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리처드 도킨스 [이기적 유전자]
만약 당신이 나처럼 개개인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관대하게 이타적으로 협력하는 사회를 만들기를 원한다면 생물학적 본성으로부터 기대할 것은 거의 없다는 것을 경고로 받아들이기 바란다. 우리는 이기적으로 태어났다. 그러므로 관대함과 이타주의를 가르쳐 보자. 우리 자신의 이기적 유전자가 무엇을 하려는 녀석인지 이해해 보자. 그러면 우리는 적어도 유전자의 의도를 뒤집을 기회를, 다른 종이 결코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전자는 단백질 합성을 제어하는 일을 통해서 작용한다. 이것은 세상을 조종하는 강력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 속도는 매우 느리다. 배를 만들려면 인내를 갖고 몇 개월 동안 단백질(합성)의 끈을 잡고 있어야 한다. 반면에 행동의 특징은 빠르다는 것이다. 행동은 수개월이라는 시간 단위가 아닌 몇 초, 또는 몇 분의 1초라는 시간 단위로 작용한다. 예컨대 부엉이가 머리 위를 휙 지나가고 키 큰 풀숲이 부스럭거려 먹잇감이 자기 위치를 들키면, 수 밀리세컨드 만에 신경계가 흥분하고 근육이 몸을 띄워 누군가의 생명이 살아남거나 아니면 사라진다. 그러나 유전자는 그처럼 반응 시간이 신속하지 못한다. 유전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안드로메다 외계인처럼, 자기들은 대신해서 신속히 작동할 컴퓨터를 조립하고, '예상'할 수 있는 많은 우발적 사건들에 대처하기 위한 규칙과 '충고'를 사전에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최선의 대책을 강구해 두는 것뿐이다. 유전자는 생존 기곙게 생존 기술의 각론이 아니라 일반 전략이나 비결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
철저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포커페이스가 더 나은 것은 왜일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안정한 전략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체들이 정말로 장시간 버틸 작정일 때에만 목덜미 털을 세운다고 해보자. 상대방 대응 전략, 즉 상대가 목털을 세우면 즉시 포기하는 전략이 진화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거짓말이 진화하기 시작한다. 실제로는 장시간 버틸 작정이 아닌 개체가 어떤 소모전에서나 목털을 세워 손쉽게 승리의 이익을 누릴 수 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거짓말쟁이의 유전자가 퍼져 나갈 것이다. 거짓말쟁이가 대세를 차지하면 선택은 이제 그 속임수를 감지하는 개체를 선호할 것이다. 이 때문에 거짓말쟁이는 다시 그 수가 감소할 것이다. 소모전에서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 아니다. 무표정한 얼굴은 진화적으로 안정하다. 결국 항복한다고 해도 그것은 돌발적이고 예측 불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헐데인 자신도 잘 알고 있었겠지만, 생존 기계가 의식적으로 머릿속에서 그런 계산을 한다고 생각할 필요는 다행히도 없다. 우리가 결과적으로는 로그를 사용하면서도 그것을 모른 채 계산자를 사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동물 역시 복잡한 계산을 하는 것처럼 행동하도록 미리 프로그램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생각보다 그리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다. 공을 공중에 던져 올렸다가 다시 잡을 때 사람들은 일련의 미분 방정식을 푼 것같이 그 공의 궤도를 예측한다. 그는 미분 방정식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개의치도 않을 수 있지만, 그 공을 잡는 기술은 이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그 수학적 계산과 기능적으로 똑같은 어떤 일이 진행되고 있다. 마찬가지로 모든 장단점과 예상되는 모든 결과를 고려하여 어려운 결정을 내릴 때, 사람들은 컴퓨터나 할 법한 대규모의 '가중 합계' 계산과 기능적으로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아마 메더워의 '노화 이론'과도 관련된 여러 가지 이유에서 자연 상태의 여성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육아의 효율성이 점점 감퇴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노령의 산모가 낳은 아기의 기대 수명은 젊은 산모가 낳은 아기의 수명에 비해 짧았다. 이것은 가령 어떤 여성의 아이와 손자가 같은 날 태어났다면 손자가 아이보다 오래 살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성이 자기가 낳은 아이가 어른이 될 평균 확률이 동갑내기 손자가 어른이 될 확률의 1/2보다 낮아지는 연령에 도달할 때, 자기 아이보다 오히려 손자 쪽으로 투자하게 하는 유전자가 유리하기 되어 번창할 것이다. 이 유전자는 손자 4명당 1명의 비율로 전해지는 반면, 그것과 경쟁 관계에 있는 유전자는 자식 2명당 1명에게 옮겨지지만, 손자의 기대 수명이 이 관계를 역전시키기 때문에 '손자에 대한 이타적 행동'을 유발하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 널리 퍼지게 된다. 자기 아이를 계속 낳은 여성은 손자에게 충분히 투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년기에 이른 여성이 번식 능력을 상실하도록 작용하는 유전자가 점점 증가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유전자가 할머니의 이타적 행동에 의해 살아남은 손자들의 몸속에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제 이 문제를 특정한 아이의 관점에서 보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한 아이의 형제자매 각각에 대한 유전적 근연도는 그 아이와 어머니의 근연도와 같다. 즉, 모든 경우에 그 값은 1/2이 된다. 따라서 그 아이는 어머니가 자원 중에서 어느 정도를 그의 형제자매에게도 투자하기를 '바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는 자신에 대한 근연도가 형제자매에 대한 근연도의 두 배이므로, 제반 조건이 동일하다면 어머니가 다른 어느 형제자매보다 자기 자신에게 많이 투자해 주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나 이기적 유전자론에 비추어 볼 때 반드시 이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 허약한 막내가 기대 수명이 짧아서 부모의 투자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이 같은 양의 투자로 다른 아이들이 얻을 수 있는 이익의 1/2 이하가 되면, 그는 기꺼이 명예로운 죽음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하는 것이 대개 자기 유전자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몸아, 만일 네가 다른 한배 형제보다 훨씬 작다면 바동거릴 것 없이 죽어라"라는 지령을 내리는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죽음에 의해 살아남은 개개의 형제자매의 몸에 그의 유전자가 들어 있을 확률이 50퍼센트고, 한편 허약한 막내의 체내에서 그 유전자가 살아남을 가능성은 어쨌든 극히 적다는 것이 그 이유다.
