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 앨빈 토플러 [권력이동]2
현재의 심각한 환경문제 중 대부분 -대기오염에서 유독성 폐기물에 이르기까지- 은 낡은 산업주의적 부 창출방법의 부산물이다. 이에 반해 물질적 자원을 지식으로 대체하고, 생산을 집중화시키기보다 분산시키고, 에너지 효율을 증대시키며 또한 자원 재생기술을 극적으로 발전시킬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새로운 경제체제는 깨끗한 생태계와 경제발전을 결합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해 주고 있다.
그러나 향후 10~20년 동안에 체르노빌 사건, 보팔 사건, 알래스카 석유 유출사건 등 공장굴뚝 시대의 유산이 재현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대중민주주의는 <대중>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그것은 대중운동, 대중정당, 대중매체에 기반을 둔다. 그러나 대중사회가 탈대중화하여 각종 운동, 정당 미디어가 분열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우리가 교환 불가능한 노동려에 기초하는 경제로 이행해 갈 경우 <대중>이란 말은 무슨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을까?
만일 기술이 제품의 주문화를 허용한다면, 시장이 여러 부문시장으로 분해된다면, 미디어가 늘어나 그 독자층이 계속 협소해진다면, 그리고 만일 가족구조와 문화조차도 더욱 더 이질화되어 간다면 정치학은 왜 여전히 동질적인 대중의 존재를 가정해야 한단 말인가?
이 모든 변화는 -그것이 지방주의의 대두이건, 세계화에 대한 저항이나 생태보존 운동, 또는 민족적, 인종적 의식의 고양이건 간에- 선진경제의 사회적 다양성 증대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 변화들은 대중사회의 종언을 가리키고 있다.
그러나 탈대중화와 함께 사람들의 욕구와 그 정치적 욕구사항도 다양해진다. 업계의 시장조사원들은 지금 생활양식의 다양화를 반영하여 제품의 단편적 시장과 <마이크로 시장(micro-market)>이 더욱 더 늘어나고 있음을 발견하고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정치가들도 더욱 더 다양해진 유권자의 요구에 시달리고 있다. (중략)
그러므로 대중사회의 붕괴가 가져온 최초의 결과는 정치의 복잡성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이다. (중략)
후술하는 바와 같이 현재 등장하고 있는 것은 대중민주주의가 아니라 고도로 활성화되고 급속하게 운동하는 <모자이크 민주주의(mosaic democracy)>이다. 그것은 경제부문 모자이크의 등장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독자적인 규범에 따라 운영된다. 이로 인해 우리는 민주주의에 관한 극히 기초적인 가설들까지도 재정의할 수밖에 없게 된다.
히틀러가 등장하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그 한가지는 비평형체제에 관한 새로운 과학이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새로운 과학이론은 그 당시 독일이 처했던 것과 같은 극단적인 불안정 시기에는 세 가지 상황이 일어난다고 가르친다. 즉 우연의 역할이 커지고, 외부세계의 압력이 더욱 큰 영향력을 갖게 되며, 포지티브 피드백(positive feedback, 변화를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확대하는 과정)이 거대한 눈덩이 효과를 일으킨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작용하고 있는 눈덩이 효과의 예는 미디어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자는 휴대용 카메라를 가지고 아무리 작은 사이버 정치집단이나 테러집단이라더라도 즉시 세계의 의식에 투영함으로써 그 집단에 실상보다 훨씬 더 큰 중요성을 부여할 수 있다. 일단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 집단은 <뉴스거리>가 되고 그렇게 되면 다른 미디어들이 그 활동상황을 취재하여 한층 더 큰 뉴스거리로 만든다. 이렇게 해서 <포지티브 피드백 고리>가 만들어진다.
역사상 우리 인류가 전적으로 새로운 부 창출방법을 만들어낸 적은 두 번밖에 없었다. 그 때마다 인류는 이에 상응하는 새로운 통치형태를 만들어냈다.
농업의 확산은 부족집단, 수렵부족 등의 사회적, 정치적 제도를 일소하여 이들을 도시국가, 세습왕국, 봉건제국 등으로 대체시켰다. 산업혁명은 다시 이들의 대부분을 일소해 버렸다. 그 결과 대량생산, 대량소비, 대중매체와 함께 여러 나라에서 이에 상응하는 체제, 즉 <대중민주주의>가 대두되었다.
