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유발 하라리 [호모 데우스]
과학 연구에 몸담고 있지 않은 보통 사람들도 이제는 죽음을 대개 기술적 문제로 생각한다. 한 여성이 병원에 가서 "선생님, 뭐가 문제죠?"라고 묻는다. 의사는 "음, 독감에 걸린 것 같군요" 또는 "결핵입니다" 또는 "암입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죽음에 걸렸습니다"라고 말하는 의사는 없다. 우리 모두는 독감, 결핵, 암이 기술적 문제들이며 언젠가 그 해법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데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허리케인, 자동차 사고, 전쟁으로 죽는 경우에도 우리는 그것을 막을 수 있었고 막아야 했던 기술적 문제에서 실패한 것으로 간주한다. 정부가 더 나은 정책을 펼쳤더라면, 지방자치제가 일을 제대로 했더라면, 군 사령관이 더 현명한 결정을 내렸더라면 죽음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늘날 죽음은 거의 자동적으로 소송과 수사의 대상이 된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죽었을까? 누군가 어딘가에서 잘못한 것이 틀림없다."
과학자, 의사, 학자 들 대부분은 불멸에 대한 노골적인 꿈과 거리를 둔 채, 자신들은 그저 특정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노화와 죽음은 그런 특정한 문제의 결과이므로, 의사들과 과학자들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면 결국 노화와 죽음을 해결할 때까지 멈출 수 없다. "여기까지만. 더 이상은 안돼. 결핵과 암은 극복했지만, 알츠하이머로 계속 죽을 수 있어." 이렇게 선언할 수는 없다. 세계인권선언은 인간이 '90세까지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인간은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할 뿐이다. 그 권리에는 만료일이 없다.
약 2,300년 전 에피쿠로스는 제자들에게 무절제한 쾌락 추구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보다 비참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고 경고했다. 그보다 약 200년 전에 부처는 훨씬 더 급진적인 주장을 했다. 그는 쾌감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인간 고통의 근원이라고 가르쳤다. 그런 감각들은 순간적으로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무의미한 동요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행복하거나 흥분된 감각을 아무리 많이 경험해도 결코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중략)
행복에 대한 이런 불교적 시각은 생화학적 시각과 공통점이 많다. 쾌락은 생겨나자마자 사라지고, 쾌감을 갈구할 뿐 실제로 경험하지 못하는 한 불만 상태가 계속된다는 데 양측을 동의한다. 하지만 문제에 대한 해법은 양측이 꽤 다르다. 생화학적 해법은 한순간도 쾌감이 멈추지 않도록 끊임없이 쾌감을 제공하는 제품과 치룢법을 개발하는 것이다. 부처의 가르침은 쾌감에 대한 갈구 자체를 줄여 쾌감이 우리를 통제하지 못하게 하라는 것이다. 부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마음수련을 통해 감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을 주의 깊게 관찰할 수 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각이 덧없고 무의미한 동요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우리는 그런 감각에 더 이상 끌려다니지 않게 된다. 생기자마자 사라지는 것을 뭐하러 뒤쫓는가?
그런데 과학은 단지 미래를 예측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모든 분야의 학자들은 우리의 지평을 넓히고 그럼으로써 우리 앞에 새로운 미지의 미래를 열고자 한다. 역사 분야에서는 특히 그렇다. 이따금씩 역사학자들이 예언을 시도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역사학의 가장 큰 목표는 우리가 평상시 고려하지 않는 가능성들을 인지시키는 것이다. 역사학자들이 과거를 연구하는 것은 그것을 반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다.
세계를 바꾸려는 운동들은 대개 역사 다시 쓰기에서 시작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새로운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 노동자의 총파업, 자기 몸에 대한 여성들의 권리, 억압받는 소수자들의 정치적 권리를 요구하는 운동에 당신이 찬성하든 안하든, 이러한 운동의 첫 단계는 역사 다시 말하기이다. 새로운 역사는 이렇게 설명할 것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은 운명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지금과 달랐던 때도 있었다. 일련의 우연한 사건들이 우리가 오늘날 아는 부당한 세계를 창조했을 뿐이다. 현명하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세계를 바꿀 수 있고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 주의자들이 자본주의의 역사를 말하고, 페미니스트가 가부장제 사회의 형성 과정을 공부하고, 미국 흑인들이 노예무역의 참상을 기억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들의 목표는 과거를 영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사실 돼지에게 감정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화가 아니다. 그것은 '포유류화'이다. 감정은 인간만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감정은 모든 포유류가 공유하는 성질이다(더 나아가 모든 조류와 몇몇 파충류, 심지어 어류도 감정을 느낀다). 모든 포유류에게 감정과 필요가 진화해왔다면, 돼지가 포유류라는 사실에서 우리는 그들이 감정을 느낀다는 사실을 충분히 연역할 수 있다.
수렵채집인들은 자신들이 생태계에 끼치는 영향을 잘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신들을 우원한 존재로 여기지 않았다. 보통 수렵채집인 무리는 몇십 명 수준이었던 반면, 그들 주변에는 수천 마리의 야생동물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동물들의 욕구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에 수렵채집인 무리의 생존이 달려 있었다. 수렵채집인들은 사슴이 무엇을 바라는지, 사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끊임없이 자문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슴을 사냥할 수도, 사자를 피할 수도 없었다.
반면 농부들이 사는 세계를 통제하고 조성한 것은 인간의 꿈과 생각이었다. 인간은 여전히 폭풍이나 지진 같은 막강한 자연의 힘에 종속되었지만, 다른 동물들이 바라는 바에 얽매일 필요는 없었다. 농가의 소년은 말 타는 법, 황소에 고삐를 매는 법, 말 안 듣는 당나귀를 매질하는 법, 양떼를 목초지로 데려가는 법을 일찌감치 배웠다. 그러한 일상이 만물의 자연적 질서 또는 하늘의 뜻을 반영한다는 것은 믿기 쉽고 솔깃한 이야기였다.
