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안병진 [트럼프, 붕괴를 완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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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바마의 임기가 본격 시작되자 그가 꿈꾼 담대한 의망이란 사실 의료 보험 개혁 정도라는 것이 드러났다. 물론 그는 정권의 명운을 걸고 용감히 뛰어들었지만 사실 내용적으로는 보수 재단인 헤리티지 재단의 어젠다를 구현한 것에 지나니 않았다. 마찬가지로 망가진 자본주의를 고치기 위한 월스트리트 개혁 법안인 도드 프랭크 법도 애초보다 훨씬 보수적으로 땜질된 채 종결되었다. 월가의 충실한 관리자인 가이트너 재무장관은 위기의 관리에만 급급했다. 결국 미국 주류 언론이 한국 자본주의를 비난할 때 쓰는 대마불사라는 표현이 미국의 금융 자본들에게 적용되었다.
물론 이러한 한계를 두고 오바마의 소심함만을 탓하기 어렵다. 그의 정치 자본과 의회 내 지형의 취약함, 그리고 오바마를 문명의 적으로 규정하는 공화당의 극단적 방해 같은 요인은 임기 내내 오바마를 괴롭혔다. 반면에 오바마 왼쪽에 있어야 할 의원들은 너무 적었고 외부의 강력한 사회 운동도 존재하지 않았다. 클린턴도 그랬지만 오바마도 과거 링컨이나 루스벨트가 누린 전환적 운동 메너지의 행운이 따르지 않은 것이다.
백악관에 입성한 오바마는 국내 개혁은 물론이고 국제 관계에서도 담대한 희망보다는 질서 있는 퇴각이 필요한 시대라는 걸 점차 깨달아 갔다. 오바마의 중동에서의 발 빼기와 아시아 회귀 전략은 클린턴의 확장 및 중국 견인 노선과의 결별을 의미한다. 오바마가 시리아 내전에 본격적인 개임을 거부한 사실과 이란과의 핵 위기를 봉합한 점에 대해 당시 많은 보수주의자들은 유약하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제 미국이 과거 청년기와 달리 꿈의 크기를 줄이고 중년기의 쓸쓸함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지금 시점에서 지난 대선을 회고해 보면, 이 퇴조기라는 큰 맥락 속에서 힐러리의 재등판은 애초부터 매우 어색하다. 이미 힐러리는 2008년 새천년 세대와 다인종 연합의 후보인 오바마에게 패배한 바 있다. 힐러리는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제외하고는 오바마 시대의 한계를 넘어 새로운 미래로 가는 리버럴이 아니라 이전 시대로의 복귀를 상징한다. 힐러리는 매파인 매케인과 친교를 나누며 강력한 총사령관으로서의 이미지를 만들었지만 시대는 준비된 대통령을 원하지 않았다. 월가 점령 시위occupy Wall Street 와 티 파티 Tea party 운동의 결과로서 시민들은 기성 질서를 뒤집을 혁명가를 원했다.
처음에 힐러리에 맞서는 트럼프의 등장은 블랙 코미디의 소재였다. 심지어 트럼프 가족도 트럼프 대통령이라는 미래를 심각하게 생각한 것 같지 않다. 트럼프의 전략가이자 극단적 음모론자인 스티브 배넌이 트럼프의 당선을 장담한다고 한 말에 귀 기울일 정도로 트럼프 주변은 미치지 않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트럼프는 배트맨 영화의 조커처럼 기존 체제의 불편한 진실을 드러내는 희한한 역할을 하면서 부상하기 시작했다. 하루는 월가 체제를 공격했다가 하루는 제국적 개입 주의를 건드렸다. 우리는 북미 정상 회담 직후 트럼프가 한미 군사 훈련을 위험한 워 게임War Game이라고 공격하던 충격적 장면을 기억한다. 나는 그 순간 트럼프가 혹시 김정은이 세운 맨추리안 켄디데이트The Manchurian Candidate가 아닌가 하는 환상에 빠질 정도로 놀랐다. 지금까지 미국 대선 역사상 트럼프는 가장 충격적인 블랙 스완Black Swan이었다.
