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진중권 [미학 오디세이2]
이렇게 모자이크 단편을 쌓아 올려 대상을 구성하는 세잔의 방법은 입체주의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입체주의자들은 대상을 여러 조각으로 해체해서 다시 종합하려 했다. 그들을 입체주의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세잔의 방법을, 2차원 평면과 3차원 공간의 모순을 해결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입체주의자들은 사물을 여러 시점(가령 전후좌우)에서 본 시각적 단편들을 모아 그것들을 하나의 평면에 재조립하려고 했다.
사실 세잔이 화면을 모자이크처럼 구성한 것은 지각 자체가 원래부터 혼란스럽다고 믿었기 때문이지, 2차원과 3차원 공간의 모순을 해결하려고 한 건 아니었다.
현대 예술은 그림 밖의 어떤 사물을 지시하지 않는다. 지시하는 게 있다면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여기서 의미 정보에서 미적 정보로의 전환이 시작된다.
의미 정보를 중시한 고전 회화에선 형태나 색채가 주제에 종속되어 있었다. 하지만 재현을 포기한 현대 예술엔 내용이나 주제가 있을 수 없다. 다만 색과 형태라는 형식 요소 자체가 가진 아름다움, 즉 미적 정보만 있을 뿐이다. 이제 현대 예술을 보고 '저게 뭘 그린거냐'고 물으면 실례가 되는 건 이 때문이다. 알겠는가?
크로체는 표현을 물질적 구현(퍼포먼스)과 철저하게 구별한다. 퍼포먼스는 관조가 아니라 실천 활동이기 때문이다. 진짜 화가는 원래 손이 아니라 머리로 그리는 법이다. 일단 머리속에 그림이 그려지면 거기에 물질적 외투를 입히는 건 저절로 따라온다. 표현은 머릿속에서 완성되면, 머릿속에 그려지는 이 그림(표현)이야말로 어떤 외적인 찌꺼기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예술 작품이다. 그리고 이게 바로 아름다움이다. 미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직관은 표현이며, 표현은 예술이며, 예술은 아름다움이다.
이 구두라는 도구의 밖으로 드러난 내부의 어두운 틈으로부터 들일을 하러 나선 이의 고통이 응시하고 있으며,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는 거친 바람이 부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 있고, 구두 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함이 깃들여 있다. 구두창 아래는 해 저물녘 들길의 고독이 깃들여 있고, 이 구두라는 도구 가운데서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또 대지의 조용한 산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이,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일렁이는 해명할 수 없는 대지의 거절이 동요하고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빵의 확보를 위한 불평 없는 근심과 다시 고난을 극복한 뒤의 말없는 기쁨과 임박한 아기의 출산에 대한 전전긍긍과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전율이다.
고흐의 그림은 이처럼 하나의 유용한 물건이기 이전에 구두가 진실로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촌아낙네의 삶 속에서의 구두 존재를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한 켤레의 구두를 존재의 빛 속에 들어서게 한다. 구두라는 존재자의 진리가 정립된 거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진리의 일어남을 '미'라고 부른다. 작품 속에서 진리가 빛나는 거, 그게 바로 아름다움이란 얘기다.
예술 작품은 세계를 건립하면서, 동시에 대지를 설립한다. 세계는 열리려 하고, 대지는 닫으려 한다. 진리는 이렇게 세계와 대지 사이의 밝힘과 가림의 투쟁으로 존재한다. 작품은 바로 이 팽팽한 대립 속에 닻을 내리고 안식한다.
시(예술)은 과학보다 위대하다. 왜? 어떤 인식이 사실에 일치하려면, 먼저 사실이 그 자체로서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다음에야 비로소 우리는 진술이 사실과 일치하는지 아닌지 얘기할 수 있다. 예술에서는 그와 같은 알레테이아로서의 진리, 즉 근원적인 진리가 일어난다. 반면 과학은 진리의 근원적 일어남이 아니며, 다만 이미 알려진 영역을 사후에 정비하는 데 그칠 뿐이다. 헤겔은 예술의 종언을 얘기했다. 그에게 예술은 더 이상 역사적 현존재를 위한 결정적 진리가 일어나는 방식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이데거는 거꾸로 철학의 종언을 얘기한다. 예술은 철학보다 위대하다. 예술은 존재의 진리를 열어주기 때문이다.
이저에 따르면 원래 미는 어떤 내용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미가 가리키는 게 있다면 그건 자기 자신이다. 말하자면 미의 본질은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에 있다는 얘기다. 사실 그렇다. 미에선 '무엇을 말하느냐'보다 '어떻게 말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가령 우리는 '기분이 좋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디언 부족은 이걸 다르게 말할 줄 안다."내 마음 독수리처럼 하늘을 날도다." 어느 쪽이 더 미적인가?
왜 그(비트겐슈타인)는 초기의 견해를 포기해야 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철학이 가진 묘한 역설 때문이었을 거다. 그 역설이란 자연언어의 결함을 제거하려 한 그의 작업도 결국은 자연언어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는 거다. 그는 자신의 철학을 사다리에 비유하면, 일단 지붕 위에 올라간 다음엔 그 사다리를 치우기 전에 벌어진 거다. 그 결함 투성이의 사다리를 타고서도 어쨌든 그는 지붕 위로 올라가지 않았는가!