이집트의 농부들과 프로이센의 병사들은 왜 우리가 최후통첩 게임이나 흰목꼬리감기원숭이 실험을 토대로 예상한 것과 다르게 행동했을까? 대규모 집단의 사람들은 소규모 집단의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각각 100만 명씩인 두 집단을 대상으로 최후통첩 게임을 실시해 1,000억 달러를 나눠갖게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아마 이상하고 매혹적인 역학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100만 명이 한자리에 모여 결정을 내릴 수는 없으므로, 각 집단은 소규모의 지배층을 구성할 것이다. 한 집단의 지배층이 다른 집단의 지배층에게 100억 달러를 제안하고 나머지 900억 달러는 자기들이 가진다면 어떨까? 두 번째 집단의 지도자들은 이 불공평한 제안을 받아들여 100억 달러 중 대부분을 자신들의 스위스 은행 계좌로 빼돌리는 한편, 당근과 채찍을 결합해 추종자들의 반란을 막을 것이다. 지배층은 체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즉시 무거운 처벌을 내릴 거라고 위협하는 한편, 온순하고 참을성 있는 사람들에게는 내세에 영원한 보상을 받을 거라고 약속할 것이다. 바로 이것이 고대 이집트와 18세기 프로이센에서 일어난 일이고, 지금도 전 세계 수많은 나라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이런 위협과 약속은, 그것이 인간의 변덕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적 법칙 또는 신의 신성한 명령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한, 흔들림 없는 위계질서와 대규모 협력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대개 성공한다. 인간의 모든 대규모 협력은 결국 상상의 질서에 대한 우리의 믿음에 기반한다. 그것은 우리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중력처럼 실재하고 어길 수 없다고 믿는 일군의 규칙들이다.
우리가 '상상의 질서'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두 가지 유형의 실재만 존재한다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객관적 실재와 주관적 실재 말이다. 객관적 실재에서는 모든 것이 우리의 믿음이나 느낌과 관계없이 존재한다. 예컨대 중력은 객관적 실재이다. 중력은 뉴턴이 발견하기 오래전부터 존재했고,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나 믿지 않는 사람에게나 똑같은 영향을 미친다.
반면 주관적 실재는 내 개인적 믿음과 느낌에 의존한다. (중략) 모든 객관적 검사가 나에게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밝혔고, 나 외에는 아무도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그럼에도 그 고통은 나에게 백 퍼센트 실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실재가 객관적이거나 주관적이며 제3의 옵션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떤 것이 자신의 주관적 느낌이 아니라고 확신하면 그것은 객관적인 것이라는 결론으로 도약한다. 많은 사람들이 신을 믿는다면, 돈이 세상을 움직인다면, 민족주의가 전쟁을 일으키고 제국을 만든다면, 이런 것들은 내 주관적 느낌이 아니다.
하지만 실재에는 제3의 층위가 존재한다. 그것은 상호주관적 실재이다. 상호주관적 실재들은 개개인의 믿음과 느낌보다는 여러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에 의존한다. 역사의 중요한 동인들 가운데 많은 것이 상호주관적 실재이다.
돈이 상호주관적 실재임은 비교적 받아들이기 쉽다. 또한 고대 그리스 신, 악한 제국, 외래문화의 가치가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꺼이 인정한다. 하지만 우리 신, 우리 나라, 우리의 가치가 허구라는 것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의 인생이 어떤 객관적 의미를 지니고, 자신의 희생이 머릿속에서 지어낸 이야기보다 중요한 뭔가를 위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하지만 사실 사람의 인생은 그들이 서로에게 말하는 이야기의 그물망 안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많은 사람이 공동의 이야기망을 함께 짤 때 의미가 생겨난다. 왜 교회에서 결혼하고, 라마단에 금식하고, 선거일에 투표하는 것 같은 특정 행동이 의미가 있을까? 내 부모는 물론 형제, 이웃, 이웃 도시 사람들, 심지어 먼 나라 사람들조차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이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의미있는 일로 생각할까? 그들의 친구와 이웃들도 같은 견해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믿음을 강화하면서 자기 영속적인 고리를 만든다. 다른 모든 사람들이 믿는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상호 확증을 거듭하며 의미의 그물망을 팽팽하게 만든다.
그런데 몇십 년, 몇백 년이 지나면 의미의 그물망이 풀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그물망이 만들어진다.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의 그물망들이 생기고 풀리는 것을 지켜보고, 한 시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였던 것이 후손에 이르러 완전히 무의미해진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사피엔스가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그들만이 상호주관적 의미망을 엮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공동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는 법, 힘, 실체, 장소로 이루어진 그물이다. 이런 그물은 인간만이 십자군, 사회주의 혁명, 인권운동을 조직할 수 있게 된다.
다른 동물들도 아마 다양한 것을 상상할 것이다. 쥐를 습격하기 위해 기다리는 고양이는 쥐가 보이지 않아도 쥐의 생김새를 상상하고, 심지어 쥐의 냄새도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기로 고양이들은 쥐처럼 이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는 것들만 상상할 수 있다. 그들은 본 적도 냄새를 맡은 적도 맛본 적도 없는 것을 상상하지 못한다. 사피엔스만이 그런 비현실적인 것을 상상할 수 있다.
그 결과 고양이와 여타 동물들은 객관적인 영역에 갇혔고 그들의 의사소통 장치는 단지 실재를 기술하기 위해서만 쓰이는 반면, 사피엔스는 언어를 사용해 완전히 새로운 실재들을 창조한다. 지난 7만 년 동안 사피엔스가 발명한 상호주관적 실재들은 점점 막강해졌고, 오늘날 이들이 세계를 지배한다. (중략)
다른 어떤 동물들도 우리에게 맞서지 못하는 것은 그들에게 영혼이나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러기 위해 필요한 상상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상호주관적인 실재들을 창조하는 능력은 인간을 다른 동물들에게서 분리할 뿐 아니라, 인문학을 생명과학에서 분리한다. 사학자들은 신이나 국가 같은 상호주관적 실재들의 발생을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반면, 생물학자들은 그런 것의 존재를 잘 인정하지 않는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유전암호를 해독하고 뇌에 있는 모든 뉴런을 파악할 수만 있다면 인류의 모든 비밀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만일 인간에게 영혼이 없다면, 인간의 생각, 감정, 감각이 단지 생화학적 알고리즘에 불과하다면, 인간사회의 그 모든 변덕스러운 변화들을 생물학으로 설명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십자군은 생존하고 번식하라는 진화의 압박이 만든 영역분쟁이었고, 살라딘과 싸우러 성지로 간 잉글랜드 기사들은 이웃 무리의 영역을 강탈하려고 시도하는 늑대들과 다를 바 없었다.
