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유시민 [거꾸로 읽는 세계사]
만일 삐까르 중령이 진실을 발견했을 때 참모본부의 지휘부가 적절한 조치를 취했더라면 반역자 에스떼라지가 체포되고 드레퓌스라는 한 무고한 장교는 명예를 회복하는 것으로 사건은 끝나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군부의 위신을 군가안보와 동일시한 군고위층의 어처구니없는 아집과 독선 때문에 사건은 눈사태처럼 커져갔다.
그러나 가풍 신부야 어찌 되었든 '피의 일요일' 이후 1년간 러시아는 그야말로 본격적인 혁명의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말았다. 특히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둘러싸고 발발한 러일전쟁에서 대제국 러시아의 발트함대가 1905년 3월 일본 해군에 의해 전멸당함으로써 전제정부의 위신은 더더욱 땅에 떨어졌다. 전쟁과 혁명은 쌍생아이다. 보불전쟁 패배 직후 1871년 파리콤뮨이 일어났고 중일전쟁의 잿더미에서 중국혁명이 완수되었듯 패전으로 인한 정부의 권위 실추는 혁명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는 법이다.
전쟁이 장기화하자 점점 더 넓은 지역의 훨씬 더 많은 나라들이 전쟁의 진흙구덩이 속으로 자진해서 뛰어들거나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오기 시작했다. 흑해의 입구를 장악하고 있던 터키는 러시아의 남진에 대항하기 위해 독일과 한패가 되었다. 이로 인해 아라비아반도에도 거센 모랫바람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메카의 수호자' 훗세인과 아들 파이잘을 비롯한 아리비아의 여러 왕자들이 사막의 유목민들을 불러모아 영국과 함께 아라비아인들은 독립을 얻기 위해 용감하게 싸웠다. 게다가 영국은 독립을 미끼로 인도인들을 구슬렀다. 영국의 식민지배에 대항하여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인도 민족주의자들은 영국의 약속을 믿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또한 영국은 미국의 정계와 재계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던 유태인들을 움직여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해 외상 발포어를 워싱턴으로 파견했다. 이때 발포어는 장차 팔레스타인에 유태인의 나라를 세워주겠다는 소위 '발포어선언'을 한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후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과 중동전쟁, 또 팔레스타인 난민의 불행과 PLO(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필사적인 저항과 테러사태를 야기할 불씨가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사라예보사건'이 과연 제1차 세계대전의 원인인가? 프린시프가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처를 쏘지 않았다면 그 참혹한 전쟁은 피할 수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의 진짜 원인은 '사라예보사건'이 아니라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이기 때문이다.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는 겉으로 보기에 고대 로마제국이나 주변 약소국을 정복한 중국의 고대국가와 비슷한 면이 있지만 본질 면에서는 서로 전혀 다르다. 고대 대제국의 지배자들이 자기가 믿는 신의 뜻을 실현하기 위하여, 혹은 정복과 약탈을 목적으로, 주변 국가를 침략하고 지배한 데 비해서 현대 제국주의를 움직이는 힘은 식민지에서 높은 이윤을 추구하려는 자본주의체제의 속성이다. 그리고 대자본가들이 장악하고 있는 정부가 이것을 보호하고 관철시키기 위해 군대를 파견한 것이다. '사라예보사건'은 서로 투쟁하는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전쟁의 필연성이 현실화하는 계기였을 뿐이다.
