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버트런드 러셀 [게으름에 대한 찬양]
p.18
지금까지의 얘기는 모두 서두에 불과하다. 내가 진심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로가 미덕이라는 믿음이 현대 사회를 끼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복과 번영에 이르는 적으로 일을 줄여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일이란 무엇인가?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지표면 혹은 지표면 가까이 놓인 물질을 다른 물질과 자리를 바꿔 놓는 일이다. 또 하나는 타인들에게 그런 일을 하도록 시키는 일이다.
첫번째 종류의 일은 즐겁지 못하고 보수도 박하다. 두 번째의 일은 즐겁고 보수도 높다. 또한 이 일은 무한히 확대될 수 있어서 지시를 내리는 사람들뿐 아니라 어떤 지시를 내려야 할지에 대해 조언해 주는 사람들도 있다. 흔히, 조직화된 두 개의 집단에서 정반대되는 두 가지 조언이 동시에 나오게 마련인데 이게 소위 정치역학이다. 이런 류의 일을 하는 데 요구되는 기능은 어떤 조언을 할 것인가라는 주제에 관한 지식이 아니라 말과 글로써 설득하는 기술, 즉 선전에 관한 지식이다.
미국의 경우는 예외지만 유럽에는 이러한 일을 하는 두 계층보다 존경받고 있는 제3의 계층이 존재한다. 바로 토지를 소유함으로써 남들에게 일할 수 있는 은전을 베푼 대가를 받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지주들은 게으르다. 그러니 잘못하면, 내가 지주들을 찬양하는 것으로 비춰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의 게으름은 불행하게도 타인들의 근면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사실, 안락하게 게으름을 피우고자 하는 그들의 욕망이야말로 역사적으로 볼 때 일해야 한다는 모든 신조가 생겨난 뿌리인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들의 본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그들이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일 것이다.
p.19
문명이 시작된 이래로 산업혁명에 이르기까지 대체로, 인간은 열심히 일해도 자신과 가족의 생계에 필요한 정도밖에 생산할 수 없었다. 비록 그의 아내도 남편 못지않게 열심히 일했고 아이들도 나이가 차는 대로 노동력을 보탰겠지만 말이다. 최소한의 필요를 하는 작은 양의 잉여물이 생긴다 해도 전사나 사제 집단에게 돌아갔다. 기근이 닥칠 때는 전혀 잉여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일하는 사람들이 굶어 죽은 반면, 전사와 사제들은 평상시처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중략)
이처럼 오래 유지되어 왔고 종식된 지 얼마 안 된 체제이니만큼 그것이 사람들의 사고와 견해에 깊은 흔적을 남겼으리란 것은 당연하다. 우리가 근로의 바람직성과 관련해 당연시 여기고 있는 내용들이 이 체제에서 파생되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것들은 산업 사회 이전의 산물이기 때문에 현대 세계에는 적합하지 않다. 현대의 기술은 여가를 소수 특권 계층만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공동체 전체가 고르게 향유할 수 있는 권리로 만들어 주었다. 근로의 도덕은 노예의 도덕이며 현대 세계는 노예 제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원시 공동체의 경우, 농부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더라면 얼마 안 되는 잉여를 전사와 사제들에게 나눠 주기보단 차라리 잉여가 생기지 않도록 생산을 줄이거나 소비를 늘렸을 것이다. 처음에 전
사와 사제들은 힘으로 강제하여 농부들을 생산케 하고 잉여를 내놓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일한 대가의 일부가 놀고 있는 사람들을 부양하는 데로 빠져 나간다 하더라도 열심히 이것이 농부들의 본분이라는 윤리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 방법을 쓰게 되자 강제력을 쓸 일이 적어지고 따라서 지배에 드는 비용도 줄어들었다.
(중략) 의무란 개념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권력을 가진 자들이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자기 자신의 이익이 아니라 주인의 이익을 위해 살도록 유도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어져 왔다.
물론 권력을 가진 자들은 자신들의 이익과 인류 전체의 이익은 동일하다고 어거지로 믿음으로써 스스로에게도 이 사실을 은폐한다. 그러한 믿음이 진실인 경우도 있긴 하다. 예를 들어 노예를 거느렸던 아테네인들은 여가의 일부를 바쳐 영원히 문명에 남을 공헌을 했다. 공정한 경제 체제하에서였다면 그 같은 공헌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여가란 문명에 필수적인 것이다. 예전에는 다수의 노동이 있어야만 소수의 여가가 가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노동이 가치 있는 이유는 일이 좋은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가가 좋은 것이기 때 문이었다. 이제 현대 사회는 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에 피해를 주지 않고도 얼마든지 공정하게 여가를 분배할 수 있게 되었다. 현대의 기술은 만인을 위한 생활 필수품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엄청나게 줄였다.
p.22
예를 하나 들어보자. 어떤 시점에서 일정한 수의 사람이 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하루 (이를테면) 8시간 일해서 세상에 필요한 만큼의 핀을 만들어 낸다. 그때 누군가가 같은 인원으로 전보다 두 배의 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한다. 그러나 그 세계에선 핀을 두 배씩이나 필요로 하지 않을뿐더러 이미 핀 값이 너무 떨어져서 더 이상 낮은 가격으론 팔 수도 없다. 이때 지각 있는 세상이라면 핀 생산에 관계하는 모든 이들의 노동 시간을 8시간에서 4시간으로 조정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 두 종전처럼 잘 굴러갈 것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 세계에서 그렇게 했다간 풍속 문란 행위쯤으로 여길 것이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8시 간씩 일하고, 핀은 자꾸자꾸 남아돌고, 파산하는 고용주들이 생겨 나고, 과거 핀 제조에 관계했던 인원의 절반이 직장에서 내쫓긴다.
