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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1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12 최진석 [생각하는 힘, 노자 인문학]

by 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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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점에서 삶의 방향은 바로 생각의 방향이고, 가치의 충돌은 생각의 충돌이며, 제도의 변화는 생각의 변화와 직결됩니다.


생각은 인간이 합니다. 인간의 생각이 구체적으로 작동해 인간의 방식으로 자연에 변화를 가하는 것,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결과를 '문화 文化' 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이뤄진 세계의 형태가 바로 '문명 文明'이지요.


인간이 불을 사용하게 됐다는 사실이 내포한 정말 큰 의미는, 인간이 동물을 압도할 무기 혹은 도구를 갖게 됐다는 점보다 '생각'의 물질적 터전을 확보해나갈 수 있게 됐다는 점입니다. 생각의 터전이란 바로 '뇌'입니다.


추상화는 사물을 개별적인 상태로만 보지 않고 그것을 하나의 범주로 묶어서 파악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가능한 일입니다. 이 작업을 통해 '공통성'이나 '의미' 등의 생각이 출현할 수 있었고, 공통성이나 의미에 관한 생각이 등장하면서 인간은 점점 '구별'하는 능력을 잘 구사하게 되지요.


당시에 생산력이 증가하자 그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잉여생산물이 나왔어요. 자연히 잉여 생산물에 대한 소유 문제가 대두되었고, 이는 결국 사유재산이라는 관념의 형성으로 이어졌습니다. 또 농업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전의 채집 경제활동 시기에 비해 남성의 근력이 더 필요하게 됐고,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점점 남성이 주도하는 관념이 발생했습니다. 남성 주도 관념이 발생하면서 사유재산 상속문제는 자연스럽게 남성의 소유를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형성됐지요. 남성이 자신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확신하는 자식에게 재산을 모두 주려는 욕구는 오직 한 여성을 독점해야만 실현됩니다. 일부일처제가 성립되는 것이지요. 이처럼 남성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의 전승체계가 구조화되면서 종법 제도가 점점 형성되어 나갑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신을 넘긴다는 것은 인간 자신을 이해하는 매개로 혈연보다는 훨씬 보편적이고 초월적인 지위를 갖는 신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지요.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신과 소통할 수 있는 아주 잘 정화된 마음의 상태가 먼저 준비돼야 합니다. 그 정체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고안된 절차가 따로 있었어요. 당시 사람들은 그 절차를 '예'라고 불렀습니다. '덕'은 제사장이나 제사에 참여한 사람들이 신과 소통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준비한 마음의 상태인데, 태어날 때 갖고 있던 마음처럼 순화되고 정화된 마음의 상태를 말하지요.


인간이 세계와 어떤 관계 방식을 확립하는가, 그것이 바로 세계관 건립의 문제인데, 세계관이 달라지면 그 세계관을 운용하는 인간에 의해 시대의 풍경이 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덕은 지식의 대상이 아니라 삶의 향기와 힘을 발산하는 동력으로 회복돼야 합니다.


'세계를 봐야 하는 대로 보지 말고 보여지는 대로 보라'


'이념의 수행자가 되거나 이념으로 세계를 지배하려 하지 말고 주체적인 세계에서 이념을 만들라'


그러나 '공동생산'이 비생산적이라는 것은 역사를 통해 증명됐지요.


인류 역사는 소수가 다수를 정복하고 주변이 중심을 공격하는 방식으로 진행돼요.


성장한 소인들이 점점 확대되다 강해지다 어느 단계에 이르러 혈연적 세습귀족을 모두 타도할 수 있다고 판단해 계급 전복을 도모하는데, 이것이 정치적으로 성공한 역사적 사건이 바로 진시황의 등장입니다.


안정적 이분 구도가 깨지도록 작용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철기였습니다. 생산수단의 변화는 계급관계를 변화시키고 정치 구조에 영향을 미치며 세계관을 전환시킬 정도로 큰 힘이 되는 것입니다.


하늘이 점점 무시되고 제거돼가는 역사 발정 추세는 하늘의 뜻이라고는 하나도 개입돼 있지 않은 '법'이 등장하면서 완결됩니다. 즉 법이 세워진 것은 하늘이 인간에 의해 완전히 극복돼 제거됐음을 의미해요. 진시황이 등장한 것도 바로 이때예요. 진시황에게 힘을 주던 법가라는 이데올로기는 급작스럽거나 돌출적인 것이 아닙니다.


