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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Feb 17. 2018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56 스티븐 코비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성서의 잠언은 이 같은 우리의 확신을 잘 표현해 준다. "무릇 지킬 만한 것보다도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이는 인생의 모든 문제가 마음에서 발생하므로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라는 뜻이다.


완력을 동원하는 것은 우리 모두를 약하게 만든다. 힘을 빌리는 당사자가 목적 달성을 위해 외적 요소에 대한 의존심을 키우기 때문이다. 또 힘을 동원하는 것은 독립적으로 사리를 판단하는 능력과 내면적인 성숙 및 자제력의 발달을 방해하기 때문에 강요받는 사람 역시 약하게 만든다. 나아가 마침내는 그 관계 자체도 약화된다. 왜냐하면 협동심 대신 두려움이 앞설 때 사람은 더욱 독단적이고 방어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품성은 근본적으로 습관의 복합체이다. "우리가 생각의 씨앗을 뿌리면 행동의 열매를 얻게 되고, 행동의 씨앗을 뿌리면 습관의 열매를 얻는다. 습관의 씨앗은 성품을 얻게 하고, 성품은 우리의 운명을 결정짓는다"라는 격언이 있다.


현재의 사회적 패러다임은 우리가 대부분 주위의 환경과 조건에 의해 물들어 있고 조절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가 스스로의 삶 속에 존재하는 조절화의 엄청난 위력을 인정하는 것과, 자신은 이 같은 조절화에 의해 결정되며 이것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고 보는 것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주도성(proactivity)이란 단어는 요즈음 경영학 문헌에서는 빈번하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지만 대부분의 사전에서는 찾지 못할 것이다. 주도성은 단순히 솔선해서 사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이 말은 스스로의 삶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행동은 자신의 의사결정에 의한 것이지 결코 주변 여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가치가 감정을 지배할 수 있다. 또 우리는 어떤 일을 수행하는 데 있어 주도적으로 하고 그 책임도 질 수 있다.


간디의 말처럼 "우리가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우리의 자존을 빼앗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의 나는 어제 내가 한 선택의 결과이다"라고 진지하고 정직하게 말하기 전까지는 "나는 다른 것을 선택하겠다"라고 말할 수 없다.


반사적인 말이 갖는 심 각한 문제는 그것이 바로 자성예언이 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의 운명은 이미 결정됐다는 패러다임을 굳게 믿고, 이러한 믿음을 입증하기 위해서 그에 맞는 증거를 만들게 된다. 그 결과 자신의 인생이나 운명에 대한 책임을 상실하게 될 뿐만 아니라 점차 피해의식을 갖게 되고 스스로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게 된다. 이 같은 사람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 및 여건을 다른 사람, 주위 환경, 심지어 하늘에 떠 있는 별과 같은 외부의 영향력 탓으로 돌린다.


주도적인 사람은 우선순위를 가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며 그것을 효과적으로 행사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최소한 영향력의 원과 같은 크기의 관심의 원을 가지고 있다.


책임을 회피하려는 것은 반사적인 사람이 갖는 본성이다. "나는 책임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내가 "내 책임이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무책임하다"라고 말해야 할 때도 오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결정할 능력이 있으며 내가 결정한 것이 부정적이고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특히 오랫동안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다른 사람 탓을 해왔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다른 중역들은 자신이 왜 책임이 없는가를 입증할 더 많은 정보와 공격거리 그리고 증거를 찾는 데만 열중하고 있었다.


이같이 최후의 순간을 마음속에 분명하게 간직하면 어느 날 어떤 일을 하게 되어도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 기준을 위반하지 않게 된다. 나아가 전체적인 삶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하루하루의 생활을 의미 있게 보내게 된다. 인생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는 목적지를 정확히 이해하고 출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현재 위치를 더 잘 파악하고 항상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어디로 가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자신에게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이를 항상 유념하여 매일매일 실천으로 옮긴다면 우리의 삶은 하루하루 크게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다리가 올바른 벽에 기대어 있지 않다면, 계단을 빨리 올라갈수록 더욱 빨리 잘못된 곳으로 빠져 버리는 꼴이 된다. 우리는 매우 바쁠 수도 있고 효율적(efficient)일 수도 있다. 그러나 목표를 확립하고 행동할 때라야만 참으로 효율적(effective)이 될 것이다.


내가 아는 어떤 아버지는 자녀들과 서커스 구경을 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려고 막 집을 떠나려 할 때 전화가 걸려 와서 서커스 구경 대신 일할 것을 요구받은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이것을 거절했다. 그의 부인이 회사에 가서 일을 봐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일은 나중에 다시 할 수 있지만 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다시 오지 않는다." 자녀들은 이 작은 사건을 일생 동안 기억하면서 우선순위에 대한 아버지의 교혼으로 받아들였고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가슴속에 간직하게 되었다.


교회를 어떤 인생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목표 그 자체로 보기 때문에 사람들은 지혜와 삶의 균형감각을 잃는다. 교회가 비록 사람들에게 새로운 힘의 원천, 즉 역량에 대하여 가르친다고는 하지만 교회 자체가 힘이요 역량이라고는 주장하지 않는다. 교회는 단지 하나님의 능력이 인간의 본성에 닿을 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매체임을 주장할 뿐이다.


"자신이 참여하지 않은 결정에는 헌신하지 않는다." 이 말은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직의 문제에 참여하지 않으면 절대로 헌신하지 않는다.