p.34
트럼프는 이 문명 충돌론의 시대 분위기를 타고 과거로 가는 역주행의 대변자에 불과하다. 국내적으로는 권위주 의적 정치와 문화, 타자에 대한 폭력적 정서가 강화되고 대외적으로는 미국 우선주의와 서구 문명의 배타적인 블록이 강 조된다. 1930년대의 미국은 자신감을 가진 상승기였기 때문에 파시즘이 아니라 뉴딜을 택했다. 하지만 오늘날 하강하는 미국과 전 지구적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 더 나아가 지구 환경 파괴 문제는 경쟁의 격화 및 새로운 파시즘의 토양이다. 트럼프의 파시즘에 대한 충동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를 배경으로 에너지를 얻는다.
다른 한편으로 시진핑의 권력 연장을 개인의 권력욕으로만 이해하는 이들은 지금의 전 지구적 지형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시진핑의 시도는 이 평형 붕괴 시대에 대한 중국 공산당의 필사적 생존 전략이다. 마치 과거 자본주의와의 사활을 건 내전에서 레닌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을 선택했듯이 말이다. 겉으로는 강해 보이지만 고독한 트럼프와 시진핑은 아마 서로에 대해 연민의 정이 많을 것이다.
사업가인 트럼프는 항상 실리를 추구한다는 평가가 있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이 실리는 로버트하이저와 피터 나바로를 중심으로 한 중국 때리기로 상징되듯 중국 등 타자에 대한 악마화와 배타적 블록화를 동반한다. 트럼프는 오늘날 호주, 영국 등의 서구 문명권을 동원하고 힌두 문명권인 인도까지 끌어들여 중국 봉쇄에 나서고 있다.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한 트럼프의 인도 태평양 전략이나 반대로 남미의 히스패닉 문명권에 대한 중국의 구애는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테제를 연상시킨다.
p.45
미국의 이러한 특성은 미국 체제의 내적 특성에서 나온다. 미국은 북한과 달리 한순간 외교에서 실수해도 망하지 않는 '세계 국가'다. 물론 중국처럼 아래로부터 엄청난 단련을 거치며 한 단계씩 승진해 올라온 지도자가 이끄는 국가가 아니라 선거에서 퍼포먼스로 하루아침에 뽑힌 인물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다. 오히려 준비된 대통령은 미국 정치에서 극히 예외다. 다만 미국 특유의 탁월한 실용주의 문화 속에서 전문가들로 구성된 보좌 시스템이 발달되어 있어 보완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의 체제가 결함만 있는 건 아니다. 아무리 중국의 체제가 일사불란하게 아래로부터 단련되었다 하더라도 선거를 거쳐 민심에 대한 반응성 및 정치적 근육을 키운 대통령과 그를 견제하기도 지원하기도 하는 공화국의 시스템이 훨씬 더 내구력이 있을 때가 많다. 미국에서도 타자인 소련과 중국의 지도자들을 천재 전략가이자 음모가로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비밀 자료들의 보안이 해제되면서 이들이 얼마나 허술하고 오만했는지가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매우 뇌회하다고 평가받았던 흐루시초프의 쿠바 미사일 위기 대응 과정에서의 수많은 실수는 한 사례가 될 것이다.
