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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1

어떻게 살 것인가

#21 유시민 [어떻게 살 것인가]

by 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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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을 관통한 목표와 원칙이 있었는지, 있었다면 무엇이었는지, 내 삶을 재배한 감정과 욕망은 어떤 것이었는지, 과연 나는 내게 맞는 삶을 살았는지 살펴보는 일이 앞으로도 짧지 않은 시간을 더 살게 될 내 자신에게 만큼은 의미가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열정이 있는 삶을 원한다.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고 싶다. 자유롭게, 그리고 떳떳하게 살고 싶다. 인생이라는 짧은 여행의 마지막 여정까지, 그렇게 철이 덜 난 그대로 걸어가고 싶다. 내 삶에 단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싶다. 그렇게 사는 게 나다운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런 내가 좋다. 자유로움과 열정, 설렘과 기쁨이 없다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바람이 불면 사물이 각자 다른 소리를 내는 것처럼, 사람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세상과 부딪쳐 제각기 색깔이 다른 삶을 산다.


그러나 계속해서 지금처럼 살 수는 없다고 느끼거나 다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의 삶은 아직 충분히 훌륭하다고 할 수 없다. 더 훌륭한 삶을 원한다면 지금이라도 무언가를 바꾸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기득권 더불어 살면서도 그 달콤함과 안일함에 젖지 말아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불의와 타협하거나 악에 가담하지 않고 살려면 강력한 내면의 힘이 있어야 한다.


소극적 선택도 선택인 만큼, 성공이든 실패든 내 인생은 내 책임이다. 그 책임을 타인과 세상에 떠넘겨서는 안 된다. 삶의 존엄과 인생의 품격은 스스로 찾아야 한다.


무엇이 되든, 무엇을 이루든, '자기 결정권' 또는 '자유의지'를 적극적으로 행사해 기쁨과 자부심을 느끼는 인생을 살아야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존 스튜어트 밀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의 삶을 자기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방식이 최선이어서가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사는 길이기 때문에 바람직한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옳다고 믿는 방식으로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은 절대 없어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일이 세상을 더 훌륭하게 만드는 데 보탬이 되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내 자신도 더 훌륭해져야 한다.


내가 괴로워한다고 해서 누군가 더 행복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이제부터라도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그 어떤 이념에도 얽매이지 않고, 내 마음이 내는 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떳떳하게 그 권리를 행사하고 싶다.


재능의 본질은 즐기면서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인생 전체가 의미 있으려면 살아 있는 모든 순간들이 기쁨과 즐거움, 보람과 황홀감으로 충만해야 한다.


아프고 지친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요즘은 책도 신문 방송도 모두 '힐링'이 대세다. 그런데 나는 그런 말을 잘 하지 않는다. 자기의 삶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치열하게 고민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타인의 위로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는) 각자 알아서 찾아야 한다. 찾지 못할 경우 그 책임은 전적으로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


내 책임이든 사회의 책임이든, 닥쳐온 고통은 일단 내가 견디고 이겨내야 한다. 세상을 원망해본들 달라질 것은 없다. 누구도 그 짐을 대신 져주지 않는다.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세사의 그 어떤 날카로운 모서리에 부딪쳐도 치명상을 입지 않을 내면의 힘, 상처받아도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신적 정서적 능력을 기르는 거시다. 그 힘과 능력은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 사는 방법을 스스로 찾으려는 의지에서 나온다. 그렇게 자신의 인격적 존엄과 인생의 품격을 지켜나가려고 분투하는 사람만이 타인의 위로를 받아 상처를 치유할 수 있으며 타인의 아픔을 위로할 수 있다.


'나는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그 일은 내 삶에 충분한 의미를 부여하는가? 나는 어떤 놀이에서 즐거움을 얻고 살았으며 어떤 놀이를 더 하고 싶은가?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며 뜨겁게 사랑받고 있는가? 지금 사랑하고 사랑받는 방식이 만족스러운가? 누구와 함께 어디엔가 속해 있으면서 서로 공감하고 손잡으려는 의지를 충분히 표현하면서 살고 있는가? 그래야만 할 이유도 없이 지레 무엇인가를 포기하고 산 것은 아니었던가?


내 방식대로 살아야 한다. 누가 시키는 대로 또는 무엇인가에 얽매어 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삶의 모든 순간은 죽음이라는 운명과 대비할 때 제대로 의미를 드러낸다.


죽음 단순히 삶의 끝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죽음은 삶의 완성이다.


나이가 많이 든 후에도 철학적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 발전시킨 예외적 인물들은 공통점이 있다.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 젊은 사람들과 수평적으로 대화한다는 것이다.