반면 인문학은 상호주관적 실재들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한다. 상호주관적 실재들은 호르몬과 뉴런으로 환원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이야기의 내용에 실질적인 힘을 부여한다는 뜻이다.
언젠가 신경생물학에 획기적인 발견이 이루어지면, 공산주의와 십자군 원정을 엄격하게 생화학적인 관점에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21세기에 역사학과 생물학의 경계가 흐려질 가능성이 높은 이유는 우리가 역사적 사건들에 대한 생물학적 설명을 찾을 것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는 이념이라는 허구들이 유전자 가닥들을 고쳐쓸 것이고, 정치적ㆍ경제적 이해관계가 기후를 재설계할 것이고, 산과 강 같은 지리적 공간이 사이버 공간으로 대체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허구들이 유전암호와 전자암호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상호주관적 실재가 객관적 실재를 삼키고, 생물학은 역사와 융합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21세기에 허구는 소행성과 자연선택을 훨씬 능가하는, 지구상의 가장 강력한 힘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미래를 이해하고 싶다면, 게놈을 해독하고 통계수치를 처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우리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허구들도 해독해야 한다.
파라오의 이집트, 유럽의 제국들, 현대 교육제도 같은 인간의 막강한 조직들이 꼭 실재를 명료한 눈으로 볼 필요는 없다. 그들의 힘은 자기들의 허구적 믿음을 순종적인 실제에 강요하는 능력에서 나온다. 돈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정부는 무가치한 종잇조각을 만들어 그 가치를 선언한 다음, 그 종잇조각을 이용해 다른 모든 것의 가치를 계산한다. 정부는 시민들에게 이 종잇조각을 이용해 세금을 내라고 강요할 힘이 있고, 따라서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그 종잇조각들을 조금이라도 가져야 한다. 그 결과 지폐들은 실제 가치를 갖게 되었고, 정부 관료들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이 입증되었고, 정부가 지폐 발행을 통제하는 한 정부의 힘은 계속 커진다. 만일 누가 "저건 무가치한 종잇조각일 뿐이야"라고 항의하며 마치 돈이 종잇조각에 불과한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는 잘 살기 어려울 것이다.
인간의 협력 네트워크는 대개 자체적인 잣대를 통해 자체 평가를 내리고, 자체 평가 점수는 당연히 높다. 특히 신, 국가, 기업 같은 상상의 실체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인간 네트워크는 일반적으로 상상의 실제의 관점에서 성공을 평가한다. 종교는 신의 계명을 글자 그대로 따르면 성공이고, 국가는 국익을 높이면 성공이고, 기업은 돈을 많이 벌면 성공이다.
그러므로 인간 네트워크의 역사를 검토할 때는, 이따금 멈춰서 실제하는 실체의 관점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것이 좋다. 어떤 실체가 실제하는지 아닌지 어떻게 아느냐고? 아주 간단하다.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라고 질문해보면 된다. 제우스의 사원을 불태워도 제우스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유로화가 가치를 잃어도 유로화는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은행이 파산해도 은행은 고통을 느끼지 않는다. 한 나라가 전쟁에서 패배해도 그 나라가 실제로 고통을 느끼지는 않는다. 이런 경우 고통은 단지 은유이다. 반면 병사가 전투에서 부상을 당하면 그는 실제로 고통을 느낀다. 굶주린 농부는 먹을 것이 전혀 없을 때 고통을 느낀다. 갓 태어난 송아지와 떼어놓으면 어미 소는 고통을 느낀다. 이런 경우 고통은 실제이다.
물론 허구에 대한 믿음도 고통을 초래할 것이다. 예컨대 국가적 신화나 종교적 신화에 대한 믿음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고, 그로 인해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집과 신체의 일부는 물론 목숨까지 잃을 수 있다. 전쟁의 원인은 허구이지만 고통은 백 퍼센트 실제한다. 우리가 허구와 실제를 구별하려고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허구는 나쁜 것이 아니다. 허구는 꼭 필요하다. 돈, 국가, 기업 같은 허구적 실체에 대한 널리 통용되는 이야기가 없다면 복잡한 인간사회가 제대로 돌아갈 수 없다. 똑같은 허구적 규칙들을 모두가 믿지 않으면 축구 경기를 할 수 없고, 허구 없이는 시장과 법원의 이점을 누릴 수 없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지 도구일 뿐이다. 이야기가 목표나 잣대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단지 허구임을 잊을 때 우리는 실제에 대한 감각을 잃게 되며, 그때 우리는 '기업을 위해 많은 돈을 벌려고' 또는 '국익을 보호하려고' 전쟁을 시작한다. 기업, 돈, 국가는 우리의 상상에만 존재한다. 우리는 우리를 도우라고 그것들을 발명했다. 그런데 왜 그것들을 위해 우리의 생명을 희생하는가?