슬라보예 지젝의 지적처럼 우리는 잘 모르는 타자에 대해 뭔가 체계적이고 무서운 음모가 있는 것처럼 환상의 틀을 구성하기 쉽다. 트럼프라는 부시와는 비교할 수 없이 설명하기 힘든 존재의 부상은 트럼프에 대한 온갖 두려움과 환상을 만들어 냈다. 과거 부시 시절도 그랬다. 부시 대통령이 정상 회담에서 김대중 대통령을 무시한 에피소드에 대해 어느 기자는 나에게 음모론적인 설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나의 답변은 부시가 그저 무례한 스타일이고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 노선을 전혀 신뢰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라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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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동적 포퓰리즘과 트위터 하이쿠의 환상적 조합>
사실 트럼프는 정치가의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인 시대의 분위기와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탁월하게 꿰뚫는 눈을 갖고 있다. 트럼프는 걸출한 포퓰리스트다. 나는 미국에서 공부할 때 샹탈 무페Chantal Mouffe라는 포퓰리즘 이론가의 수업은 좋아했는데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포퓰리즘에 대한 왜곡된 정의를 바꾸려고 무던히도 노력하다 결국 포기했다. 한국에서 여전히 포퓰리즘은 인기 영합주의 정치가에게 찍는 주홍 글씨다. 세계 학계의 보다 정확한 정의는 이와 사뭇 다르다. 학게에서는 포퓰리즘을 기득권으로 간주된 세력에 대해 국민이라는 집단의 반발을 동원하는 정치의 한 유형으로 본다. 만약 그 기득권이 자본이면 월가 시위와 같은 좌파 포퓰리즘, 기득권이 강남 좌파이면 티 파티 운동과 같은 우파 포퓰리즘 이 나타난다. 이 정의만을 보면 포퓰리즘은 매우 상식적인 정치처럼 느껴진다. 그렇다. 자유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합이다. 여기서 민주주의democracy 란 인민demos의 동원과 관련되어 있다. 포퓰리즘은 필연적으로 이 자유 민주주 의 공식 어딘가에 내재한다. 이를 억지로 자유 민주주의 정치 바깥으로 몰아내려 하면 어두운 구석에 숨거나 반드시 귀환해서 복수한다. 무페는 최근 포퓰리즘도 국민 일반이라는 모호한 덩어리로서가 아니라 다원적 세력의 공존에 기반해 기득권과 싸우는 좋은 유형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더 적극적으 로 정당화하기도 했다.
나는 트럼프를 포퓰리즘의 유형 이론에 근거해 '반동적 포퓰리즘Reactionary Populism’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반동적이란 시대의 흐름과는 거꾸로 가는 담론이란 의미다. 반동적 포퓰리즘은 양극화의 고통과 삶의 방식의 파괴에 대한 당혹감을 타자에 대한 폭력과 좋았던 시절에 대한 환상, 이를 대변한다고 믿는 위대한 정치가로 해결하려 한다. 파커 파머는 본질을 다음과 같이 적절히 지적한다.
“이따금은 다른 사람들에게 고통을 가하면 자신의 고통이 완화되기라도 하는 양 그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이 광적인 전략은 인종 차별, 성차별, 동성애 혐오, 그리고 가난한 이에 대한 경멸 같은 잔인한 결과를 낳는다.”
비통에 빠진 사람들은 타자 배제 전략을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위대한 과거와 연결되려고 한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구호는 자신의 자아를 넘어 위대함에 연결하고자 하는 큰 정치이자 일종의 영성 정치다.
영성과 트럼프? 물론 어색한 조합이다. 하지만 영성이 별것인가? 영성이란 무언가 위대한 실재에 연결되려는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천박하고 무지하다고 경멸하는 힐러리와 같은 지성주의자들은 비통한 자들이 땅 위에서의 비루함을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위대함으로 상승하고자 하는 욕망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트럼프는 비록 품위 없고 혐오스럽지만 나름대로는 영성으로 가는 특급 열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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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반동적 포퓰리즘의 대표적 교과서는 레이건이다. 