그러나 대중민주주의는 심한 저항에 봉착했다. 봉건적 농업체제의 낡은 세력 -토지를 소유한 상류계급, 위계체제 하의 교회, 그리고 이들의 지적, 문화적 옹호자- 이 새로 등장하는 산업주의와 여기에 종종 수반되는 대중민주주의를 상대로 저항하고 제휴하고 싸웠던 것이다.
사실 모든 공장굴뚝 사회의 중심적인 정치투쟁은 흔히들 생각하듯 좌익과 우익 간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제1물결> 농업체제와 <전통주의> 찬미자를 한편으로 하고 <제2물결> 산업체제 또는 <근대주의> 옹호자를 다른 한편으로 하는 투쟁이었다.
그같은 권력투쟁은 다른 깃발 -예를 들어 민족주의, 종교 또는 민권- 을 내걸고 싸우는 경우가 많다. 이 투쟁은 정치뿐 아니라 가정생활, 남녀관계, 학교, 전문직업, 예술 등에까지 파급된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이 역사적 투쟁은 오늘날 하나의 새로운 투쟁-<제3물결>, 즉 근대 이후의 문명이 근대주의와 전통주의 모두를 상대로 벌이는 투쟁- 에 의해 그 존재가 희미해지고 있다.
그리고 만일 지식에 기반을 둔 새로운 경제가 지금 공장굴뚝 생산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앞으로 우리의 정치체제를 개조하여 이를 대량생산 이후의 혁명적 경제체제와 조화시키기 위한 역사적 투쟁이 전개되리라고 예상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산업사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집중적인 위기 -도시체제, 보건체제, 복지체제, 수송체제, 환경체제 등 모든 기본체제에서 일어나는 위기- 에 직면하고 있다. 공장굴뚝형 정치가는 여전히 이러한 위기에 대해 한 번에 하나씩 여러 가지 낡은 접근방법으로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대중사회에 맞도록 만들어진 현존 체제 하에서 그러한 위기는 해결할 수 없을 것이다.
또한 현재 등장하고 있는 경제체제는 전혀 새로운 문제와 위기를 제기함으로써 종전의 가설과 대중민주주의 시대의 제휴관계를 분쇄하고 있다.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그의 수석 보좌군 중의 한 사람인 애트워터(Lee Atwater)는 백악관에서 친구들과 오찬을 함께 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주목할 만한 솔직한 발언을 했다.
"앞으로 몇 달 동안 [레이건 혁명]에 관해 여러 가지 말을 듣게 될 겁니다. 신문 제목은 레이건이 도입하려고 계획하는 엄청난 변화를 잔뜩 소개할 겁니다. 그런 보도를 믿지 마세요."
"레이건은 실제로 여러 가지 변화를 이룩하기 원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가 그런 일을 해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카터는 [체제]를 5도쯤 한 쪽 방향으로 옮겨 놓았지요. 이제 우리가 아주 열심히 일하고 또 운이 아주 좋다면, 레이건은 체제를 반대 방향으로 5도쯤 옮길 수 있을지 모릅니다. [레이건 혁명]이란 것의 실상은 그런 것입니다."
언론은 개개 정치가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애트워터의 발언은 가장 인기있고 높은 자리에 오른 지도자라 할지라도 [체제]의 포로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체제는 물론 자본주의나 사회주의가 아니고 관료주의를 말하는 것이다. 관료주의야말로 모든 공장굴뚝 국가에서 가장 지배적인 권력형태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략)
정치지도자들은 관료체제를 뜻대로 부리기 힘들게 되었다고 입버릇처럼 한탄하고 있다. 선거에서 아무리 여러 정당이 서로 경쟁하더라도, 그리고 어느 정당이 가장 많이 득표하는가와 상관없이 하나의 단일 정당이 항상 승리하고 있다는 것이 사태의 진상이다. 그것이 바로 관료사회라고 하는 [보이지 않는 정당(Invisible Party)]이다.
지금까지는 정상적 상황에서 미국 대통령이나 일본 수상이 하는 대부분의 일은,
ㆍ자기가 피상적으로만 이해하는 문제에 관해
ㆍ관료체제의 여러 부서가 합의에 도달하지 못하는 경우에 한하여
ㆍ여러 가지 대안(각국의 관료체제가 사전에 작성해 준 것) 중에서 선택을 내리는 일이었다.
물론 이런 것들은 -관료기구가 처리할 때까지 기다릴 수 없는 긴급 결정사항이라든가 전환기적 결정, 화전의 결정 또는 특별히 비밀을 요하는 결정 등- 은 오직 최고지도자만이 내릴 수 있는 결정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프로그램할 수 없는 결정으로서 직접 지도자의 머리 속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태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때는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경우는 비교적 드물다.