과학과 종교를 둘러싼 오해의 대부분은 종교를 잘못 정의한 데서 기인한다. 종교를 미신, 영성, 초자연적 힘에대한 믿음, 또는 신에 대한 믿음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이다. 하지만 종교는 이 가운데 어떤 것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종교가 미신과 같을 수 없는 이유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믿음을 '미신'이라고 부를 리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내가 믿는 것은 언제나 '진리'이고 미신은 남들이나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당신이 종교를 초자연적 힘에 대한 믿음과 같다고 여긴다면, 세상에 알려진 모든 자연현상을 종교 없이도 이해할 수 있다. 종교는 단지 선택사항일 뿐이다. 당신은 자연의 전부를 이미 완벽하게 이해했으므로, '초자연적인' 종교적 교의를 추가할지 말지는 당신의 선택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종교들은 종교 없이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종교의 교의를 참고하지 않고는 질병이나 가뭄, 또는 지진이 일어나는 진짜 이유를 결코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교를 '신에 대한 믿음'으로 정의하는 것 역시 문제가 있다. 독실한 그리스도교도는 신의 존재를 믿기 때문에 종교를 갖는 반면, 열렬한 공산주의자는 공산주의에 신이 없기 때문에 종교를 갖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종교를 창조한 것은 신이 아니라 인간이고, 종교를 규정하는 것은 신이 있고 없고의 여부가 아니라 사회적 기능이다. 종교는 사회구조에 초인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어떤 것이다. 종교는 사회구조에 초인적 법칙이 반영되어 있다고 반영되어 있다고 주장하며 인간의 규범과 가치를 정당화한다. 종교는 우리가 창조하지 않았으므로 바꿀 수도 없는 어떤 도덕법 체계의 지배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독실한 유대교도는 그것이 바로 신이 창조해 성경에 계시한 도덕법 체계라고 말할 것이다. 힌두교도는 브라흐마, 비슈누, 시바가 법을 창조했고, 베다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했다고 말할 것이다. 불교와 도교부터 공산주의, 나치즘, 자유주의에 이르는 다른 종교들은 이른바 이 초인적 법들이 실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자연법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이 모든 종교는 부처와 노자부터 마르크스와 히틀러에 이르는 각기 다른 예언자와 선지자가 발견하고 계시한 서로 다른 일군의 자연법을 믿는다.
한 유대교도 소년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빠, 왜 우리는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돼요?" 그러면 아버지는 자신의 길고 곱슬곱슬한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긴 뒤 이렇게 대답한다. "얀켈레야, 그것이 세상의 작동원리란다. 너는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우리가 돼지고기를 먹으면 신이 우리를 벌하고, 우리는 나쁜 운명을 맞게 된단다. 이건 내 생각도, 랍비의 생각도 아니야. 랍비가 세상을 창조했다면 아마 돼지고기를 먹어도 율법에 어긋나지 않는 세상을 창조했을 거야. 하지만 랍비는 세상을 창조하지 않았어. 신이 하셨지. 그리고 이유는 모르지만 신은 우리에게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 그러니 우리는 먹으면 안된단다. 알겠니?"
1943년에 한 독일인 소년이 나치 친위대 장교인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빠, 왜 우리는 유대인을 죽여요?" 아버지는 번쩍이는 가죽 군화를 신으며 이렇게 설명한다. "음, 프리츠, 그것이 세상의 작동원리란다. 너는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유대인을 살려두면 그들이 인류를 타락시켜 멸종하게 할 거야. 이건 내 생각이 아니란다. 총통의 생각도 아니야. 만일 히틀러가 세상을 창조했다면 자연선택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세상, 유대인과 아리아인이 함께 조화롭게 살 수 있는 세상을 창조했을 거야. 하지만 히틀러가 세상을 창조하지 않은 걸 어떡하니. 그는 단지 자연법을 해독했고, 그 법칙에 따라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지시했을 뿐이야. 우리가 이 법칙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나쁜 운명을 맞게 될 거야. 알겠니?"
2016년에 한 영국인 소년이 자유당 하원의원인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빠, 왜 우리는 중동에 사는 이슬람교도들의 인권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아버지는 찻잔을 내려놓고 잠시 생각하더니 이렇게 말한다. "음, 던컨. 그것이 세상의 작동원리린다. 너는 아직 어려서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중동에 사는 이슬람교도들까지 포함해 모든 인간은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고, 따라서 똑같은 자연권을 가진단다. 이건 내 생각도, 의회의 결정도 아니야. 만일 의회가 세상을 창조했다면 보편인권은 온갖 이상한 발상들과 함께 어느 분과위원회에 처박혀 있었을 거야. 하지만 의회는 세상을 창조한 게 아니라 이해하려고 할 뿐이고, 우리는 중동에 사는 이슬람교도들의 자연권도 존중해야 한단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인권도 언젠가 침해당할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나쁜 운명을 맞게 될 거야. 이제 그만 가보거라."
사실 윤리적 판단과 사실적 진술을 분리하는 것이 항상 쉽지만은 않다. 종교는 사실적 진술을 윤리적 판단으로 바꾸어 심각한 혼란을 일으키고, 비교적 간단한 논쟁으로 끝날 것을 복잡하게 만드는 집요한 속성이 있다. 그래서 '신이 성경을 썼다'는 사실적 진술은 흔히 '너희는 신이 성경을 썼다는 사실을 믿어야 한다'는 윤리적 명령으로 돌변한다. 이 사실적 진술을 그대로 믿는 것은 선인 반면,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끔찍한 악이다.
반대로 윤리적 판단 안에는 그 제창자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증명되었다고 생각해 구태여 언급하지 않는 사실적 진술이 감춰져 있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과학이 검증할 수 없는 사실)는 윤리적 판단을 한 겹 벗기면 '모든 인간은 불명의 영혼을 갖고 있다'(과학적 논쟁의 대상)는 사실적 진술이 나타난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국가주의자들이 '미국은 신성하다'고 선언할 때, 이 말은 겉으로는 윤리적 판단처럼 보이지만 실은 '지난 수백 년 동안 이루어진 도덕적ㆍ과학적ㆍ경제적 발전에 압도적 지분을 갖고 있는지 과학적으로 조사할 수 있다.
따라서 샘 해리스 같은 몇몇 철학자들은, 인간의 가치 안에는 언제나 사실적 진술이 감춰져 있으므로 과학이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해리스는 모든 인간이 단 하나의 지고의 가치(고통을 최소화하고 행복을 최대화하는 것)를 공유하고, 그러므로 모든 윤리적 논쟁은 행복을 최대화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에 관한 사실적 논증들이라고 생각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행복해지기 위해 천국에 가고 싶어 하고, 자유주의자들은 인간의 자유가 행복을 극대화한다고 믿고, 독일 민족주의자들은 베를린이 전 세계를 통치하면 모두가 더 잘살 거라고 생각한다. 해리스에 따르면, 이슬람 극단주의자, 자유주의자, 민족주의자 들은 윤리적 논쟁을 벌이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 것이 공동의 목표를 실현하는 최선의 방법인가, 하는 사실적 문제에서 의견이 엇갈리는 것이다.
