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 에드워드 카 [역사란 무엇인가]
리턴 스트레이치(1880-1932. 영국의 전기작가)가 장난스럽게 말했듯이, '무지는 역사가의 첫 번째 필수품이다. 단순화시키고 명료하게 만드는, 또한 선택하게도 하고 빼버리기도 하는 그런 무지 말이다.'
그러나 나는 역사가라는 이름에 값하는 모든 역사가에게는 경제학자가 '투입(input)'과 '산출(output)'이라고 부르는 그 두 과정이 동시에 진행되며, 실제로 그 두 과정은 단일한 과정의 부분들이라고 확신한다. 만일 그것들을 분리시키거나 어느 하나를 다른 하나보다 우월한 것으로 삼으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두 가지 이단론들 중의 어느 하나에 빠지게 된다. 여러분은 의미나 중요성을 무시하는 가위와 풀의 역사를 쓰거나 아니면 선전문이나 역사소설을 쓰게 될 것이며, 역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부류의 글쓰기를 치장하려고 과거의 사실을 이용하게 될 것이다.
역사가의 곤경은 인간의 본성을 반영한다. 인간은 아마도 아주 어렸을 때나 아주 늙었을 때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환경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으며 무조건 그것에 예속되지도 않는다. 다른 한편, 인간은 결코 자신의 환경에서 완전히 독립적일 수 없고 그것의 무조건적인 지배자일 수도 없다. 인간과 그의 환경의 관계는 역사가와 그의 연구주제의 관계와 같다. 역사가는 그의 사실들의 비천한 노예도 아니고 난폭한 지배자도 아니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관계는 평등한 관계, 주고받는 관계이다. 연구 중에 있는 역사가가 잠시 일을 멈추고서 자신이 생각하고 글을 쓰는 동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다 알 수 있듯이, 역사가는 자신의 해석에 맞추어 사실을 만들고 또한 자신의 사실에 맞추어 해석을 만드는 끊임없이 과정에 종사하고 있는 것이다. 둘 중 어느 한쪽을 우위에 두는 것을 불가능하다.
역사가는 사실의 잠정적인 선택에서, 그리고 동시에 그 선택을 이끌어준 잠정적인 해석에서 출발한다. 그가 연구하는 동안, 사실의 해석 그리고 사실의 선택 및 정돈, 이 두가지는 이러저러한 상호작용을 통해서 미묘하고도 얼마간 무의식적일 수 있는 변화들을 겪는다. 그리고 이 상호작용에는 현재와 과거 사이의 상호관계도 포함되는데, 왜냐하면 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 속하기 때문이다.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에게 필수적이다. 자신의 사실을 가지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쓸모없는 존재이다. 자신의 역사가를 가지지 못한 사실은 죽은 것이며 무의미하다. 따라서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나의 첫 번째 대답은, 역사란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끊임없는 상호작용 과정,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d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위대한 역사는 현재의 문제에 대한 통찰이 과거에 대한 역사가의 시야를 밝혀주는 바로 그때 쓰인다.
여기에서의 나의 목적은 다만 두 가지의 중요한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다 : 첫째, 여러분은 역사가 자신이 연구에 들어가면서 가지게 되는 입장을 파악하지 않고서는 그의 연구를 충분히 이해하거나 평가할 수 없다 ; 둘째, 그 입장 자체는 어떤 사회적, 역사적 배경에 뿌리박고 있다. 언젠가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교육자 자신이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요즈음 말로 하자면, 세뇌하는 사람의 머리 자체가 세뇌되어 있는 것이다. 역사가는 역사책을 쓰기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역사의 산물이다.