미국 보수주의의 모델인 레이건 대통령은 당시 뉴딜 진보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피로감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이들 리버럴 엘리트들을 기득권으로 몰아붙였다. 한국에서 <조선 일보>가 성공적으로 마케팅한 강남 좌파론이란 레이건의 리무진 리버럴을 베낀 것이다. 레이건은 노조, 흑인, 동성애자 등 소수자들을 괴물로 몰았다. 그들과 대비하여 가족의 가치와 같은 담론을 전면에 내세우며 아름다웠던 복고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레이건은 도대체 어떤 시절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걸까? 동성애자가 없고(물론 그들의 눈앞에) 남성이 지배자이고 흑인이 노예였던 그 '아름다운 시절'을 말하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아름다운 시절은 미국이 잔혹한 패권을 마구 휘두르고 동맹국들이 얌전하게 무임승차하던 때를 의미한다. 레이건은 플라자 합의(더 정확하게는 압박)라는 형식으로 일본의 팔을 비틀어 일본의 부상을 꺾어 버렸다. 또한 레이건은 소비에트와의 냉전에서 유럽 동맹을 장기판의 말처럼 여겨 약한 자를 괴롭히는 국가라는 오명까지 받기도 했다.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트럼프는 이미 오래된 미국의 불리(bully) 전통을 복원한 것뿐이다.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Let's Make America Great Again'라는 레이건의 구호를 (Let's만 빼고) 천연덕스럽게 자기 브랜드로 만들었다. 사실 트럼프는 오늘날 극단적 양극화로 고통 받고 진보적 가치의 확대 속에서 피로감을 느낀 저소득층 대중들의 분노와 혐오를 잘 읽어 냈다. 트럼프는 영화 <다크나이트>의 조커가 인민들의 어두운 욕망을 자극하듯이 대중을 기막히게 자극한다. 소수자들과 멕시코 이민자 등 타자에 대한 시민들의 두려움을 활용해서 스토리를 짜고 국경 장변이라는 상징의 정치로 전화轉化시킨다. <다크 나이트 라이즈>의 월가 인민 반란과 이를 선동하는 악당 베인은 트럼프 현상을 예고한 것처럼 잘 보여 준다. 물론 트럼프는 집권하고 나서 최대의 업적으로 부자에 대한 감세 조치를 꼽고 있지만 그의 열성 지지자들은 '억만장자 포퓰리즘'이란 기묘한 단어 조합이 가지는 모순에 눈을 감는다.
트럼프의 포퓰리즘은 지성주의적 리버럴들이 불편해하고 이해하기 힘든 운동이다. 캠페인 시절 트럼프가 자주 언급 한 단어는 '에너지'였다. 내 기억으로 미국 양당 대선 캠페인 역사상 에너지라는 단어가 그렇게 자주 등장한 건 처음인 것 같다. 마치 UFC 대회를 연상시키는 단어에 다른 대선 주자들은 어리둥절해했다. 공화당의 지성주의 후보인 젭 부시는 트럼프가 에너지 레벨이 낮다고 비판할 때 황당한 표정을 짓곤 어쩔 줄 몰라 했다. 하지만 이 에너지라는 키워드이야말로 트럼프 포퓰리즘의 역동성을 제대로 보여 준다. 포퓰리즘은 지성주의적 운동이 아니라 기성 체제에 대한 혁명적 열정의 표출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마수미 Brian Massumi 등은 이를 정동 정치Politics of Affect라는 개념으로 잘 표현한다. 미국의 합리주의 철학 전통에서는 이 육체의 꿈틀거리는 분노와 열정의 표출에 담긴 혁명성을 읽어 내기 어렵다.
트럼프의 모습을 볼 때마다 영화 <파이트 클럽>이 떠오른다. <파이트 클럽>은 파시즘의 매혹을 다루는 영화다. 이 영화는 자본주의의 합리성에 억눌린 에너지의 남성적이고 폭력적 표출을 보여 준다. 나는 이 영화를 좌파 급진주의로 해석하는 지젝을 이해하기 어렵다. 금융 독점 자본에 대한 분노와 테러리즘을 선동하는 것은 좌파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과거 나치즘도 마찬가지였다. 이 영화에서 남성들의 폭력에 대한 광기 어린 매혹은 트럼프를 쉽게 연상시킨다. 북한 같은 소위 불량 국가를 상대로 미치광이로 행동해야 한다는 광인 이론의 트럼프 말이다.
p.51
물론 트럼프의 독자적 발명품은 하나도 없다.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가 레이건의 발명이라면 광인 이론은 닉슨의 발명품이다. 다만 닉슨은 광인처럼 행동하려 한 계산가였지만, 트럼프는 광인과 ‘광인처럼'의 경계선에서 위태롭게 움직인다. 닉슨은 압박 전술과 실제 전쟁으로 이어지는 압박의 차이를 이해했지만 트럼프는 이 미묘한 차이에 관심이 없다. 리샤오는 세심하게 설계하는 사업가 기질의 트럼프를 말했지만 사실 트럼프의 장점은 이 세심하지 않은 광기에 있다. 주한 미군 가족들에 대한 본국 소개령을 지시하려 했던 트럼프는 압박 전술과 실제 우발적 전쟁이 발생할 수도 있는 미친 짓의 차이를 구별할 줄 모른다.
