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서재 Part 1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컹리 Jan 18. 2018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54 우치다 타츠루 [푸코, 바르트, 레비스트로스, 라캉 쉽게 읽기]

   이러한 책들에서 볼 수 있는 문지방의 높고 낮음은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그들만의 파티'와 누구든 참가할 수 있는 파티'의 차이인가요? 아니면 전문서와 입문서의 특성상 내용의 질적인 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일까요? 나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문지방의 높고 낮음은 '전문가용'이 안다는 전제하에 구성되어 있는 것임에 반해 '입문자용'은 모른다는 전제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일 뿐입니다.


   우리는 자기가 누구인지 잘 알고 있다거나 이를 기초로 자유롭게 생각하거나 행동하고 욕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구조주의 이전 시대에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알려준 사실입니다. 마르크스는 인간 주체가 자기가 누구인가를 '생산=노동'의 관계망 속 '행동'을 통해 사후에 알게 된다는 견해를 주장했고, 프로이트는 인간 주체가 '자기는 무언가를 의식화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식화할 수 없다는 견해를 주장했습니다.



   이처럼 니체는 관객이 코러스를 매개자로 해서 비극이 지닌 '사물의 밑바닥에 있는 생명'을 다룰 수 있었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사실 여부는 차지하고 매우 흥미로운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 분석은 무대에 펼쳐지는 세계를 '살아 있는 육체를 가진 경험적인 것으로 느끼고 받아들인' 그리스 코러스의 감동을, 니체 스스로 '살아 있는 육체를 가진 경험적인 것으로' 느끼고 받아들인다는 '이중 구조'를 이룩 있기 때문입니다. 니체는 그리스 사람들의 이질적인 것에 대한 '공감의 방법'에 '공감'한 것입니다.

   니체의 이런 생각이 꽤 독특한 접근 방법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는 사실 먼 시대, 먼 조상의 경험을 전승하기 위한 매우 정통한 방법입니다.

   기예를 전승할 때 '스승을 보지 마라. 스승이 보고 있는 것을 보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제자가 스승을 보고 있는 한 제자의 시야는 '지금 자기'의 위치를 바꿀 수 없습니다. '지금의 자기'를 기준점으로 삼아 스승의 기예를 해석하고 모방하는 것에 만족한다면 기예는 대를 거듭할수록 낙후되고 변질될 것입니다.

   추락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스승 자체나 스승의 기예가 아니라 '스승의 시선', '스승의 욕망', '스승의 감동'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스승이 그 작업이나 기예를 통해서 '실현하라고 했던 것'을 사정거리에 둘 수 있다면, 그리고 자기의 제자에게도 그 심상을 전할 수 있다면 '지금의 내'가 보기에 어느 정도 이질적으로 보인다고 해도 '원초의 경험'은 오염되지 않고 현대에서 되살아날 수 있을 것입니다.



   소쉬르는 언어활동이 별자리를 보는 것처럼 원래 선이 그어져 있지 않은 세계에 인위적으로 선을 긋고 별자리를 정하듯 정리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리적으로 보아 우리의 사상은 낱말을 통한 그 표현을 빼면 형태 없고 불분명한 덩어리에 불과하다. 기회의 도움 없이는 두 개념을 분명하고 한결같은 방법으로 구분할 수 없다는 데에 철학자와 언어학자들은 항상 의견을 같이했다. 사상은 그 자체로 보면 하나의 성운과 같아서 그 속에 필연적으로 구분되어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언어활동이란 '모두 분절되어 있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밤하늘의 별을 보며 별자리를 정하는 것처럼 비정형적이고, 성운 모양을 한 세계를 쪼개는 작업 그 자체입니다. 어떤 관념이 먼저 존재하고 거기에 이름을 붙인 것이 아니라 이름이 붙으면서 어떤 관념이 우리의 사고 속에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소쉬르)

   따라서 '내가 말하고 있을 때 내속에서 말하는 것'은 대부분의 경우 '타인의 말'이라고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즉 '내가 말할 때' 그 말이 국어의 규칙에 속박되고 규정된 어휘로 이루어진 한 우리가 '말하는 내용'의 대부분은 타인으로부터 얻은 것이 되며, 그때 '내가 말한다' 라고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됩니다. 내가 말을 하고 있을 때 거기서 말해지는 것의 기원은 대부분 나의 외부에 있기 때문이지요.