결국 모두 4시간씩 일했을 때 나올 수 있는 만큼의 여가가 창출된 셈이다. 그러나 인력의 절반이 완전히 손놓고 노는 동안 나지 절반은 여전히 과로에 시달려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불가피하게 생긴 여가는 행복의 원천이 되기는커녕 온 사방에 고통을 야기시킬 뿐이다. 이보다 더 정신나간 짓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p.24
만일 사회를 현명하게 조직해서 아주 적정한 양만 생산하고 보통 근로자가 하루 4시간씩만 일한다면 모두에게 충분한 일자리가 생겨날 것이고 실업이란 것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부자들에겐 충격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여가가 주어지면 어떻게 사용할지도 모를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p.29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돈을 버는 것은 선이고 돈을 쓰는 것은 악이란 얘기다. 그 두 가지가 거래의 양 측면이란 점을 생각할 때 그 같은 얘기는 모순이다. 차라리 열쇠는 선이고 열쇠 구멍은 악이 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물품 생산에서 나온 가치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그 물품을 소비하는 행위에 의해 획득된 이익에서 나온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은 이윤을 위해 일한다. 그런데 그가 하는 일의 사회적 목적은 생산한 것을 소비하는 데 있다. 생산의 개인적 목적과 사회적 목적 사이의 이 같은 분리야말로 이윤 창출이 산업
로 자극하는 세계에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명쾌한 사고를 하기 어렵게 만드는 주요인이다. 우리는 생산에 관해선 너무 많이 생각하 소비에 대해선 너무 적게 생각한다. 그 결과로 우리는 즐거움의 향유나 소박한 행복에는 별 중요성을 두지 않으며 생산을 그것이 소비자에게 주는 기쁨에 근거해 판단하지 않는다.
노동 시간을 4시간으로 줄여야 한다고 해서 나머지 시간이 반드시 불성실한 일에 쓰여져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내 얘기는 하루 4시간 노동으로 생활 필수품과 기초 편의재를 확보하는 한편, 남는 시간은 스스로 알아서 적절한 곳에 사용하도록 되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현재보다 더 많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그 교육의 목표에 여가를 현명하게 사용하는 데 필요한 안목을 제공하는 항목이 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사회에서나 필수적이다. 나는 지금 소위 지식인으로 만드는 따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아니다.
p.77
그러나 국가들은 노동 분업의 원리를 아직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만일 이해하고 있었다면 독일로 하여금 특정 종류의 상품들 ─연합국들이 자국 생산을 중단한 품목들─로 배상하게 했을 것이다. 그 결과로 실직하게 되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다른 직종으로 옮길 수 있도록 국가에서 교육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생산의 조직화가 반드시 요구되는데 그것은 사업 관행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다.
p.85
따라서 정부가 금융에 관여해야 할 필요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금융과 산업을 한 덩어리로 묶어 생각하도록, 따로이 금융의 이익만이 아닌 전체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을 목표로 삼도록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 금융과 산업을 따로 떼어 놓으면 금융이 산업보다 막강하다. 그러나 금융의 이익보다 산업의 이익이 공동체의 이익에 좀더 가깝다. 과대해진 금융 세력으로 인해 세계가 위기에 처하게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소수가 다수를 능가하는 힘을 획득하는 경우 그들은 어김없이 다수를 지배하는 일정한 미신의 도움을 받아 왔다. 고대 이집트에 서 일식과 월식 현상이 당시 대중들에게 공포의 대상으로 여겨지고 있을 때 사제들이 그것을 예견하는 방법을 발견해 냈다. 결국 사제 들은 다른 방법으론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공물과 권력을 얻을 수 있었다. 왕들은 신성한 존재였고 따라서 찰리 1세의 목을 자른 크롬웰은 신성 모독의 죄를 지은 것으로 여겨졌다. 우리 시대의 금융업자들은 금을 숭배하는 미신의 도움을 받고 있다. 금 준비금이니, 어음 발행이니, 인플레이션, 디플레이션, 리플레이션, 기타 온갖 전문 용어들을 나열하면 보통 시민은 놀라서 말문이 막혀 버린다. 그런 문제들에 대해 청산 유수로 말하는 사람들은 대단히 똑똑한 사람임에 틀림없다고 느끼면서 그들의 말에 감히 의문조차 품지 못한다.
보통 시민에게 금의 기능을 설명해 보라고 하면 대단히 당황하겠지만 현대 사회에서 금이 차지하는 역할이 실제로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그저 막연히, 자기 나라가 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더 안전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금 준비금이 증가했다고 하면 기뻐하고 줄었다고 하면 서운해하다.
일반 대중의 이러한 어리석은 면은 금융업자가 민주주의에 구속되지 않고 활동하는 데 꼭 필요한 조건이다. 물론, 그에겐 여론을 다루는 데 필요한 이점들이 그밖에도 많다. 그는 엄청나게 부자이기 때문에 대학에 재산을 기부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대학 여론에 가장 큰 영향력 있는 부분을 자신의 편으로 확실하게 만들어 놓는다. 그는 금권 정치의 우두머리 위치에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으로 꽉 찬 정치 사상을 가진 모든 이들의 지도자가 된다. 경제력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그는 전 국가들을 골라 잡아 흥망을 분배할 수 있다. 그러나 미신의 도움이 없다면 이러한 무기들 중 어느 것도 충분치 못하다. 경제학은 모든 남자나 여자, 아이들에게까지, 모두에게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이 과목을 가르치는 일이 거의 없으며 대학에서조차도 소수의 사람들만이 배우고 있을 뿐이라는 건 놀라운 사실이다. 게다가 그 소수조차도 정치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지 않는 한 마땅히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한다. 금권 정치로 기울지 않은 입장에서 경제학을 가르치는 몇몇 기관들이 있긴 하지만 그야말로 아주 극소수이고 일반적으로는 현존
경제 현상을 미화시키는 방식으로 가르친다. 내가 보기에 이 모든 것들이 '미신과 신비화는 재력을 가진 자들에게 봉사한다'는 사실과 연관되어 있다.
전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공동체의 이익에 반(反)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p.130
만일 당신이 많은 사람들이 말이나 개에 대해 가지는 애정처럼 조건 없는 애정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한다면 아이들은 당신의 제안에 쉽게 반응할 것이고 금지 사항들도 쉽게 받아들일 것이다. 물론 다소 투덜거리긴 하겠지만 분노는 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을 금전으로 환산할 수 있는 사회적 노력의 수단으로 바라본다거나 결국 마찬가지 얘기지만 권력 충동을 위한 배출구로 바라본다면, 위에 말한 류의 애정을 가졌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아이가 투표권을 갖게 되면 당신의 정당을 지지해 줄 거라는, 혹은 아이가 국왕과 나라에 희생할 마음을 가지게 될 거라는 속셈에서 나온 관심을 아이에게 보인다면 고마워할 아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바람직한 관심이란 아무 목적 없이 아이들과 같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움을 느끼는 데서 나오는 것이다. 이런 자질을 가진 교사라면 아이들의 자유에 간섭할 필요도 별로 없겠지만 혹시 필요한 경우가 있다 해도 아이들에게 심리적 상처를 주지 않을 것이다.
p.136
'이성'에 대한 반란은 추론에 대한 반란으로 시작되었다. 18세기 전반 뉴톤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동안, 지식으로 가는 길은 단순한 일반 법칙의 발견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연역적 추론을 통해 그러한 법칙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었다. 뉴톤의 중력 법칙이 1세기에 걸친 면밀한 관찰을 통해 발견되었다는 점도 잊은 채 많은 사람들이 일반 법칙은 자연적으로 발견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자연 종교, 자연법, 자연 도덕 등이 탄생했다. 이러한 주제들은 유클리드 방식에 따라 자명한 공리로부터 나오는 논증적 추론들로 구성된다고 여겨졌다. 미국 독립전쟁 및 프랑스 혁명에서 설파된 '인권 선언'은 바로 이 같은 관점의 정치적 결과물이었다.