그러나 우리가 혁명적 시기에 접어들어 새로운 부 창출체제가 낡은 체제를 둘러싼 권력구조와 충돌하는 경우에는 이같은 [정상사태]가 무너진다. 신문은 매일처럼 어떤 예상치 못했던 새로운 위기와 그 해결에 관해 보도한다. 세계문제와 국내문제가 모두 안정을 잃는다. 제아무리 능력이 있는 자라도 안주할 수 없을 정도로 사태 추이가 가속화한다.
이같은 상황에서는 가장 우수한 관료체제라도 붕괴되어 심각한 문제들이 위기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예를 들어 미국 내의 [무주택 문제]는 단순한 주택건설 부진의 문제가 아니라 상호연관된 몇 가지 문제(알콜중독, 마약중독, 실업, 정신질환, 부동산가격의 상승)가 얽혀 있는 것이다. 각 문제는 이를 관할하는 관료체제를 달리하며 그 어떤 기관도 혼자서는 문제를 효과적으로 다룰 수 없는데도 그 중 어느 관료체제도 예산, 권한 또는 관할권을 내놓지 않으려 한다. 사람만이 아니라 문제 자체도 무주택인 것이다.
마약문제도 경찰, 보건당국, 학교, 외무부, 금융기관, 수송기관 등 여러 관료체제에 의한 동시적인 통합적 조치를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기관들은 효과적으로 협력하도록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오늘날의 기술적, 사회적인 고속변화는 바로 이같은 [횡적 연결(cross-cutting)]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것들이 망각되면 될수록 더 많은 영역 다툼이 일어나 정부의 자원을 소모하고 행동을 지연시키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치지도자는 정부의 관료로부터 권력을 빼앗을 기회를 얻게 된다. 거꾸로 말하면, 정치지도자는 각종 문제가 위기로 치닫는 것을 보고 극단적인 조치를 취해 일을 해결하기 위한 온갖 종류의 기동대책반, [수뇌회의], [비밀공작반], [비밀팀] 등을 설치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을 때가 많다.
데이터 베이스에서 사용되는 각종 지표와 그 지표에 부여된 상대적 중요성을 둘러싸고 수많은 권력투쟁이 일어나고 있다. (중략) 세기 쉬운 병원의 침상 숫자가 한 나라의 보건행정 수준의 지표로 간주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인구 1,000명당 의사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더 좋은 척도가 아닐까? 그리고 이 두 가지 척도 모두는 특정지역 주민의 실제 건강상태를 제대로 반영하겠는가? 침상통계는 침상수를 기준으로 각 병원에 보상금도 주고 벌칙금도 매기는 정부의 보조사업을 반영할지는 몰라도 실제로 사회에 제공되는 의료 서비스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초전술가들은 WYMIWYG 원리(What You Meausre Is What You Get)를 터득하고 있다.
전문가 위원회, 정부의 각종 전문가 팀, 로비스트 단체 등은 빈번하게 이런 문제와 씨름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심도깊은 질문을 하지 못하거나 숨겨진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참가자도 있지만, 똑똑한 참가자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영리적 이익이나 자기 부처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이 상례이다. 이런 싸움은 고도의 전문적 용어로 진행되지만 사실은 매우 정치적인 싸움일 때가 많다.
이 정보과다는 또한 단순한 정보수집보다 그 해석이 더욱 중요해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데이터(그 질은 다양하다)는 풍부하다. 이해되는 것은 별로 없다. 그러나 해석의 중요성이 커진다는 것은 정신노동 위계체계의 상층부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되면 전문가들 간의 권력관계 자체가 뒤바뀌게 된다. 그것은 또한 정보전술가의 활동영역을 훨씬 더 높은 초수준으로 이동시킨다.
이것이 함축하는 바는 정책결정을 지원하도록 컴퓨터 안에 입력, 체계화되고 장치된 각종 전문가에게서 끌어낸 복잡한 규칙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유사한 기술이 정부기관 전체에 (정치제도 자체를 포함하여) 확산되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지금까지 정치생활에서는 복잡하고 부정확하고 상호관련되고 애매모호한 대량의 사실, 아이디어, 이미지 및 제안들과 아예 권력의 이동을 이으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기만을 기초로 하여 정책결정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같은 도구들이 의미하는 바는 정책결정을 이끌어가는 논리가 더욱 더 [삽입]되어 말하자면 비가시화 된다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명확한 정보를 제공해 주는 시스템 그 자체가 대부분의 일반 사용자에게는 더욱 더 불명료해진다.