싫어하는 일을 수행하려면 분명한 목적과 사명이 필요하다. 또 이것은 "끝을 생가갛며 시작하라"는 습관2의 가치관과 방향감각을 필요로 하고, 소중한 일에 열렬히 찬동하고 다른 것들을 거절할 수 있는 용기를 필요로 한다. 나아가 순간적인 충동이나 욕구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에 입각해서 행동하도록 하는 독립의지와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을 때도 필요한 것이라면 그 일을 해내는 강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 이 강한 의지가 우리의 주도로 만들어진 첫 번째 창조, 즉 인생목표를 성실하게 따르도록 해준다.


여기서 새롭게 등장한 것이 바로 제4세대 시간관리이다. 제4세대에서는 '시간관리' 란 표현 자체가 진정한 의미에서 보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시간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관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족이란 기대와 실현에 좌우된다. 그런데 기대(곧 만족)는 우리 영향력의 원 안에 놓여 있다.


-제 2사분면 위주

우리는 자신에게 용기를 복돋아 주고 의욕을 자극하며 제2사분면의 활동에 입각해 시간을 보내도록 도와주는 도구가 필요하다. 이것은 위기만을 우선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아닌 위기를 예방하는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을 위해서는 일주일을 단위로 생활계획을 조직하는 것이 최선이다. 물론 하루를 단위로 우선순위를 정하여 융통성 있게 조정할 수도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주 단위로 계획하여야 한다.

일주일 단위로 계획을 수립하면 하루 단위로 하는 것보다 앞뒤 연결과 균형 유지가 더 좋아진다. (중략 그러나 제3세대에 속하는 대부분의 시간계획 도구들을 하루 중심의 계획 수립에 주어진 것들이다. 하루 중심의 도구가 활동에 대한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줄지는 모르지만 본질적으로는 위기와 바쁜 일들을 계획하는 것에 불과하다. 문제의 핵심은 스케줄 상에 있는 것이 아닌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 중에서 우선순위를 매기고 일정을 계획하는 것이다. 이것은 일주일이라는 시간 단위로 가장 훌륭히 달성될 수 있다.


야구를 매우 좋아하는 아들을 둔 친구가 있었다. 그러나 이 친구는 야구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어느 해 여름, 그는 아들을 데리고 메이저 리그를 보기 위해 여러 도시를 다녔다. 야구 구경은 6주일 이상이 걸렸고 비용 역시 엄청나게 많이 들었다. 그러나 이 여행이 부자간의 인간관계를 강력하게 결속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내 친구에게 "자넨 그 정도로 야구를 좋아하나?"라고 물었더니 그는 "아니, 그렇지만 내 아들을 그만큼 좋아하지"라고 대답했다.


거의 모든 대인관계에서 나타나는 어려움은 역할과 목표에 대한 갈등과 애매한 기대 때문에 발생한다. 누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의 문제를 다룰 때, 예를 들어 딸에게 방 청소를 시키거나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누가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고 쓰레기를 내놓아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불분명한 기대가 오해와 실망을 불러오고 신뢰가 인출될 수도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할 때마다 자기에게 부과되는 기대를 파악하여야 한다. 사람들은 기대를 통해서 상대방을 판단하려고 한다. 만약 상대방에 대한 기본적인 기대가 어긋났다고 느낀다면 실망하게 되고 신뢰의 잔고도 감소할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갖는 기대가 자명하고 다른 사람에 의해 분명히 이해되고 공유된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많은 부정적 상황을 야기한다.


언행일치, 즉 성실성이 드러나는 가장 단적인 예가 현재 자리에 없는 사람에게 충실한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의 신뢰를 얻게 된다. 자리에 없는 사람을 공격한다면 현재 함께 하는 사람의 신뢰도 잃게 마련이다.


문제는 사람 때문이 아니라 제도 때문에 생기는 겨우가 많다. 만일 유능한 사람들을 나쁜 제도 아래서 일하게 한다면 나쁜 결과를 얻게 될 것이다. 유능한 인재의 꽃을 얻고 싶으면 그 꽃나무에 좋은 제도라는 물을 주어야 한다.


어떤 아버지가 언젠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난 우리 애를 이해할 수 없어요. 그 애는 도대체 내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아요."

"당신이 방금 말한 것을 제가 다시 한번 말해 볼까요? 아들이 당신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아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겁니까?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고 그가 대답했다.

"다시 한 번 확인하죠. 당신은 그 애가 당신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그를 이해하지 못합니까?" 내가 말했다.

"그게 내가 말하려는 겁니다." 그는 불쾌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먼저 그에게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요?" 하고 내가 넌지시 말했다.

"그렇네요!"라고 그가 대답했고 그 다음에는 긴 친묵이 흘렀다. "정말 그렇네요!"하고 그가 다시 말했을 때 그의 얼굴에는 어떤 빛이 비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래요. 맞습니다. 하지만 난 벌써 그 애를 이해하고 있어요. 난 그 애가 겪고 있는 심정을 잘 압니다 왜냐하면 나도 똑같은 과정을 경험했거든요. 그런데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왜 그 애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가입니다."

사실 이 아버지는 자기 아들이 마음속으로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가를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마음만을 들여다보고는 자기 아들의 생각을 이해했다고 간주한 것이다.


네 번째 단계는 둘째, 셋째 단계를 모두 포함한다. 당신은 '내용을 재구성하고 감정을 나타낸다.'

"아빠, 난 지쳤어요. 학교는 지루하고 따분해요."

"너 정말로 학교에 대해 좌절감을 느끼고 있구나."

이 경우 좌절감은 감정이고 학교는 그 내용이다. 당신은 아들이 말하는 내용의 두 가지 측면 모두를 이해하기 위해 오른쪽 뇌와 왼쪽 뇌를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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