그러나 이성의 신전'이 거의 완성되어 가는 듯 보이던 바로 그 때, 지뢰가 하나 부설되었고 결국 그 지뢰에 의해 건축물 전체가 공중 분해되어 버리고 만다. 지뢰를 놓은 이는 바로 데이비드 흄이었다. 1739년에 발간된 그의 『인간 본성에 관한 보고서』는 '도덕적 주제들을 추론하는 실험적 방법을 소개하기 위한 시도'란 부제를 달고 있다. 이것은 그의 모든 의도를 대표하지만 그의 성과는 절반 정도밖에 표현하지 못했다. 그의 의도는 명목상 자명한 공리들로부터의 연역을 관찰과 귀납으로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정신적 성향으로 볼 때 그는 완벽한 합리론자였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적 변종들보단 베이컨의 합리주의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그러나 전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잘 결합된 그의 예리함과 지적 정직성이 결국 몇 가지 파괴적인 결론들을 이끌어 내었다. 귀납은 논리적 정당성을 갖추지 못한 습관이라는 것과 인과 관계를 믿는 것은 미신보다 별로 나을 게 없다는 결론이었다. 그리하여 과학은 신학과 더불어 기만적 희망과 비합리적인 확신이라는 변방으로 좌천되었다.
p.151
우리가 살펴본 현대 비합리주의자들의 교리의 특징을 살펴보자. 그들은 사고와 감정보다 '의지'를 강조하고 권력을 찬양한다. 객관적이고 귀납적인 검증보다 이미 정립된 것에 대한 직관적인 단정'을 믿는다. 이러한 정신 상태는 비행기 같은 현대적 기계를 조종하는 습관에 젖은 사람들이나, 과거의 우월성을 회복할 합리적인 근거를 찾아낼 수 없는 사람들이 보이는 자연스런 반응이다. 산업주의와 전쟁은 기계력에 의존하는 습관을 가져다 주었으며 경제적, 정치적 힘의 대변환을 야기했다. 그 결과 독단적인 자기 주장을 펼치는 대규모 집단들을 낳았다. 바로 거기에서 파시즘이 자라난 것이다.
1920년의 세계를 1820년의 세계와 비교해 보면 대자본가, 임 금 노동자, 여성, 이교도, 유대인처럼 세력이 커진 측이 있다(여기서 '이교도'란 통치권의 종교와 다른 종교를 가진 이들을 의미한다). 상대적으로 세력이 줄어든 측은 군주, 귀족, 성직자, 중하층 계급, 그리고 여성과 비교해 남성들이 있다.
대자본가들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막강해졌을 사회주의의 위협, 특히 모스크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스스로의 안전을 지킬 필요성을 느꼈다. 전쟁 관계자들─육·해군 장성, 비행사, 무기 회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그 당시로선 막강했지만 성가신 볼셰비키 패거리와 평화론자들의 위협에 처해있었다.
이미 패배한 계층들─왕과 귀족, 소규모 상인, 이교 묵인에 대해 격렬하게 반대하는 종교인, 남성이 여성 위에 군림하던 시절을 아쉬워하는 남자들─은 완전히 궁지에 몰렸다. 경제나 문화의 발전 양상으로 볼 때 현대 세계에서 그들의 자리는 전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자연히 그들은 불만을 품게 되었고, 집단적으로 모이면 다수였다. 니체의 철학은 그들의 정신적 요구에 심리적으로 맞아떨어졌다. 자본가들과 군사 전문가들은 대단히 영리하게도 그 점을 이용해 패배한 세력들을 모아 산업과 전쟁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 가장 중세적인 반동을 지지하는 정당을 만들고자 했다. 산업과 전쟁의 경우, 기술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현대적인 것을 추구했지만 권력의 분배나 평화를 추구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에게 사회주의자들은 위험스런 존재들이었다.
결국 나치 철학의 비합리적 요소들은 더 이상 존재 이유 (raison d être)'를 가지지 못하게 된 계층들의 지지를 끌어 모아야 할 필요성에서 나온 반면, 비교적 합리적인 요소들은 자본인와 군인들에게서 나왔다.
전자의 요소들이 '비합리적'인 이유는, 예를 들어 소규모 상인들의 경우 자신들의 희망을 실현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에서 환상적 믿음만이 좌절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피난처가 된다는 점에 있다. 이에 반해, 자본가와 군인들의 희망은 파시즘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희망이 오로지 문명의 파괴를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을 비합리적이라기보단 차라리 악마로 만든다. 이 사람들은 파시즘에서 지적으론 최고이면서 도덕적으론 최악의 요소를 이룬다. 나머지 사람들은 영광과 영웅주의와 자기 희생에 현혹되어 자신들의 중대한 이익은 제대로 보지도 못한 채 감정에 휩싸여 자신의 목적도 아닌 것에 스스로 이용당하고자 한다. 바로 이것이 나치 왕국의 정신 병리학이다.
p.157
정치에서 이성이 몰락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하나는, 세상이 자신들에 아무런 기회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 임금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회주의에서도 희망을 찾지 못하는 계층 및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요인은 능력 있고 힘 있는 사람들 가운데 공동체의 이해와 반하는 이해 관계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다양한 집단 히스테리들을 조장함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안전하게 유지하려 한다. 反공산주의, 외국 군사력에 대한 공포, 경쟁국에 대한 증오가 가장 두드러진 예이다. 합리적인 사람들은 이러한 정서를 느끼지 못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정서들 이 실제적인 문제에 대해 이성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만드는 수단으로 이용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세계가 가장 필요로 하는 두 가지는 사회주의와 평화이지만 우리 시대 가장 힘 있는 사람들의 이익에 정면 대치되는 것도 바로 이 두 가지다. 이 두 가지 쪽으로 접근하는 조치들을 다수의 이익과 상치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집단 히스테리를 일으키는 것이다. 사회주의와 평화로부터의 위협이 높아질수록 정부는 국민의 정신적 삶을 더욱 타락시키려 한다. 또한 현재의 경제적 난국이 가중될수록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지적인 냉철함에서 벗어나 기만적인 도깨비불 쪽으로 향하게 된다. (중략)
이처럼 다른 진실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만일 이성적 설득마저 좌절된다면 정신 나간 선전이 판치는 대결과 전쟁에 의해 결정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 세계를 전염시키고 있는 국가 및 계급 간의 깊은 반목이 해결되어질 때까진 인류가 이성적 정신 습관을 회복하길 기대하긴 어렵다.