실제로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 [범세계적 판매] 이론은 이를 적용한 회사에 파멸을 가져다 주었다. [월 스트리트 저널] 지는 1면 톱기사에서 이 이론을 값비싼 실패작이라고 썼다. 이 신문은 파커펜 회사가 이 공식을 따르려다가 겪은 고통을 상세히 설명했다. [에르노 라즐로(Erno Laszlo)] 상표의 피부 미용제를 피부가 하얀 오스트레일리안인과 가무잡잡한 이탈리안인에게 똑같이 판매하려던 시도도 물론 파탄을 가져왔다.
심지어 맥도널드사조차도 국가별 차이를 수용하여 독일에서는 맥주를,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포도주를 팔도록 되었으며, 심지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한 때 양고기 파이를 판매한 적도 있었다. 또 필리핀에서는 [맥스파게티(McSpaghetti)]라는 것을 판매하기도 했다. 소비자 제품에서 다양성이 요구된다면 문화나 정치 이데올로기에서도 다양성이 필요해지지는 않을까? 범세계적 미디어는 과연 여러 국민들 간의 차이점을 동질화시켜 버릴까?
몇 가지 예외는 있지만 사실 문화도 역시 생산품과 마찬가지로 탈대량화되고 있다. 그리고 미디어의 다양성 자체가 이 과정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정계의 후보자나 아이디어를 판매하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직면하게 되는 것은 획일성이 아니라 고도의 다양성이다. 제품들이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데 거의 예외 없이 실패한다면 정치인이나 정책도 성공할 리 없지 않겠는가?
새로운 범세계적 미디어시스템은 낡은 [제2물결] 미디어처럼 지구를 동질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양화를 심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범세계화는 동질화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작고한 캐나다의 미디어 이론가 맥루언(Marshall McLuhan)이 예측했던 단일 지구촌이 아니라, 우리는 전혀 다른 수많은 지구촌들(그 모두가 새로운 미디어와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각자의 문화적, 민족적, 국민적 또는 정치적 특성을 유지, 고양시키려고 노력하는)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1989년에 동유럽을 휩쓴 혁명의 도미노 물결은 세 가지 요인이 수렴한 결과임이 분명하다. 세 가지 요인이란 사회주의가 약속했던 경제적 부를 가져다 주는 데 장기적으로 실패했다는 점, 소련이 이제는 군사개입 위협으로 공산정권들을 지탱해 주지 않겠다고 발표했다는 것, 그리고 검열관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공산국가에 정보(새로운 통신수단에 의해 전달된 정보)가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중이 기술 이전 시대의 유일한 대중매체인 것은 아니었다. 서방의 중세시대에는 광범한 조직을 갖는 카톨릭 교회가 대중매체와 가장 유사한 존재였고 또한 동일한 메시지를 [정치적 경계선을 넘어] 다수의 주민에게 전달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었다. 이 유일무이한 능력으로 인해 교황청은 유럽의 봉건군주에 대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여러 세기 동안 유럽을 피로 물들인 교회와 국가 간의 줄다리기 권력싸움도 그 원인의 일단이 여기에 있었다.
공장의 대량생산에 토대를 둔 [제2물결]의 부 창출체제는 보자 많은 장거리 통신을 필요로 했으며 이에 따라 우체국, 전신, 전화 등이 생겨났다. 그러나 이 새로운 공장은 또한 동질적인 노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기술에 바탕을 둔 대중매체가 발명되었다. 각기 동일한 메시지를 수백만 명에게 동시에 전달할 능력을 지닌 신문, 잡지,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이 산업사회의 주된 대량화 도구가 되었다.
이에 반해 새로운 [제3물결]의 미디어시스템은 지금 등장하고 있는 대량생산 이후의 경제의 필요를 반영한다. 최근의 [탄력적 생산] 공장과 마찬가지로 이 역시 영상제품(image product)을 주문생산하여 여러가지 다른 영상, 아이디어, 상징물을 표적이 정밀하게 정해진 인구계층, 시장, 연령계층, 전문직업인 사회, 민족 또는 생활양식 집단(life-style grouping)에게 내보낸다.
