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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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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Jan 29. 2020

관객모독

#126 페터 한트케 [관객모독]


p. 25

    우리는 익살꾼이 아닙니다. 여기에는 우리가 걸려 넘어질만한 물건들이 없습니다. 물건들을 사용할 때 겪는 어려움 같은 것은 계획에 없습니다. 책략적인 물건들이 함께 상연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물건들이란 책략적인 상연에 이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체가 책략적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비틀거린다면, 아무런 의도 없이 비틀거린 것입니다. 우리들 의상의 흠도 의도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들이 어쩌다 미소를 띠어도 의도적인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말을 더듬는다 해도, 의도 없이 더듬는 것입니다. 우리가 손수건을 떨어뜨린다 해도 그것을 연극과 연관 지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연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물건을 사용할 때 부딪히는 어려움을 수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 뜻을 지닐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뜻을 지닐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릿광대가 아닙니다. 우리는 원형 경기장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경기장을 둘러싼 권력자처럼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책략적인 사물들의 희극을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언어의 희극을 즐기는 것입니다.


p.40

    (중략) 우리는 연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연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호하게 변조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몸짓으로 연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직 언어로만 표현합니다. 우리는 단지 말할 뿐입니다. 우리는 표현할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게 아니라 작가의 생각을 표현할 뿐입니다. 우리는 말로써 표현합니다. 우리 말은 곧 우리 행동입니다. 우리 말은 곧 연극이 됩니다. 우리가 무대에서 말하기 때문에 우리가 곧 연극입니다. 쉬지 않고 여러분에게 말하면서, 그리고 여러분에게 지금 그리고 지금 그리고 지금이라고 시간에 관해 말하면서, 우리는 시간과 장소와 행위의 일치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이 일치를 그러나 우리는 여기 무대에서만 신경 쓰는 것은 아닙니다. 무대가 독립적인 세계가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아래쪽에 있는 여러분에게 말하는 동안 우리와 여러분은 통일체를 이룹니다. 여러분이라고 말하는 대신 우리는 특별한 조건에 따라 우리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행위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여기 위쪽 무대와 아래쪽 객석은 더 이상 두 세계로 나누어지지 않고, 통일 체를 이룹니다. 어떤 경계선도 없습니다. 이곳엔 두 장소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곳엔 오직 한 장소가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장소의 통일을 의미합니다. 여러분의 시간, 즉 관객과 청중의 시간은 우리들의 시간, 즉 말하는 사람의 시간과 통일체를 이룹니다. 여기에는 무대 위 시간과 공연 시간이라는 두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시간은 공연되지 않습니다. 여기엔 오직 실제 시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여기에는 단지 우리가, 즉 우리와 여러분이 체험할 수 있는 그런 시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이것은 시간의 일치를 의미합니다. 이미 언급된 세 상황을 합하여 시간과 장소의 행위의 일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러니까 고전입니다.


p.44

    여러분은 지금 여러분의 현재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보내는 이 시간이 바로 여러분의 시간임을 의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주제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문제를 만듭니다. 여러분 자신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여러분은 중심인물입니다. 여러분은 결정적인 계기입니다. 여러분은 결정적인 원인입니다. 여러분을 연기를 하게 하는 결정적인 동기입니다. 여러분은 여기서 단어 역할을 합니다. 여러분은 우리의 선도자기도 하고 상대자기도 합니다.


p.51

    (중략) 여기서는 현실도 연극도 연기되지 않았습니다. 순수한 연극이 상연되었더라면 사람들은 시간을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순수한 연극에서는 시간이 의식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실이 상연되었기 때문에 현실의 시간 역시 상연되었습니다. 만약 순수한 연극이 상연되었더라면 여기서는 오직 관객의 시간만이 존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현실은 연극 속 현실이었기 때문에 이곳엔 항상 두 가지 시간이 있었는데, 바로 고나객의 시간인 여러분의 시간과 겉보기에만 실제 시간으로 상연되는 가상의 시간입니다. 그러나 시간은 재생될 수 없습니다. 어떤 연극에서도 시간은 반복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만회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불가항력적입니다. 시간은 상연될 수 없습니다. 시간은 연기될 수 없기 때무에 현실 역시 연기될 수 없습니다. 시간을 제거한 연극만이 연극입니다. 시간이 함께 상연되는 연극은 연극이 아닙니다. 시간과 무관한 연극만이 의미를 지니지 않습니다. 시간과 무관한 연극만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연극입니다. 시간과 무관한 연극만이 시간은 연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간과 무관한 연극에서만이 시간이 무의미합니다. 모든 다른 연극들은 순수하지 못한 연극들입니다. 단지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연극들이 있거나 혹은 그 안의 시간이 현실적인 사긴인 연극들입니다.


p.76

    사건이나 개인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서술해서 어떤 상(想)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단어와 문장만으로 작품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내용은 없고 단어나 문장이 비트 음악처럼 반복되는 연극인 것이다. 이것을 한트케는 언어극이라 부른다. 한트케가 거부한 기존의 연극은 구체적으로 현실을 서술하며, 언어극과 대비된다.

