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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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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Feb 17. 2018

광장

#57 최인훈 [광장]


   이젠 뒷골목을 빠져가면 그런대로 자기 몰골을 드러내지 않고 돌아갈 수 있었지만, 얼른 자리를 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본다. 눈언저리와 입언저리가 부었다. 윗바닥으로 윗입술을 핥는다. 아까 그 형사는 아직 저 건물 속에 있을까. 그는 처음 만나는 나를 왜 그렇게 미워했을까.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 영미 아버지를 봐서라도 자기를 그렇게까지 다루지는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터에, 거침없이 손찌검을 하다니. 어찌 된 일일까. 여태까지 잘못 생각해온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잘못 생각. 마음이 그렇게 말한다. 나의 방문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렇게 튼튼하리라고 믿었던 나의 문이 노크도 없이 무례하고 젖혀지고, 흙발로 들이닥친 불한당이 그를 함부로 때렸다. 내 방인데. 그자는 어찌 그리 방자할 수 있었을까. 그 점에 헛갈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명준의 편에서든 형사의 편에서든. '법률'이 그렇게 말한다.



   사랑하려고 했는데, 저쪽을 더럽히고 할퀴고 말지 않았을까, 하고 돌이켜보아야 하는 일은 괴로운 노릇이다. 남한 시절의 그에게는 철학이 모든 것이었다. 부모도 없고, 돈도 없고 명예도 없는 청년에게, 철학이란 모든 것을 갚고도 남을 꿈을 보여주는 단 하나의 것이었으리라. 또는 양반과 종놀음으로 헤아릴 수 없는 세월 살아온 고장에서, 꿈을 이룰 엄두조차 내지 못할 사회에서, 철학이란, 양심의 마지막 숨을 곳이었으리라. 아니면 그 신분이 임금이건 종이건 사람이 산다는 일에 놀라움을 느끼고, 그 뜻을 캐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마음 탓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느 것이든 좋고, 철학이란 그 모든 것을 다 뜻한다. 어쨌든 그는 철학의 탑 속에서 사람을 풍경처럼 바라보았다.



   명준이 북녘에서 만난 것은 잿빛 공화국이었다. 이 만주의 저녁 노을처럼 핏빛으로 타면서, 나라의 팔자를 고치는 들뜸 속에 살고 있는 공화국이 아니었다.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코뮤니스트들이 들뜨거나 격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는 일이었다. 그가 처음 이 고장 됨됨이를 똑똑히 느끼기는, 넘어와서 바로 북조선 굵직한 도시를, 당이 시켜서 강연 걸음을 했을 때였다. 학교, 공장, 시민회관, 그 자리를 채운 맥빠진 얼굴들, 그저 않아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는 아무 울림도 없었다. 혁명의 공화국에 사는 열기 띤 시민의 얼굴이 아니었다. 가락 높은 말을 쓰고 있는 자신이 점점 쑥스러워지는 것이었다. 강연 원고만 해도 그랬다. 몇 번이나 당 선전부의 뜻을 받아 고쳤다. 마지막으로 결재가 났을 때, 그 원고는, 코뮤니스트들의 늘 하는 되풀이를 이어붙인 죽은 글이었다. 명준이 말하고 싶어한 줄거리는, 고스란히 김이 빠져버리고, 굳이 명준의 입을 빌려야 할 아무 까닭도 없는 말로 둔갑해 있었다.





   "일찍이 위대한 레닌 동무는 제X차 당대회에서 말하기를……" 눈앞에 일어나는 일의 본을 또박또박 '당사' 속에서 찾아내고, 그에 대한 처방 역시 그 속에서 찾아내는 것. 목사가 성경책을 펴들며 "그러면 하나님 말씀 들읍시다. 사도행정……" 그런 식이었다. 그것이 코뮤니스트들이 부르는 교양이었다. 언제나, 어떤 일에 어울리는 '당사'의 대목을, 대뜸, 바르게, 입에 올릴 수 있는 힘. 그것을, 코뮤니스트들은 교양이라 불렀다. 명준이 써오던 말들의 뜻이, 모조리 고쳐져야 했다. (중략)

