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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Nov 10. 2017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37 장하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자유 무역이 자본주의가 발흥한 원인은 아니다. 그러나 19세기 전반에 걸쳐 자유 무역이 널리 확산된 것은 사실이다. 그 중 일부는 1860년대에 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도 벌어졌다. 영국이 자유 무역 정책을 채택하고 서유럽 국가들과 일련의 양자 간 자유 무역 협정(free-trade agreement)을 맺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자유 무역의 확산 현상은 대부분 자본주의의 변방인 중남미와 아시아 지역에서 벌어졌다.

이는 '자유'라는 단어와 보통 잘 연관 짓지 않는 행동의 결과였다. 바로 힘, 혹은 힘을 쓰겠다는 위협을 통해 벌어진 것이다. 식민 정책은 '자유롭지 않은 자유 무역'을 달성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다.


   개발주의 경제학자들은 첨단 제조 산업과 같은 특정 경제 활동이 다른 산업보다 한 나라의 생산 능력을 개발하는 데 더 유리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경제 활동은 이미 선진국 기업들이 점유하고 잇는 분야라 후진국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발달할 수 없다고 본다. 후진 경제에서는 관세, 보조금, 규제 같은 정부의 개입이 없으면, 자유 시장의 힘으로 인해 그 나라가 이미 잘하는 천연자원이나 저임금에 의지한 저생산성 경제 활동으로 끊임없이 회귀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개발주의에서는 어떤 경제 활동과 정책이 바람직하고 적절한지는 시기와 사회적 맥락에 달려 있다고 강조한다. 18세기의 섬유 산업처럼 과거의 첨단 산업이 현재는 서양 산업일 수 도 있고, 자유 무역처럼 선진국에 좋은 정책이 경제적으로 덜 발달한 나라에는 좋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행동주의 학파)

   사이먼은 인간이 비합리적인 존재라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합리적이려고 노력하지만 그럴 수 있는 능력은 너무도 제한되어 있고, 특히 이렇게 복잡한 세상에서는 더욱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우리가 결정을 내리는 데 가장 큰 장애가 되는 것은 정보의 부족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라는 뜻이다.

   사이먼은 우리가 이렇게 제한적 합리성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의 정신적 능력을 경제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지름길'을 발달시킨다고 주장한다. 휴리스틱스(heuristics) 혹은 직관적 사고라고 부르는 이것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어림짐작, 상식, 전문가의 판단 등이 그 예이다. 이 정신적 도구들의 근본에는 패턴을 인식하는 능력이 자리 잡고 있어서, 엄청나게 많은 대안들을 무시하고 우리 능력으로 다룰 수 있는 적은 수의 가장 유력한 몇 가지 가능성만을 고려하게 만든다.

   일부 가능성에만 집중하는 것은 그 결과로 얻은 결정이 최상을 아닐 수 있지만, 우리가 제한된 합리성을 가지고 복잡하고 불확실한 세상을 헤쳐 나아갈 수 있게 해 준다. 따라서 인간은 신고전주의 학파의 주장처럼 최선의 선택이 아니라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선택(satisfice), 즉 '그만하면 괜찮은(good enough)' 선택을 하게 된다고 사이먼은 주장한다.


   행동주의 학파는 가장 최근에 생긴 경제학파임에도 인간의 합리성과 동기에 관한 이론을 완전히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었다. 행동주의 학파 덕분에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를 더 정교하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경제학에 여러 가지 접근법이 있음을 인식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이러한 다양성을 보존하고, 나아가 권장해야 한다. 각 학파가 서로 다른 측면을 강조하고 서로 다른 관점을 제시한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단순히 한 두 개가 아니라 여러 학파를 아는 것은, 경제라는 복잡한 대상을 더 풍부하고 더 균형 잡힌 시각으로 이해하게 해 준다. 다양한 이론적 접근법을 가진 학문 분야가 단일한 지적 성향을 가진 학문 분야보다 변화하는 세계에 훨씬 더 잘 적응할 것이다. 다양한 유전자 풀을 가진 생물 집단이 충격에서 더 잘 회복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사실 우리는 지금 그 증거를 목격하고 잇다. 주요 국가의 정부가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가 터진 직후 자유 시장 경제학을 버리고 케인스학파의 정책을 채택하지 않았다면 전 세계는 1929년의 대공황 같은 큰 시련을 겪었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다양성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단순히 백 가지 꽃이 피게만 해서는 안 된다. 그 꽃들을 이종 교배해야 한다. 각 경제학파는 서로에게 배움으로써 큰 혜택을 볼 수 있고, 경제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더욱 깊게 해 줄 것이다.