'하고 싶어서 마음이 설레는 일을 하자. 그 일을 열정적으로 남보자 잘하자. 그리고 그걸로 밥도 먹자. 이것이 성공하는 인생 아니겠는가.'


신군부가 강압적 분위기를 조성했고 신문 방송으로 하여금 '인간 전두환'과 헌법개정안을 찬양하게 하기는 했지만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대다수 국민이 투표소에 와서 압도적으로 찬성표를 던졌다. 나는 실망했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하고 싶은 생각도 의지도 없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다. 그때 나를 붙잡아준 것은 희망이나 용기가 아니었다. 억울함과 분노, 복수심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강력한 것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것이 눈 덮인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내리지 못하게 했다. 수치심과 절망감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


사는 데도 죽는 데도 다른 것이 있어야 한다. 삶의 그리고 죽음의 의미에 대한 확신이다. 그것이 없으면 삶도 죽음도 주체적 선택일 수 없다. 삶은 습관이고 죽음은 패배일 뿐이다.


고령에 접어들면 질병이 자살 충동을 불러들인다. 혹독한 질병에 걸리면 삶은 전쟁이 된다.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고 환희와 즐거움을 누리기 위한 전쟁이라면 어떤 고통도 감내하면서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질병과 싸워 살아남는 것 자체가 삶이 되고, 더욱이 그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전혀 없거나 이겨도 단지 일시적인 승리에 불과하다는 것이 명백해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런 것들이 자존감을 회복할 수 없는 양상으로 파괴할 때, 인간적 존엄성을 회복할 수단이 남아 있지 않다고 느낄 때 자살은 탈출구가 된다.


나는 20대에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면서 사회주의 사상과 이론에 탐닉했다. 그러나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졌을 때 그다지 큰 심리적 충격을 받지 않았다. 사회주의 사상 이론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사회주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내 나름의 '비법' 있기는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거리감'이다. 세상에 대해서, 타인에 대해서,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일정한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다.


내 삶에 대한 평가는 살아 있는 동안만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리니 먼 훗날, 또는 긴 역사 속에서가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내 스스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활동으로 내 삶을 채우는 것이 좋다.


에고는 지속적으로 일관성 있는 행동을 하는 데 필요한 개인적 기준과 원칙을 만들어내며, 그 기준과 원칙에 의거하여 외부 세계와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한다. 이 기준과 원칙이 자아 정체성의 핵심이다.


'하고 싶다'는 욕망보다 '히야 한다'는 의무감에 이끌려 사는 인생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걸치고 나들이를 가는 것과 비슷했다. 어떻게 걸어도 어색했다.


쓸모와 훌륭함은 다르다. 훌륭함, 존엄, 품격이란 자신의 내면에 있는 가치이고 쓸모는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타인의 상대적 가치 평가이다.


인생의 성공은 멀리 있지 않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그것을 남들만큼 잘하고, 그 일을 해서 밥을 먹고살면 최소한 절반은 성공한 인생이다.


천부적 재능이란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이다.


즐기는 게 아니라 이기기 위해 일하게 되면, 이겨도 남는 게 없고 지면 최악이 된다.


중요한 건 노는 즐거움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이나 승리를 목적으로 삼으면 놀이가 더 이상 놀이가 아니게 된다.


부모가 저지를 수 있는 가장 중대한 잘못은 자녀의 삶을 대신 설계하고 자녀의 행복을 대신 판단하는 데서 시작된다.


자식은 부모의 꿈이나 희망을 실현하는 수단이 아니다. 자신의 소망을 자녀에게 투사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가 옳다고 믿거나 좋다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을 강제해서도 안 된다. 자녀들은 부모가 그렇게 할 경우 그것을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 삶의 중요한 문제를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은 행복을 누리는 능력을 기를 수 없다.


어떤 부모도 자기에게 없는 것을 자식에게 줄 수는 없다.


많이 사랑하고 그 사랑을 최대한 표현함으로써 작은 일에도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제대로 된 사랑을 듬뿍 받고 자라나 스스로 인생을 만들어나가는 사람은 아주 작은 일에도 쉽게 행복을 느끼게 된다.


의사와 약사는 병을 고쳐줄 수 있지만 나를 건강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건강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임을 잊지 말자.


1. 잘난 체, 있는 체, 아는 체 하지 않고 겸손하게 처신한다.

2. 없어도 없는 티를 내지 않는다.

3. 힘든 일이 있어도 의연하게 대처한다.

4. 매사에 넓은 마음으로 너그럽게 임하며 웬만한 일에는 화를 내지 않는다.