탈레스를 최초의 철학자라고 하는 이유는 이처럼 신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벗어나서 자기 스스로의 생각으로 이 세계와 마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철학은 믿음에서 생각으로 신에게서 인간으로 이동하는 역사를 보여줍니다.


인간이 인간만의 능력으로 건립한 그 길을 바로 '도'라고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간만의 능력이란 믿음의 힘이 아니고 '생각하는 힘'을 말해요.


그래서 천명에 있던 문제점을 비의성, 임의성 그리고 주관성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공자] "네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 시키지 말라."


[노자]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름답다고 하는 것을 아름다운 것으로 알면 추하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하는것을 좋은 것으로 알면, 이는 추하다."


노자는 그 기준이 비록 선의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기준으로 행사되는 한 폭력을 잉태할 장치일 뿐이라고 강조해요.


이렇게 천명을 극복하고 '도'라고 하는 인간의 길을 건립하려 했던 두 철학자 가운데 공자는 인간의 내면에서 영암을 얻고, 노자는 자연의 존재 형식을 사유의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노자] "인을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인에서 멀어진다. 효를 주장하면 주장할수록 효에서 멀어진다."


(노자는) '가치'의 세계와 결별하고, 자연이라고 하는 '사실'의 세계에서 인간 질서의 근거를 발견하려는 것이죠.


공자는 인간으로서 가지고 있는 가장 기본적이면서 근본적인 정서는 부모 자식 사이에서 가장 제대로 드러난다고 봅니다. 그 공존의 공간을 가정이라고 하지요.


천명을 최고 권위로 제시하던 지배질서는 사회 경제적 조건이 변하면서 새롭게 등장한 인간과 그들의 욕구들을 순조롭게 담아낼 수가 없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춘추전국시대의 변화란 바로 이처럼 '명'과 '실'의 불일치 현상이 발생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본질이란 무엇일까요? 본질은 '어떤 것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것이게 해주는 성질'을 말합니다.


달리 말해 '시작'이라는 것은 이 세계 어디에도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보면, '도'는 어떤 무엇으로서 존재한다기보다는 유무 상생이라는 세계의 존재형식을 드러내 보여주는 기호나 글자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실 도는 이 세계의 발생근원도 아니며 실체도 아닙니다.


[모차르트] "음악은 음표 안에 있지 않고 음표와 음표 사이에 존재하는 침묵 안에 있다."


노자는 가치론적 판단 기준을 모두 걷어내고, 이 세계를 사실 그대로 볼 수 있는 단계를 '무위'라고 합니다. '무위'란 어떤 가치론적 장치도 개입되지 않은 상태예요. 가치론이 모두 사라지면 '사실'만 남게 됩니다. 세계 본래의 진실이 드러난 격이지요.


'실상'을 알면 집착하지 않게 되고, 집착하지 않으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실상'은 세계의 실제 모습, 진실입니다.


상을 짓는 행위, 어떤 것을 '자기 뜻대로' 전해 버리는 행위가 불교에서 말하는 '소유'입니다.


요약하자면, 사실을 자기 생각의 틀에 가두는 게 '소유'입니다. 사실을 '소유'의 눈으로 바라보면 반드시 고통이 따라옵니다. 왜냐하면 그 '소유'적 시선과 세계의 '실상'은 잘 맞지 않거든요. 잘 맞지 않는데도, 자신의 듯을 고집하여 관철시키려 하는 것이 집착이지요. 집착은 고통을 낳습니다. 그 집착으로부터 업이 쌓이고 결국 윤회의 틀에 갇히게 돼요. 불교에서는 그래서 '실상'을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의미는 발굴되거나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나는 것이 됩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것을 '잠시 있는 것'이라 하고 '가유'라 칭합니다.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을 모두 포함해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잠시 존재하는 것이죠. '가유' 상태라는 게 불교의 관점입니다.


반면 불교나 <주역>, 노자가 말하는 '관계'는 존재하는 '그것 자체'가 관계로 되어있음을 뜻해요.


점점 개념화가 진행되면서 대립되는 의미가 분리되고, 그 대립 사이의 거리가 점점 벌어졌을 것입니다.


철학이 한계에 이르렀다 함은 새롭게 전개되는 사회 경제적 변화를 기존의 세계관이 담아내지 못하게 됐다는 뜻입니다.


중국은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항상 주도권을 가진 제국이었어요. 그런데 중국을 중심으로 유지되던 아시아의 주도권이 일순 서양에 의해 역전되고 짓밟힙니다. 이러한 국면이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1840년에 발생한 아편전쟁입니다.