   경제학 이론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은 부분적으로 서로 다른 도덕적, 정치적 가치관에 근거하기 때문임을 이해하고 나면, 경제학을 제대로 알게 되고, 다시 말해서 옳고 그름이 확실한 '과학'이 아닌 정치적 논쟁으로서의 경제학을 토론할 자신감을 얻게 된다.



   개인이 사회의 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회적 관습과 지배 이데올로기, 또는 계급적 배경에 반(反)한 선택을 하는 사람의 자유 의지를 더 깊이 존경하게 된다. 인간의 합리성이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몯느 사람이 실패할 것이라 생각하는 (그러나 성공하면 혁신이 부르는) '비합리적'인 사업을 시작하는 기업가의 용기에 더 큰 박수를 보낼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불완전함을 인정한 다음에야 우리는 '진정한' 선택을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길이 최선의 선택인지를 항상 알고 있는 완벽한 인간이 운명적으로 내리는 기계적인 선택이 아니라 진정한 선택 말이다.


   억압을 받거나 착취나 차별을 당하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자신이 행복하다고 답한다. 그리고 그 답이 거짓말은 아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상황을 향상시킬 수 있는 변화에 반대하기도 한다. (중략) 이들은 억압자/차별자의 가치관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전문 용어로는 '내재화'하여) 자신이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를 허위의식 (false consciousness)이라 부른다. 


(제품을 만드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무엇을 만드는 일이 별다른 가치를 부여받지 못하는 '지식 경제'라는 새 시대가 도래했다는 시각은 역사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는 '항상' 지식 경제 안에서 살아왔다. 산업화가 더 진행된 나라일수록 더 부유한 것은 생산된 제품과 서비스의 물리적 성질보다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연관된 지식의 질 때문이다. 18세기에 가장 첨단 기술 산업이던 모직 방적이 이제는 가장 수준 낮은 산업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더 명확히 이해가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프랑스 산업부 장관이 언젠가 했던 다음의 발언은 기억할 만한 가치가 있다. "폐기되어야 할 산업은 없다. 다만 시대에 뒤떨어진 기술이 있을 뿐이다."



   지난 30년 동안 많은 개발도상국이 '조숙한' 탈산업화를 경험했다. 다시 말해 부자 나라들과 비교할 때 생산량과 고용 면에서 제조업 (그리고 산업 전반)이 차지하는 비율이 너무 일찍 하락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산업화 후 경제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서비스 산업을 기반으로 성공을 이룬 예로 스위스와 싱가포르를 언급한다. 이 두 나라야말로 금융, 관광, 교역 같은 서비스를 통해 부자가, 그것도 아주 큰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 산 증거가 아닌가? 

   그러나 사실 이 두 나라는 그들의 주장과 완전히 반대되는 사례이다. 유엔 공업개발기구(UNIDO)의 2002년 자료에 따르면, 스위스는 1인당 제조업 부가 가치가 세계에서 가장 높아 일본보다 24퍼센트 더 높은 것을 나타났다. 2005년에는 일본이 1위, 스위시가 2위, 싱가포르가 3위를 기록했다. 2010년에는 싱가포르가 세계 1위를 기록했는데, 1인당 제조업 부가 가치가 미국보다 48퍼센트가 높았다. 그해 일본에 이어 3위를 기록한 스위스는 이 수치가 미국보다 30퍼센트 더 높았다.]


