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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Jul 24. 2017

언어의 온도

#25 이기주 [언어의 온도]



면회 날 어머니가 책 한 권을 챙겨주셨다. 

어머니는 이것이 요새 뜨는 것이라며, 나도 한번 읽어봤으면 한다며 책을 주셨다. 

면회가 끝나고 난 책을 챙기고 복귀를 했다.


중간중간 페이지 모서리에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그 페이지 속 구절들은 어머니가 좋아하실 만한 것들이었다.

역시 우리 엄마구나 싶었다.


나는 읽다가 마음에 드는 페이지 끝을 접어 보았다. 

그 페이지에도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역시 나는 엄마 아들이구나 싶었다.


밤에 퇴근하는데 마음 한편이 뭉클해진다.

어머니는 나와 떨어져 계셔도 내 가슴속에 따뜻하게 자리하고 계신다.






"그게 말이지. 아픈 사람을 알아보는 건, 더 아픈 사람이란다..."

상처를 겪어본 사람은 안다.

그 상처의 깊이와 넓이와 끔찍함을.



흔히들 말한다. 상대가 원하는 걸 해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지만 그건 작은 사랑인지도 모른다. 상대가 싫어하는 걸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큰 사랑이 아닐까.



"그냥"이란 말은 대개 별다른 이유가 없다는 걸 의미하지만,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한기주 씨! 미안할 때는 미안하다고 말하세요. 자존심 세우면서 사과하는 방법은 없어요."

- 드라마 '파리의 연인' 中



진짜 사과는,

아픈 것이다.



위로의 표현은 잘 익은 언어를 적정한 온도로 전달할 때 효능을 발휘한다. 짧은 생각과 설익은 말로 건네는 위로는 필시 부작용을 낳는다.

"힘 좀 내"라는 말만 해도 그렇다. 이런 멘트에 기운을 얻는 이도 있을 테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힘낼 기력조차 없는 사람 입장에선 "기운 내"라는 말처럼 공허한 것도 없다. 정말 힘든 사람에게 분발을 종용하는 건 위로일까, 아니면 강요일까.



상대에 대한 '앎'이 빠져 있는 위로는 되레 더 큰 상처를 주기도 한다. 상대의 감정을 찬찬히 느낀 다음, 슬픔을 달래 줄 따뜻한 말을 조금 느린 박자로 꺼내도 늦지 않을 거라고 본다.



단지 받는 게 미안해서가 아닐 것이다. 더 주고 싶지만 주지 못하니까, 그래서 부모는, 자식을 향해 "미안하다"고 입을 여는 게 아닐까.



사람이 사랑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것. 그게 바로, 삶이 아닐까?



문인수 시인의 '하관'이다. 시인은 어머니 시신을 모신 관이 흙에 닿는 순간을 바라보며 '묻는다'는 동사를 쓰지 않고 '심는다'고 표현한다. 어머니를 심는다고. 

"이제, 다시는 그 무엇으로도 피어나지 마세요. 지금, 어머니를 심는 중..."



눈물은 눈에만 있는 게 아닌 듯하다.

눈물은 기억에도 있고, 또 마음에도 있다.



유다이: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해요."

료타: " 그건 그렇지만 회사에서 제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많습니다."

유다이: "아버지라는 일도 다른 사람은 못 하는 거죠."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中



'프로'는 포로페셔널 professinal 의 준말로, 그 어원적 뿌리는 '선언하는 고백'이란 뜻의 라틴어 프로페시오 professio에서 발견할 수 있다. 

남들 앞에서 "난 전문가입니다"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할 수 있어야, 그리고 그에 따른 실력과 책임감을 겸비해야 비로소 프로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프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하기 싫은 일도 끝까지 해내는 경향이 있다. 그냥 끝까지 하는 게 아니다. 하기 싫은 업무를 맡아도 겉으로는 하기 싫은 티를 잘 내지 않으면서 유연하게 마무리한다. 왜? 프로니까. 

이와 달리 '아마추어'는 라틴어 아마토리amator에서 유래했다. '애호가' '좋아서 하는 사람' 정도로 해석할 수 있는데 말 그대로 취미 삼아 소일거리로 임하는 사람을 뜻한다. 

아마추어는 어떤 일이나 과정에서 재미와 즐거움 같은 요소가 사라지면 더는 하지 않는다. 아마추어의 입장에선 재미가 없으면 의미도 없기 때문이다.

새삼 이런 생각도 든다. 어쩌면 프로와 아마추어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기술이 아니라 태도인지 모른다고.



프로가 되는 것보다, 프로처럼 달려들지 아마추어처럼 즐길지를 구분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다. 프로가 되는 노력은 그다음 단계에서 해도 된다.