곤경에서 빠져나와 스위스로 도망쳐온 레닌은 제국주의 전쟁을 깊이 연구한 끝에 1916년 [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1870년대 이후의 자본주의가 "건설적이고 평화적인" 단계를 지나 독점자본주의 단계에 들어섰다고 선언했다. 독점자본주의 단계의 자본주의 강대국들은 값싼 노동력과 원자재를 제공해주며 또 그것으로 대량생산한 상품을 비싸게 팔 수 있는 해외식민지를 둘러싼 쟁패전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레닌은, 마르크스의 예언과는 달리 선진 공업국가에서 사회주의혁명이 지체되어온 것은 그들이 해외의 식민지 민중을 착취해서 그 이윤 중 일부를 사용하여 노동계급의 상층부를 매수함으로써 계급투쟁과 사회주의혁명을 저지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 전 세계 금융의 80%를 차지하는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의 4개국과 식민지의 80%를 장악한 영국, 독일, 프랑스 3개국은 더더욱 넓은 식민지를 필요로 하게 되니까 마침내 일대 격투를 벌이게 되어 결국 하나의 국제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는 파괴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은 선진 공업국가의 젖줄로서 그 나라의 계급투쟁을 완화시키는 식민지의 민족해방혁명이나 러시아와 같이 후진적이지만 식민지가 없는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약한 고리'에서의 혁명으로부터 시작될 것이며, 더구나 그 혁명은 전쟁에 의해 촉질될 것이므로 사회주의자는 자기 조국이 패전하여 혁명이 촉진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한다는 것이 레닌의 주장이었다. 이 주장은, 비록 2월 혁명의 시기와 과정까지 정확히 예측하지는 못했지만, 일 년 후의 러시아혁명을 거의 그대로 예언한 셈이다.
러시아 2월혁명 후에 수립된 자유주의자들의 임시정부는 독일과의 전쟁을 중지하지 않음으로써 스스로 무덤을 판 셈이었다. 언제나 외국 군대의 침략은 혁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법이다. 중국 혁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일본제국주의의 대륙 침략이 혁명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모택동과 중국 공산당은 현대사에서 새로운 형태, 새로운 성격의 혁명을 창조했다. 러시아혁명은 산업노동자계급의 도시봉기를 중심으로 해서 그것이 군대와 결합하고 빈농과 동맹하면서 전제군주제를 타도하고 민주주의혁명을 이룬 후 곧바로 사회주의 혁명으로 성장, 전화했다. 그러나 중국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혁명 이념하에 농민을 주축으로 한 유격대를 중심으로 노동자, 지식인, 민족 부르조아지를 결합하면서 매우 장기적인 항전을 통해 외래 제국주의와 봉건제의 잔재, 자본주의 권력(국민당)을 동시에 타도하고 민주주의, 사회주의, 민족해방이라는 세 가지 과제를 동시에 성취하였다. 이것은 제국주의 지배하에 있는 식민지, 종속국 혁명의 원형이며, 그 이론적 정치적 지도자는 모택동이었다. 나중에 일반 이론으로 정립되었을 때 중국혁명은 '인민민주주의혁명'이라 불리게 되며 이는 사회주의혁명의 한 유형으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국가사회주의'라는 이름에도 불구하고 나찌체제는 '사회주의'와 아무런 공통점이 없었다. 그것은 독점자본가나 군부, 관료의 민중에 대한 가장 적나라한 계급 독재였으며 가장 노골적인 형태의 전체주의 국가였을 뿐이다. 일찍이 대중을 '조작의 대상'으로 여겨온 히틀러는 각계각층을 철저히 하향식으로 조직하였다.
나찌는 성공했다. 정치뿐만이 아니라 경제에서도 일련의 눈부신 성과를 거둔 것이다. 독일 경제의 부흥은 형태만 달랐을 뿐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이 실시한 뉴딜정책과 동일한 원리에 의해 설명된다. 의도했든 아니든 히틀러는 케인즈의 가르침을 가장 먼저 이행했다. 그는 도로 건설과 토지 개량사업, 대규모의 병영과 비행장 건설사업을 일으키고 기계 대신 인력을 사용하게 했다. 그리고 군대와 경찰, 감옥을 대폭 늘이고 군수산업을 진흥시켰다. 미혼여성에게는 결혼 대부금을 주어 직장을 떠나도록 하고 남자들을 취직시켰다. 친위대만 해도 5만 이상에 징집제를 실시했다. 이리하여 무려 6백만이 넘던 실업자가 불과 몇 년 안에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줄어들었다. 케인즈의 표현대로 하자면 정부의 '재정지출'이 '유효수요'를 증대시켰고, '유효수요'의 증대는 '국민소득'의 증대를 몰고와 대공황의 그림자가 사라졌다.