트럼프가 광인 이론에 능한 건 세상을 움직이는 동력은 공포라는 걸 야수의 본능으로 일찌감치 간파했기 때문이다. 과거 대선 캠페인 시절 힐러리와의 토론을 보면 그는 하이에나를 닮았다. 힐러리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혐오스러운 입김을 내뿜는 트럼프를 소름 끼쳐 했다고 한다. 사실 힐러리와의 토론에서 잠시 보여 준 모습은 트럼프가 살아온 역사의 압축판이다. 트럼프는 사업가 시절 항상 먹잇감 주변을 어슬렁 거리며 맴돌다가 야비하게 때로는 무자비하게 먹잇감에 달려들었다. 만약 공포 전략이 소기의 성과를 내면 만족해서 물러선다. 자기 배가 어느 정도만 채워지면 주변에 먹잇감이 추가로 있어도 돌아보지 않는다. 나머지 작은 고깃덩어리들(세부 협상 내용)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가 대선과 대통령 임기 중에 본 트럼프의 모습은 과거 사업가 시절의 재판再版에 불과 하다. 그는 예를 들어 먹잇감으로 설정한 별장을 직접 사지 않고 주변에 자기 건물을 세워 경관을 해치는 덫을 놓고 별장 가격을 떨어뜨려 상대를 외통수로 몰아넣었다. 그러고 나서 먹잇감을 싼값에 낚아챘다. 우리는 똑같은 행태를 주한 미군 철수 협박으로 방위비 협상을 외통수로 몰아가는 행태나 전쟁 위협을 통한 북미 협상 혹은 협상 일정 파기 등에서 반복적으로 목격한 바 있다.
트럼프의 가공할 포퓰리즘의 연료가 분노와 광기, 그리고 공포의 동물적 에너지라면 분노를 실어 나를 ICBM은 트윗이다. 물론 이 또한 트럼프의 발명품은 아니다. 트럼프가 아니라 오바마가 미국 대통령제 역사상 최초의 SNS 대통령이 었다. 오바마는 최저 임금 논쟁 당시 '당신도 한번 그 돈으로 살아 보라 Go Try It’라는 감동적인 트윗으로 정세를 돌파했다. 인종 갈등과 총기 규제 논쟁으로 이어진 흑인 교회 총기 난사 사건의 희생자 추도식에서 찬송가 '어메이징 그레이스Amazing Grace'를 부르는 영상은 유튜브를 통해 확산되면서 초당적 분위기를 만들었다. 하지만 오바마의 SNS 활용이 리버럴다운 지성주의적 메시지라면 트럼프는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자극하는 조커처럼 리얼리티 쇼와 SNS의 어두운 파괴력을 제대로 분출시킨다. 트위터 사용에서도 다크 나이트 오바마와 조커 트럼프는 극단적으로 대립하는 셈이다.