   이 군사적 신체 가공의 '성공(세이난 전쟁에서의 승리)'을 딛고 근대 일본은 '체조'의 도입을 진행시킵니다. 메이지 19년 문부대신이었던 모리 아리노리는 군대에서 행해지던 '군대식 체조'를 학교 교육의 현장에 도입했습니다. 학생들의 신체를 통제하는 것이 '도덕의 향상'과 '근대적인 국가 체제의 완성'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던 것이지요. 국가 주도에 의한 체조의 보급이 지닌 목적은 단순히 국민의 건강 증진과 체력 향상에 있지 않았습니다. '조작 가느한 신체'와 '순종적인 신체'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지요.


   푸코의 사회사를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그의 '성의 담론화'에 대한 비판에서 엿볼 수 있듯이 '권력'이라는 말을 단순히 '국가권력' 이라든지, 그것이 조종하는 각종 '이데올로기 장치'라는 실체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권력'이란 모든 수준의 인간적 활동을 분류하고, 명명하고, 표준화하여 공공의 문화재로 지의 목록에 등록하려고 하는 '축적 지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따라서 권력 비판론이라고 해도, 그것이 방법론적으로 '권력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기능하는가?'를 실질적으로 열거하고 목록화해서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자리를 부여하는 한 그것 자체가 이미 '권력'으로 변해 있는 것입니다.

   푸코가 '권력 비판'의 이론을 세웠다는 식으로 결론을 짓는 것 역시 그가 진정으로 원한 일이 아닙니다. 푸코가 지적한 것은 모든 지의 영위가 그것이 세계의 성립이나 인간의 모습에 대한 정보를 정리해서 '축적'하려고 하는 욕망에 의해 구동되는 한 반드시 '권력'적으로 기능한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그렇게 적혀 있는 푸코의 학술적 이론도, 그리고 (이 책을 포함해서) 푸코의 이론에 영향을 받아 기술되거나 소개되는 모든 저술 또한 숙명적으로 '권력'적으로 기능하게 됩니다.

   현재 푸코의 저작은 전 세계의 사회과학ㆍ인문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의 필독서이며 이를 '공부하는' 것은 제도권 내에서 거의 의무처럼 되어 있습니다. 대학원생들은 푸코의 용어를 구사하고 푸코의 도식에 의거해 생각하며 추론하는 것을 거의 강제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권력=지'를 낳는 '표준화의 압력'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스스로 이 역설을 예지하고 푸코는 고통스러웠을 것입니다.


   텍스트는 직물을 뜻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사람들은 이 직물을 그 뒤에 다소간의 의미(진리)가 감추어져 있는 하나의 산물, 완결된 베일로 간주해왔다. 이제 우리는 이 직물에서 지속적인 짜임을 통해 텍스트가 만들어지며 작업되는 생성적인 개념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 직물, 이 짜임새 안으로 사라진 주체는 마치 거미줄을 만드는 분비액을 토해내며 점점 약해지는 한 마리의 거미와도 같은 자신을 해체한다. 우리가 신어 사용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텍스트론을 거미학이라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이 '거미의 집(웹)'의 비유는 현재 웹 위를 오가는 다양한 정보와 그것을 만들어 배포한 사람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매우 적절한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는 인터넷 텍스트를 읽을 때 그것을 '원래 누가 만들어서 배포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거의 흥미를 갖지 않습니다. 누가 처음으로 만들어 배포했든 그것은 인터넷 위에서 복사ㆍ전송되고 링크되는 사이에 변용과 증식이 이루어지며, '원래 누가?'라는 물음은 무의미해집니다. 문제는 그것을 내가 읽을지 앍지 않을지, 읽은 다음 자기의 사이트로 전송하거나 또는 링크할지 등의 판단에 맡겨집니다. 이것은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과 상당히 가까운 생각입니다.

   텍스트는 수많은 문화에서 온 복합적인 글쓰기들(에크리튀르)로 이루어져 서로 대화하고 풍자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이 집결되는 한 장소가 있는데 그 장소는 지금까지 말해온 것처럼 저자가 아닌 바로 독자이다. 독자는 글쓰기를 이루는 모든 인용들이 하나도 상실됨 없이 기재되는 공간이다. 텍스트의 통일성은 그 기원이 아닌 목적지에 있다. 그러나 이 목적지는 더 이상 개인적인 것일 수는 없다. (중략) 독자의 탄생은 저자의 죽음이라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사람들이 독재자에게 공포를 느끼는 것은 그가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권력을 어떤 기준으로 행사할지를 예측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신하들 가운데 누가 다음에 총애를 잃고 사형을 당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을 때 권력자는 참으로 무서운 존재가 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