이처럼 고도로 다양한 메시지와 미디어가 필요한 것은 새로운 부 창출체제가 훨씬 더 이질적인 노동력과 인구를 요구하기 대문이다. 탈대중화가 이제는 새로운 미디어시스템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되었다.
동유럽 전체에 걸쳐 공산정권들이 붕괴된 후 [파이낸셜 타임스] 지는 이렇게 환호했다.
"오웰이 노예화 도구라고 보았던 수단은 해방자임이 입증되었다. 차우셰스쿠조차도 인민의 눈을 가릴 수 없었다."
물론 상술한 바와 같은 종교운동은 각기 달라서 서로 충돌할 때가 많고 또한 과격파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기독교이건 [신시대] 운동이건, 아니면 유태교이건 회교이건 간에 이들 모두는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직 있다. 그것은 대중적 민주주의의 철학적 기반인 세속주의에 대한 적대감이다.
이처럼 오늘날에는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세속주의가 후퇴하고 있다. 민주주의 옹호세력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지금까지 새로운 고도기술 민주국가는 뒤떨어진 대중민주주의적 정치구조도 혁신하지 못했고 그 바탕이 되는 철학적 가설도 쇄신하지 못했다.
종교는 민주주의의 적이 아니다. 국가와 교회가 확연히 분리된 세속적인 다종교 사회에서는 신앙과 비신앙의 다양성 자체가 민주주의에 활기와 역동성을 가져다 준다. 많은 나라에서는 종교운동이 국가의 억압에 맞설 유일한 대항력으로 되어 있다. 정통주의도 그 자체만으로는 위협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비단 이란만이 아니고 모든 나라에서 종교적 광신자들은 이 거대한 종교부활의 흐름 속에서 개인의 정신과 행동의 신권정치적 통제에 전념하는 사람을 양성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도 그들을 부지불식 간에 지원하고 있다.
다양성에 대한 관용을 탈대중화 사회의 첫째가는 계명이다.
만인 구제적인 종교, 전세계에 보급되어 온 인류를 포용하고자 하는 종교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신자의 모든 생활을 전체주의적으로 통제하고자 고집하는 종교조차도 비신자를 통제하고자 시도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와 양립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양립이 불가능한 것은 전체주의와 보편주의를 결합시킨 종교이다. (물론 정치적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종교운동은 이러한 종류의 민주주의와도 대립된다.
소련은 우수한 군사과학자와 세계를 잿더미로 만들 수 있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면서도 초하이테크 재래식 무기나 전략방위체제 개발경쟁에서는 따라잡을 수 없었다. 정보기술에 기초한 재래식 무기가 더욱 정교해진 것은 동유럽에서의 소련 지상군의 우위를 위협했다.
한편 지식집약도가 높은 전략방위구상으로 소련 장거리 미사일의 존재가치는 무효화될 위기에 처해 있다. 전략방위구상 비판론자들은 이 구상이 전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가능성만으로도 소련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전략방위구상이 실제로 소련이 미국을 강타하기 전에 소련의 모든 핵미사일을 봉쇄할 수 있다면 소련 미사일은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것은 또한 미국이 보복을 겁낼 필요없이 선제공격으로 핵공격을 가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보다 합리적인 가정이지만 설사 전략방위구상이 단편적인 효율성만 발휘하여 소련측 탄두의 일부만 봉쇄한다 하더라도, 소련 전쟁입안자는 미국 미사일 중 어느 정도가 남게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 어느 경우이든 전략방위구상은 판돈을 올림으로써 소련측의 핵무기 사용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들고 소련측 자신에게 훨씬 더 위험부담을 낳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냉혹한 현실 위에 자체의 경제적 쇠테에도 직면하게 된 소련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는 동유럽 전선의 돌출지역을 군사적으로 보호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처럼 경제적, 군사적인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소련은 제국주의적 공약을 축소할 수 밖에 없었다.
빠른 경제에서는 선진기술이 생산을 촉진시킨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개략적으로 말한 것이다. 그 경제의 속도는 거래의 속도, 결정(특히 투자에 관한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 시간, 연구소 내에서 새 아이디어가 만들어지는 속도, 그것이 시장에 출하되는 속도, 자본흐름의 속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데이터, 정보 및 지식이 경제체제를 통과하는 속도에 의해 결정된다. 빠른 경제는 느린 경제보다 빠른 속도로 부를 (그리고 권력을) 창출한다.