문제는 비이성이 만연하고 있는 한 우리의 고민들은 우연히 해결책에 도달하는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이성이란 사리에 치우침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보편적인 협조를 만들어낼 수 있지만, 비이성이란 사적인 열정을 대표하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불화를 빚어내기 때문이다.
보편적이고 공정한 진리의 기준에 호소한다는 의미에서 합리성이야말로 인간 종족의 안녕에 으뜸가는 요소라고 보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러한 시각은 합리성이 쉽게 승리할 수 있는 시대 에는 물론이고, 합리성이란 자신이 동조할 수 없는 부분에서 살인으로 해결해 버릴 만한 배짱도 없는 사람들의 헛된 꿈에 불과하다며 합리성을 경시하고 거절하는 불행한 시대에는 더더욱 지당하다.
p.162
1. 나는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 비판』에 깔린 철학 마르크스의 철학에 동의할 수 없다. 나는 유물론자가 아니며 관념론자는 더더욱 아니다. 역사의 변화에 어떤 변증법적인 요소가 필요하다고 믿지 않는다. 변증법은 마르크스가 헤겔에게서 논리적인 기초─다시 말해 관념 제1주의─만 쪽 빼놓고 물려받은 것이다. 마르크스는 인류 발전의 다음 단계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진보임에 '틀림없다'고 믿었는데 나는 그가 어떤 근거로 그런 믿음을 가지게 됐는지 모르겠다.
2. 나는 마르크스의 가치론은 물론 그의 변형된 잉여가치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 상품의 교환 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든 노동력에 비례한다고 하는 이 논리는 마르크스가 리카르도에게서 물려받은 것으로 리카르도의 지대론에 의해 거짓임이 판명되었고 마르크스주의 학자들을 제외한 모든 경제학자들에 의해 이미 오래 전에 버림받은 논리다. 잉여가치론은 맬더스의 인구론에 의거한 것으로 마르크스는 맬더스 인구론에서 이 부분만 취하고 나머지는 모두 거부했다.
마르크스의 경제학은 전체적으로 논리적 일관성을 세우지 못한 채 옛 학설들을 취사선택하여 구축한 것으로 그 대부분이 자본가들에 대항하는 입장을 세우고자 하는 그의 편의에 따라 이루어진 취사선택이었다.
3. 어느 한 사람을 두고 무오류자로 간주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필연적으로 지나친 단순화로 귀착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주입해 온 전통은 사람들로 하여금 무턱대고 성스런 책을 찾게 만들었다. 그러나 권위에 대한 이 같은 숭배는 과학적 정신에 반(反)하는 것이다.
4. 공산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소위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것은 사실, 과두 지배 치란 권력을 잃을 위험에 처해 있지 않는 한 언제나 지배 계급의 이익 속에서 수행된다는 것을 모든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가르침일 뿐 아니라 마르크스의 가르침이기도 하다. 공산주의 국가의 지배 계급에게는 '민주주의' 국가의 자본가 계급보다 훨씬 더 큰 권력이 주어진다. 그 계급이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한 자기 계급의 이익을 위해 그 힘을 쓰려할 것이다. 그러한 이익 이 자본가 계급의 이익보다 해롭지 않을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그 계급이 언제나 전체의 이익을 위해 행동할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이상주의에 불과하며 이상주의는 마르크스 자신의 정치 철학과도 상반된다.
5. 공산주의는 자유, 특히 지적 자유를 파시즘을 제외한 다른 어떤 체제보다 심하게 제한한다. 경제적, 정치적 권력이 완벽하게 일치됨으로써 공포스런 압제의 장치가 생겨나게 될 것이고 그 압제 에는 예외를 위한 한치의 틈도 없다. 이러한 체제하에서는 진보도 이내 불가능해질 것이다. 자신의 힘을 증대시키는 것을 제외한 어떤 변화에도 반대하는 것이 관료들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모든 중대한 혁신은 평판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어쩌다 우연히 살아남는 데서 가능했다. 케플러는 점성술로 살았고 다윈은 물려받은 재산으로 살았으며, 마르크스는 엥겔스가 맨체스터의 프롤레타리아를 '착취'해서 보내주는 돈으로 살았다. 평이 좋지 않았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러한 기회들이 공산주의하에서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6. 마르크스와 요즘 공산주의자들의 사고에는 정신 노동자들에 비해 육체 노동자들을 지나치게 미화하는 면이 있다. 그 결과, 어쩌면 사회주의의 필연성을 이해할 수도 있었을 많은 정신 노동자들을 적으로 돌려왔다. 그들의 도움 없이는 사회주의 국가의 조직이 불가능한데도 말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설정해 놓은 계급 구분은 이론보다 실제에서 더 심하다. 실상, 그들 자신부터가 너무도 비천한 계급 출신들이다.
7. 계급 전쟁을 설파하는 것은 대립하는 양 세력이 어느 정도 힘이 비슷하거나 혹은 자본가 측이 우세한 시점이라 해도 계급 전쟁을 일으키겠다는 얘기처럼 들린다. 만일 자본가 측의 힘이 우세하다면 그 결과는 반동의 시대다 만일 양측의 힘이 엇비슷하다면 현대의 전쟁 방식을 감안할 때 그 결과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할 것 없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 문명의 파멸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내 생각으론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곳의 사회주의자들은 설득에 의존해야 하며, 무력은 적들이 비합법적인 무력으로 나올 때에만 사용해야 한다. 이런 방법을 쓰면 사회주의자들이 크게 우세할 수 있을 것이므로 결전 기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 것이고 따라서 문명 파괴라는 심각한 사태로까지 나아가지 않아도 될 것이다.