   그렇다고 경제 발전을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특히 개발도상국은 더욱 그렇다. 무엇보다도 개발도상국은 상위층 극소수가 모든 부를 차지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생산량을 더 늘려야 한다. 즉 경제 성장을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개발도상국에서 소득이 오른다는 것은 단순히 텔레비전 하나를 더 사는 문제가 아니다. 덜 위험한 환경에서 허리가 휘도록 힘든 일을 덜 하고, 자녀가 어릴 때 죽는 것을 보지 않아도 되고, 더 오래 살고, 병에 덜 걸릴 수 있는 삶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런 변화가 지속 가능하려면 단순한 성장보다는 (생산 능력이 증가하는) 경제 발전에 기반을 두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만, 천연자원의 발견 등에 따른 경제 성장이라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금융 부문의 과도한 발달과 그 영향)

   새로운 시스템을 갖춘 금융 부문은 이전과 달리 비금융 부문에 비해 훨씬 이익을 많이 내게 되었다. 다른 부문보다 월급과 보너스를 훨씬 더 많이 지급할 수 있게 되면서 대학 전공과 상관없이 가장 유능한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불행히도 이로 인해 공학, 화학 등 다른 분야에서 훨씬 더 생산적인 일을 할 수 있었을 재능 있는 사람들이 파생 상품을 거래하고 그 상품의 가격을 책정하는 수학 모델을 만드는 데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금융 부문에 불균형적으로 부가 집중되면서 금융 부문은 로비 활동을 통해 사회적으로 유익한 규제마저 효과적으로 반대할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금융 산업과 규제 기관 사이에 양방향으로 고용 관계가 오가는 일이 더욱 빈번해짐에 따라 굳이 로비가 필요하지 않은 지경까지 이르렀다. 금융 부문에서 일하다가 규제 감독 기관으로 옮긴 사람이라면 본능적으로 자기가 규제해야 하는 산업에 동정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을 '회전문' 인사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말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는 친금융 이데올로기가 지배적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금융 부문이 너무 힘이 세지고, 그 종사자나 도움을 주는 사람들에게 후한 보상을 안겨 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2008년 위기 이후 금융 산업 내 무능력, 무모함, 냉소주의가 만천하에 드러났음에도 대부분의 정치인과 규제 기관이 금융 규제 체제를 급진적으로 개혁하기를 꺼린 것은 단지 로비 때문만은 아니다. 금융 산업에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국가 이익에 부합한다는 이데올로기적 확신도 큰 이유이다.


   금융 시스템이 발달하지 않았으면 자본주의는 지금과 같은 발전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상업 은행의 확산, 주식 시장의 탄생, 투자 은행의 발전, 회사채와 국채 시장의 성장 등은 선례 없는 규모로 재원을 동원하고, 위험을 한데 묶어 관리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러한 발전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전히 재정적, 행정적으로 능력이 부족해서 제대로 지원도 못해 주는 정부 하에서 '소규모 자본가 겸 공장주'가 돈을 대고 운영하는 작은 공장만 가득한 세상에 살 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난 30년 동안 급격히 부상한 '새로운 금융'으로 인해 이제 금융 시스템은 부정적인 힘이 되고 말았다. 금융 기업은 여러 상품을 한데 묶고 구조화하는 등의 각종 기법을 통해, 자산 거품을 지속 가능한 것처럼 속여서 자사의 이윤을 높이는 데 아주 능숙해졌다. 거품이 터지면 이 기업들은 민첩하게 경제적 힘과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해 구제 금융을 확보하고 정부 보조금을 받지만, 그렇게 해서 비어 버린 정부의 금고는 세금을 올리고 정부 지출을 줄여 전 국민이 다시 채워야 한다. 이 시나리오는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이후 엄청난 규모로 현실화되고 있지만, 이미 지난 30년 동안 좀 더 작은 규모로 (칠레, 미국, 스웨덴, 말레이시아, 러시아, 브라질 등등) 전 세계 각국에서 수십 번 되풀이된 일이다.

