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채사장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너머 편]
하지만 근대 합리성의 낙관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근대는 매우 빠르게 붕괴되었다. 그 원인은 외적인 원인과 내적인 원인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외적인 원인은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에서 기인한다. 이성에 대한 신뢰와 그에 따른 기술의 발전은 인간을 풍요로 이끌어줄 것만 같았지만, 반대로 인류는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다. 물리학과 화학의 발전은 대량 인명 살상을 가능하게 하는 핵무기가 되어 인류를 위협했다. 인간의 유전에 대한 이해와 생리학의 발전은 열등한 인종을 규정하는 근거가 되어, 유대인 학살의 명분이 되었다. 그리고 산업 발전은 환경 파괴와 거대 자본에 의한 개발도상국 종속화를 가져왔다. 인간의 이성과 합리성의 추구가 행복한 미래를 가져오지 않으며, 인류의 삶과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것을 인류는 충분히 경험한 것이다. 사람들은 근대 합리성의 미래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내적인 원인도 근대성의 붕괴에 기여했다. 내적인 원인이란 인간 이성의 한계가 학문 내부의 영역에서 스스로 드러난 것을 말한다. 쉽게 말해서 인간 이성의 꽃이며 모든 학문의 최종 근거로서의 지위를 지녔던 수학, 물리학, 철학에서 스스로의 한계와 불가능성이 발견된 것이다. 수학에서는 괴델이 '불완전성 정리'를 통해 수학의 불가능성을 수학적으로 증명해냈고, 물리학에서는 하이젠베르크가 '불확정성 원리'를 통해 물리학이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음을 설명했다. 철학에서는 파이아벤트가 '인식론적 무정부주의'를 통해 철학적 방법론에 규칙이 필요하지 않음을 설명함으로써 학문 전체의 질서를 흔들었다.
각 시대마다 진리라고 믿어지는 영역이 존재했다. 원시의 자연신, 고대의 신화, 중세의 유일신, 근대의 이성이 그것이다. 근대 이성은 합리성, 객관성, 효율성을 기반으로 인간에게 낙관적인 미래를 전망해주었으나 세계대전이라는 외적인 요인과 학문 내부의 붕괴라는 내적인 요인으로 그것이 가능하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이러한 근대 이성의 붕괴와 함께 단일 진리에 저항하는 포스트모던이 탄생했다. 포스트모던은 중세와 근대의 이분법을 비판하고, 이분법에 의해 억압되었던 다원적 가치를 복원하는 실천적인 운동을 발전했다.
데카르트는 이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의심할 수 없는 제1명제라고 불렀다. 이 명제는 나눠서 생각해봐야 한다. 우선 '나는 생각한다'부터 알아보자.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생각한다'는 도저히 의심할 수 없는 명제다. 왜냐하면 '정말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하고 의심하는 순간 나는 의심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지 의심하는 순간마다 내가 생각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로써 '나는 생각한다'라는 명제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가 된다.
다음으로 '나는 존재한다'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단 내가 생각하고 있음은 확실해졌다. 그런데 내가 생각하기 위해서는 생각하고 있는 주체로서의 '나'가 반드시 있어야만 한다. 내가 생각하고 있음이 확실한다면 나는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차례로 두 문장은 의심할 수 없음이 도출된다. '나는 생각한다'는 의심할 수 없고, '나는 존재한다'는 것도 필연적으로 증명된다.
무신론자이거나 신자유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이라면 도대체 이게 무슨 증명인가 싶겠지만, 데카르트가 방법적 회의를 통해 나와 세계를 증명하는 과정은 그 내용보다는 형식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데카르트 이전까지의 시대는 신 중심의 중세였다. 당시에는 신이 중요할 뿐, 인간은 가치나 중요성을 갖지 않았다. 인간과 현실 세계는 신의 피조물로서, 인간의 존재 의미는 신으로부터 도출되었다. 신이 제1원인자이고, 그로부터 파생되는 존재가 인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사유는 신이 아니라 인간으로부터 모든 세계의 증명을 시작한다. 진리에 도달하는 길은 나의 의심과 회의를 통해서이고, 나의 존재 증명이 신과 세계의 존재 증명보다 앞선다. 즉 인간의 이성이 우선이고, 신과 세계는 이로부터 파생되어 증명되는 것이다. 데카르트가 아직도 '신'을 언급함에도 불고하고 근대 철학의 압저지로 불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의자는 본질로서 존재한다. 의자의 본질은 단적으로 '앉는 것'으로, 의자의 본질은 개별적 의자보다 중요하다. 만약 특정 의자가 다리가 부러져서 '않는 것'이라는 본질을 상실했다면, 그 의자는 폐기될 것이다. 의자에게 본질은 무엇보다도 선행한다. 마찬가지로 돼지도 본질로 존재한다. 돼지의 본질은 '먹는 것'이다. 물론 돼지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반대 의사를 개진하지 않으니 우리가 규정하자. 만약 병에 걸려서 못 먹게 되었다면, 돼지는 본질을 상실했으므로 살처분되고 말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의 존재도 생각해보자.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말하는 존재'인가? 