나찌즘은 제국주의의 본질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약소국에 대한 침략과 군사적 점령, 식민 통치가 독점자본주의체제의 대외적 표현이었다면 국내에 있어서 민주주의의 완전한 말살은 그 대내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동등한 크기의 투표권을 갖는 평등한 정치제도인 민주주의와, 소수의 자본가가 생산과 유통, 금융을 과도적으로 지배하는 불평등한 경제체제인 자본주의가 더이상 공존할 수 없다는 것을 나찌즘은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민주주의 전통이 강력하고 민중의 정치의식이 높았던 미국과 영국은 국가권력을 개입시켜 자본주의체제를 수정함으로써 적어도 대내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유지했지만, 그렇지 못한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의 지배계급은 3권분립과 자유선거,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와 각계각층의 이익단체와 정당정치를 일체 폐기하고 강력한 독재체제를 수립하였다. 이것이 '파시즘'이며 나찌즘은 그 극단적인 형태였을 따름이다. 인종주의와 광신적 반공주의라는 나찌적 특성을 독일만의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국가의 이익이라는 명분을 들이대면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말살하고, 안정이라는 이름 아래 소수자의 이익을 위해 다수자의 이익을 짓밟는 파시즘의 악령은 20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도 세계 각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종차별의 철폐를 포함하는 사회주의혁명에 뛰어든 동유럽과 러시아의 유태인들과는 달리 시온주의운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당시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아랍계 주민들의 권리를 철저히 무시했다. 이는 당시 유럽을 풍미한 철학 사조에 물든 탓이었다. 제국주의 유럽은 유럽 밖의 영토를 자기네 마음대로 점령하고 지배할 수 있는 '주인 없는 땅'처럼 여기고 있었으며 또 실제로 그렇게 했다. 유태인들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시온주의가 고개를 든 바로 그때,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놓여 있던 팔레스타인의 아랍민족 역시 같은 성격의 이념, 즉 아랍 민족주의에 눈뜨고 있었다. 그들은 자기 민족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고 결정하는 민족자결의 미래를 그리면서 이민족 지배자에 대한 복수의 칼을 막 갈기 시작했다. 이같은 사실은 비록 시온주의자들이 인식하지 못하였다 할지라도 이미 양 민족 사이에 던져진 크나큰 불행의 씨앗임에 분명했다.
이런 의미에서 시온주의는 유태민족주의와 동일시될 수 없다. 시온주의는 다른 민족을 물리적인 힘에 의해 축출하고 그 땅에 순수한 유태국가를 수립하려는 침략적 국수주의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나라를 세움으로써 수천 년에 걸쳐 당해온 박해와 불행을 종식시키겠다고 결심한 시온주의자들은, 팔레스타인의 아랍인들에게 자기의 불행을 고수란히 떠넘기는 방법으로 그 목표를 달성했다. 만일 이러한 행위가 정당하다면 나찌의 유태인 박해 역시 정당한 행위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긴 칠흑 같은 밤의 계속이다. 나이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사를 보라. 그것은 가식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벌거벗은 나상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위협과 폭력으로써 우리들을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를 양보하고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학수의 양심을 느낀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에,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 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추하에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로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결은 용기일 뿐이다.
(서울대학생들의 4월 민주혁명 선언문)
미국이 이렇게 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장개석 군대가 패주함으로써 '중국을 상실'한 이후 미국 정부는 반공 히스테리에 걸려있었다. 더욱이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부터 이 히스테리는 매카시즘이라는 일종의 정신병 발작으로 도졌다. '매카시'라는 한 광신적 반공주의자가 행정부와 의회 안에 수백 명의 공산주의자가 암약하고 있다는 아무 근거 없는 정치선동을 한 데서 시작된 이 병은 1950년대의 미국 사회를 공포 분위기와 반지성적 사상통제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시민이 그 이웃을 적이나 간첩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살피도록 명령받을 때 그 사회는 벌써 와해의 과정을 걷고 있다"는 양식있는 이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매카시즘의 '빨갱이 사냥'은 미국이 자랑하는 모든 가치와 전통을 짓밟았다. 그것은 "정신과 영혼의 병"이었다. 종교재판의 이단자 탄압이나 히틀러주의, 스탈린주의, 쿠 크락 클랜(KKK)과 같은 사악한 세력을 모조리 합친 병이었다.