근대사를 과학과 종교 사이의 투쟁으로 그리는 것은 관례처럼 되어 있다. 이론상으로 과학과 종교는 둘 다 다른 무엇보다 진리에 관심을 두지만, 각기 다른 진리를 지지하므로 충돌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실제로는 과학도 종교도 진리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둘은 쉽게 타협하고 공존할 수 있는 것은 물론 협력도 할 수 있다.
종교는 다른 무엇보다 질서에 관심이 있다. 종교의 목표는 사회 구조를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한편 과학은 다른 무엇보다 힘에 관심이 있다. 과학의 목표는 연구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고 전쟁을 하고 식량을 생산하는 힘을 획득하는 것이다. 과학자와 성직자 개인이 다른 무엇보다 진리를 우선시할 수는 있겠지만, 집단적인 제도로서 과학과 종교는 진리보다 질서와 힘을 우선시한다. 그러므로 이 둘은 의외로 잘 어울리는 짝이다. 타협 없는 진리 추구는 영적 여행이라서, 종교나 과학의 제도권 내에 머물기 어렵다.
따라서 근대사를 과학과 특정 종교, 즉 인본주의 사이의 계약 과정을 보는 것이 훨씬 더 정확한 관점일 것이다. 근대 이후의 사회는 인본주의 교의를 믿고, 그 교의에 의문을 제기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교의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과학을 이용한다. 21세기에 인본주의 교의가 순수한 과학이론으로 대체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과학과 인본주의 사이의 계약은 깨지고 그 자리에 매우 다른 종류의 계약이 들어설 것이다. 그것은 과학과 어떤 새로운 포스트 인본주의 종교 사이의 계약일 것이다.
힘을 계속 추구하게 하는 동력은 과학의 진보와 경제 성장의 동맹이다. 대부분의 역사에서 과학은 굼벵이 같은 속도로 진보했고 경제는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인구가 점진적으로 증가하면서 생산도 늘어났고, 산발적으로 일어난 과학적 발견이 이따금씩 1인당 성장률을 높여주었지만, 이 과정은 전반적으로 매우 더뎠다. (중략)
이런 경제적 정체의 한 가지 큰 원인은 새로운 사업을 위한 자금 조달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적당한 자금 없이 습지의 물을 빼고 다리를 건설하고 항구를 짓기는 어렵다. 하물며 새로운 밀 종자를 얻고, 새로운 에너지원을 발견하고, 새로운 무역로를 트는 일은 말할 나위도 없었다. 자금 조달이 어려웠던 이유는 그 시절에는 신용거래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고, 신용거래가 거의 없었던 이유는 성장에 대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며, 사람들이 성장을 믿지 않았던 이유는 경제가 정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체는 무한히 계속되었다. (중략)
근대에 이르러 이 악순환이 마침내 깨졌다. 미래에 대한 신뢰가 커지고 그에 따라 신용거래라는 기적이 일어난 덕분이었다. 신용이란 신뢰를 경제적 수단으로 표시하는 것이다. 요즘 시대에는 신약을 개발하고 싶은데 돈이 충분하지 않다면, 은행에서 대출을 받거나 개인 투자자 또는 투기자금에 의지할 수 있다. (중략)
새로운 벤처기업들이 여기저기서 성공을 거두면, 미래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가 증가하고 신용거래도 확대된다. 그러면 이자율이 떨어져 사업가들이 더 쉽게 돈을 조달할 수 있고 경제가 성장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미래에 더 큰 신뢰를 가지고, 경제는 계속 성장하고, 그와 함께 과학도 발전한다.
적어 놓고 보면 간단한 일 같다. 이렇게 쉬운데 왜 근대에 와서야 경제속도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을까?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미래의 성장을 별로 믿지 않았던 것은 그들이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성장이라는 개념이 우리의 육감, 진화적 유산, 세상 돌아가는 방식과 모순되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자연 시스템은 평형 상태로 존재하고, 대부분의 생존투쟁은 한쪽이 성공하면 다른 쪽이 손해 보는 제로섬 게임이다.
종교라는 딱지를 붙이면 대부분의 자본주의자들이 싫어하겠지만, 적어도 종교의 영역에서 자본주의는 고개를 빳빳이 들어도 된다. 저 세상의 파이를 약속하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자본주의는 지상의 기적을 약속한다. 때로는 정말로 그런 기적을 가져다주기까지 한다. 기아와 역병을 극복한 공의 대부분은 성장을 신봉하는 자본주의에 돌아가야 한다. 심지어 자본주의는 인간사회에 폭력을 줄이고 관용과 협력을 증가시킨 점에 대해서도 칭찬받을 자격이 있다. 이 부분에 기여한 또 다른 요인들이 있다는 것을 다음 장에서 설명하겠지만, 자본주의는 사람들이 경제를 네 이윤이 곧 내 손실인 제로섬 게임이 아닌, 네 이윤이 곧 내 이윤인 윈윈 상황으로 보게 함으로써 세계 화합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이런 호혜주의적 접근방식은 네 이웃을 사랑하고 한쪽 뺨을 때리거든 다른 쪽 뺨을 내어주라는 수백 년간의 기독교 설교보다 세계 화합에 훨씬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세계를 크기가 고정된 파이로 보는 전통적인 세계관은 이 세계에 오직 두 종류의 자원만 존재한다고 본다. 바로 원재료와 에너지이다. 하지만 실은 세 종류의 자원이 존재한다. 원재료, 에너지 그리고 지식이다. 원재료와 에너지는 고갈된다. 사용하면 할수록 줄어든다. 반면 지식은 성장하는 자원이다. 사용하면 할수록 늘어난다. 실제로 당신이 지식의 총량을 늘리면 그 지식은 당신에게 더 많은 원재료와 에너지를 준다. 내가 알래스카에서 석유를 탐사하는데 1억 달러를 투자해 석유를 발견한다면, 나는 석유를 더 많이 갖지만 내 손자들은 나보다 석유를 적게 가질 것이다. 반면 내가 태양에너지를 연구하는 데 1억 달러를 투자해 태양에너지를 이용하는 새롭고 더 효율적인 방법을 발견한다면, 나는 물론 내 손자들도 더 많은 에너지를 가질 것이다.