이에 반해 농업사회에서는 경제적 과정들이 얼어붙은 속도로 움직인다. 전통, 의식 그리고 무지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선택 가능성을 제한한다. 통신은 원시적이고 교통은 제한적이다. 투자선택의 매개자인 시장제도가 등장하기 전에는 전통이 기술분야의 의사결정을 지배했다. 경제학자 라보이에(Don Lavoie)의 말대로 전통은 [느린 생물학적, 문화적 진화과정을 통해 사용 가능하다고 입증된 생산기술을 보존하기 위한 규칙이나 금기]에 의존했다.
세계의 주된 부 창출체제의 회전속도가 빨라지면, 판매하고자 하는 나라는 구매하고자 하는 나라와 같은 속도로 경제를 운영해야 한다. 이것은 느린 경제가 중추신경 반응을 빠르게 하지 않으면 계약과 투자를 빼앗겨 경쟁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제학자들은 통상적으로 군사전략적인 부동산을 판매 가능한 자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수많은 저개발국은 지금까지 바로 이 자원을 판매해 왔다.
군사적, 정치적 열강이 되고자 하는 나라들은 이 자원을 사들일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 쿠바 등 여러 저개발국은 지금까지 자국의 위치 또는 시설은 소련, 미국 등에 군사적, 정치적 또는 정보활동의 용도로 판매하거나 임대해 주고 있다. 쿠바의 경우는 소련에 미국 해안에서 90마일 떨어진 곳에 전략적 기지를 마련해 줌으로써 중앙아메리카 전역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해준 대가로 소련으로부터 매년 50억 달러를 지원받고 있다.
냉전은 거의 반세기 동안에 가난한 나라(전략적 위치를 차지하는 경우)에게 무엇인가 비싼 값으로 팔 수 있는 것을 제공해 주었다. 이집트와 같은 몇몇 나라는 자국에 협력한 초강대국에 팔았다가 나중에 또 다른 초강대국에 팔았다.
미, 소간의 긴장 해소는 이 세계에 가장 좋은 뉴스이겠지만, 지금까지 자국의 전략적 위치를 이용할 권리를 성공적으로 판매해 온 필리핀, 베트남, 쿠바 및 산디니스타 정권의 니카라과에는 아주 나쁜 소식이었다. 이제부터는 전략적 위치의 양대 구매국이 전처럼 서로 값을 올릴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병참 역량이 증대하고, 항공기와 미사일의 항속거리가 증가하고, 잠수함이 늘어나고, 공수작전이 신속해짐에 따라 해외 군사기지, 수리 설비, 군수품 사전배치 등의 필요성이 줄고 있다.
따라서 저개발국은 이제 그같은 전략적 위치에 대한 판매자의 시장은 끝났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다른 형태의 국제적 지원이 강구되지 않으면 지금까지 몇몇 저개발국에 흘러들어 갔던 수십억 달러의 [외국원조]와 [군사원조]는 사라지게 될 판이다.
더구나 EC 과학기술위원회의 콜롬보(Umberto Colombo) 위원장은 [오늘날 선진부유국에서는 1인당 소득이 한 단위 증가할 때마다 원자재 및 에너지 소비량의 증가가 체감되고 있다]고 말한다. 콜롬보는 IMF 통계를 인용하여 [일본이 1984년에 사용한 원자재는 1973년에 같은 양의 산업생산을 위해 사용한 원자재의 60%에 불과했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식이 발달하면 적은 것을 가지고 더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권력은 부피가 큰 원자재를 생산하는 나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새로운 부 창출체제를 몇 가지 [필수적인] 원자재에 묶어두기에는 너무나 변화무쌍하고 움직임이 빠르다. 그러므로 앞으로 권력은 부피가 큰 원자재 생산국으로부터 일시적으로 중요한 [소량]원료를 장악하는 나라로, 그리고 다시 새로운 자원을 만들어내는데 필요한 지식을 장악하는 나라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마르크스 자신은 혁명적 순간에 관해 고전적인 정의를 내린 바 있다. 그는 이 순간이 [사회적 생산관계](즉 소유권과 지배권의 성격)가 [생산수단](대체로 말하자면 기술)의 발전을 가로막을 때 도래한다고 말했다.
이 공식은 사회주의 세계의 위기를 완벽하게 설명해 주었다. 마치 봉건시대의 [사회적 관계]가 산업발전을 저해했던 것처럼 지금 사회주의의 [사회적 관계]는 사회주의 국가들로 하여금 컴퓨터, 통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공개적 정보에 기초한 새로운 부 창출체제를 활용하는 것을 불가능하도록 만들고 있다. 사실 20세기의 거대한 국가사회주의 실험이 실패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지식에 관한 구태의연한 생각에 있었다.
