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 채사장 [열한 계단]
당신이 읽고 있는 이 책은 변증법적 원리에 따라 구성되었다. 불편한 책을 읽고 불편한 지식과 대면한다고 했을 때, 그 불편한 책과 지식이란 따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다. 불편함은 내 마음속에만 있다. 내가 낯선 지식과 대면할 때 느끼는 불편함의 실체는 안정된 정신으로서의 '정'이 모순된 '반'을 대면할 때의 존재론적 위기인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런 사람들(자기만의 신념으로 가득 찬 사람들)은 결벽증적인 강박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세상을 선과 악, 정의와 불의, 청결과 불결로 나누고 자기가 선, 정의, 청결의 편에 섰다고 단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모든 것을 악, 불의, 불결로 타자화한 후 이에 맞서는 것에서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
이러한 우월감과 선민의식이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들이 사실은 나약하기 때문이다. 배움의 부족으로 세상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수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현실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여 타협과 조율에 익숙하지 않을수록 세상과 벽을 쌓고 작은 세계 안에서 완전함을 향유하려 한다.
젊은 나의 생각은 옳았다. 그때 이후로 단 한 번도 완전함 혹은 충만함의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완전함과 충만함이란 아이러니하게도 미숙함의 다른 표현이라는 것을 말이다. 현실에서 멀어질수록, 세계의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할수록 세상은 단순하고 명쾌하게 보인다. 문제는 세상을 그렇게 단순하게 파악할 때에만 우리가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어른으로 성숙해간다는 것은 세계의 복잡성을 초연하게 받아들임을 의미한다. 세계의 복잡성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우리가 완전함과 충만함의 허구성을 이해했음을 의미한다. 완전함과 충만함을 내려놓은 사람에게 행복은 없다.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지금의 계단에 머무를지, 아니면 한 걸음 더 오를지. 니체는 여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충고한다.
"만약 네가 영혼의 평화와 행복을 원한다면, 믿어라. 다만 네가 진리의 사도가 되려 한다면, 질문하라."
대학 수업을 포기할 뻔했던 나를 구한 건, 우연히 청강한 철학 수업이었다. 철학 수업은 놀랍고 재미있었다. 그것은 세계가 해체 되고 재구성되는 존재론적인 재미였다. 수업을 듣고 강의실을 나설 때마다 기존에 내가 알던 세계는 철저히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를 토대로 재구성되었다.
선택한 모든 책을 읽은 것은 아니다. 잘 읽히지 않는 책이면 고민하지 않고 옆으로 제쳐두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잘 읽히지 않는 책이 있다. 그럼 굳이 읽으려 애쓸 필요는 없다. 잘 읽히지 않는다는 건 내가 그 책을 읽을 준비가 덜 되었거나, 반대로 그 책이 나를 설득할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당신이 노력하지 않아도 당신의 흥미를 끌고 당신을 깨우치기 위해 기다리고 있는 책들이 무수히 많다. 읽히지 않는 책을 가볍게 지나칮 못하고 집착할 필요는 없다.
지금 돌이켜보면 세계의 이면에 대한 이해는 내가 사유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사유의 시작은 분절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해서 질문을 하고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단일했던 세계를 둘로 잘라야 한다. 세계를 표면과 이면으로 자르고, 현상과 본질로 자르고, 형이하학과 형이상학으로 자르고, 대지와 하늘로 잘라내야 한다. 이러한 이분법적 구분은 사유의 시작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 된다.
우리는 한 가지에만 집중한 사람들의 한계를 쉽게 본다. 책만 본 사람들과,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 우선 책만 본 사람들의 한계는 타인에게 엄격하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쉽다. 왜냐하면 책의 울타리 속에서 안전하게 보호받으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실제 세상 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까닭에 현실의 폭력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다른 사람들이 나약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들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막상 현실에 발을 디디면 이들은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당황한다. 그리고 스스로의 나약함을 부정하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모든 일에서 불평불만거리를 찾아내는 사람, 타인의 잘못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사람, 선과 도덕과 정의를 습관적으로 강조하는 사람.
다음으로 현실에 적응하기만 한 사람들의 한계는 자신에게 너무도 너그럽다는 것이다. 이들은 세상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으며, 계획과 일정에 따라 정확하게 진행되는 일 따위란 애초에 존재하지 않음을 정확히 알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문제에 봉착했을 때, 옳고 그름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타협과 조율을 통해서만 상황에 따라 문제를 봉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이 된다. 선과 도덕에 대해 하찮게 여기는 사람, 모든 것을 손익으로 판단하는 사람, 심연의 깊은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
하지만 오해해서는 안 된다. 이 책(공산당 선언)을 읽는다고 한 사람이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가끔 주위에서 어리석은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들의 특징은 한 권의 책이 갖는 영향력을 과대평가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특정 서적이 사회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어떤 책들을 읽어서는 안 될 책으로 상정하고, 자기 주변의 사람들이 이를 접할까 봐 노심초사한다. 이들은 진보적인 책을 진보적이라고 욕하고, 보수적인 책은 보수적이라고 욕한다. 성경은 종교적이라고 욕하고, 과학은 유물론이라고 욕하고, 또 어려운 책은 어렵다고 욕하고, 쉬운 책은 쉽다고 욕한다. 이들은 평생 한 권의 책만 읽을 기세다. 이들은 대중이 자신보다 단순해서 쉽게 휩쓸릴 것이라 믿고 싶어 하는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는 책이 아니라, 이런 편협한 사고를 가진 단순한 사람들이다.
소사 : 혹시 놓고 온 것이 있어서 불러 세운 것은 아닐까요?
환자 : 네?
소사 : 아니면, 아무것도 챙겨가지 않아서 불러 세웠을 수도 있지요. 지금 무엇을 가져가고 있나요? 당신 혼자 달려가고 있는 건 아니에요? 당신이 지키려는 것들은 뒤로 버려진 채 당신의 뒷모습만을 바라보고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들, 당신의 이상. 모두 뒤에 있는 걸요.
소사 : 운 좋게도 멈춰 설 기회를 얻었으니, 뒤돌아 가서 놓고 온 것들을 챙기세요. 그리고 다시 천천히 걸어가세요. 또다시 허둥지둥 달려오면 안 돼요. 길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들을 돌보면서 오세요. 그렇게 천천히 인생의 마지막에 닿았을 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삶이 당신에게 정말 주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에요.
파드마 삼바바 : 너는 핑계를 대고 있다. 삶이 허망하다고 느끼는 건, 사후 세계의 유무가 결정해준 것이 아니라 너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다. 만약 네가 영원한 존재라면, 죽지 않고 다치지 않고 그래서 수십억 년의 시간을 지속해온 존재라면 그때는 허망하지 않을 것 같으냐? 너는 그때도 허망하다고 말할 거다. 이 세상이 허망한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건 너의 마음이다.
세상의 모든 텍스트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 지식에 대해 앞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은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정리하지 못했던 것들을 언어화해줄 뿐입니다. 나의 체험을 벗어난 것들은 나에게 체험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