p.101
반지성주의적 월리스와 유사하게도 트럼프와 지지자 들에게 중요한 점은 '팩트 체크’가 아니라 분노의 랩이다. 특 히 월리스가 살았던 모던 시대에 비해 포스트모던 시대인 지금은 진실의 가치가 더 낮다. 오히려 양극화된 대결에서 내 편 선수를 지키는 게 더 중요하다. 케네디와 닉슨의 우아한 지성주의적 대결로 상징되었던 미국 대선 토론은 이제 뉴 미디어 시대에 링에서의 난투극이나 트위터에서의 격정 토로 정도로 변질되었다. 반지성주의가 지성주의를 압도하는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오늘날 자극적인 뉴 미디어의 시대에 지성주 의적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갈수록 잃고 있다. 과거 월리스가 결코 쟁취하지 못한 지성주의와의 대결에서의 승리를 이제 포스트모던 시대에 트럼프가 얻어 내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월리스 현상보다 트럼프 현상이 더 위력적인 이유는 트럼프 현상이 단지 반인종주의 지형만이 아니라 지구적 경제 대위기 및 극우 포퓰리즘 운동의 번성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월리스 시대에는 유럽 차원에서 진보적 운동이 상승하는 흐름이었다면, 오늘날에는 미국만이 아니라 유럽 등지에서도 반이민 선동의 보수 포퓰리즘 운동이 번성하고 있다. 물론 스페인의 포데모스나 미국의 샌더스 현상처럼 진보 측의 포퓰리즘 운동도 동시에 일어나지만, 전반적으로는 경제 대위기, 저성장, 인공지능 시대 일자리 위협, 테러 공포 등을 배경으로 타자를 배척하는 포퓰리즘 번성의 토양이 더 비옥하다. 트럼프 현상은 이 지적 보수 포퓰리즘 운동의 일환이라는 점에서 월리스 현상과 는 사뭇 궤를 달리하고 있으며, 그 파장도 훨씬 더 지구적이다.
트럼프의 정치 운명은 4년의 임기로 끝날지 모르지만, 트럼프주의 현상은 이제 본격적인 시작이라 할 수 있다. 오늘날 아메리칸 드림의 퇴색과 새로이 주류로 등장하는 히스패닉 등의 상승세, 신진보주의적 가치의 득세가 존재하는 한 소수화되는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필사적인 반격은 불가피하다.
과거 20세기 백인 우월주의 운동의 상징인 월리스가 이후 태어난 닉슨과 레이건 보수주의 운동의 산파였다면, 21세기 트럼프 현상은 이후 보수주의의 산파가 될 것이다. 지금 공화당은 이 트럼프 현상의 지지자들이 대거 유입되어 기존 인사이더들과의 대립 구도가 더욱 공고해졌다.
p.112
아이젠하워 대통령 같은 일부 탁월한 예외를 제외하고는 CEO 출신 정치가들은 상대적으로 국가의 의사 결정 과정에 둔감한 경우가 많다. 특히 트럼프는 자의적 권력을 휘두르는 부동산 제국 사업가 출신이라 CEO 대통령 모델 중 가장 행정부와 어울리지 않는 유형이라 할 수 있다. 1인 기업 제국의 총수인 트럼프의 뇌 구조에는 행정부 직원들이 총수를 위해 충성하는 회사원이라는 인식이 박혀 있다. 반면에 트럼프에게 의회는 말만 많고 음모나 꾸미는 비생산적인 집단에 불과하다. 이러한 사업가 기질은 정치를 생산적 정치와 비생산적 정치로 구분하는 파시스트의 인식 구조와도 유사하다.
흔히 트럼프와 비슷한 반反정치 유형의 전형적인 포퓰리스트로 레이건이 거론된다. 레이건은 말이 과격했고 극단적인 이념파들을 대거 고용했다. 하지만 동시에 비서실장을 통해 물밑에서 의회와 온갖 타협을 모색했고 미국의 복잡한 견제 제도에 비교적 성곡적으로 적응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사업가 시절의 습관 그대로 대통령 임기 동안 지루하고 폼이 나지 않는 타협의 예술보다는 자의적 지배와 순도 높은 성취를 추구한다. 물론 조지 부시 시절에도 백악관 자문역이었던 존 유는 대통령의 자의적 권한 행사를 법적 이론화해서 미국 내 자유주의자들에게 충격을 준 바 있다. 과거 1970년대 닉슨 시절에 오명을 얻은 제왕적 대통령제는 오늘날 미국에서 금기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존 유의 제언은 대통령에게 상당한 권한을 위임하는 풍토가 존재하는 외교 안보 사안에 국한된 이야기이다. 하지만 트럼프는 대통령이 펼치는 모든 영역에서 자의적 지배를 추구한다. 트럼프에게 미국 정부 관계자는 트럼프 제국의 회사원일 뿐이다.
p.126
트럼프는 절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아주 오래전인 유학 시절 들줘 본 버트람 그로스Bertram Gross의《상냥한 파시즘Friendly Fascism을 먼지 쌓인 서가에서 다시 꺼내 볼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다. 그로스는 이 오래된 책에서 다음과 같이 섬뜩하게 예언한다.