   금융 시스템을 훨씬 더 엄격하게 규제하지 않으면 이런 위기는 계속 반복될 것이다. 1980년대 이후 약화되거나 철폐되었다고 이 장에서 설명한 규제 정책의 많은 수를 다시 부활시키거나 이전보다 오히려 강화해야 한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를 가능하게 하려면 이 책에서 다루는 범위를 넘어선 기술적인 논의가 필요하지만, 개혁을 생각할 때 한 가지 분명한 원칙만은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금융 시스템을 더 단순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불이익을 안고 있는 빈곤층 출신 사람들은 가장 공정한 시장에서도 경쟁에서 이기기가 상대적으로 힘들다. 그런데 시장 자체가 부자에게 유리하게 조작되는 경우도 흔하다. 금융 위기 때 자주 본 것처럼 금융 상픔을 고의로 부적합한 사람에게 판매하고 규제 기관에 거짓말을 한 스캔들이 그 좋은 예이다.

돈을 극도로 많이 가진 부자들은 게임의 기본 규칙마저 다시 쓸 수 있는 힘을 갖는다. 이것은 합법적, 불법적으로 정치인 및 관직을 매수하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진다. 부자 감세는 물론 금융 시장 및 노동 시장의 수많은 규제 완화는 이런 금권 정치의 결과이다.


   사실 덴마크는 2011년 1인당 소득이 2만 달러 이상인 OECD 회원 국가 중 가장 빈곤율이 낮았고, 그 뒤를 아이슬란드(6.4퍼센트), 룩셈부르크(7.2퍼센트), 핀란드(7.3퍼센트)가 이었다. 가장 빈곤율이 높은 나라는 이스라엘(20.9퍼센트)이었고, 미국(17.4퍼센트), 일본(16.0퍼센트), 스페인(15.4퍼센트)이 뒤따랐다.


   논리 자체만 보면 말이 되는 것처럼 들린다. 누군가 무엇을 자유 의지로 선택했다면 그 사람이 다른 것보다 그것을 선호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과연 그 선택을 하게 된 상황이 바뀌어야 하는지, 그리고 바뀔 수 있는지이다.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이라도 차선책이 굶는 것이라면 기꺼이 그 일을 선택할 것이다. (중략) 이런 상황에서 한 선택을 '자유 의지'로 했다고 할 수 있을까? (먹어야 산다는 생리적 조건 때문에) 그 일자리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한 게 아닌가?


   이런 맥락에서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특히 중남미에서 인기를 누린 좌파 '해방신학'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브라질 올린다-헤시피 지역의 대주교 돔 헬더 카마라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면 사람들은 나를 성인이라 부른다. 왜 그들에게 음식이 없는지를 물으면 사람들은 나를 공산주의자라 부른다." 어쩌면 우리 모두 약간은 '공산주의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이 조건이 '좋지 않은' 일을 자발적으로 선택할 만큼 절박하게 만든 환경을 용인할 것인가를 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잘못된 고정관념이 생기는 또 하나의 이유는 가난은 게으름의 산물이고, 따라서 가난한 나라 사람일수록 더 게으를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한 나라 사람들이 가난한 것은 생산성이 낮아서이고, 이런 낮은 생산성을 가난한 사람들의 잘못으로 돌릴 수는 없다. 국가의 생산력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본재, 기술, 사회 기반 시설, 제도 등이고 이런 것이야말로 가난한 사람들이 마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멕시코와 같은 나라에서 생산성을 결정하는 요소를 장악하고 있으면서 제대로 일을 해내지 못하는 돈 많고 힘 있는 사람들을 비난해야 할 것이다.


   역사를 보면 모든 이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안다고 확신하는 정치 지도자가 너무도 많았다. 왼쪽으로는 폴 포트, 스탈린, 오른쪽으로는 피노체트, 히틀러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세계관을 폭력적 수단을 동언해서라도 관철시키려는 정치인들 때문에 우리는 많은 고통을 겪었다. 국가가 시민보다 위에 있지 않다는 선언은 국가의 권력 남용 혹은 국가라는 기계를 관리하는 사람들로부터 개인을 보호하는 중요한 방어 수단이다.