흐름 속에 있는 것은 단지 사건만이 아니다. 역사가 자신도 그 속에 있다. 여러분이 어떤 역사책을 집어 들 때, 책 표지에 있는 저자의 이름을 살펴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 출간일자나 집필일자도 살펴보아야 한다. 똑같은 강물에 발을 두 번 담글 수는 없다는 한 철학자의 말이 옳다면, 한 사람의 역사가가 두 가지 책을 쓸 수 없다는 말도 어쩌면 마찬가지로, 그리고 똑같은 이유에서, 진리일 것이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hidden hand)이라든가 헤겔의 '이성의 간계(cunning of reason)'가 말하고 있는 것은, 비록 개인 스스로는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을 성취하고 있다고 믿겠지만 실은 그 보이지 않는 손이나 이성을 위해서 일하게 되고 그것들의 목적에 봉사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에 관해서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으므로 인용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 서문에서 '인간은 자신의 생산수단을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가운데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정한 필연적인 관계 속에 들어간다'고 말했다. 톨스토이는 <전쟁과 평화(War and Peace)>에서 애덤 스미스를 본떠서 '인간은 의식적으로는 자신을 위해서 살고 있지만, 역사에 남을 인류의 보편적인 목적을 성취하는 일에서 무의식적인 도구가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 이쯤에서 지금까지 이미 충분히 길게 소개한 명언들을 버터필드 교수의 다음과 같은 말로 끝마치기로 하자 : '역사적 사건들의 성격에는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역사의 경로를 틀어버리는 무엇인가가 존재한다.'
나는 지금까지도 다음과 같은 헤겔의 고전적인 정의에 더 고칠 만한 것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 그 시대 위인이란 자기 시대의 의지를 표현할 수 있고, 그 의지가 무엇인지를 그 시대에 전달할 수 있고, 또한 그것을 완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가 행하는 것은 그의 시대의 정수이자 본질이다 ; 그는 자신의 시대를 실현한다.
역사에서 배운다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방적인 과정이 아니다.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배운다는 것은 또한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배운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의 기능은 과거와 현재의 상호관계를 통해서 그 두 가지 모두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를 진전시키는 데에 있다.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역사가 거의 반복되지 않는 하나의 이유는 두 번째로 공연할 때의 등장인물들은 첫 번째 공연의 결말을 알고 있고, 따라서 그에 관한 지식이 그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볼셰비키는 프랑스 혁명이 결국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에게서 끝장났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래서 자신들의 혁명도 똑같은 방식으로 끝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의 지도자들 중에서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을 가장 닮은 트로츠키를 불신했고, 나폴레옹이라는 인물을 가장 닮지 않은 스탈린을 신뢰했던 것이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마이네케는 지난 40년 동안의 독일 국가의 재앙은 독일 황제의 허영, 힌덴부르크(1847-1934. 독일의 군인)가 바이마르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된 것, 히틀러의 편집광적인 성격 등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했다 - 이는 조국의 불행에 짓눌린 한 위대한 역사가의 정신적 파산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역사에서의 운이나 우연의 역할을 강조하는 이론들이 역사적 사건들의 봉우리가 아니라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집단이나 국민에게서 널리 퍼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험성적이란 모두 운수 나름이라는 생각은 열등반에 배치될 사람들 사이에서 언제나 유행하게 마련이다.
30년 전 포위크(1879-1963. 영국의 역사가) 교수가 옥스퍼드 대학교의 근대사 흠정강좌 담당교수로 취임하면서 행한 강연 중의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보도록 하자 :
역사를 해석하려는 열망은 너무도 뿌리 깊은 것이어서, 만일 우리가 과거에 대해서 무엇인가 건설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 신비주의나 냉소주의에 빠지게 된다.
나는 '신비주의(mysticism)'란 역사의 의미를 역사 밖의 어딘가에서, 즉 신학이나 내세론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견해를 뜻하리라고 생각한다. '냉소주의(cynicism)'란 역사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혹은 유효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쓸모없기도 한 수많은 의미들이 있다는, 혹은 우리가 마음대로 골라잡아 부여한 의미만이 있다는 견해를 뜻하는데, 그 사례들에 관해서는 내가 몇 차례 인용한 적이 있다.