수천 년 동안 과학의 성장로가 막혀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세상에 관한 모든 중요한 지식이 성경과 고대 전통에 담겨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유전들이 이미 다 발견되었다고 믿는 회사는 석유를 탐사하는 데 시간과 돈을 낭비하지 않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는 새 지식을 찾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 이것인 전근대 인류 문명 대부분의 입장이었다. 하지만 과학혁명이 인류를 그런 순진한 혁신에서 혁명시켰다. 과학의 가장 위대한 발견은 무지를 발견할 것이었다.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이 얼마나 없는지 깨달았을 때 비로소 인간에게 새 지식을 찾아나설 매우 타당한 이유가 생겼고, 이것은 진보를 향해가는 과학의 길을 열었다.
어제의 사치는 오늘의 필수품이 된다.
오늘날 인본주의자들은 인간의 감정이 예술 창조와 미적 가치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믿는다. 음악을 창조하고 평가하는 것은 우리 내면의 목소리이고, 이 목소리는 별들의 리듬도, 뮤즈와 천사의 명령도 따를 필요가 없다. 별들은 소리를 내지 않고, 뮤즈와 천사들은 우리의 상상 속에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현대의 예술가들은 신의 지시보다는 자기 자신의 감정에 귀 기울인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술을 평가하는 어떤 객관적인 잣대를 더 이상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대신 우리는 우리 자신의 주관적 감정에 귀 기울인다. 윤리학에서 인본주의의 모토는 '좋게 느껴지면 해라'이다. 정치학에서 인본주의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고 가르친다. 미학에서 인본주의는 '아름다움은 보는 이의 눈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자유민주주의는 점점 노쇠한 백인 제국주의자들의 배타적인 클럽처럼 보였다. 그들은 다른 세계는 고사하고, 자기들의 젊은 후손에게조차도 줄 것이 별로 없었다. 워싱턴은 자유세계의 지도자임을 자처했으나, 같은 편의 대부분은 권위주의 국가의 왕들(사우디아라비아의 칼레드 왕, 모로코의 하산 왕, 페르시아의 샤)이나 군부독재자들(그리스의 대령들, 칠레의 피노체트 장군, 스페인의 프랑코 장군, 한국의 박정희 장군, 브라질의 가이젤 장군 그리고 대만의 대원수 장개석)이었다.
이 모든 왕과 장구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가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보다 군사적으로 압조적인 우위를 점했다. 서구 국가들이 재래식 무기로 그들과 같은 수준에 다다르려 했다면, 아마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을 철회하고 영구적 전시 상태에 놓인 전체주의 국가 되어야 했을 것이다. 자유주의를 구원한 것은 핵무기였다. NATO는 상호확실파괴 전략을 채택했는데, 소련이 재래식 무기로 공격해도 전면적인 핵 공격으로 응답한다는 전략이었다. 자유주의자들은 "나를 공격하면 우리 모두가 죽을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 무시무시한 방패 덕분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마지막 요새에서 그럭저럭 버틸 수 있었고, 서구인들은 섹스, 마약, 로큰롤뿐 아니라 세탁기, 냉장고, TV를 향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핵무기가 없었다면 비틀스도, 우드수톡도, 상품이 넘쳐나는 슈퍼마켓도 없었을 것이다. 핵무기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중반까지는 미래가 사회주의 편으로 보였다.
하지만 영혼은 존재하지 않고 인간에게는 '자아'라고 불리는 내적 본질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자아가 어떻게 욕망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미혼 남성에게 "당신의 아내는 어떻게 옷을 고르는가?"라고 묻는 것과 같다. 현실에는 의식의 흐름만 존재하고, 욕망은 그 흐름 안에서 생겨났다가 사라질 뿐이다. 욕망을 소유하는 불멸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내 욕망을 결정론적으로 선택하는지, 무작위로 선택하는지, 자유의지로 선택하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무척 복잡한 말처럼 들리겠지만 이 개념을 검증하는 것은 놀라운 만큼 쉽다. 당신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거든 이렇게 자문해보면 된다. '내가 왜 이 생각을 했을까? 이 생각을 하겠다고 1분 전에 결정하고 그런 다음에 생각했나? 아니면 내 어떤 지시나 허가 없이 그 생각이 그냥 떠올랐나? 내 생각과 결정의 주인이 실제로 나라면, 다음 60초 동안 아무 생각도 하지 않겠다는 결정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할 수 있는지 한번 해보라.
자유의지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은 단순한 철학 훈련이 아니다. 그것은 실생활에 영향을 미친다. 유기체가 자유의지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것은 우리가 약물, 유전공학, 직접적인 뇌 자극을 통해 그 유기체의 욕망을 조작하는 것은 물론 통제까지 할 수 있다는 뜻이다.
성직자들은 수천 년 전에 이 원리를 발견했다. 수많은 종교의식과 계명의 근저에 이런 원리가 깔려 있다. 신이나 국가 같은 상상의 실체를 믿게 하려면, 사람들이 가치 있는 뭔가를 희생하게 해야 한다. 희생이 고통스러울수록 그 희생을 바치는 대상의 존재를 더 확실히 믿게 된다. 값비싼 황소를 제우스에게 바치는 가난한 농부는 제우스가 실존한다고 확신할 것이다.
지금까지 높은 지능은 발달한 의식과 항상 짝지어 다녔다. 의식을 가진 존재만이 체스를 두고, 자동차를 몰고, 질병을 진단하고, 테러범을 찾아내는 것 같은 높은 지능을 요하는 일들을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이런 일들을 인간보다 훨씬 잘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비의식적 지능을 개발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모두 패턴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데, 머지않아 비의식적 알고리즘이 인간의 의식보다 패턴 인식을 더 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완전히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둘 중 어느 것이 진정 중요한가? 지능인가, 아니면 의식인가? 이 둘이 항상 짝지어 다니는 한 둘의 상대적 가치를 논하는 것은 철학자들의 소일거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21세기에 이 문제는 절박한 정치적ㆍ경제적 쟁점이 되었다. 그리고 군대와 기업은 이것이 "지능은 반드시 있어야 하지만 의식은 선택 사항이다"라고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문제임을 알고 나면 정신이 번쩍 든다.