"다음번에 등장할 파시즘의 흐름은 사람들을 가축처럼 나르고 강제 수용소에 집어넣는 형태가 아닌, 친근한 얼굴로 나타날 것이다."
트럼프는 파시스트 DNA를 가지고 있다. 물론 트럼프를 파시스트라고 부르는 건 과할 수도 있다. 권위주의 정부 정도가 적당한 규정일지도 모르겠다. 남미 권위주의 국가를 오랫동안 연구해 온 스티븐 레비츠키는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How Democracies Die라는 논쟁적 저서에서 권위주의적 정치가가 탄생했다고 선언한다. 그의 리트머스 테스트는 폭력을 명확하게 부정하지 않는 자세, 정치적 경쟁자의 시민적 자유를 제한하는 자세, 선출된 정부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태도 등 세 가지이다. 우리는 캠페인 시절 유세장의 반대파에 대한 폭력을 자극하고, 선거 불복을 선언하고, 힐러리를 감옥에 집어넣자고 선동한 트럼프를 기억한다. 레비츠키의 기준으로 보면 최소한 트럼프는 100퍼센트 권위주의자다.
하지만 트럼프는 단지 권위주의자라는 규정으로는 5퍼센트 부족하다. 파시즘 성격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와 논쟁이 존재한다. 나는 핵심 문제의식과 스타일에서 트럼프를 파시스트로 규정한다. 즉 트럼프는 국내외적으로 어려워지는 디스토피아와 미국 퇴조기의 불안감을 타자에게 전가하고 적에대한 폭력에 매혹을 느끼는 이들을 적극 동원한다는 의미에 서 파시즘의 미학에 가깝다.
과거 자본주의 고도 금융이 낳은 대공황 시절에도 세계 경제에는 디스토피아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엄습했다. 독일과 이탈리아 등은 이를 미·영 중심의 시장 지배에 도전하는 것으 돌파하고자 했다. 이는 내적으로는 국가의 강압적 개입에 의한 전체주의적 총동원으로 구성된다. 자본주의의 위기 앞에서 미국도 국가 개입주의를 노골화했다. 파시즘과 뉴딜은 외관상으로는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국내외적으로 광대한 시장을 보유한 미국은 국가 개입과 임금 주도 성장을 통해 자유주의를 왼쪽으로 확장했다. 노동자층을 강화해 자본과 노동은 새로운 평형을 당분간 확보했다. 이는 금융 자본을 중심으로 한 미국 제국의 상승기였기에 가능한 돌파구였다. 이후 미국은 1970년대 중반까지는 무한한 번영과 실제 성장을 누렸다.