첫째로, 나는 진보(progress)와 진화(evolution)에 관한 혼란스런 생각부터 제거하고 싶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명백히 모순되는 두 개의 견해들을 취했다. 그들은 인간의 위치를 자연계 안에서 해명하려고 애썼다 : 역사의 법칙이라는 것도 자연의 법칙과 동일시되었다. 다른 한편, 그들은 진보를 믿었다. 그러나 자연을 진보하는 것으로, 즉 끊임없이 어떤 목적을 향해 전진하는 것으로 받아들인 데에는 어떤 근거가 있었던가? 헤겔은 역사는 진보하는 것이고 자연은 진보하지 않는 것이라고 뚜렷이 구분하는 바람에 어려움에 봉착했다. 다윈의 혁명은 진화와 진보를 동일시함으로써 모든 혼란을 제거하는 것처럼 보였다 : 자연도 역사와 마찬가지로 결국 진보하는 것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진화의 원천인 생물학적인 유전(biological inheritance)을 역사에서의 진보의 원천인 사회적인 획득(social acquisition)과 혼동함으로써 훨씬 더 심각한 오해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중략) 생물학자들이 거부하고 있는 획득형질(acquired characteristics)의 전승이야말로 사회적 진보의 바로 그 기초인 것이다. 역사란 획득된 기술이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의 사실들은 순수하게 객관적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역사가가 부여하는 의미에서만 역사의 사실이 되기 때문이다. 역사에서의 객관성은 사실의 객관성일 수 없으며, 오로지 관계의 객관성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역사의 외부에 역사로부터 독립된 어떤 절대적인 가치 기준을 세워놓고서 역사적 사건을 평가하려는 시도를 비역사적인 것이라고 거부했는데, 그 이유들을 다시 끄집어낼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역사가를 객관적이라고 칭찬하는 것은, 혹은 이 역사가는 저 역사가보다 객관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단순히 그가 그의 사실을 올바르게 입수한다는 뜻이라기보다는 그가 올바른 사실을 선택한다는, 달리 말하자면 그가 중요성에 관한 올바른 기준을 적용한다는 뜻임이 분명하다. 우리가 어떤 역사가를 객관적이라고 말할 때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그 역사가에게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 자신의 위치로 인해서 제한되어 있는 시야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능력은 자신이 그 위치에 어느 정도까지 묶여 있는가를 인식할 수 있는, 다시 말하자면 완전한 객관성이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그의 능력에 얼마간 좌우된다.) 둘째로, 그 역사가에게는 자신의 시야를 미래에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런 만큼 그는 자신이 처해 있는 바로 그 위치에 전적으로 속박된 사고방식을 가진 역사들보다 과거를 더 심원하고 더 지속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략) 과거를 다루는 역사가는 미래의 이해에 다가설 때에만 객관성에 접근할 수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점은 1888년대의 역사가보다는 1920년대의 역사가가, 1920년대의 역사가보다는 오늘날의 역사가가 객관적인 판단에 더 근접해 있다는 것이다. 아마 2000년의 역사가는 훨씬 더 근접해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역사에서의 객관성이란 바로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어떤 고정불변의 판단기준에 의존하거나 의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미래에 남겨진 그리고 역사과정이 전진함에 따라서 발전하게 되는 그런 기준에 의존하거나 의존할 수 있는 것이라는 나의 명제를 설명해준다. 역사는 과거와 미래 사이에 일관된 연관성을 확립할 때에야만 의미와 객관성을 가지게 된다.
역사가는 사실과 해석, 사실과 가치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사람이다. 그는 그것들을 분리시킬 수 없다. 여러분은 정적인 세계에서라면 어쩔 수 없이 사실과 가치의 구별을 선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정적인 세계에서는 무의미하다. 역사는 그 본질상 변화이며, 운동이며, 혹은 진보이다.