"자식은 속이는 행위를 할 것이다"라는 표현의 진의는 자식에게 사기 행위를 하게 하는 경향을 가진 유전자가 유전자 풀 속에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 논의에서 인간의 윤리에 대한 교훈을 도출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자식들에게 이타주의를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자식들의 생물학적 본성에 이타주의가 심어져 있다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이 일치하지 않는 점은 자식들 각각의 양육 부담을 누가 질 것이냐 하는 것이다. 어느 개체든지 가능한 한 많은 수의 자식이 생존하기를 바란다. 자식에 대한 투자량이 줄어들수록 그만큼 자기가 가질 수 있는 자식의 수는 증가한다. 이 바람직한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분명한 방법 한 가지는, 파트너에게 자식 각각에게 공평한 배분량 이상을 투자하도록 유도하고 자기는 다른 파트너와 새로운 자식을 얻는 것이다. 이 전략은 암수 누구한테나 바람직한 것이지만 암컷이 이를 구사하기는 수컷에 비해 어렵다. 왜냐하면 암컷은 크고 영양소가 풍부한 난자의 형태로 처음부터 수컷보다 많은 투자를 하고 있기 때문에, 수태할 때부터 이미 어느 자식에 대해서건 아비보다 더 깊은 '정성'을 쏟는다. 자식이 죽을 경우 어미는 아비보다 더 많은 것을 잃는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장래에 새로운 자식을 죽은 자식과 같은 ㄱ단계까지 키우려면 어미는 아비보다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 어미가 자식을 아비에게 맡기고 다른 수컷을 찾아 나서는 전술을 취하면 아비도 별 부담 없이 자식을 버릴 것이다. 따라서 부모가 아직 어린 자식을 내버릴 경우, 버리는 것은 어미가 아니라 아비일 확률이 높다. (중략) 암컷이란 착취당하는 성이며, 착취의 근본적인 진화적 근거는 난자가 정자보다 크다는 데 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세계 문화에 무언가 기여할 수 있다면, 예컨대 좋은 아이디어를 내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점화 플러그를 발명하거나, 시를 쓰거나 하면, 그것들은 우리의 유전자가 공통의 유전자 풀 속에 용해되어 버린 후에도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윌리엄스의 말마따나 소크라테스의 유전자 중에서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이 과연 하나라도 있는지 어떤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누가 그런 것에 관심이나 있는가. 하지만 소크라테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코페르니쿠스, 마르코니의 밈 복합체는 아직도 건재하지 않은가.
우리에게는 우리를 낳아 준 이기적 유전자에 반항하거나, 더 필요하다면 우리를 교화시킨 이기적 밈에게도 반항할 힘이 있다. 순수하고 사욕이 없는 이타주의라는 것은 자연계에는 안주할 여지도 없고 전 세계의 역사를 통틀어 존재한 예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육성하고 가르칠 방법도 논할 수 있다. 우리는 유전자의 기계로 만들어졌고 밈의 기계로서 자라났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우리의 창조자에게 대항할 힘이 있다. 이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비영합 게임-반복)
그러나 만약 게임이 되풀이되지 않는다면 여태껏 우리가 살펴봤던 어떤 것도 성립되지 않을 것이다. 선수들은 지금 하고 있는 게임이 최종회가 아니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또는 알고 있다). 액설로드의 명언처럼 '미래의 그림자'는 길어야 된다. 그러면 어느 정도 길어야만 하는가? 무한히 길 수는 없다. 이론적으로 보면 게임이 오랫동안 되느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어느 경기자도 게임이 언제 끝나는지 몰라야 된다는 것이다.
감기에 걸리거나 기침이 나면 우리는 보통 그 증상을 바이러스 활동의 부산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몇몇의 경우 그 증상은 바이러스가 한 숙주에서 다른 숙주로 이동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꾸민 일일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인다. 바이러스는 공기 중으로 호흡을 통해 단순히 내뱉어지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재채기나 기침을 해서 힘차게 뿜어내도록 한다.
즉 동물의 행동은, 그 행동을 담당하는 유전자가 그 행동을 하는 동물의 몸 내부에 있거나 없거나에 상관없이 그 행동을 담당하는 유전자의 생존을 극대화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