   어느 모임에서나, 판에 박은 말과 앞뒤가 있을 뿐이었다. 신명이 아니고 신명난 흉내였다. 혁명이 아니고 혁명의 흉내였다. 흥이 아니고 흥이 난 흉내였다. 믿음이 아니고 믿음의 소문뿐이었다. 월북한 지 반년이 지난 이듬해 봄, 명준은 호랑이굴에 스스로 걸어들어온 저를 저주하면서, 이제 나는 무얼 해야 하나? 무쇠 티끌이 섞인 것보다 더 숨막히는 공기 속에서, 이마에 진땀을 흘리며, 하숙집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명준은 터지는 마음을 그대로 쏟았다.

   "이게 무슨 인민의 공화국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소비에트입니까? 이게 무슨 인민의 나랍니까? 제가 남조선을 탈출한 건, 이런 사회로 오려던 게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아버지가 못 견디게 그리웠던 것도 아닙니다. 무지한 형사의 고문이 두려워서도 아닙니다. 제 나이에 아버지 없어서 못 살 건 아니잖아요? 또 제가 아무리 미워도 아버지가 여기서 활약하신다고 그들이 저를 죽이기야 했겠습니까? 저는 살고 싶었던 겁니다. 보람 있게 청춘을 불태우고 싶었습니다. 정말 삶다운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남녘에 있을 땐, 아무리 둘러보아도, 제가 보람을 느끼면서 살 수 있는 광장은 아무데도 없었어요. 아니, 있긴 해도 그건 너무나 더럽고 처참한 광장이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가 거기서 탈출하신 건 옳았습니다. 거기까지는 옳았습니다. 제가 월북해서 본 건 대체 뭡니까? 이 무거운 공기. 어디서 이 공기가 이토록 무겁게 짓눌려나옵니까? 인민이라구요?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자기 정권을 세운 기쁨으로 넘치는 웃음을 얼굴에 지닌 그런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바스티유를 부수던 날의 프랑스 인민처럼 셔츠를 찢어서 공화국 만세를 부르던 인민이 어디 있습니까? 저는 프랑스 혁명 해설 기사를 썼다가, 편집장에게 욕을 먹고, 직장 세포에서 자아 비판을 했습니다. 프랑스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라구, 인민의 혁명이 아니라구요. 저도 압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고 싶었던 건 그게 아니었습니다. 그때 프랑스 인민들의 가슴에서 끓던 피, 그 붉은 심장의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겁니다. 시라구요? 오, 아닙니다. 아버지, 아닙니다. 그 붉은 심장의 설레임 그것이야말로, 모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와 자본주의자들을 가르는 단 하나의 것입니다. 퍼센티지가 문제인 게 아닙니다. 생산 지수가 문제인 게 아닙니다. 인민 경제 계획의 초과 달성이 문젠 게 아닙니다. 우리 가슴속에서 불타야 할 자랑스러운 정열, 그것만이 문젭니다. 이남에는 그런 정열이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비루한 욕망과, 탈을 쓴 권세욕과 그리고 섹스뿐이었습니다. 서양에 가서 소위 민주주의를 배웠다는 놈들이 돌아와서는, 자기 및 대조가 무슨 판서 무슨 참판을 지냈다는 자랑을 늘어놓으면서, 인민의 등에 올라앉아 외국에서 맞춘 아른거리는 구둣발로 그들의 배를 걷어차고 있었습니다. 도시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일본놈들 밑에서 벼슬을 지내고 아버지 같은 애국자를 잡아죽이던 놈들이 무슨 국장, 무슨 처장, 무슨 청장 자리에 앉아서 인믄들을 호령하고 있습니다. 남조선 사회는 백귀 야행하는 도시 알 수 없는 난장판이었습니다. 청년들은, 섹스와 재즈와 그림 속의 미국 여배우의 젖가슴에서 허덕이지 않으면, 재빨리 외국인을 친지로 삼아서 외국으로 내빼고 있었습니다. 유학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은 그 험한 사회의 혼탁에서 잠시 몸을 빼고, 아름다운 아내와 쪼들리지 않을 만큼 한 살림을 꾸릴 수 있는 간판과 기술을 얻기 위해서, 외국으로 간 것입니다. 부르주아 사회의 가장 실팍한 뼈대를 이루는, 약삭빠른 수재들 말입니다. 