8. 마르크스와 공산주의는 너무도 많은 증오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한다 해도 적의가 터져나오지 않는 여유있는 체제를 구축할 것이라고 기대하긴 힘들다. 그러므로 승자들에겐 압제를 옹호하는 주장들이 실제보다 더 강력해 보일 것이며 특히, 치열하고 불확실한 전쟁에서 승리했을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그러한 전쟁을 치르고 승리한 측이 올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재건에 나서리라고 기대하는 건 무리다. 전쟁에는 두려움에서 나오는 그 자체의 심리 구조가 있다는 것, 따라서 전쟁은 애초의 투쟁 명분에서 이탈해 독자적으로 흐르게 된다는 점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너무 쉽게 망각한다.
p.165
실제적으로 공산주의와 파시즘이 유일한 대안이라고 보는 시각은 내가 보기엔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그리고 심지어 이탈리아와 독일에서도 단연코 사실이 아닌 것 같다. 영국은 크롬웰 치하에서, 프랑스는 나폴레옹 치하에서, 파시즘을 겪었지만 두 나라 중 어느 나라에서도 그 경험이 그 후의 민주주의의 발전에 장애가 되진 않았다. 또한 정치적으로 미성숙한 나라들이 정치적 미래에 대한 지표가 될 수 없음은 물론이다.
파시즘에 대한 나의 반론은 공산주의에 대한 반론에 비하면 훨씬 단순해서 어떤 의미에서는 원론적인 측면이 많다. 공산주의자들의 목표는 전반적으로 나도 동감하는 바이다. 다만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수단이다. 그러나 파시스트들의 경우 나는 그들의 수단 못지않게 목표까지도 증오한다. 파시즘은 복합적인 운동이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의 형태도 매우 달랐고 만일 다른 나라로 확산된다 해도 역시 각기 다른 형태를 띠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일정한 본질적 요소들이 있다. 파시즘은 반민주적, 국가주의적, 자본주의적이다. 또한 현대 세계의 발전 과정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면서도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의 체제가 확립되면 더 힘들어질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중산 계층에 호소한다.
공산주의도 물론 반민주적이긴 하지만 적어도 공산주의 이론이 실제 정책으로 연결되어지는 한 반민주적 성격은 일시적이다. 게다가 공산주의는 노동자들의 이익에 봉사함을 목표로 있다. 선진 국가들에서 노동자들은 다수를 차지하고 있고 따라서 공산주의자들은 전체 인구를 노동자로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파시즘은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반민주적이다. 절대 다수의 절대 행복을 주요 목표로 인정하지 않는 대신, 특정 개인이나 국가, 계층들을 선택해서 최고라고 내세우며 배려할 만한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머지 사람들은 선택된 자들에게 봉사하도록 무력에 의해 강요된다.
파시즘이 권력 투쟁에 몰입해 있는 기간 동안은 상당한 세력을 가진 인구에 호소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모두 사회주의로부터 자라났지만 단, 정통 프로그램에서 반국가주의적인 요소들은 모조리 빼버렸다. 사회주의로부터 경제 계획과 국가 권력 증대에 관한 아이디어를 얻긴 했지만 그 계획은 전세계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한 나라의 최상층 및 중간 계층의 이익을 위한 계획으로 변질되었다.
또한 파시즘은 이런 이익들을, 능률을 증대시켜 확보하기보단 노동자 및 힘없는 중간 계층에 대한 압제를 증대시킴으로써 얻으려 한다. 파시즘의 자비가 미치지 않는 영역에 놓인 계층들에게는 기껏해야 지휘 감독이 잘 되는 감옥에서 얻을 수 있는 정도만을 기대할 뿐, 그 이상의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파시즘에 반대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인류의 일부를 선택해 그들만이 중요하다고 보는 데 있다. 애초에 통치 세력이 확립된 이래로 권력을 가진 자들은 사실상 그러한 선택을 자행해 왔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이론으로나마 개별 인간의 영혼은 그 자체가 목적이며 타인들의 영광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다고 정의해 왔다. 현대 민주주의의 힘은 기독교의 그 같은 도덕적 이상에서 나왔으며, 통 치 세력이 힘 있고 돈 있는 자들의 이익에만 몰두하는 것을 막는 데 큰 역할을 해왔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파시즘은 고대 우상 숭배의 최악의 형태로 복귀한 것이다.
또한 파시즘이 성공하기 위해서라면 자본주의의 병폐를 치유하기 위한 조치를 전혀 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러한 병폐를 더욱 악화시키려 들 것이다. 육체 노동자는 강제 노동에 의해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게 될 것이고 그러한 노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겐 정치적 권리뿐 아니라 거주지나 작업장을 선택할 자유, 어쩌면 영속적인 가정 생활조차도 일체 보장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사실상의 노예인 것이다.
독일이 실업을 다루는 방식에서 이미 이 모든 것이 진행되고 있음을 목격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민주주의의 통제에서 벗어 난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결과이며 이와 유사한 러시아의 강제 노동 실태는 이것이 모든 독재의 불가피한 결과란 것을 시사해 준다. 역사를 보아도 전제주의에는 언제나 노예제나 농노제가 함께 했다.
파시즘이 성공하려면 필연적으로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나 파시즘이 영구히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파시즘은 경제 국가주의란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치 측의 가장 막강한 힘은 중공업, 특히 철강과 화학이었다. 국가 조직된 중공업은 오늘날 전쟁 조장에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만일 모든 문명국들에 중공업의 이익에 예속된 정권이 서 있다면 사실, 이미 상당 정도 그렇긴 하지만 조만간 전쟁은 불가피해질 것이다. 파시즘이 새롭게 승리할 때마다 전쟁은 가까워진다. 그리고 일단 전쟁이 터지면 그 당시 존재하고 있던 모든 것은 물론, 파시즘조차도 깨끗이 쓸어 버릴 가능성이 높다.
파시즘은 자유방임주의나 사회주의, 공산주의처럼 정돈된 믿음 체계가 아니며 본질적으로 감정적 항변에 불과하다. 현대 경제의 발달로 고통받는 소상인 같은 중산층들의 감정과 권력을 사랑한 나머지 과대망상증에 걸려 버린 무정부주의적 산업계 우두머리들의 감정이 그 축을 이루고 있다.
또한 파시즘은 지지자들이 바라는 것을 성취시켜 줄 수 없다는 점에서 불합리하다. 파시즘의 철학이란 건 없으며 다만 정신 분석 학이 있을 뿐이다. 파시즘이 성공하게 되면 결과는 비참함의 확산 일 뿐이다. 그러나 파시즘은 전쟁 문제에 있어 해결책을 찾을 능력이 없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성공할 수 없다.