중국은 과거 완벽한 사상체계로 구축됐던 인도의 불교철학을 받아들여 사상적 재무장을 이루고 사회를 재편해 통일을 달성했던 것처럼, 서양 철학에서 최첨단 철학으로 꼽히던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수용해 중국을 통일시키고 발전시켰습니다.


독립적인 사고를 통해 과거와의 단절을 결정했던 이 힘이야말로 미래 중국 발전의 발전이 되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데 동양에서 논리학이 서양에 비해 깊게 발달하지 않은 이유는 아마 동양 사람들이 논리학에 대한 의존성이 약할 수밖에 없는 사상을 가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서양에서 논리학이 발달한 이유는 '실재하는 않는 대상'을 놓고 사유를 하기 때문이에요. 철학 자체가 사유의 구조물이기 때문에 사유 전체의 치밀성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지요. 그런데 동양의 사유는 사유의 치밀성보다는 경험의 확실성, 경험의 소통이 더 중요했고, 따라서 논리학이 그렇게 핵심적인 역할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현대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마르크스나 프로이트나 니체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세 사람을 기점으로 현대를 해석한다면 결국 이성에 대한 부정으로 귀결되지요.


그(니체)는 근대 이성을 계산적 이성이라고 비판하면서, 이성이 아니라 동물적인 권력에의 의지가 우주의 본질이라고 합니다. 이성은 정신으로 존재하고 의지는 육체로 존재하죠. 근대가 이성의 시대였다면 현대는 비이성, 즉 '육체성'의 시대입니다. 마르크스의 사회 경제적 조건도, 프로이트의 성적 욕망도, 니체의 의지도 모두 육체성입니다. 육체성을 바로 주체성입니다.


그래서 세계는 이제 집단적 통합보다는 개별적 주체들의 자율적 융합으로 무게 중심이 이동할 겁니다.


사유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에서 경험이 부각되는 시대로, 이성이 중심적인 역할을 하던 시대에서 감성이 중시되는 시대로, 정신이 절대적 우위를 점하던 시대에서 육체 혹은 욕망이 새롭게 조명되는 시대로 이행하는 것이죠.


막스 베버라는 사회학자는 중국이나 인도에서 자본주의가 발달하지 않은 이유를 개신교 윤리, 즉 프로테스탄티즘의 부재에서 찾았을 정도입니다.


가변적인 유한한 세계를 지배하는 불변의 세계가 있다는 생각이 서양 철학의 출발점입니다.


공자, 노자는 자신들의 철학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기본 틀을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냅니다. 이는 현상을 긍정하는 겁니다.


이 세계가 진실이라고 보기 때문에 중국 사람들이 철학을 구축하는 사유의 원천은 경험에서 옵니다. 공자도 그렇고 노자도 마찬가집니다. '경험의 구조'에 있는 이들에겐 경험이 진실입니다. 실제 현상이 진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변화를 긍정한다는 뜻이에요.


철학이란 기본적으로 이 세계가 어떻게 존재하고 운행하는지를 파악하고 거기에 대응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결정하게 합니다.


'광이 불요'란 '빛을 발하지만 눈을 부시게 하지는 않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동작이든 대립면의 긴장을 유지하지 않으면 깨지고 맙니다.


세계가 대립면의 긴장으로 되어 있으니 인간도 그것을 모방하여 대립면의 긴장으로 되어있는 마음 상태를 유지해야 하지요. 이것이 세계와 순조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기초라고 노자는 강조했어요.


"봄날 얼음이 풀리듯이 하라"


경계가 모호한 것을 분명하게 하려 들지 말라는 것은 경계가 모호한 것 그 자체가 세계의 실상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함은 구분 이후의 명료한 사태를 말하지요. 그런데 세계는 경계가 계속 중첩되는 모호한 상황의 연속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 모호함을 분명함이나 명료함으로 개선하려는 순간 세계의 실상과는 멀어지게 됩니다. 이 모호함은 명료하게 만들어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품어버려야 할 것이지요.


헛똑똑이들이 판치는 세상을 거칠고 갈등이 심하며 선명성 경쟁이 하늘을 찌르게 됩니다. 세계가 대립면의 긴장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다시 말해 대립면의 경계에 설 수 있는 사람은 진중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확신하지 않는 힘'이 바로 내공입니다.


배움은 수단이고,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 목적인 것이죠. 삶은 자기표현의 과정이어야 합니다.


남에게 들은 말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면 받아들일수록 자기 눈에서는 원초적인 힘찬 눈빛이 사라집니다.