그러나 단지 심리적인 충동 때문에 미국이 월남전에 개입한 것은 결코 아니다. 거기에는 엄연한 장사속이 개입되어 있었다. 미국은 2차 대전 후 막대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사회주의권을 제외하면 거의 전 세계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고 미군을 주둔시키면서 그 나라들을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베트남은 인도차이나와 동남아시아, 나아가 태평양에 있어서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는 대소 봉쇄망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게다가 베트남은 경제적으로도 매우 쓸모있는 지역이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1953년에 한 말이 이것을 증명한다.
우리가 인도차이나를 상실한다고 가정해보자. 몇 가지 문제가 문제가 생긴다. 우선 반도의 방위가 어려워진다.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한 주석과 텅스텐을 잃어버릴 것이다.
"자유세계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상투적인 문구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양심적인 나라들은 베트남을 지배하려는 미국의 야욕을 꿰뚫어보면서 베트남 개입을 거절했다. 만일 베트남이 승리하지 못했다면 세계 인류의 양심은 크나큰 절망에 부닥쳤을 것이다.
베트남 개입의 진상을, 그리고 음모와 조작을 서슴지 않았던 군부와 행정부의 부도덕성을 백일 하에 폭로한 엘즈버그와 같은 지성인들의 용기와 아울러, 뉴욕 타임즈의 승리를 선언하여 언론자유라는 고귀한 이상을 수호한 연방 대법원의 양심적 판단 ,베트남 전쟁을 반대하며 거리로 나섰던 수백만의 양식있는 시민들이 파탄 직적의 골리앗을 구한 것이다. 베트남전쟁에서 군부가 저지른 범죄행위의 소름끼치는 진상이 폭로됨으로써 미국정치는 냉전의식과 매카시즘의 악령으로부터 벗어나 다시금 문민 우위의 전통을 회복할 수 있었다.
아울러 베트남전쟁은 제국주의가 멸망할 수밖에 없으며, 그 멸망은 본국 내부의 혁명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것이 지배하고 있는 식민지 종속국의 혁명에 의해서 서서히 진행되고 촉진될 것임을 입증하였다. 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인 러시아혁명은 제국주의적 대외정책을 취하고 있던 낡은 봉건국가에서 일어났다. 볼세비키는 혁명을 이루는 과정에서가 아니라, 혁명 후 권력을 직키기 위해 외국군대와 싸웠다. 중국공산당과 홍군은 일본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배경 속에서 국민당과의 내전을 통해 혁명을 달성했다. 그러나 베트남혁명은 제국주의와의 전쟁, 바로 그 자체였다.
베트남전쟁은 자기네가 무엇이든 세계 제일이며 미국이 하는 일은 모두 정당하고 또 승리한다는 미국인의 대국주의, 맹목적 자기 과신에 일대 경종을 울렸다. 그것은 '미국의 시대'의 폐막을 알리는 조종이었다. 그리고 역설적인 이야기이지만 베트남인은 미국에 초유의 치명적인 패배를 안겨줌으로써 미국인 스스로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면서부터 소중히 여겨온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다시금 깨닫게 했다.
미국은 여러가지 면에서 독특한 나라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할 만한 일은 원주민을 철저히 말살한 위에 세워진 유일한 나라라는 점이다. 종교적 박해를 피해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로 건너온 청교도들은 처음에는 자유와 정의의 이름 아래 이 나라를 세웠지만, 미국의 건국사는 뒤집어 말하면 인디언 말살의 역사 그 자체이다. 원주민의 평화로운 삶을 송두리째 파괴하고 그들을 황량한 '보호구역'에 몰아넣었으며, 필사적인 그들의 저항을 참혹하게 쳐부순 학살의 역사를 미국인들은 자랑스런 '서부개척'의 역사로 기록하였다. 미국은 출발부터 전례없는 인종차별주의 위에 건설된 것이다. 그것은 유색인의 인간적 존엄을 부인하는 백인지상주의 사상이었다.
백인들은 단지 신대륙의 유색 원주민을 짓밟았을 뿐만 아니라, 대서양 건너 검은 대륙 아프리카의 주민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부리기까지 했다.
그(말콤 X)가 '분리'를 주장할 때마다 흑인 '박사님'들은 이슬람교도들은 백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이 하는 주장과 똑같은 소리를 한다고 비판하고, 그가 흑인들로 하여금 "폭력을 쓰도록 선동한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말콤은 이렇게 답변했다.