영국과 미국이 파시즘을 채택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이 두 나라의 확고한 대의 정체(政體)의 전통이 파시즘 쪽으로 발전해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반 시민들은 공 적인 일이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므로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총선이나 대통령 선거는 이미 그들에겐 더비(경마 대회)와도 같은 즐거운 행사이기 때문에 선거 없는 생활은 매우 따분하게 느껴질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는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프랑스가 파시즘을 선택한다면 나로선 놀라운 일일 것이다. 전시 중에 잠시 동안이라면 몰라도.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동시에 적용되는 몇 가지 반론 내가 보기에 이것이야말로 가장 결정적 있다. 두 체제 모두 소수의 집권자들이 대다수의 국민들을 미리 생각해 둔 틀에 강제로 짜 맞추려 한다. 그들은 마치 기계를 제작하는 사람이 재료를 보듯 국민들을 바라본다. 기계 재료들은 자체 내 고유의 발전 법칙이 아닌 제작자의 목적에 따라 많은 변형을 겪게 된다.
생물이 관련된 경우, 특히 인류가 관련된 대부분의 경우에는 자발적 성장만이 일정한 결과를 낳도록 되어 있어 그 외의 결과들은 강제와 압력에 의해서만 얻을 수 있다. 발생학자들이 머리가 둘인 동물이나 발가락이 나야 할 자리에 코가 나 있는 짐승 따위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진 모르지만 그런 기형 동물들이 즐겁게 생활하리라 곤 생각하기 힘들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회 전체의 밑그림을 구상하고 있는 파시스트와 공산주의자는 특정 틀에 끼워 맞추기 위해 개인들을 비틀어 버린다. 제대로 비틀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죽여 버리거나 강제 수 용소로 보내 버린다. 개인의 자발적인 추진력을 완전히 무시하는 이런 류의 관점이 윤리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거나 장기적으로 정치적인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p.197
두 가지 문제로 좁혀 얘기하고자 한다. 즉, 이 시점에서 자본주의와 연계된 전쟁의 위험성은 어느 정도인가? 또 사회주의의 확립으로 그 위험성은 얼마나 제거될 수 있을 것인가?
전쟁은 매우 오래된 관습으로 비록 그 원인은 언제나 주로 경제 문제였지만 자본주의에 의해 처음 도입되어진 것은 아니다. 과거의 전쟁들은 주로 두 가지 근원에서 비롯되었다. 군주의 개인적 야망이 그 하나이고, 힘있는 부족 혹은 국가의 모험심 확장이 나머지 하나이다.
'7년 전쟁'에서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볼 수 있다. 유럽에서의 충돌은 왕조간 충돌인 반면 미국과 인도에서의 충돌은 민족 간 충돌이었다. 로마인들의 정복은 주로 장군들과 로마 군단의 사사로 운 재정적 동기와 직결되었다. 아랍족, 훈족, 몽고족 같은 목축 민 족들은 기존의 목축지로는 충분치 않았던 까닭에 거듭 정복의 길로 나서야 했다.
어느 시대에나 승리를 확신하는 강건한 사내들은 전쟁을 즐기고 여자들은 그들의 무용을 예찬하는 분위기가 전쟁을 조장해 왔다. 그러는 사이 전쟁은 최초의 기원에서 많이 멀어졌지만 전쟁이
없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앞서 말한 고대적 동기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전쟁을 막는 '완결된' 안전 장치는 오직 국제 사회주의를 통해서만 주어질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주요 문명국들에서 나타나는 국가 사회주의는 그 가능성을 엄청나게 감소시키고 있다.
전쟁에 대한 모험적 충동이 문명국 국민들의 일각에 여전히 남아 있긴 하지만 평화에의 갈망으로 이어지는 동기들은 지난 몇 세기를 통틀어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다. 지난번 전쟁이 승리자들에게조차도 번영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는 것을 사람들은 쓰라린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사람들은 다음 전쟁이 그 규모와 강도에 있어 '30년 전쟁' 이래 그 어느 전쟁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인명 손실을 불러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그러한 피해가 결코 어느 한편에만 국한되지 않으리란 것, 따라서 주요 도시들이 파괴되고 대륙 전체가 문명을 상실하지나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특히 영국인들은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침략에 대한 해묵은 면역성마저 상실했음을 잘 알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사실들로 인해 대영 제국에서 열정적인 평화에 대한 갈망이 일었고 강도는 다소 덜하겠지만 다른 나라도 이에 못지않았다.
그러나 이 모든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급박한 전쟁 위험이 여전히 존재하는 것일까? 그 원인에 가장 근접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독일 내 호전적 민족주의의 성장을 낳은 베르사이유 조약의 가혹함이다. 하지만 새로운 전쟁이 터진다면 아마도 1919년 조약보다 훨씬 더 가혹한 조약을 낳을 수밖에 없을 것이고 따라서 피정복자측의 더욱 거센 반동으로 이어질 것이다.
이처럼 끝없는 시소게임에서는 영구적 평화란 결코 올 수 없다. 평화는 국가 간 적대감의 근원을 뿌리 뽑는 데서 가능하다. 오늘날 그러한 원인들은 주로 특정 파벌들의 경제적 이해에 얽혀 이 때문에 결국 근본적 경제 재건을 통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
철강 산업은 경제적 요인이 어떤 식으로 전쟁을 조장하는지 가장 두드러지 보여준다. 현대의 기술 발전으로 인해 생산량이 적을 때 보다 대량 생산할 때 톤 당 생산가가 더 낮아진다. 따라서 충분하게 큰 시장을 확보하면 수익이 남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수익이 없다.
다른 모든 시장들을 능가하는 홈마켓을 가진 미국 철강업의 경우에는 해군 군비 감축 계획을 막기 위해 개입하는 정도 외에 지금 까진 정치와 티격태격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독일, 프랑스, 영 국의 철강 산업들은 자신의 기술 수준에 못 미치는 작은 규모의 시장을 가지고 있다. 물론 합병 형태를 통해 일정한 이익을 확보할 수 도 있겠지만 여기에도 역시 만만찮은 경제적 장애들이 존재한다.
철강 수요는 주로 전쟁 준비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볼 때 철강 산업은 국가주의와 군비 확대로부터 이익을 얻는다. 게다가 프랑스의 코미테 데 포르쥐나 독일 철강 트러스트는 양자 모두 경쟁자들과 이익을 나눠 먹느니 차라리 전쟁을 통해 경쟁자들을 분쇄하는 쪽을 택한다. 전쟁 비용은 주로 상대측에 넘겨질 것이 므로 전쟁 결과는 재정상으로도 자신들에게 유리할 것이란 계산이다.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실수는 권력에 도취된 대담하고 자신만만한 사람들에겐 자연스러운 일이다.
p.209
자신이 속한 문명을 올바르게 바라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 가지의 확실한 수단이 있다. 바로 여행, 역사, 그리고 인류학이다. 그러나 객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이 셋 중 어느 하나도 생각만큼 그리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여행자는 자기가 관심 있는 것만을 본다. 예를 들어 마르코 폴로는 중국 여인들의 발이 작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역사가들은 자신들의 관심사에 따라 역사적 사건들을 정리한다. 이를테면 로마 몰락의 원인으로 제국주의, 기독교, 말라리아, 이혼, 이주민의 유입 등등의 여러 다양한 이유들이 제시되어 왔다. 이 중 이혼과 이주민의 유입은 각각 미국의 목사들과 정치인들이 선호하는 이유들이다.