기업은 국경선을 가로지르며 생산과 분배를 통합하고, 외국상사를 매입하고, 전세계에서 두뇌력을 끌어들이게 되면서 필연적으로 여러 나라에서 새로운 자본원천을 필요로 하게 된다. 그리고 이 자본원천은 빨리 찾아내야 한다. 이 때문에 지금 투자자본이 다소라도 자유롭게 국경선을 넘나들도록 하기 위해 핲을 다투어 자본시장을 [자유화]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그 결과로 자본이 장벽을 벗어나 바다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에 따라 권력이 중앙은행이나 개별 국가로부터 떨어져 나감으로써 전세계적으로 주권을 침식하고 금융 영세화의 새로운 위험을 조성하고 있다.
1987년 10월의 월 스트리트 폭락사태 직후에 필자는 [뉴욕타임즈]지에 이렇게 쓴 바 있다. "최소한의 규제를 받는 완전 개방된 단일 금융체제를 만든다는 것은 밀폐 칸막이가 없는 초대형 유조선을 만드는 것과 같다. 커다란 시스템은 적절한 칸막이나 객실이 있어야만 일부분이 파괴되어도 살아남을 수 있다. 그런 것이 없으면 선체에 단 하나의 구멍만 뚫려도 유조선이 침몰될 것이다."
그 후로는 미국 연방준비위원회 의장 그린스팬(Alan Greenspan)도 다국적 증권회사를 설립하여 여러 나라에서 매매, 인수, 투자 사업을 벌이도록 하면 대규모 파탄의 위험이 증대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린스팬은 [이런 회사들 중 한두 회사가 적자를 내도] 그결과는 여러 나라로 [소동을 전염]시킬 것이라고 강조했다.
금융이 국제화되면 각국은 권력의 핵심적인 요소 중 한 가지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될 위험에 빠지게 된다.
미국, 일본 또는 유럽이 앞으로 세계의 권력투쟁에서 얼마나 잘 해나갈지를 판단하려면 이 세 가지 권력원천 모두를 살펴보되, 특히 세 번째 원천인 지식기반을 중점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으로는 이 세 번째 원천이 더욱 더 다른 두 가지의 중요성을 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지식기반에는 과학, 기술, 교육 등 재래적인 항목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포함된다. 여기에는 국가의 전략개념, 해외 정보활동 역량, 언어, 다른 문화에 대한 일반적 지식, 국제적인 문화적ㆍ이념적 영향력, 통신체제의 다양성과 이를 통해 전달되는 광범위한 새로운 아이디어ㆍ정보 및 영상들이 포함된다. 이 모든 것이 한 국가의 권력을 키우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면서 국가가 어떤 분쟁이나 위기에 처해 전개할 수 있는 권력의 질을 결정하게 된다.
[권력의 균형]이 아닌 [균형있는 권력]을 살펴볼 때 우리는 냉전기간을 통해 미국의 권력이 극히 광범위한 기반을 갖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미국은 막강한 군사력만이 아니라 대단한 경제적 영향력을 보유했다. 또한 뛰어난 고학기술에서 세계의 대부분이 모방하기를 원했던 대중문화에 이르기까지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권력-지식(power-knowledge)의 공급원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소련의 권력은 과거나 지금이나 완전히 균형을 잃고 있다. 소련이 초강국 위치에 오른 것은 순전히 그 군사력 덕분이었다. 국내적으론 휘청거리는 소련 경제는 세계체제에서 별로 중요시되지 않았다. 몇몇 국방관련 부문의 R&D는 뛰어났지만, 일반적인 기술적 노하우는 편집증적인 비밀주의에 짓눌려 낙후해 있었다. 소련의 전기통신은 형편없었다. 교육제도는 평범했고, 중아의 통제를 받는 미디어는 엄격한 검열로 인해 낙후되어 있었다.
장기간의 냉전 속에서 지구력 경쟁에 이긴 것은 절름발이 소련이 아니라 권력 균형을 이룬 미국이었다.
일본의 고위층에서는 몇 가지 핵심적인 국내적 목표에 관해 합의가 이루어져 있다. 이 합의에는 국내경제의 학충과 수출 필요성의 감축, 여가 증대를 통한 생활의 질적 향상, 심하게 오염된 환경의 개선 등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의 엘리트 계층은 대외 경제정책에 관해서는 심하게 분열되어 있으며, 일본이 미래에 어떠한 세계적 역할을 맡아야 할 지에 관해서도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다. 한 가지 전략적 가정은 세계가 여러 지역으로 분할될 것이므로 일본은 동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투자와 대외원조를 이 지역에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역경찰로서의 역할에 은밀히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정책은 미국 및 유럽의 보호주의에 대한 일본의 취약점을 줄여준다.
