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강원국 [대통령의 글쓰기]
최순실의 국정 농단이 가능했던 이유는 자명하다. 자기 생각을 말과 글로 표현하지 못하는 지도자와, 그런 지도자 아래서 침묵으로 자리를 연명하려 했던 참모들의 합작품이다.
우리 사회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말과 글이 살아나야 한다. 말과 글이 살아 있는 사회가 열린사회다. 부정부패는 열린사회에서 설 땅을 잃는다. 부정, 부패, 비리, 농단은 말 없는 사회를 좋아한다. 말과 글이 죽은 사회는 그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놀이터다. 아무도 그것에 시비 걸지 않고 문제 제기하지 않는다. 보고도 모른 체한다. 고발자는 배신자가 되고 이의를 제기하면 충성심이 부족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앞서 욕심이 문제라고 했다. 그렇다면 글에 관한 대통령들의 욕심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어떻게 쓰느냐'의 차이다. 어떻게 쓰느냐,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멋있게, 있어 보이게 쓸 것이가를 두고 고민하는 것은 부질없는 욕심이다. 그러나 무엇을 쓰느냐에 대한 고민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글의 중심은 내용이다. 대통령의 욕심은 바로 무엇을 쓸 것인가의 고민이다. 그것이 곧 국민에게 밝히는 자신의 생각이고, 국민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쓰기에 자신 없다고 하는 사람 대부분은 전자를 고민한다. 어떻게 하면 명문을 쓸까 하는 고민인 것이다. 이런 고민은 글을 쓰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부담감만 키울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사학]에서 말했다. '말은 세 가지로 이루어진다. 말하는 사람과 말의 내용, 그리고 말을 하는 대상이다. 말의 목적은 마지막 것과 관련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에게 들은 꾸지람 중에 가장 얼굴을 붉히게 했던 말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모르겠네."이다. 글쓰기 최고의 적은 횡설수설이다. 횡설수설한 글은 읽는 사람을 짜증 나게 한다. 두 대통령 모두 횡설수설하는 글을 가장 싫어했다. 한 말 또 하고 또 하고, 다음 얘기로 넘어가나 싶더니 다시 처음 얘기로 돌아가고,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오락가락하는 글. 좀 심하게 얘기하면 술 취해 걷는 갈지자걸음의 술주정이다.
김동식 교수는 [인문학 글쓰기를 위하여]에서 이 같은 문제를 지적한다. "생각의 길이와 글의 길이를 서로 같게 한다는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 생각을 충분히 드러내기에 말이 부족하면 글이 모호해지고, 생각은 없이 말만 길게 늘어뜨리면 글이 지루해지기 마련이다."
대상이나 주제에 한정하지 말고, 보다 큰 시야에서 보고 전체를 아우르는 메시지로 확장한다. (중략)
기왕이면 생각을 크게 하라. 그래서 손해 볼 일은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10월 일본 국회 연설에서 한국의 민주주의가 우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피와 땀의 결과라고 말하면서 "기적은 기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겼다.
노 대통령 역시 2003년 4월 국회 국정연설에서 "시장개혁만으로 시장은 개혁되지 않는다."는 인상적인 말을 남겼다. 일상생활 속의 생각과 행동이 달라져야 시장이 달라지는 것이며, 투명하고 공정한 시장을 위해서는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문화가 먼저 정착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던진 말이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쓴 노 대통령 추모사의 처음과 끝은 이렇다.
'노무현 대통령 당신, 죽어서도 죽지 마십시오.' (시작)
'우리가 깨어 있으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죽어서도 죽지 않습니다.' (끝)
노무현 대통령은 주관이 뚜렷하고 자기주장이 강한 분이다. 그래서 흔히 고집이 셀 것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적어도 연설문 수정과 관련하여 겪어본 바로는 그렇다. 어떤 참모가 '이 얘기는 수위가 너무 높습니다.' 하면 처음에는 듣기만 한다. 그런데 그 참모가 다시 같은 내용을 건의하면 항상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대통령은 이렇게 얘기한 적이 있다.
"두 번씩이나 얘기할 때는 필시 무슨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수용하는 게 맞습니다. 터무니없는 얘기가 아닌 한 그 사람을 참모 뒀으면 받아들여야지요."
어느 대통령이나 자신이 생각하는 핵심의제, 소위 대통령 어젠다라는 게 있다. 노 대통령은 정치를 이렇게 얘기했다.
"어젠다를 만들고 그것을 통해 세력을 결집하는 게 정치다. 그러므로 정치인은 새로운 어젠다를 만들고 끊임없이 던져서 국민에게 생각이라도 해봐 달라고 해야 한다."
대통령은 행사에서 돌아와 경위 보고를 받았다. 대통령이 취한 조치는 의외였다. 대통령과 연설비서관실 간에 소통이 잘될 수 있는 근본적인 조치를 지시했다. 연설비서관실을 공보수석실 소속에서 대통령 직속으로 바꾸고, 사무실도 비서동이 아닌 본관 대통령 집무실 옆 방으로 옮기라는 지시였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정확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서는 이를 담당하는 연설비서관실부터 가까운 곳에서 대통령의 말을 잘 알아들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짧은 말은 긴 말보다 결코 쉽지 않다. 짧은 말속에 모든 것을 얘기해야 하고, 또한 핵심을 찔러야 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명문장가 이덕무 선생은 이를 이렇게 얘기했다. "간략하되 뼈가 드러나지 않아야 하고, 상세하되 살찌지 않아야 한다." (한정주, [조선 지식인의 글쓰기 노트], 포럼)
누구나 아는 얘기 중에, 더 극단적인 사례도 있다.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가 출판사에 원고를 보낸 후 반응이 궁금해서 이렇게 편지를 보냈다.