인류학자는 그 시대의 지배적인 편견에 따라 사실들을 선정하고 해석한다. 늘 집에 박여 있는 우리가 미개인에 대해 뭘 알겠는가? 루소주의자들은 그를 숭고하다고 하고 제국주의자들은 그를 잔인하다고 말한다. 종교적 성향을 가진 인류학자들은 그를 정하고 가정적인 사람이라고 하는 반면 이혼법 개혁 주창자들은 그가 자유 연애주의자라고 말한다. 제임스 프레이저 경은 그가 늘 자신의 신을 죽이고 있다고 하고, 다른 이들은 그가 종교입회 의식들로 늘 바쁘다고 말한다. 쉽게 말해 이 미개인은 인류학자들의 이론에 따라 무엇이든 되는 친절한 녀석이다.
그러나 이 같은 결점들에도 불구하고 여행과 역사와 인류학은 그래도 가장 좋은 수단이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p.233
그렇다면 죽음이 존재하는 세상에 적응하려 애쓰는 젊은이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을 것인가? 다음 세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사실 이것들을 모두 달성하기란 대단히 힘든 일이다.
첫째, 죽음은 말하고 싶지도 않고 생각해 보라고 권장하고 싶지도 않은 않은 주제라는 느낌을 그들에게 주어선 안 된다. 만일 우리가 그런 느낌을 준다면 오히려 거기엔 흥미로운 뭔가가 있다고 판단하고 더 열심히 생각하려 들 것이다. 이 부분에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요즘의 성교육 방식을 응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젊은이들이 죽음의 문제를 두고 많이 혹은 자주 생각하는 것을 가능한 한 막아보려 해야 한다. 이것은 포르노에 빠지는 류의 탐닉 행위들에 반대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다. 다시 말해 그런 류의 탐닉은 능률을 감소시키고 모든 방면의 발전을 가로막으며 결국 자신과 타인들 모두에게 불만족스러운 행동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셋째, 의식적인 사고만으로 죽음이란 주제에 대한 만족할 만한 태도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리란 희망을 버려야 한다. 특히, 죽음이 생각보단 덜 끔찍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는 의도를 가진 믿음들은 그것들이 의식의 저변으로 침투하지 못하는 한(흔히 그렇다) 아무 쓸모도 없다.
이 다양한 목표들을 실행하기 위해선 어린이나 젊은이의 경험에 따라 다소 다른 방법들을 택해야 한다. 만일 아이와 가까운 사람들 중 아무도 죽은 이가 없다면 죽음을 평범한 사실로, 대단한 흥미 거리가 못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
죽음을 추상적이고 무인격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끔찍 가지 말고 사실 그대로 묘사하지 말고 사실 그대로 말해 주어야 한다. 아이가 "내가 죽어요?”라고 물어오면 "그래,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그런 일은 없을 거야.”라고 대답한다. 죽음에 대해 신비감을 갖지 않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난감이 닳아서 폐기할 때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게 유도해야 한다. 그러나 가능한 한, 아직 어린아이들에겐 죽음이란 대단히 먼 일인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것이 가장 좋다.
아이에게 중요한 누군가가 죽었을 때는 문제가 다르다. 예를 들어 아이가 형을 잃었다고 해보자. 부모는 슬픔에 젖을 것이고 자신들이 '얼마나' 슬퍼하는지 아이가 눈치채길 바라진 않겠지만 사 실은, 부모가 고통받는 게 어떤 것인지 아이가 감지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또 필요하다. 꾸밈없는 애정은 대단히 소중한 것이므로 아이는 어른들이 그것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일 부모가 초인적인 노력으로 자신들의 슬픔을 아이에게 드러내지 않는다면 아이는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엄마 아빠는 내가 죽어도 상관하지 않을 거야.”
이런 생각은 온갖 병적 발달의 출발점이 되기 쉽다. 따라서 아이가 좀 성장했을 때 누군가가 죽는 일이 생기는 것은(아주 어릴 때는 그다지 크게 느끼지 못한다) 좋지 않은 충격이 되긴 하겠지만, 그러나 만일 그런 일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지나치게 축소하려 들지 말아야 한다. 죽음이란 주제는 피해서도 안 되지만 지나지게 집착해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너무 의도적일 필요는 없지만, 새로 관심과 특히 새로운 애정을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p.249
현대 과학의 진보로 인해 파생되는 가장 고통스러운 사실 중 하나는 한 단계씩 진보가 이루어질 때마다 우리 인간들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적게 알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되는 일이다.
내가 어렸을 때는 사람이 영혼과 육체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육체는 시공에 존재하지만 영혼은 시간에만 존재한다고 알고 있었다. 죽음 이후에 영혼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견 차이가 있을 뿐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고 여겼다.
우리는 육체에 대해선 당연히 그 존재를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과학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철학자들만이 그때그때의 유행에 따라 육체를 분석하며 육체란 그것을 가진 사람 및 어쩌다 우연히 그를 알아보는 다른 누군가의 마음 속에 든 관념이라 축소시키곤 했다. 그러나 그러한 철학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과학은 심지어 꽤 공인받는 과학자들의 손에서도 편안하게 유물론으로 남아 있었다.
오늘날에는 이 같이 멋진 옛날의 소박함들이 사라졌다. 물리학자들은 물질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하고 심리학자들은 정신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구두 수선공이 장화 따윈 존재하지 않
는다고 말하는 걸 들어 보았는가? 양복 직공이 모든 사람은 사실 벌거벗은 존재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들어 보았는가? 아니, 그런 일이 있었다 해도 물리학자들이나 일부 심리학자들이 해오고 있는
짓에 비하면 별로 기이할 것도 없을 것이다.
p.256
러셀은 소위 '무용한' 지식이, 우리가 그것을 몰랐더라면 놓쳐 버렸을 환희의 감각으로 우리의 경험을 고양시키고 풍부하게 만듦으로써 과일의 맛을 더 달콤하게 만들어 줄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살구의 예를 들고 있다. 내가 프랑스의 한 정원에 앉아 그 부분을 읽으면서 맛보았던 '정신적 쾌감' 은 그가 말하고자 했던 것을 너무도 생생하게 느끼게 해주었다. 이 과일의 간략한 역사와 대충의 어원을 아는 것만으로도 살구 맛은 더 달콤해지고, 햇살은 더 밝게 빛나고, 내 이해는 더 높아졌다.
