이름 붙인다. 인간이 거기에 있음으로 본격적인 탐구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후설이 말한 것처럼 생활 세계 안에 있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일정한 세계 안에 있고 자신을 세계와 떼어놓을 수 없는 상태에서 살아간다. 게다가 그것은 우리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것 뿐이다. 그는 이런 인간의 모습은 '세계-내內- 존재'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것은 또 하나의 혁명을 의미하고 있었다. 그의 이 '세계-내內- 존재'는 대상과 세계를 떨어져서 바라보는 주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이제까지 인간은 바라보는 주체였고, 세계는 우리의 대상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하이데거에 의해 더 이상 인간은 세계를 바라보는 외부에 있지 않다. 인간은 태어난 이후 항상 세계의 일부분으로서 세계 속에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인간은 더 이상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또한 인간이 세계 속에 던져졌다는 의미로 실존철학의 교두보를 제공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실존철학자로 불리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이 주관적인 존재론을 통해 후설 철학과 결별하게 된다. 후설은 주관적인 인식으로 시작하지만, 마침내 그것을 초월하는 초험적 자아와 의식된 대상의 진정한 본질을 밝힐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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