이도저도 못 하는 우리 같은 것은, 철학이니 예술이니 하는, 19세기 구라파의 찬란한 옛날 얘기책을 뒤적이면서, 자기 자신을 속이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그러고 있는 사람이 남조선에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들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심장의 소유자들입니다. 젊은 사람치고, 이상주의적인 사회 개량의 정열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만 그들은, 남조선이라는 이상한, 참으로 이상한 풍토 속에서 성격적인 약점이 점점 커지더군요. 저는 새로운 풍토로 탈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월북했습니다. 어리광을 피려는 저의 손길을, 위대한 인민공화국은 매정스레 뿌리치더군요. 편집장은 저한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명준 동무는, 혼자서 공화국을 생각하는 것처럼 말하는군. 당이 명령하는 대로 하면 그것이 곧 공화국을 위한 거요. 개인주의적인 정신을 버리시오'라구요. 아하, 당은 저더러는 생활하지 말라는 겁니다. 일이면 일마다 저는 느꼈습니다. 제가 주인공이 아니고 '당'이 주인공이란 걸. '당'만이 흥분하고 도취합니다. 우리는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당'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느끼고 한숨지을 테니, 너희들이 복창만 하라는 겁니다. 우리는 기껏해야 '일찍이 위대한 레닌 동무는 말하기를……' '일찍이 위대한 스탈린 동무는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위대한 동무들에 의하여, 일찍이 말해져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아무 말도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는 인제 아무도 위대해질 수 없습니다. 아 이 무슨 짓입니까? 도대체 어쩌다 이 꼴이 된 겁니까?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적 현실의 모든 경우에 한결같이 적용되는 단 한 가지의 처방을 내린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이란, 정확하게는, 그가 자기 시대를 분석한 그의 저술 속에서 쓴, 방법론을 가리켜야 합니다. 이론 속에 엉켜 있는 방법과 정책이 분리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어떤 이론이든 마찬가집니다. 정책에 대해서는 방법론의 창시자조차도 반드시는 정확하달 수 없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동무들도 모든 것을 다 말할 수 있었을 리가 없고 그렇게 믿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어떤 결정된 진리만을 믿은 게 아니고 진리는 더 고치는 것이 용서 안 될 만큼까지 최종적으로 결정돼서는 안 된다는 태도까지 믿은 것입니다. 수많은 고결한 심장의 소유자들이, 이런 공화국을 만들려고, 중세기의 순교자들보다 더 거룩한 죽음을 한 건 아니잖습니까? 그들의 피에 대한 배반입니다. 그 누군가가 위대한 선구자들의 피를 착취하고 있습니다. 저는 월북한 이래 일반 소시민이나 노동자 농민들까지도 어떤 생활 감정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그들은 무관심할 뿐입니다. 그들은 굿만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끌려다닙니다. 그들은 앵무새처럼 구호를 외칠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인민이란 그들에겐 양떼들입니다. 그들은 인민의 그러한 부분만을 써먹습니다. 인민을 타락시킨 것은 그들입니다. 그리고 북조선의 공산당원들은, 치사하고 비굴하고 게으른 개들입니다. 양들과 개들을 데리고 위대한 김일성 동무는 인민공화국의 수상이라? 하하……"

그는, 배를 끌어안고, 목을 젖히며 웃었다. 그의 부친도 한마디도 말이 없었다. 명준은 말하면서도 부친의 눈치를 살피면서, 맞받아주기를 기다렸지만, 끝내 묵묵히 듣고만 앉아 있을 뿐이었다. 웃음에 지친 그는, 방바닥에 엎드려 소리를 죽여 울었다. 아버지가 미웠다. 아무 말도 않는 아버지가.