애덤 스미스와 헤겔 모두의 제자인 마르크스는 합리적인 자연법칙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개념에서 출발했다. 헤겔과 마찬가지로 그도, 법칙의 지배를 받지만 인간의 혁명적인 창의력에 조응하여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서 발전하는 세계라는 개념으로 이행했는데, 그러나 이번의 그의 이행은 실천적이고도 구체적인 형태를 띠었다. 마르크스의 견해를 최종적으로 종합해보면, 역사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그리고 하나의 일관된 합리적인 전체를 구성하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것을 의미했다 : 객관적이고 주로 경제적인 법칙에 일치하는 사건의 운동 ; 그것에 조응하면서 변증법적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사유의 발견 ; 그리고 그것에 조응하면서 혁명의 이론과 실처을 일치시키고 결합시키는 계급투쟁의 형태. 마르크스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객관적인 법칙과 그 법칙을 실천으로 전환시키는 의식적 행동의 종합, 즉 때때로 결정론이라고 불리는 것과 주의주의(voluntarism)라고 불리는 것의 종합이다. 마르크스는 지금까지 인간이 의식하지 못한 채 복종해온 법칙들에 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 그는 자본주의 경제와 자본주의 사회에 얽매인 사람들의 이른바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이라는 것을 여러 차례 상기시켰다 : '생산과 유통의 담당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생산의 법칙에 관한 개념은 실제의 법칙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저술 속에서는 의식적인 혁명적 행동을 요구하고 있는 눈에 띄는 사례들이 발견된다. 포이어바흐에 관한 그 유명한 태제는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르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공산당 선언]은 '프롤레타리아트는 그 정치적 지배권을 이용하여 부르주아로부터 모든 자본을 차례로 빼앗을 것이며,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의 수중에 집중시킬 것이다'라고 공언했다. (중략) 프롤레타리아트야말로 자본주의 사회의 허위의식을 타파하고 무계급사회의 진정한 의식을 가져다주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1848년의 혁명들의 실패는 마르크스가 활동하기 시작했을 무렵만 해도 곧 이루어질 것 같았던 발전에 대해서 심각하고도 극적인 좌절을 안겨주었다. 번영과 안정이 여전히 우세한 분위기 속에서 19세기의 후반이 지나갔다. 현대사 시대로의 이행은 20세기로 넘어와서야 비로소 완결되었는데, 이 시대에 이성의 일차적인 기능은 이제 사회 속의 인간의 행위를 지배하는 객관적인 법칙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적인 해위를 통해서 사회와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을 개조하는 것이 되었다. 마르크스에게서 '계급(class)'은, 비록 정확하게 규정된 적은 없지만, 대체로 경제적인 분석에 의해서 확정되는 객관적인 개념으로 남아 있다. 레닌에게서는 강조점이 '계급'에서 '당'으로 이동하는데, '당'은 계급의 전위로 구성되고 그 전위에서 계급의식이라는 필수적인 요소를 주입한다. 마르크스에게 '이데올로기'는 부정적인 용어(자본주의적 사회질서에 대한 허위의식의 산물)이다. 레닌에게 '이데올로기'는 중립적이고 긍정적인 것(계급의식적인 엘리트 지도자들이 정차 계급의식적이 될 수 있는 노동자 대중에게 불어넣는 신념)이 된다. 계급의식의 형성은 더 이상 자동적인 과정이 아니라, 실행되어야만 하는 과업이 된다.
프로이트가 한 일은 의식과 합리적인 탐구에 대해서 인간 행위의 무의식적인 근원을 폭로함으로써 우리의 지식과 이해의 범위를 확장시킨 것이었다. 이것은 이성의 영역의 확장이었고, 인간 자신을 따라서 인간의 환경을 이해하고 지배할 수 있는 인간 능력의 증대였다 ; 그러므로 그것은 혁명적이고 진보적인 업적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에서 프로이트는 마르크스의 작업을 보완하고 있는 것이지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비록 프로이트 자신은 고정불변의 인간성이라는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인간 행위의 근원을 보다 깊이 이해함으로써 합리적인 과정을 통해서 인간의 행위를 의식적으로 교정할 수 있는 도구를 제공했다는 의미에서 그는 현대 세계에 속하는 인물이다.