'무용한' 지식은 살구의 역사처럼 사소해 보이는 부분에서까지 개인들에게 커다란 즐거움을 줄 수 있다. 그러한 지식의 추구를 가능케 해주는 것은 바로 '사색하는 습관'인데 여기에는 게으름이 요구된다. 사람은 게으를 수 있을 때 비로소 마음이 가벼워지고, 장난도 치고 싶어지고, 스스로가 선택한 건설적이고 만족스러운 활동 들에 전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러셀은 가벼운 마음으로 놀 수 있는 그러한 기회들이 아동 교 육에서 특히 더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그런 기회를 갖지 못할 경우, 노곤하고 불쾌하고 파괴적인 아이로 성장하며 자기 인생에서 보다 깊고 폭넓은 목적들을 이해하는 능력까지 빼앗겨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표현의 기회를 가지는 것은 성인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그러한 기회들은 개인들로 하여금 지식 자체의 가치뿐 아니라 자신의 경험의 질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만일 내게 살구나무 아래서 보냈던 그 게으름의 시간이 없었더라면 나는 지식의 본질적 가치를 그처럼 적절하게 제시한 러셀의 논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 거시다.
그러나 이런 류의 경험은 오늘날까지도 대다수 사람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그들에겐 '무용한' 지식을 추구하며 빈둥댈 돈도 여가도 없다. 그들은 러셀이 말하는 '효율성 숭배'에 사로잡혀 있다. 따라서 지식의 경제적 혜택 혹은 그러한 혜택이 가져오는 타인 위에 군림하는 권력의 증대만이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게으름을 부려도 좋을 만큼의 자원을 가진 운좋은 사람들은, 큰 지배력을 가질 순 있지만 인생의 폭넓은 목적들에 대한 반성적 이해를 할 수 없게 만드는 '정력적인 활동'에 눈이 멀어 게으름을 냉대하기 일쑤다.
러셀은 기 같은 '도구적' 지식관을 해로운 것으로 본다. 가치를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근거가 아닌 결과에만 입각해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시각으로 인해 부와 권력은 최상의 가치로 여겨지는 반면 게으름과 사변적 지식은 빈둥빈둥 노는 것으로 비쳐진다.
이 문제에 대해 러셀이 제안하는 해결책은, 기술 문명의 발달로 노동을 현명하게 재구성한다면 이제 일반 대중도 게으름을 누릴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대체로 노동을 구성하는 바쁘고 도구적인 활동들보다 게으름이 더 높게 평가받을 수 있다면 게으름은 바람직할 뿐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될 것이다.
p.258
러셀이 주장하는 핵심은 노동이 인생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인생의 목표라면 사람들은 노동을 즐길 것이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볼 때 실제 노동하는 사람들은 틈만 나면 일을 피하려 한다. 오직, 타인에게 일을 시키는 사람들만이 노동의 가치를 찬양한다. 만일 게으름, 놀이, 사변적 지식을 향유하는 능력이 그 자체로 가치를 인정받는다면 러셀이 제안한 개혁들이 수행될 수 있다.
'게으름 찬양'의 목적은 '즐겁고, 가치 있고, 재미있는' 활동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추구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데 있다.
p.260
러셀이 특히 반대하는 두 가지 도그마는 파시즘과 공산주의다. 이 두 체제는 경험적 증거나 사회 정의, 그 어느 기준에 의해서도 정당화될 수 없는 극단적인 입장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입증해 준다. 또한 이 도그마들은 순종적이면서도 한편으론 격렬한 행위를 선호하며 사고의 조직화로 나아가는, 지금까지 고안된 것 중에 가장 치명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다.
더욱이 파시즘은 방법과 목표, 모두 비인도적이기 때문에 두 도그마 중에서도 더 심각하다. '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는 이유'에서 러셀은, 파시즘은 완전히 비민주적이고 반유대적이 어서 노동자, 유대인, 기타 소수들의 권리를 조직적으로 박탈한다고 지적한다. 또한 그 신봉자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은 자 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
파시즘은 비이성에 호소하고 지속적인 권력의 안정을 꾀함으로써 이러한 해악들을 뒷받침한다. 러셀은 '이성의 몰락, 니체와 히틀러' 란 글에서 이 같은 특징들을 분석하고 국가 사회주의의 역사적 뿌리를 추적하여 19세기 초반 철학자 피히테의 '독일 국민에게 고함'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피히테는 독일이 다른 모든 민족보다 우수한 근거로 독일어의 순수성을 내세우면서 개인의 의지를 국가의 의지에 일치시킴으로써 ‘독일인들을 하나의 기업체로 빚어낼' 국가적 교육 체계를 주장
하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이탈리아에선 마치니, 영국에서 카알라일과 사이비 다윈주의자들, 독일에선 나치 세력에게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되었다.
그러나 각자 그들의 뿌리는 자국 내에 있었다. 볼셰비키 체제에 위협을 느낀 각국의 주요 산업 및 군부 세력이 급속한 사회 개혁으로 인해 박탈감을 느끼는 각종 사회 계층의 다수 인구들으로부터의 지원을 모색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의 불행스런 결탁이 국가 사회주의자들이 득세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고 러셀은 이 사실을 통찰력 있게 관찰하고 있다.
공산주의에 대해 러셀은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든다는 목적 자체에는 동조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회를 세우기 위해 무력을 수단으로 삼는 것은 반대한다. 그러한 방법은 필시 평화가 아닌 독재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1920년에 러시아를 방문하고 온 후 볼세비키 혁명에 대해 내린 자신의 평가에도 일부 기인하지만 그가 '내가 공산주의와 파시즘을 반대하는 이유'에서도 열거하고 있듯, 러셀은 이론적으로도 마르크스 이론에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다.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에서 건전하고 합리적인 사회를 언급하면서 러셀이 다소 온건하게 자기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다. 특히 그는, 시민 다수의 지원하에 평화적으로 사회주의로 이행하는 방법을 권하고 있다.
그는 사회주의란 토지, 자본, 광물 등의 경제적 소유권과 보편 적 민주주의 양자 모두가 그 사회의 공공 기관들에 속해 있는 사회라고 정의한다. 그는 이 두 가지 핵심 요소들을 조화시킴으로써 민주주의적 사회주의야말로 공산주의와 파시즘에 대한 현실적인 대안이란 점을 보여 주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