하지만 웨이츠에 따르면 이 물음 자체(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가 잘못된 거다. 가령 '예술'이라는 말은 음악, 무용, 영화, 소설, 조각, 회화 등 여러 가지 예술들을 가리킨다. 하지만 이것들 모두에 공통된 성질이 있을까? 없다. 이들 사이엔 가족 유사성만 있을 뿐이다. 본질이 없는데 본질이 뭐냐고 묻는 건 난센스다. 웨이츠에 따르면 예술의 본질이 뭐냐고 물으며 출발했던 전통적 미학은 모두 이러한 오류에 빠져 있다고 한다. 이걸 '본질주의의 오류'라고 한다.
이드는 끊임없이 쾌락을 추구하나, 현실에서 욕망을 충족하는 게 언제나 가능하지는 않다. 현실 원리 때문에 우리는 때론 대상이나 목표를 잠시 또는 영원히 포기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이 쾌락을 포기하기란 쉽지가 않다. 어떻게 하나? 이드는 방법을 안다. 공상을 통해 욕망을 충족시키는 거다. 적어도 공상 속에선 현실 원리의 속박을 벗고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우린 대낮에도 꿈을 꾼다. 야무지게.
물론 공상을 통한 만족은 진정한 만족이 아니다. 우린 결국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그런데 야무진 꿈을 고스란히 품고 현실로 돌아 오는 길이 있다. 바로 예술이다. 예술가들은 본능적 욕구가 매우 강한 사람들로, 대개 신경증에 가까운 내향적 소질을 갖고 있다.
의미를 중요시한 고전주의 예술에선 대상의 형태가 가장 중요했다. 색채는 단지 대상의 형태를 분명히 드러내는 수단일 뿐이었다. 하지만 현대 예술에선 대상성이 사정 없이 파괴된다. 형태와 색채는 대상에서 해방되어 자유로운 구성을 이룬다. 결국 고전주의 예술은 의미 정보를 추구한 반면, 현대 예술은 의미 정보를 단순화하는 가운데 미적 정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 : 그렇지. 가령 뒤샹이라는 자는 화판에 세 가닥의 실을 떨어뜨려 생긴 우연한 모습을 그대로 작품으로 출품했다더군.
아리스 : 예술 창작을 그냥 자연의 우연적 과정에 맡겨버린 셈이군요.
플라톤 : 바로 그거야. 어떤가? 모더니즘의 3대 현상이라는 추상, 표현, 레디 메이드가 결국은 한 방향이 되는 셈이지.
아리스 : 그건 왜죠? 가령 추상은 차가운 이성의 산물이고, 표현은 뜨거운 감정의 표출이 아닙니까?
플라톤 : 생각해보게. 가령 추상의 극한은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검은 사각형>이고 ,표현의 극한은 폴록의 물감 뿌리기지. 하지만 그 결과, 두 경우 모두 구체적 대상성과 기호성을 잃고 하나의 '사물'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아리스 : 하지만 레디 메이드는 좀 다르지 않을까요? 그건 오히려 구체적 대상에 무한히 가까워지니까요.
플라톤 : 하지만 너무 가까워져 결국 예술이 그냥 '사물'이 되어버리지 않았나. 대상에서 무한히 멀어지든, 무한히 가까워지든 결과는 마찬가지야. 어떤가? 우리는 이제까지 시각적 가상의 역사를 추적해왔다네. 현실에서 나온 가상은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 하는 거지. 오디세이는 출발했던 곳에서 끝나야 하니까.
어쨌든 카오스모스를 추구하는 오늘날의 열린 예술 작품은 현대 사회의 어떤 징후를 반영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건 세계관과 가치관의 중심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혼란스런 상황의 반영이다.
베르너 하이젠베르크(1901~1976)의 불확정성 원리는, 세계는 확실하고 고정된 관점에서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현대 예술이 확실하고 고정된 필연성에서 도피하고 다의성을 띠는 경향은, 이런 의미에서 현대 사회의 위기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과연 다른 책들이라고 미와 예술을 논하고 있을까? 십중팔구 그것들 역시 다른 책들을 보고 쓴 책일 거다. 그럼 그 책은...? 결국 우린 책 속에 갇혀 있는 셈이다. 책은 현실이 아니라 책에 대해 말할 뿐이다. 책이 책을 말한다. 과연 우리가 돌고 도는 책들의 고리를 끊고, 바깥 세계를 볼 수 있을까?
나아가 저 그림 속의 책은 우리의 의식, 우리의 언어, 아니면 우리 시대의 '지평'일 수도 있다. 문제는 저 책에 씌어진 세계의 모습이 올바르다는 보장이 없다는 거다. 의식은 허깨비일 수 있고, 언어는 종종 우리를 기만하여, 이해의 지평은 찌그러져 있을지 모르니까. 그래서 벌레는 책을 뚫고 밖으로 나왔다. 과연 우리도 저 벌레처럼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에셔의 패러독스는 인간 사유의 문법, 즉 논리를 깨는 데 있다. 말하자면 사유의 '형식'에 들어 있는 패러독스인 셈이다. 반면 마그리트의 패러독스는 사유의 내용, 즉 의미를 깨는 데 있다. 말하자면 사유의 '내용'이 가진 패러독스인 셈이다. 에셔는 수학과 논리학과 같은 형식 체계에 관심이 있었고, 마그리트는 철학, 특히 실재론과 관념론의 대립에 관심이 있었다. 두 사람의 작품세계의 차이는 여거시 비롯되었을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