어떤 사람들은 알고리즘이 기술적 측면에서는 의사와 약사보다 잘할지 몰라도 인간미는 결코 대체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당신이 CT를 찍었는데 암이라는 진단이 나왔다면, 그 소식을 배려와 감정이입 능력을 갖춘 인간 의사에게 듣고 싶겠는가, 아니면 기계에서 듣고 싶겠는가? 그것이 문제라면, 당신의 성격 유형에 맞는 단어를 고르는 배려를 할 줄 알고 감정이입 능력도 있는 기계에게 그 소식을 듣는다면 어떨까? 유기체는 알고리즘이고, 왓슨은 당신의 종양을 알아채는 것만큼이나 당신의 감정 상태를 정확하게 알아챌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사실 시간이 갈수록 인간을 컴퓨터 알고리즘으로 대체하기가 점점 더 쉬워지는데, 알고리즘이 더 영리해지고 있기도 하지만, 인간이 전문화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고대 수렵채집인들은 생존하려면 다양한 종류의 기술을 다룰 수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로봇 수렵채집인을 설계하기는 엄청나게 어려울 것이다. 로봇 수렵채집인은 부싯돌로 창촉을 만들 줄 알아야 하고, 숲에서 먹어도 되는 버섯을 찾아낼 수 있어야 하고, 약초로 상처 부위를 감쌀 줄 알아야 하고, 매머드를 추적할 줄 알아야 하며, 10여 명의 다른 사냥꾼들과 협동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지난 몇천 년 동안 인간은 점점 전문가가 되었다. 택시 기사나 심장전문의는 수렵채집인에 비하면 훨씬 좁은 분야의 전문가라서 인공지능으로 대체하기가 더 쉽다.
이 모든 활동을 책임지는 관리자조차 대체 가능하다. 고성능 알고리즘 덕분에 우버는 단 몇 명의 사람으로 수백만 명의 택시 기사들을 관리할 수 있다.
이 장을 시작할 때 우리는 자유주의가 직면한 몇 가지 실질적 위협들을 확인했다. 첫 번째는 인간이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쓸모없어질 거라는 점이다. 물론 이것은 가능성일 뿐 예언이 아니다. 기술적 어려움 또는 정치적 반대가 알고리즘이 직업시장에 침입하는 속도를 늦출 것이다. 또는 인간의 마음은 상당 부분 여전히 미지의 영토로 남아 있어서, 인간이 어떤 숨겨진 재능을 발견할지 그리고 어떤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 잃어버린 직업을 대체할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자유주의를 구원하기에 역부족인데, 자유주의는 인간의 가치뿐 아니라 개인주의를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주의가 직면한 두 번째 위협은, 미래에 시스템이 여전히 인간을 필요로 한다 해도 개인을 필요로 하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다. 인간은 계속 작곡을 하고 물리학을 가르치고 돈을 투자하겠지만, 시스템은 인간보다 인간을 더 잘 이해할 것이고, 따라서 인간 대신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을 내릴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시스템은 개인들에게서 권한과 자유를 박탈할 것이다.
개인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의 믿음은 이 책의 앞부분에서 살펴본 세 가지 중요한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
1. 나는 분리할 수 없는 존재이다. 즉 나는 부분이나 하부 시스템들로 분리할 수 없는 단일한 본질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내적 중심은 여러 겹의 껍데기로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내가 그런 껍데기들을 벗겨내고자 한다면, 내 안의 깊숙한 곳에서 단 하나의 분명한 내적 목소리를 발견할 것이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나이다.
2. 진정한 나는 완전히 자유롭다.
3. 앞의 두 전제로부터, 다른 누구보다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잘 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왜냐하면 내 내면에 있는 자유의지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고, 진정한 자아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사람도 나뿐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가 개인에게 그토록 많은 권한을 부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 나 외에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므로, 나는 나에 대한 선택을 다른 누구에게도 맡길 수 없다. 유권자가 가장 잘 아는 이유, 고객이 항상 옳은 이유 그리고 아름다움이 보는 사람에게 달려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생명과학은 이 가정 세 가지 모두에 도전한다. 생명과학은 이렇게 주장한다.
1. 유기체는 알고리즘이고, 인간은 분리할 수 없는 존재가 아니다. 즉 인간은 여러 알고리즘들의 집합으로, 단일한 내적 목소리 또는 단일한 나는 없다.
2. 인간을 구성하는 알고리즘들은 유전자와 환경의 영향을 받고, 자유의지가 아니라 결정론적으로 또는 무작위적으로 결정을 내린다.
3. 앞의 두 전제로부터, 이론상으로 외부의 어떤 알고리즘이 나보다 나 자신에 대해 훨씬 더 잘 안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내 몸과 뇌를 구성하는 시스템 각각을 관리 감독하는 알고리즘은 내가 누구이고 어떻게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있다. 그런 알고리즘이 개발되면 유권자, 고객, 보는 사람의 눈을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알고리즘이 가장 잘 알고, 알고리즘이 항상 옳고, 알고리즘의 계산에 아름다움이 달려 있게 될 것이다.
"나는 너를 잘 아는데, 너는 이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을 거야. 존보다 폴이 훨씬 더 잘생겼지. 너는 외모를 중시하니까, 내가 '폴'이라고 말해주기를 내심 바랐을 거야. 물론 외모는 중요하지. 하지만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은 아니야. 수만 년 전 아프리카 사바나에서 진화한 네 생화학적 알고리즘은 배우자감을 전반적으로 평가할 때 외무에 두는 비중이 35퍼센트야. 하지만 최신 연구와 통계를 바탕으로 하는 내 알고리즘은 외모가 사랑하는 관계에 장기적으로 미치는 영향은 14퍼센트에 불과하다고 말해. 그러니 폴의 외모를 고려한다 해도 네가 존과 함께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해."
이런 충실한 상담 서비스를 받는 대가로 우리가 포기해야 하는 것은 인간은 분할할 수 없는 존재이며 각 개인은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아름다움이고 무엇이 인생의 의미인지 결정할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개념뿐이다. 인간은 더 이상 이야기하는 자아가 꾸며내는 이야기들의 지시를 따르는 자율적 실체들이 아니라, 거대한 전지구적 네트워크의 필수불가결한 일부가 될 것이다.