두 번째 접근방법으로서 일본은 오히려 어느 지역이건 가리지 않고 모든 개발도상국에 관심을 집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접근방법 중에는 일본이 세계경제에 접속하고자 하는 나라들이 필요로 하는 전자적 하부구조를 창설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제안하는 것도 있다.
아마도 현재 가장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세 번째 전략은 일본이 어떤 특정한 지역에 얽매이지 않는 국제적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들은 [국제적 사명]을 주장하는 것은 세계지배에 관한 어떤 메시아적인 환상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일본 경제를 어떤 단일 지역이나 국가군에 묶어두기에는 너무나 크고 다양하며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의 경우는 세계의 다른 경쟁국들의 경우보다 권력의 삼각대 중 군사적 다리가 훨씬 더 중요하다. 유럽과 일본의 군대는 아직은 일차적으로 지역군대이기 때문에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작전할 수 있는 능력이 제한되어ㅣ 있다. 이에 반해 미국과 소련의 군대는 최근의 감축에도 불구하고 작전활동 범위가 전세계에 뻗쳐 있다.
그러니 소련이 국내적인 난관에 봉착해 있고 또 붉은 군대가 분리주의 위협, 민족문제, 그리고 이란에서 중국에까지 이르는 불안정한 국경선을 다루어야 하는 상황인 데 반해, 미군이 이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자원은 원거리 투입을 위한 것이다. 미군을 다른 모든 군대와 차별짓는 것은 바로 이 같은 국제적 투입 능력이다.
UN은 1국 1투표권 원칙을 버리고 초국가적 기업이나 종교단체 등을 위해 추가적인 표결자격을 창설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하면 국제적인 지원 기반을 크게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만일 UN을 장악, 운영하고 있는 국민국가들이 가입범위의 확대를 거부할 경우에는 범세계적 기업체들의 세력이 늘어남에 따라 이에 대항하는 기구가 등장하게 될지도 모른다.
동일한 인간이 가정에서는 권력이 강하고 직장에서는 권력이 약하다는 등의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주로 징벌을 위해 사용되는 폭력이 가장 비가변적인 권력원천이다. 상, 벌 모두를 위해 사용될 수 있고 또한 다른 여러 가지 자원으로 전환될 수 있는 부는 가장 융통성 있는 권력수단이다. 그러나 지식은 가장 가변적이고 또한 기초적이다. 왜냐하면 지식은 폭력이나 부를 필요로 하는 도전을 회피할 수 있도록 해주고, 또한 다른 사람을 자기 이익이라고 인식되는 바람직한 방법으로 행동하도록 설득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식은 최고급의 권력을 낳는다.
어떤 특정한 순간에 보다 큰 권력체제를 구성하는 여러 하위체제들 중 일부는 상대적 평형상태에 놓이는 반면에 다른 일부는 평형과 거리가 먼 상태에 있게 된다. 평형상태가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우연이 중요하다. 체제가 불안정할수록 우연의 중요성이 커진다.
모든 사회체제와 하위체제들 간에 동시적을 완전하 균형이 이루어지거나 권력이 모든 집단 간에 평등하게 배분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억압적인 정권을 타도하기 위해 급진적인 행동이 필요한 경우가 있겠지만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변화 그 자체의 작용이다.
완전한 평등은 변화의 정지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불가능할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다. 수백만 인구가 굶주리는 세상에서 변화를 정지시키겠다는 것은 공연한 생각일 뿐 아니라 부도덕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의 불평등의 존재는 그것 자체가 부도덕한 것은 아니다. 부도덕한 것은 권력획득 수단의 잘못된 배분을 동결시키는 체제이다. 그 불평등한 배분이 인종, 성별 또는 그밖의 선천적인 특성들에 바탕을 둔 것일 때는 이중으로 부도덕하다.
권력수단의 과잉집중은 위험하다. (예: 스탈린, 히틀러 등 그밖에도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의 많은 예가 있다.)
권력수단의 과소집중도 마찬가지로 위험하다. 레바논에 강력한 정부가 없기 때문에 이 가난한 나라는 무정부적 폭력사태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