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노인은 깡마르고 여윈 데다 목덜미에는 주름이 깊게 잡혀 있었다. 열대 지방의 바다가 반사하는 햇볕 때문에 그의 두 빰에는 양성 피부암의 갈색 반점들이 나 있었다. 이 반점들은 얼굴 양쪽 훨씬 아래까지 번져 있었다. 두 손에는 큰 고기를 잡으면서 밧줄을 다루다가 생긴 상처가 깊게 파여 있었다. 어느 것 하나 새로 생긴 상처는 아니었다. 고기가 살지 않는 사막의 침식 지대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지낸 상처들이었다.
두 눈을 제외하면 노인의 것은 하나같이 노쇠해 있었다. 오직 두 눈만은 바다와 똑같은 빛깔을 띠었으며 기운차고 지칠 줄 몰랐다.
좋은 일이란 오래가는 법이 없구나, 하고 그는 생각했다. 차라리 이게 한낱 꿈이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고기는 잡은 적도 없고, 지금 이 순간 침대에 신문지를 깔고 혼자 누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 게 아니야." 그가 말했다. "인간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칼을 갈 숫돌이 있으면 좋으련만." 노인은 노 끝 부분에 묶은 끈을 살펴보고 나서 말했다. "숫돌을 가지고 올걸 그랬어." 갖고 왔어야 할 것이 많군, 하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이 늙은이야, 넌 그것들을 가지고 오지 않았잖아. 지금은 갖고 오지 않은 물건을 생각할 때가 아니야. 지금 갖고 있는 물건으로 뭘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보란 말이다.
마침내 노인이 잠에서 깨어났다.
"일어나지 마세요." 소년이 말했다. "이걸 드세요." 소년은 유리잔에 커피를 조금 따랐다.
노인은 그것을 받아 마셨다.
"그놈들한테 내가 졌어, 마놀린. 놈들한테 내가 완전히 지고 만 거야." 노인이 말했다.
"할아버지가 고기한테 지신 게 아니에요. 고기한테 지신 게 아니라고요."
"그렇지. 정말 그래. 내가 진 건 그 뒤였어."
노인은 어쩌면 자신이 이미 죽은 몸이 아닐까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두 손을 마주 잡고 손바닥을 만져 보았다. 손은 죽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그냥 두 손을 폈다 오므렸다 함으로써 살아 있다는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고물에 몸을 기대어 보고 자신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어깨가 그렇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의 화자가 "이제까지 노인은 큰 고기들을 많이 보아 왔다. 450킬로그램이 넘는 큰 고기도 여러 번 보았고, 물론 혼자 잡은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그만한 크기의 고기를 잡은 적도 두 번이나 있었다."라고 밝히는 말도 그 뜻이 새롭게 느껴진다. 어쩌면 헤밍웨이는 이 무렵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나 [무기여 잘 있어라] 또는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같은 대어를 다시 한번 낚고 싶었을지 모른다. 이렇듯 [노인과 바다]는 작가의 삶의 궤적이 깊게 각인되어 있고 그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전기적 소설이요 자전적 작품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노인과 바다]의 주제와 관련해 노벨 문학상 선정 위원회는 "폭력과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현실 세계에서 선한 싸움을 벌이는 모든 개인에 대한 자연스러운 존경심"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평했다. 여기서 말하는 '선한 싸움'이란 물질적 또는 육체적으로는 파멸당해도 정신적으로는 패배하지 않는 산티아고의 모습을 가리키는 말로 받아들여도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산티아고는 결과보다는 과정, 목표보다는 수단과 방법에 무게를 싣는 인물이다. 죽음을 숙명처럼 안고 살아가는 인간에게 삶이란 어쩔 수 없이 '승산 없는 투쟁'일는지 모른다. 패배할 수 밖에 없는 싸움이 곧 인간 실존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패배를 좀처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백절불굴의 정신이다.
자연에 대한 헤밍웨이의 태도는 궁극적으로는 방금 앞에서 언급한 인간의 연대 의식이나 상호 의존 정신과 서로 맥이 닿아 있다. 인간에 대한 이러한 의식이나 정신을 자연 세계로 확대해 놓은 것이 곧 그의 자연관이기 때문이다. 마지막 작품인 [노인과 바다]에 이르러 헤밍웨이는 단순히 인간의 문제를 뛰어넘어 자연의 문제에까지 관심을 기울인다. 초기 작품 [태양은 다시 떠오른다]와 [무기여 잘 있어라]에서 보여 준 개인주의는 [유산자와 무산자]와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는 공동체 의식을 발전하고 [노인과 바다]에서 이제 마침내 우주의 모든 개체와 종을 함께 아우르는 최고의 단계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