이건 꽤 중요한 이야기다. 프로처럼 처리해야 하는 일을 아마추어처럼 하면 욕을 먹기 쉽고, 아마추어처럼 즐겨야 하는 일에 프로처럼 목숨을 걸다가는 정말 목숨을 잃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에 내몰릴 수도 있으니 말이다.



독사가 우글거리고 불길이 치솟는 곳만 지옥일 리 없다. 희망이 없는 곳, 아무리 희망이 없는 막막한 상황이 영원히 지속하는 곳, 그곳이 진짜 지옥이다.



그저 슬픔의 유효기간이 저마다 다를 뿐. 누군가에게는 잠깐 머물러 있고 누군가에게는 꽤 오래 달라붙어 괴롭힌다. 시인의 말처럼 우린 종종 슬픔에 무릎을 끊는다. 

그건 패배를 의미하지 않는다. 잠시 고개를 조아려 내 슬픔을, 내 감정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과정일 터다.



그러나 섣불리, 설고 어설프게 슬픔을 극복할 필요는 없다. 겨우 그것 때문에 슬퍼하느냐고, 고작 그런 일로 좌절하느냐고 누군가 흔들더라도, 너무 쉽게 슬픔의 길목에서 벗어나지 말자.

차라리 슬퍼할 수 있을 때 마음에 흡족하도록 고뇌하고 울고 떠들고 노여워하자. 슬픔이라는 흐릿한 거울은 기쁨이라는 투명한 유리보다 '나'를 솔직하게 비춰준다. 때론 그걸 응시해봄 직하다.



"참, 병원에서 진단을 받고 나오면서 중요한 결심을 했다네."

"어떤 결심을요?"

"응, 다른 건 다 잊어도 아내 생일 같은 건 잊지 말자고. 휴..."

"아..."

어르신은 말을 흐렸다. 나도 말을 흐렸다. 묻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입을 다물었다. 침묵보다 표현이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 소설 '메밀꽃 필 무렵' 中



극지에 사는 이누이트들은 분노를 현명하게 다스린다. 아니, 놓아준다. 그들은 화가 치밀어 오르면 하던 일을 멈추고 무작정 걷는다고 한다. 언제까지? 분노의 감정이 스르륵 가라앉을 때까지.

그리고 충분히 멀리 왔다 싶으면 그 자리에 긴 막대기 하나를 꽂아두고 온다. 미움, 원망, 서러움으로 얽히고 실킨, 누군가에게 화상을 입힐지도 모르는 지나치게 뜨거운 감정을 그곳에 남겨두고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면 어쩌면 활활 타오르던 분노는 애당초 내 것이 아니라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서 잠시 빌려온 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라는 냉각기를 통과해서 화가 식는 게 아니라, 본래 분노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간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빌려온 것은 어차피 내 것이 아니므로 빨리 보내줘야 한다.

격한 감정이 날 망가트리지 않도록 마음속에 작은 문 하나쯤 열어 놓고 살아야겠다. 분노가 스스로 들락날락하도록, 내게서 쉬이 달아날 수 있도록.



여행을 앞두고 짐을 챙길 때 중요한 건 '챙기기'가 아니라 '버리기'가 아닐까 싶다.



종종 공백이란 게 필요하다. 정말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 무언가 소중한 걸 잊고 산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을 때 우린 마침표 대신 쉼표를 찍어야 한다.

공백을 갖는다는 건 스스로 멈출 수 있다는 걸 의미한다. 제 힘으로 멈출 수 있는 사람이라면 홀로 나아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그러니 가끔은 멈춰야 한다.

억지로 끌려가는 삶이 힘겨울수록, 누군가에게 얹혀가는 삶이 버거울수록 우린 더욱 그래야 하는지 모른다.



"참된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우린 어떤 일에 실패했다는 사실보다, 무언가 시도하지 않았거나 스스로 솔직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더 깊은 무력감에 빠지곤 한다.

그러니 가끔은 한 번도 던져보지 않은 물음을 스스로 내던지는 방식으로 내면의 민낯을 살펴야 한다. '나'를 향한 질문이 매번 삶의 해법을 제공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삶의 후회를 줄이는 데는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살다 보니 그런 듯하다.



어른이 꼭 될 필요는 없다. 제대로 된 어른은 "나 어른이야!"라며 어른 대접을 해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냥 어른답게, 그답게, 그녀답게 행동할 뿐이다.

'어른'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건 '진짜 내'가 되는 것이 아닐까?



참, 나는 계절이 변화하는 미묘한 시기에, 수분크림이나 계절에 어울리는 양산을 어머니 화장대 위에 은밀하게 올려놓는 편이다.



인간은 얄팍한 면이 있어서

타인의 불행을 자신의 행복을 종종 착각한다.



하지만 그런 감정은 안도감이지 행복이 아니다.

얼마 못 가 증발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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