내가 20세기 혁명에서의 이성의 확대라고 부른 것은 역사가에게 특별히 중요하다 ; 왜냐하면 이성의 확대는 본질적으로 지금까지 역사의 외부에 있던 집단과 계급, 인민과 대륙이 엯 ㅏ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중략) 기독교 교회는 '중세의 유일한 이성적 기관'이었다는 말들을 하는데, 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 과장되어 있기는 하더라도 정확한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유일한 이성적 기관이었기 때문에 유일한 역사 기관이었다 ; 교회만이 역사가가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 발전과정을 밟기 쉬웠다. 세속사회는 교회에 의해서 형성되고 조직되었기 때문에 자체의 합리적인 삶을 가지지 못했다. 일반 민중은 선사시대 사람들처럼 역사가 아닌 자연에 속했다. 더욱더 많은 민중들이 사회의식과 정치의식을 가지게 되고, 각자의 집단들을 과거와 미래가 있는 역사적 실제로 깨닫게 되고, 그리하여 완전히 역사 속에 들어올 때, 그럴 때 근대사는 시작된다. 사회의식, 정치의식, 역사의식이 인구의 대다수에게 웬만큼 확산되기 시작한 것은 소수의 선진국가들에서조차 기껏해야 최근 200년 이내의 일이었을 뿐이다. 완전한 의미에서 역사 속에 들어와 이제는 식민지 통치자나 인류학자가 아닌 역사가의 관심대상이 된 민중, 그 민중으로 구성되는 전체 체계를 처음으로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것은 오늘날의 일이다.
역사 지식이 상대적이라고 한다면, 객관적인 역사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인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카는, 어떠한 역사가도 자신만의 가치를 위해서 역사를 초월하는 객관성을 주장할 수 없지만, '객관적인' 역사가라고 부를 수 있는 역사가는 '사회와 역사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로 인해서 제한되어 있는 시야를 넘어설 수 있는 능력'과 '자신의 시야를 미래에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그런 만큼 과거를 더 심원하고 더 지속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카는 왜 노년에 새삼스레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지면서 대중을 상대로 강연을 했던 것일까? 그것은 그가 [역사란 무엇인가]의 제2판을 출간하기 위해서 써놓은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진보에 대한 모든 신념과 인류의 더 나은 진보에 대한 모든 전망을 어리석은 짓이라고 배제해버리는 오늘날의 회의주의와 절망의 조류"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그가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연했던 시기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시즘이라는 공동의 적에게 맞서 협력했던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상호 대립하거나 공존하면서 경쟁하고 있던 냉전기였다. 이 냉전기에 영국을 비롯한 서구의 엘리트 지식인들은 사회의 위기를 부추기고 회의주의를 전파하면서 더 민주적이고 더 평등한 사회를 향한 역사의 변화를 부정하려고 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당대의 서구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집단에 봉사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저항해야 할 긴급성과 필요성이 노년에 접어든 카로 하여금 '역사'를 화두로 삼아 강연을 하고 책을 펴내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대화' 또는 '과거의 사실과 현재의 역사가의 대화'라는 것은 누구에게든 널리 화자되어온, 역사에 대한 카의 유명한 정의이다. 그러나 그 두 항목 중에서 카가 강조하는 것은 과거 자체 혹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라 그것을 가지고 역사담론과 역사지식을 생산하는 '현재의 역사가'이다. 이미 지나가버린,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 말할 수 없는 과거의 사실들을 대화의 장에 불러들이는 것은 현재의 역사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카는, 과거는 현재의 역사가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에 따라 구성되며, 과거의 사실들이 어떠했는가보다는 역사지식을 생산하는 역사가가 현재의 사회와 현실에 대해서 어떤 문제의식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