   신고전주의 학파는 완전 경쟁 상태를 이상적으로 생각하지만, 슘페터 학파와 오스트리아학파는 바람직하지 않은 상태라고 비난한다. 혁신이 일어날 수 없는 경제적 정체 상태라는 것이다. (일시적) 독점 이윤이야말로 기업이 혁신을 꾀하도록 동기를 부여하는 요인인데, 독점을 단속하고 심지어 독점을 없애는 정책은 혁신을 줄여 기술의 정체를 가져온다는 논리이다. 이들은 슘페터가 '창조적 파괴의 바람(gales of creative destruction)'이라고 부른 움직임 앞에서는 어떤 독점도 장기적으로 안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GM, IBM, 제록스, 코닥, 마이크로소프트, 소니, 블랙베리, 노키아를 비롯한 수많은 기업이 시장에서 거의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누렸고 천하무적이라 여겨졌지만, 이제는 모두 그 지위를 잃었고 코닥의 경우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민주 국가에서 정치란 국민이 끼치는 영향력에 다름 아니다. 시장은 '1원 1표' 원칙으로 움직이는 반면 민주 정치는 '1인 1표' 원칙으로 움직인다. 따라서 민주 사회에서 경제를 탈정치화하자는 것은, 결국 돈을 더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사회를 움직이는 힘을 더 많이 주자는 반민주적인 주장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정부 실패론을 지지하는 경제학자들은 사실상 다른 경제학 이론들에 '정치적'이라는 딱지를 붙여 더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고, 자신들의 경제학 이론이 맞는 이론이고 심지어 '유일한' 경제학이라고 암묵적으로 주장하는 것이다.


   정부 실패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세우는 경제학 이론이 '맞다'라고 받아들인다 하더라도, 경제와 정치 사이에 선명한 선을 긋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장 경계 자체가 특정 경제학 이론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는데도, 무역 자유화와 같이 일부 시민이게 피해를 주는 정책을 정당화하기 위해 보상 원칙을 들먹이는 것은 국민의 일부에게 '다수의 이익'을 위해 희생하라고 강요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자유 무역 경제학자들이 그토록 신랄하게 비판하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했던 일이 바로 그것 아닌가?


   사실 미국은 세계에서 무역 의존율이 가장 낮은 나라 중의 하나이다. 흥미롭게도 무역 주도 경제의 전형적 이미지로 우리의 뇌리에 박혀 있는 일본 역시 무역 의존율이 미국과 똑같이 15퍼센트로 낮다. (경제 정책 같은)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경제 규모가 클수록 무역 의존도가 낮은 경향이 있다. 규모가 큰 덕분에 더 많은 산업에서 규모의 경제를 이룰 수 있어서 다양한 생산 구조를 자체적으로 구축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자 나라로 유입되는 이민자 수는 그렇게 극적으로 증가하지 않았다. 1990년에서 2010년 사이 이 나라들에 사는 이민자의 수는 8800만에서 1억 4500만 명으로 늘었다. 비율로 따지면 부자 나라의 전체 인구 대비 이민자 비율은 1990년 7.8퍼센트에서 2010년 11.4퍼센트로 증가했다. 상당한 증가이기는 하지만, 일부에서 조장하는 인상처럼 엄청난 변화는 아니다.


   그러나 세계화는 기술 발전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가 아니다. 자본주의의 황금기(1945~1973년)에 세계 경제는 자유주의의 황금기(1870~1913년) 보다 세계화 정도가 훨씬 낮았다. 이전의 증기선과 유선 전신에 비해 훨씬 더 발달한 운송 및 통신 기술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지난 30여 년 동안 나타난 세계화 현상은 부자 나라의 강력한 정부들과 주요 기업들이 그렇게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일 뿐이다.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 과학이 아니고, 앞으로도 과학이 될 수 없다. 경제학에는 정치적, 도덕적 판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확립될 수 있는 객관적 진실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경제학적 논쟁을 대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Cui bono(누가 이득을 보는가)?" 로마의 정치인이자 유명한 웅변가였던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말이다.


   "망치를 쥔 사람은 모든 것을 못으로 본다."


   전 영국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  "거짓말과 새빨간 거짓말, 그리고 통계가 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견해를 가져야 하고, 그 견해가 강하면 더 좋다. 그러나 강한 견해를 갖는 것과 자신의 견해가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가 한 말처럼, 우리는 지적으로는 비관주의, 의지로는 낙관주의를 가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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