   그가 알아본 바에 따르면, 북조선 농민들의 경우, 토지 개혁을 좋아하는 층은 열에 다섯쯤이었다. 그는 처음에 놀랐다. 땅을 그저 얻은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는다니? 그 까닭을 곧 알았다. 농토는 팔고 살 수 없게 돼 있었다. 농토는 나라 땅이었다. 그들은 지주 영감의 소작인에서 나라의 소작인으로 옮아간 것뿐이었다. 그가 보기에 소시민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들 소시민은 아무리 벌어야 이제 '부자'가 될 가망은 없었다. 나라가 그것을 못 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시장에는 아직도 일본 때 옷이며 그릇가지가 없지 못할 상품이었다. 소비조합에 나도는 살림은, 모자라기도 하거니와 허술한 물건뿐이었다. 노동자들은 보수보다도 보수의 약속에 지쳤고, 인민 경제 계획의 초과 달성이라는 이름으로, 공짜일을 마지못해 하고 있었다. 인민공화국이 잘 되고 있다는 소문은 요란했으나, 정작 자기 둘레를 돌아보면 아무것도 없었다.

   개인적인 '욕망'이 터부로 되어 있는 고장. 북조선 사회에 무겁게 덮인 공기는 바로 이 터부의 구름이 시키는 노릇이었다. 인민이 주인라고 멍에를 씌우고, 주인이 제 일하는 데 몸을 아끼느냐고 채찍질하면, 팔자가 기박하다 못해 주인까지 돼버린 소들은, 영문을 알 수 없는 걸음을 떼어놓는다. '일등을 해도 상품은 없다'는 데야 누가 뛰려고 할까? 당이 뛰라고 하니까 뒤긴 해도 그저 그만하게 뛰는 체하는 것뿐이었다.



   여기도 기를 꽂을 빈터는 없었다. 위대한 것들은 깡그리 일찍이 말해진 후였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인가보다. 어김없이 움직이기만 하라는 것이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북조선에는 혁명이 없었던 탓일 것 같았다. 인민 정권은, 인민의 망치와 낫이 피로 물들여지며 세워진 것이 아니었다. '전세계 약소 민족의 해방자이며 영원한 벗'인 붉은 군대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바스티유의 노여움과 기쁨도 없고, 동궁 습격의 아슬아슬함도 없다. 길로틴에서 흐르던 피를 본 조선 인민은 없으며, 동상과 조각을 망치로 부수며, 대리석 계단으로 몰려 올라가서, 황제의 안방에 불을 지르던 횃불을 들어본 조선 인민은 없다.    그들은 혁명의 풍문만 들었을 뿐이다. 30년 전에 흥분이 있었다는 풍문을 듣고 흥분할 수 있다면 그는 감정의 천재다. 1789년에 있었던 흥분의 얘기를 듣고 흥분할 수 있다면 그는 천재다. 하물며 남의 나라의. 세계는 하나라?  그건 그 흥분이 있었던 다음부터의 얘기다. 북조선 인민에게는 주체적인 혁명 체험이 없었다는 데 비극이 있었다. 공문으로 명령된 혁명, 위에서 아래로, 그건 혁명이 아니다.



   "자네가 이런 일을 하다니 뜻밖이야."

   태식은 부은 눈을 들어서 의심스럽게 건너다보았다.

   "속에 있는 대로 대답해도 괜찮겠나?"

   "물론이야. 맘대로 대답하게, 옛날처럼."

   "그럼 말하지. 자네가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내게는 뜻밖일세."

   "알겠어. 그러나 나 같은 인간은 이렇게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자야. 허나 자네는."

   "깔보지 말게. 모든 인간은 다 그런 가능성이 있네."

   "자네가 이처럼 고생할 만한 값이 남조선에 있었던가?"

   "자네가 그 자리에 앉아 있을 만한 값이, 북한에 있었던가 묻고 싶어."

   "음. 되묻지 말고, 먼저 내 물음을 받아주게."

   "값이 있어서만 사람이 행동하는 건 아닐세."

   "그럼?"

   "값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도 행동할 수 있어."

   "자네 같은 애국자를 왜 남조선이 알아주지 못했을까. 나는 여기 잡혀오는 자들을 정말 미워해. 이렇게 애국자가 수두룩한데 왜 남조선이 요꼴이 됐지?"

   "말해도 좋은가?"