자율이란 내가 나를 조율하는 겁니다.


대립면의 긴장을 받아들이면 이념과 신념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고, 그때 드러난 자율적 주체는 무엇을 배우더라도 표현의 수단으로 생각하며 긴장을 잃지 않습니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어정쩡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배하는 철 지난 신념이나 가치관을 벗어던지고, 오직 자신만의 통찰력으로 무장해 있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성인은 방정하되 옳고 그름을 가르지 않고, 예리하되 찌르지 않고, 솔직하되 함부로 하지 않고, 빛나되 눈부시지 않다는 겁니다.


성공한 사람의 큰 적은 역설적이게도 '성공 기억'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성공했던 기억이 자기를 뻣뻣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인간으로 유연한 상태를 유지하려면 개념에 갇히면 안 되고, 개념에서 벗어나거나 개념의 구축물을 지배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바람직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바라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해야 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좋은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아니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까?

코끼리가 살얼음 밟듯이 행동하라.


이곳(중국) 정원에 들어가면 이 모퉁이를 지나서 나올 '다음 풍경'을 도무지 예측할 수 없습니다. 한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있을지 가늠이 안돼요.


"진중하구나! 마치 손님과 같다."


노자는 <도덕경> 제 41장에서 '대기 면성'을 말합니다. 즉, 큰 그릇은 특정한 모습으로 완성되지 않는다는 뜻이죠.


대립면의 경계를 품은 사람은 자신을 특정한 모습으로 확정 짓지 않습니다.


반드시 그래야만 하는 것은 없다.


무위란 '유위'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자신 앞에 펼쳐지는 세계를 자신의 기준에 따라 '봐야 하는 대로' 보게 되지만, '무위'적 태도를 가진 사람은 어떤 기준의 지배도 받지 않기 때문에 '보여지는 대로' 볼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위'는 내 의도를 세계에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나를 맞추는 것이기 때문에 주도권을 세계 자체에 두게 되죠.


신념이 강한 사람은 행동이 경박합니다. 이념이 강한 사람은 행동이 가볍습니다. 진리에 대한 신념이 강한 만큼 행동의 근거가 너무나 분명하거든요. 이 분명한 근거로부터 확신을 부여받는 순간 과감해져 버립니다.


성인은 이러한 자연의 이치를 본받아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러나 오히려 앞서게 된다. 그 자신을 도외시 하지만 오히려 자신이 보존된다.


영원히 보편타당한 철학은 없다는 것입니다. 각 시대에 맞는 어떤 유형의 철학이 있을 뿐입니다. 원래 철학은 '시대를 관념으로 포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어떤 이론을 가지고 있는지, 나에게 어떤 믿음 체계가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세계가 움직이는 방향에 대해 어떤 궁금증을 가졌는지가 더 중요하지요.


지식과 경험은 이미 하나의 관념 체계로 형성된 것인데, 그것은 형성되는 순간 고집스러운 것으로 변하고 부패가 시작되기 때문에 거기에만 의존하면 세계 전체의 실상이나 변화를 감지할 수 없습니다.


대립면의 공존을 강조해야 보편적 이념의 성립을 차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천하만큼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맡길 수 있고 자기를 천하만큼 사랑하는 사람에게 천하를 줄 수 있다.


의외로 사람들에게 '거대한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요. 작고 구체적인 것이 어렵습니다. 거대한 이념의 틀 속에서 승리를 일구는 영웅들이 오히려 일상에서 좌절하고 일상에서 패배합니다.


정해진 틀로 윤리적 사회를 정해놓고 그 안에서 일률적으로 재단하는 방식으로 윤리적 개입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이 뇌물이 아무리 크더라도 이것이 나의 자존을 해친다는 생각을 하거나 내 자부심과 자존심에 상처를 내기 싫어하는 사람한테만 뇌물은 거절될 수 있습니다.


자발적이지 않은 것에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거룩함은 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자신이 서 있는 바로 여기가 거룩함이 등장하는 원초적 토양입니다. 이상적인 삶을 저 멀리 있는 곳에 도달하려는 몸부림이 아니라, 바로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착실한 발걸음일 뿐입니다. 저 먼 곳에서 인위적으로 걸어놓은 기준은 추종하지 말고,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자기 자신에 집중해야 합니다.


노자가 '소국과민'을 주장한 것도 사람을 익명적 존재, 일반명사의 일부로 존재하게 하지 말고 고유명사로 존재할 조건을 만들어 주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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