"그렇지 않다! 우리는 당신들보다 더 단호하게 '격리'를 거부한다. '분리'는 '격리'와는 명백히 다르다. '격리'는 우월한 자가 열등한 자에게 억지로 강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리'는 평등한 둘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 미국의 흑인들이 백인에 종속되어 있는 한 우리는 언제나 백인에게 일자리와 의식주를 구걸해야 할 것이며, 백인은 우리의 생활을 규제하면서 언제든지 우리를 '격리'시킬 힘을 가지게 될 것이다."
"기독교가 미국에서 이룩한 가장 위대한 기적은 흑인들이 전혀 폭력적으로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는 사실이다. 2천 3백만의 흑인들이 압제자들에게 맞서 분연히 궐기하지 않았다는 것이야말로 기적이다!"
일본이라는 나라의 군국주의적 침략적 속성은 매우 뿌리깊은 것이다. 여러 개의 섬으로 나뉜 일본의 역사는 1868년의 명치유신 이전까지 각 지역에 할거한 봉건영주들 사이의 끊임없는 전쟁과 반란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 봉건영주는 농민을 무력으로 지배하기 위해 무장한 가신집단을 양성했는데, 이 가신들이 사무라이이고, 이들이 지녔던 칼이 소위 '일본도'이며, 이같은 봉건지배체제를 합리화시킨 이데올로기가 바로 무사도이다. 무사도는 12세기에 시작되었으며, 후에 유교사상과 결합하면서 '충성, 힁생, 신의, 결백, 명예' 등을 숭상하는 호전적인 일본 특유의 이데올로기로 정착되었다. (중략) 2차대전 시 총과 비행기와 대포를 가진 일본 장교들이 일본도를 절그럭거리고 다닌 일이나 전투에서 패배할 때 전원 옥쇄한 행동은 바로 무사도에 근거한 것이다.
마지막 봉건왕조인 덕천 막부가 무너지고 명치유신(1868)으로 근대적 국가가 출현하면서 무사들은 칼 휴대를 금지당했고 봉건영주제도는 폐지되었다. 그러나 무사도는 천황제 근대국가의 군대에 그대로 계승되었다. 이제는 자급자족적 봉건경제 대신에 자본주의라는 새로운 물질적 조건 위에 무사도가 접목된 것이다. 일본의 봉건 지배계급은 서구 열강의 위협에 의해 문호를 개방한 후 급속한 자본주의 발전을 이루었다. 하지만 신흥 부르조아계급이 시민혁명을 통해 봉건 지배계급을 타도하고 자본주의를 확립한 유럽과는 달리, 봉건 지배층이 산업 발전을 주도한 일본에서는 정치적 민주주의가 싹틀 수 없었다. 시민정부 대신에 천년의 역사를 가진 천황제가 유지되었으며, 의회는 매우 제한적인 권한밖에 가지지 못했다. 따라서 친황제 근대국가의 군대는 신식무기와 함께 봉건적 무사도로 무장하고, 봉건영주들의 내전 대신에 '대일본제국과 천황폐하'를 위한 대외침략전쟁에 동원되었다. 경제적 권력은 천황제 국가의 비호를 받는 소수 재벌에게 집중되었으며 정치적 권력은 천황을 정점으로 한 군부 지배층과 관료들에게 독점되었다.
게다가 한국전쟁이 발발한 다음에는 과거 전쟁 범죄자들이 모두 사면되었을 뿐만 아니라 공직에서 추방되었던 1만여 명 이상의 주모자급 전범들이 모두 공직으로 돌아와 정치, 경제, 군사, 문화, 교육의 각 분야를 신속하게 장악했다. 해체되었던 재벌기업들도 재편성되어 살아났다. 경찰 예비대가 창설되었고 1954년에는 자위대가 발족함으로써 일본은 실질적인 재무장을 갖추었다. 미국은 국군주의자, 제국주의자, 국수주의자, 파시스트, 천황제의 광신자들을 동맹자로 선택하여 그들에게 일본의 정치권력을 넘겨주었던 것이다. 여기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부활의 음모를 싹틔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