아니면 '신의 피조물'인가? 이 물음은 오랜 시간 서구 역사에서 종교와 철학과 과학으로 심도 있게 논쟁되어왔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본질을 상실하면 인간을 파기할 만한 본질은 찾을 수 없다. 말하지 못해도 인간은 가치가 있고, 교회를 다니지 않아도 인간은 가치가 있다. 즉 인간은 의자나 돼지처럼 단일한 본질을 가지 않는다. 이렇게 고정된 본질을 갖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하는 존재자에 대한 이름이 '실존'이다. 인간은 실존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문제는 규정되지 않고 자유로운 존재인 인간을 억압적으로 규정하고자 하는 집단들이 있다는 것이다. 국가, 사회, 가족, 관습, 도덕, 종교, 철학, 과학은 우리를 본질로 규정하려고 한다. 우리는 '국민'으로, '아들과 딸'로, '피조물'로, '이성적 존재'로, '회사원'으로, '군인'으로 규정되어 왔고, 스스로 그것이 자신의 본질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나의 본질이 아니며, 나는 본질을 가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그렇다면 본질로 존재하지 않는 나는 어떻게 존재하는가? 나에게 뒤집어씌워진 본질을 하나씩 벗어내고 어떠한 규정과 억압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면, 나에게는 단지 세 가지만이 남게 된다. 그것은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규정되지 않고 절대적으로 자유로우며 실존하는 존재다. 사르트르는 이에 대해 "인간은 자유롭도록 저주받은 존재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저주는 부정적인 의미이기보다는 인간의 숙명에 대한 강조적 표현이라고 하겠다.
뉴턴이 관심을 가진 만유인력이나 힘에 대한 역학은 기존의 과학이 가지고 있던 관심사를 확장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갈릴레이나 케플러가 기하학을 통해서 자연적 '사물'들을 수학화했다면, 뉴턴은 그 사물들 간의 보이지 않는 '힘'을 수학적으로 정리해낸 것이다. 철학적으로 표현해보자면 기존의 물리학이 존재자에 관심을 갖고 그 존재자를 수학으로 표현하려 했다면, 뉴턴은 특정 존재자와 다른 존재자가 맺고 있는 관계를 파악하고 이를 수학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뉴턴으로 인해 물리학은 존재부터 관계까지 세상의 모든 것을 수학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사실주의에서의 '사실'은 눈에 보이는 사물을 똑같이 그려낸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릴 대상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의 '사실'을 추구한다는 의미다. 쉽게 말하면 우리의 남루한 현실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 '사실'이 되는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지금 이 순간 정말 눈에 보이는 것을 그리려 했다. 엄밀히 말해서 인간은 눈에 보이는 대로 세상을 보지 못한다. 보이는 그대로를 보는 것이 아닌 언어를 본다고 하는 편이 실제에 더 부합할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눈앞에 흰색 컴이 있다. 컵은 분병 2차원적으로 일부만 눈에 들어올 테지만, 우리는 보이지 않는 컵의 뒷부분을 이미 가정하고 완벽한 컵으로 인식한다. 또한 컵의 그림자나 표면의 반사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는다. 컵은 흰색의 완벽한 형태로 개념화된다. 사실 우리가 본 것은 컵의 실재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컵의 개념이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념을 바탕으로 눈에 보이는 물체를 재구성한다. 마치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 그 장면을 보는 것처럼 순수하게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하고자 했던 일은 개념이나 이념을 걷어내고 순수하게 보이는 그대로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흰색 컵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태양 아래서 이리저리 순간적으로 반짝이고 변화하는 컵 표면의 색깔을 그리려고 했다. 지금 이 순간의 컵의 인상을 빠른 붓놀림으로 화폭에 담으려 한 것이다.
단정적으로 정리한다면 현대 예술은 '미의 추구'라기 보다는 '새로움의 추구'다. 그리고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우선 예술의 대상을 변화시켰고, 다음으로 예술의 주체를 변화시켰다.
이제 앞으로는 현대 미술의 낯선 모습과 마주친다면 당황하지 말고 다음 두 가지만 생각해보면 되겠다. 그러면 현대 미술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아! 새로운 무엇인가를 시도하려고 노력하고 있구나."
2. "예술의 대상, 주체, 의미 중에 무엇을 흔들고 있는 것이지?"
예술의 아름다움이나 종교의 경건함이나 삶의 의미나 죽음의 신비는 다른 누군가와 토론하거나 검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도 그러했듯, 우리도 이미 알고 있다. 이 말할 수 없는 것들,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못했던 예술과 종교와 삶과 죽음에 대한 주관적 체험이 나의 하나뿐인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 심오한 문제임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