"?"
이에 대해 출판사에서 답을 보내왔다.
"!"
그 결과로 [레미제라블]이 탄생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두려움뿐이다."
(1993년 대공황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용기를 북돋워줬던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연설)
김대중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 연설문의 일부다.
"여러분께 간곡히 피맺힌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행동하는 양심'이 됩시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지식의 저주'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단순한 문제를 복잡하게 말하는 데는 지식이 필요하고, 복잡한 문제를 단순하게 말하는 데는 내공이 필요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이 살아온 날들을 보면 그 사람이 살아갈 날들이 보인다."
노무현 대통령이 자주 쓰던 말이다. 중요한 것은 행동과 실천이다.
김 대통령은 자전적 에세이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서 이렇게 말한다.
"대화는 얼마나 말을 잘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의 말을 잘 듣는 것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대화의 요체는 수사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말을 경청하는 심리학에 있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의 말을 경청할 때 비로소 대화가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남의 말에 귀 기울일 줄 모르는 사람은 대화의 실격자요, 인생의 실격자다."
2001년 12월 민주당 상임고문이었던 노 대통령이 서울 후원회 행사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하면서 한 연설문이다.
"조선 건국 이래 600년 동안 우리는 권력에 맞서서 권력을 한 번도 바꿔보지 못했다. 비록 그것이 정의라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권력이 싫어하는 말을 했던 사람은, 또는 진리를 내세워 권력에 저항했던 사람은 전부 죽임을 당했다. 그 자손들까지 멸문지화를 당했고 패가망신했다. (중략) 이 비겁한 교훈을 가르쳐야 했던 우리 600년의 역사, 이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
이미지냐, 콘텐츠냐? 형식이냐, 내용이냐? 겉이냐, 속이냐? 대다수는 전자보다는 후자 쪽 손을 들어줄 것이다. 그런데 이와 전혀 상반된 주장이 있다. 바로 '메라비언 법칙'이다. 어떤 사람이 말을 했을 때, 그로부터 받는 인상은 자세와 용모, 복장, 제스처가 55%, 목소리 톤이나 음색이 38%, 내용이 7%의 중요도를 갖는다는 것이다. UCLA 심리학과 교수 앨버트 메라비언의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말의 '내용'은 중요도란 면에서 고작 7%의 비중밖에 되지 않는다. 나머지 93%는 이미지가 좌우한다. 이미지가 말이나 글보다 강하고, 몸이 입보다 더 많은 말을 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초 총칼로 권력을 찬탈한 신군부 세력이 달콤한 제안으로 회유하려 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당신들에게 협력하면 일시적으로는 살지만 영원히 죽는다. 그러나 당신들에게 협력하지 않으면 일시적으로는 죽지만 역사와 국민의 마음속에 영원히 산다. 따라서 나는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하겠다."
그러나 쫄지 말자. '아니면 말고'다. 용감하게 도전해보자. 도전하면 50%의 성공 확률이 있지만, 시도하지 않으면 100% 실패뿐이다.
첫째, 자기만의 관점이 있어야 한다. 김 대통령은 이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모든 지식은 내 자신의 비판의 그물에서 여과시켜 받아들여야 한다. 설사 그것이 미숙하고 과오를 범할 위험이 있을지라도, 그것이야말로 내가 나로서 사는 유일한 지적 생활의 길이다."
(최성, <김대중 잠언집>, 다산책방)
(김대중 대통령)
"논리의 검증을 거치지 않은 경험은 잡담이며, 경험의 검증을 거치지 않는 논리는 공론이다."
"민생은 정책에서 나오고, 정책은 정치에서 나옵니다. 정치는 여론을 따르고, 여론은 언론이 주도합니다. 언론의 수준이 그 사회의 수준을 좌우할 수밖에 없습니다."
<2007년 6월 참여정부 평가포럼 강연>
노 대통령은 연설문에서도 가급적 의례적인 칭찬은 하지 않았다. 칭찬을 해도 근거를 갖고 했다.
김 대통령은 꾸중을 하는 데도 원칙이 있었다. 그 원칙을 자신의 자서전 <다시,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에서 밝힌 바 있다.
"나는 비판을 하면서 두 가지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하나는 먼저 상대방의 입장이나 장점을 인정해주는 비판, 그리고 두 번째는 상대방의 인격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하는 비판입니다. 상대방의 입장이나 장점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상대방은 비판을 자기에 대한 비난으로 생가갛고 수용해주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인격을 존중하는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 앞에서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치는 처음에 공산주의자를 잡아갔다. 그러나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므로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다음엔 노동자를 잡아가고, 신부를 잡아갔다. 역시 나는 무관심했다. 그러다 나치가 나까지 잡아가려 할 땐 아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
(마르틴 니뮐러 목사)
취임사에는 시대정신이 함축돼 있고, 대통령의 철학과 정책, 비전이 담겨 있다. 국정운영 청사진이자 이정표이다. 워딩 하나하나는 그 자체로 정부의 국정목표와 실천과제가 된다.
김 대통령의 영웅론은 색다르다.
"영웅이란 높은 데에 올라가 포즈를 취하고 국민이 원하는 바를 말하는 사람이다. 자기의 생각이 아니라 국민의 생각을 대신 말해주는 사람이 영웅이다."
그러니까 리더는 말하는 사람, 글 쓰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평소 같은 생각을 얘기했다.
"지금의 리더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 정경유착의 시대도 막을 내렸고, 권력기관도 국민의 품으로 돌아갔다. 대통령이 권력과 돈으로 통치하던 시대는 끝났다. 오직 가진 것이라고는 말과 글, 그리고 도덕적 권위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