    그의 문학 연습을 위해 또 하나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오스트리아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이다. 한트케는 1966년에 쓴 「문학은 낭만적이다」라는 소론에서 "한 단어의 중요성은 그 단어의 의미가 아니라 그 단어가 언어에서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것"이라는 비트켄슈타인의 주장을 인용했다. 이 언어철학으로부터 한트케는 한 단어를 다양하게 사용함으로써 생격나는 유희의 가능성을 배웠다.


p.79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극에서는 무대 위 배우들이 어떤 사건을 재생하고 관객들은 그것을 숨죽이고 바라본다. 그래서 무대 위에서 구성되는 사건이나 그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과 장소는 관객들의 시간이나 그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과 장소는 관객들의 시간이나 장소와는 전혀 관계 없다. 관객들은 사건을 연기하는 배우가 진짜인 양 넋을 놓고 상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그러나 한트케는 그런 연극을 거부한다. 감동을 주는 사건 같은 것은 없다. 배우와 관객은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공기, 같은 공간을 공유한다. 배우는 "관객을 언어의 주제로 삼는 언어극"을 한다고 말한다.


p.73

    유럽인들은 전통 문법에서 언어의 주된 기능이 세상에 있는 사물을 지칭하는 것이며, 낱말은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과 일치하는 상징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데 20세기 들어오면서 언어학자 소쉬르는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언어를, 사회 안에서 긴 시간을 두고 축척된 언어(langue, 랑그)와 그 일부를 빌려 쓰는 개인들의 언어(parole, 파롤)로 구분하고, 진정한 언어 연구의 대상은 랑그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언어가 세상 사물과 아무 관계 없는 기호라는 새로운 이론을 제시했다. 낱말이 그 지시 대상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에게, 낱말이란 세상 사물과 아무런 관련 없는 기호일 뿐이며 기호와 그 의미 관계는 단지 사람들 사이의 약속에 불과하다는 이론은 지금까지와는 너무나 다른 의식을 요구했다. 한트케가 젊은 날 심취했던 형식주의와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이러한 이론에 기반을 둔 사조다.

    철학이나 과학에서도 마찬가지 현상이 나타났다. 사람들은 이전까지 역사나 개인 발전의 근원적인 힘은 '정신'이라고 배워 왔는데, 독일 철학자 마르크스는 사회 구성원을 인간이 아닌 자본가와 노동자로 보았다. 마르크스는 노동자를 향해 역사 발전의 근원적인 힘은 '물질(빵)'이라고 주장함으로써 현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또 사람들은 이전까지 인간의 모든 행동은 '의식'의 지배를 받는다고 배워 왔는데, 오스트리아 정신과 의사 프로이트는 환자들의 꿈을 분석하면서, 모든 인간이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기간, 즉 어머니 배 속에 웅크리고 있던 순간부터 태어난 후 수 년까지라는 기간에 주목했다. 그는 이 '무의식' 기간이 이후 인간의 의식 세계를 지배한다고 주장하면서 사회 여러 분야에 반향을 일으켰다.

    이처럼 인문학적 사유에 따라 규정된 많은 개념들이 현대에 들어오면서 과학적 실증의 영향으로 패러다임 변화를 겪었다. 그전까지 문학과 언어를 인간의 정서로 느끼고 감흥을 맛보았다면, 20세기 들어와서는 인간의 자리를 과학이 대신 차지하게 된 것이다. (중략)

    문학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도 독자 대부분은 내용에 대해 인문학적 사유를 펼치면서 감동을 주는 요인(상징)들을 찾느라 깊은 상념에 잠긴다. 용케 그런 장면을 찾으면 감탄사를 외치며 칭찬을 주체하지 못하지만, 마음에 와 닿는 부분이 없으면, 멀뚱해져서 뭐 이런 것을 작품이라고 하냐며 혀를 차게 된다. 그러나 빌려 쓰는 언어로 문학이 만들어진다는 말에 동의한다면, 낱말(기호)들에서 내용을 보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이전 시대의 수많은 작가들이 같은 낱말들로 같은 이야기들을 이미 수없이 서술해 놓았기 때문에 또다시 그것을 반복한다는 것은 로브그리예나 한트케 말대로 "낡아 버렸고" "서술 불능"이며 "무미건조하고 어리석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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