5.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신중하게 행동한다.

6. 내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남의 말을 경청한다.


유신과 제5공화국 체제에 대한 비판은 우리들 각자의 삶에 대한 비난이나 부정이 아니다. 그것은 지난 시대의 그늘에 대한 집단적 성찰을 위해 제기한 비판일 뿐이다.


개인이 그렇게 때문에 세대 전체도 고령이 되면 더 보수적인 쪽으로 변화한다.


국가는 합법적이고 정당하다고 간주되는 폭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주체'여야 한다. 살인범에 대한 북수도 국가가 대신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사형제도이다.


사바나-IQ 상호작용 가설

지능이 낮은 개인은 지능이 높은 개인보다 조상들의 환경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진화적으로 새로운 존재와 상황을 이해하고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지능이 높은 사람일수록 진화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는 데 필요한 새로운 사고방식과 행동 방식을 더 능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뿐이다.


진보주의에 대한 낡은 고정관념을 버릴 때가 왔다. 진보주의는 사회적 계급과 관계가 있지만 특정한 계급의 배타적 특성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회의 진보적 변화는 피지배계급의 궐기와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지지만 그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며, 그 계급에 속한 사람만이 진보주의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노동자와 농민 등 노동 계급의 모든 투쟁이 다 진보적인 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의 권리와 이익을 위해 투쟁할 경우 그 투쟁의 주체가 누구이든 군디 진보라고 해야 할 이유는 없다. 그것은 생물학적으로 자연스러운 이익투쟁일 뿐이다.


인간은 이타 행동을 하는 이기적 존재이다.


연대는 일, 놀이, 사랑과 더불어 삶을 의미 있고 존엄하고 품격 있게 만드는 제4원소이다.


고결한 이상, 바위처럼 굳건한 신념은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올바른 이상과 신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을 써도 정당하다는 생각은 자신과 타인의 삶을 치명적으로 위협한다.


신앙이나 이념은 훌륭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다른 이념과 다른 신앙에 대한 관용을 갖추는 것이다. 그럴 때에만 신념은 삶을 풍요롭고 기쁘고 의미 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래야 사람이 이념의 도구나 노예가 아니라 주인이 되는 것이다. 빛나야 할 것은 신앙이나 이념이 아니다. 정말 빛나야 할 것은 자연이 준 분성과 욕망을 긍정적으로 표출하고 실현하면서 여위하는 기쁜 삶이다.


나는 내가 가진 신념 덕분에 내 잔신과 내 삶이 더 훌륭해지는지를 주의 깊게 살핀다. 내 자신을 비루하게 만드는 신념은 좋은 것이 아닐 가능성이 많다. 그런데도 신념 그 자체가 확실히 훌륭해 보인다면, 그 신념을 실천하는 방법을 잘못 선택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정치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어주는 사업이다.


내 선택으로 바꿀 수 없는 것은 주어진 환경으로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다.


사랑, 기쁨, 행복, 열정, 환희 등 삶에서 귀중한 모든 것은 '지금 여기'에, 오로지 '지금 여기'에만 있다.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 '지금 여기'를 넘어서려는 집착과 망상은 삶의 기쁨을 갉아먹는다. 열정을 엉뚱한 곳으로 인도한다.


이름과 업적이 남았기에 그들의 삶은 훌륭했던 것일까? 아니다. 그 역이 진실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충실했을 뿐이다. 진리에 대한 호기심, 깨닫는 즐거움, 내면에서 솟구치는 열정, 선을 행하려는 의지를 자기 나름대로 표현하고 실천했다.


칸트의 충고를 기억하자.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스스로 세운 준칙에 따라 행동하되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될 수 있도록 하라. 어떤 경우에도 자기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 이름을 남기기 위해 사는 것은 자기 자신을 수단으로 만드는 것이다.


더 진지하게 죽음을 생각할수록 삶은 더 큰 축복으로 다가온다.


애통함을 되도록 적게 남기는 죽음, 마지막 순간 자신의 인생을 기꺼이 긍정할 수 있는 죽음, 이런 것이 좋은 죽음이라고 믿는다.


체계론적 접근법 - 자본주의를 타파 또는 극복하는 것만이 진보이다.

철학적 접근법 - 진보란 불합리한 제도와 물질의 결핍, 낡은 사고방식에서 해방시켜 자유로운 존재로서 행복을 추구하게 하는 것

생물학적 접근법 - 유전자를 공유하지 않은 타인의 복지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타인의 복지를 위해 사적 자원의 많은 부분을 내놓는 자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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