하지만 오늘날 세계 전반은 수축 사회로 돌입했다. 신자유주의 거품기 이후 자본과 노동의 평형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고 이는 자본의 자기 지속 가능한 기반을 파괴했다. 월러스타인이 지적한 것처럼 기후 변화와 복지 부담 등으로 기업과 국가의 부담 비용은 갈수록 상승해 간다. 반면에 경제 블록과 자본 간 경쟁 격화로 평형 구조는 무너져 버렸다. 트럼프의 USMCA는 오바마 시기의 과거 부자가 점잔 빼는 태도를 버리고 노골적으로 수축기의 과잉 경쟁을 돌파하려는 시도다. 학자들은 이를 점잖게 '경쟁적 자유화' 전략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 본질은 합리적 주고받기라는 신사적 외양을 버리고 미국의 패권을 이용하는 강압적 무역 적자 줄이기다. 부상하는 경쟁국과의 험악한 시장 경쟁과 나란히 트럼프는 국내적으로도 부상하는 인구층(히스패닉 등)과 험악한 제로섬 게임을 벌인다. 과거 2차 세계 대전 시절의 파시즘 부상과 맥락은 다르지만, 시대를 떠나 파시즘의 핵심이 바로 이러한 디스토피아 시대에 대한 강압적 돌파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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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자유주의란 자유란 가치를 통해 개인의 존엄과 동등성을 보장하려는 근대의 탁월한 발명품이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 자유주의의 번성은 공화주의와 민주주의, 자본주의리ㅏ는 세 주춧돌 위에서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공화주의란 자의적 지배를 방지하고 공동체의 활력을 유지하기 위해 법적 지배, 견제와 균형 등의 원리를 구현하는 체제를 말한다. 오늘날 자유주의는 이 공화주의와 다수의 지배라는 민주주의 덕분에 역동성이 살아 숨 쉬는 근대 자유 민주주의를 꽃피웠다. 그리고 근대 최대의 혁신적인 발명품 중 하나인 법인 자본주의의 혁신적 동력과 결합하여 삶의 질이 개선되고 번영에 대한 기대감에 사회가 발전할 수 있었다. 더구나 사회주의라는 경쟁 체제의 등장은 서구 자유 민주주의 사회에 긴장감과 견제력을 부여했다. 자유주의 사상가인 카츠넬슨은 자유주의가 사회주의적 평등의 감수성을 결합해야만 역동성을 강화할 수 있다고 간파했다. 사실 유럽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은 카츠넬슨의 화두를 모범적으로 구현하며, 효과적으로 사회주의 진영과의 싸움에서 승리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냉전에서 서구 자유주의의 승리는 카츠넬슨의 조언과 반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공화주의와 민주주의의 풍부한 수원지 대신에 오만하게 자유로운 시장의 권리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노동자 계급을 비롯한 약자들의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한 투쟁과 자본 간 경쟁의 격화에 자본주의 체제는 더 많은 시장의 자의적 지배를 추구하는 신자유주의로 반격했다. 비록 자본은 효과적으로 지구적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지만 점차 벌어지는 힘의 격차는 재생산 기반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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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구 자유주의와 중국 사회주의를 넘어서는 생태 문명대의 비전이 필요하다.
트럼프 현상은 서구 자유주의의 무능과 부작용의 결과다. 아직 자유주의는 새로운 생명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 소비에트 붕괴 후에 오랜 안락한 세월을 보내서인지 상상력이 말라붙었다. 다른 한편으로 부상하는 중국 사회주의는 자유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보편의 매력을 가지기에는 권위주의적 요가 너무 강하다. 야심 찬 일대일로의 비틀거림은 중국 사상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트럼프 시대는 우리에게 단지 서구 자유주의의 새로운 모색을 기다리거나 흉내낼 것이 아니라 스스로 창조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과거 한국의 자유주의 세력들은 미국의 제 3의 길이나 그 이후 임금 주도 성장론 등의 궤적을 따라갔다. 레프트들은 유럽의 사회 민주주의 궤적을 추적했다. 하지만, 트럼프 시대라는 카오스와 전환의 장은 상상력을 앞선다. 자유주의자들의 현상 유지 편향의 정치 시스템은 기후 변화와 양극화라는 난제를 풀 능력을 이미 상실해 버렸다. 우리는 민주주의 이념을 넘어 이 두 난제를 해결할 수 있는 세계관과 국제 협력 거버넌스, 그리고 창의적 정치 제도의 창출 실험으로 앞서가야 한다. 한반도의 대전환은 단지 기존 통일 노선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새로운 사상의 랩lab이어야 한다. 이 랩을 통해 버려진 사상은 미ㆍ중 간의 패권 다툼을 견제하는, 새로운 보편주의 담론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근대의 인간 중심주의를 넘어 지구의 권리와 공존하는 지구법적 지대를 만드는 작은 실험은 어떨까? 나아가서는 한반도와 동아시아 거버넌스에 생태 연방주의적 상상력을 스며들게 할 수는 없을까? 이를 통해 우리는 세계 그린 뉴딜과 그린 지구 운동 흐름과 접속하고 함께 발전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