   "그러래두."

   "자네 같은 사람이 넘어갔기 때문이야."

   "고맙네. 허지만 자넨 남지 않았나?"

   "아니야. 내가 남은 건 6월 25일에서 오늘까지뿐이야."

   "늦었군 그래, 늦었어. 나한테 부탁이 없나?"

   "죽어주게. 고문을 이 이상 참을 수 없어. 자네가 아직도 나한테 우정이 있다면, 나를 죽여주게."

   "자네의 죽음을 아무도 몰라도 좋은가?"

   "자네. 북한으로 가더니 속물이 됐군. 난 괴로우니깐 빨리 쉬고 싶다는 것뿐이야."

   "난 현재로선 자네한테 우정을 가지고 있지 않아. 지금 똑똑히 느꼈어. 내가 괴로워할 때 자넨 웃고, 자네가 괴로워할 때 나는 웃어야 하도록 돼 있다는 걸 지금 똑똑히 알았네. 난 웃어야겠어."

   "자넨 그다지도 악한이었나?"

   "악한? 맞았어. 더 듣기 좋게 악마라고 불러줘. 내 생애에 단 한 번 악마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빼앗지 말아줘. 난 악마가 돼봐야겠어. 이런 북새통에 자네 한 사람쯤 풀어주는 건 지금 내가 가진 힘으로도 넉넉해. 허지만 안 하겠어. 신파는 않겠어. 옛날 은인의 외아들을 목숨을 걸고 풀어주는 공산당원. 안 돼. 그러면 나는 끝내 공중에 뜬 몸일 뿐이야. 이런 기관에 온 것도, 내가 자원한 일이야. 나는 이번 싸움을 겪어서 다시 태어나고 싶어. 아니 비로소 나고 싶단 말이야. 이런 전쟁을 겪고도 말끔한 손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거야. 내 손을 피로 물들이겠어. 내 심장을 미움으로 가득 채워가지고 돌아가야겠어. 내 눈과 귀에, 원망에 찬 얼굴들과 아우성치는 괴로움을 담아가져야겠어. 여태껏 나는 아무것도 믿지 못했어. 남조선에서 그랬구, 북조선에 가서도 마찬가지였어. 거기서 나는 어떤 여자를 사랑했어. 나는 그녀를 믿었지. 그러나 그녀도 나를 속였어. 그녀를 미워하지는 않아. 좀 어려운 약속을 했는데 결국 지키지 못하더군. 그녀는 지금 모스크바에 있어. 지금 나에겐 아무것도 없어. 무엇인가 잡아야지. 그게 무엇인가는 물을 게 아니야. 싸움에서 빈손으로 돌아오는 자는 바보뿐이야. 바이블에 나오는 게으른 종처럼. 전리품을 긁어모아야지. 당이 노나주는 전리품을 바랄 수는 없어. 내 손으로 뺏아야 돼. 나의 남은 생애를 쓰고도 남을 전리품을. 옛날부터 싸움이란 그런 거야. 그때 자네가 나타난 거야 옛 은인의 아들. 맘맞는 농담을 지껄이던 짝패. 그리고…… 그건 말하지 않지. 이보다 좋은 거리가 어디 있나. 나는 그걸 짓밟겠다는 거야. 그 썩어진 모랄의 집에 불을 지르겠딴 말이거든. 그래서 범죄인이 되겠어. 또는 인민의 영웅이 되겠어. 마찬가지 말이야. 어쩔 수 없이 나를 얽매는 죄를 내 손으로 만들겠다는 거야.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나면서부터 지고 나온다는 원죄 따위 부르주아 꿈 넋두리가 아니야. 내 손으로 밝히 해낸 나의 죄. 그래서 태어나겠다는 걸세. 내 탄생을 도와주게. 그리고 자네 부인이, 지금쯤, 이층 내 방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야. 그녀도 나의 탄생을 도와야 해. 사람이 태어나기야, 여자한테서 말고야 다른 길이 있겠나?"

   태식이 의자에서 벌컥 일어섰다.

   "악한."

   "그렇지. 더 흥분해주게. 자연스럽게 내가 탄생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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