자유주의는 이야기하는 자아를 신성시하고, 투표소, 슈퍼마켓, 결혼시장에서 선택할 권한을 이야기하는 자아에게 준다. 수백 년 동안 그렇게 하는 것이 합리적이었던 것은 이야기하는 자아가 온갖 종류의 허구와 판타지를 믿는다 해도 그만큼 나를 잘 아는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나를 더 잘 아는 시스템이 생겼는데 이야기하는 자아에게 계속 권한을 맡기는 것은 무모한 일일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제기하면 과학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20세기의 수많은 획기적인 의학 치료들도 부자들이 먼저 시작했지만 결국 인류 전체가 혜택을 보았고, 그런 치료들은 사회적 격차를 넓히기보다 좁히는 데 일조했다고 대답한다. 예를 들어 백신과 항생제의 경우 처음에는 서구 국가의 상위 계급에만 혜택이 돌아갔지만 지금은 전 세계 모든 사람들이 혜택을 누린다.
하지만 이런 과정이 21세기에도 그대로 반복될 거라는 기대는 희망적 사고에 그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할 만한 두 가지 중요한 이유가 있다. 첫째, 의학은 중대한 개념적 혁명을 겪고 잇는 중이다. 20세기에 의학의 목표는 병에 걸린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21세기에 의학의 목표는 건강한 사람의 성능을 높이는 쪽(업그레이드)으로 가고 있다. 병든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평등주의적 목표였다. 왜냐하면 모두가 누릴 수 있고 누려야 하는 육체적ㆍ정신적 건강의 표준이 존재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 표준 밑으로 떨어지면, 문제를 고쳐서 그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들과 같아지게' 만드는 것이 의사의 본분이었다. 반면 건강한 사람을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엘리트주의적 목표이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편적 표준이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일부 개인들에게 우위를 제공하려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략)
둘째로, 20세기 의학의 혜택이 대중에게 돌아간 것은 20세기가 대중의 시대였기 때문이다. 20세기 군대는 수백만 명의 건강한 군인들을 필요로 했고, 20세기 경제는 수백만 명의 건강한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따라서 국가는 모든 국민의 건강과 활력을 보장하기 위해 공공보건 서비스를 마련했다. 지금까지 인류가 이룬 가장 위대한 의학적 성취는 대중 위생시설의 보급, 예방접종 운동, 유행병 극복이었다. (중략)
하지만 대중의 시대는 끝나고, 더불어 대중의학의 시대도 끝날 것이다. 인간 병사와 노동자들이 알고리즘에 밀려나면, 적어도 일부 엘리트 집단들은 쓸모없는 가난뱅이 대중에게 더 나은 건강, 아니, 표준적인 건강조차 제공할 필요가 없으며, 차라리 표준을 능가하는 소수의 초인간을 업그레이드하는 게 집중하는 것이 훨씬 현명한 일이라는 결론에 이를지도 모른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교는 학문의 전통적 피라미드를 뒤집는다. 지금까지는 데이터가 지적 활동이라는 긴 사슬의 첫 번째 단계에 불과했다. 인간이 데어터에서 정보를 증류하고, 정보에서 지식을 증류하고, 지식에서 지혜를 증류해야 했다. 하지만 데이터교도들은 인간이 더 이상 막대한 데이터의 흐름을 감당할 수 없고, 따라서 지식과 지혜를 증류하는 것은 고사하고 데이터에서 정보를 증류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데이터를 처리하는 일은 연산능력이 인간의 뇌 용량을 훨씬 능가하는 전자 알고리즘에게 맡겨야 한다. 실질적으로 데이터교도들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를 밎지 않고 빅데이터와 알고리즘을 더 신뢰한다는 뜻이다.
자본주의가 이기고 공산주의가 패한 것은 자본주의가 더 윤리적이어서도, 개인의 자유가 신성해서도, 신이 이교도인 공산주의자들에게 분노해서도 아니었다. 자본주의가 냉전에서 승리한 것은, 적어도 기술 변화가 가속화되는 시대에는 중앙 집중식 데이터 처리보다 분산식 데이터 처리가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20세기 후반의 급변하는 세계에 대처할 수 없었다. 모든 데이터가 하나의 비밀 벙커에 축적되고 모든 중요한 결정이 노쇠한 수뇌부에 의해 이루어질 때, 대량의 핵폭탄을 생산할 수는 있지만 애플이나 위키피디아는 얻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사정없는 데이터의 흐름은 아무도 계획하지 않고 제어하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는 새로운 발명과 파괴를 일으킨다. 세계경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세계정치가 어디로 향하는지 어느 누구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무도 그것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 당신은 그저 이메일에 더 빨리 답하고 시스템이 그 메일들을 읽을 수 있도록 승인하기만 하면 된다. 자유시장 자본주의자들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믿듯이, 데이터교도들은 데이터 흐름의 보이지 않는 손을 믿는다.
전 지구적 데이터 처리 시스템이 전지전능해지는 만큼, 시스템과 연결되는 것이 모든 의미의 원천이 된다. 사람들이 데이터의 흐름 속에 합류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데이터 흐름의 일부일 때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종교는 당신이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우주적 규모의 장대한 계획의 일부이고, 신은 매순간 당신을 지켜보며 당신의 생각과 감정에 신경 쓴다고 말했다. 이제 데이터교는 당신의 모든 말과 행동은 거대한 데이터 흐름의 일부이고, 알고리즘은 항상 당신을 지켜보며 당신이 행동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신경 쓴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것을 매우 흡족해한다. 진정한 신자들은 데이터 흐름과의 연결이 끊기는 것을 인생의 의미 자체를 잃는 일로 생각한다. 내 행동이나 경험을 아무도 모르고, 그것이 전 지구적 정보교류에 아무 기여도 하지 못한다면, 뭔가를 하고 경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인본주의는 경험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우리는 일어나는 모든 일의 의미를 우리 안에서 찾음으로써 우주에 의미를 채워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데이터교도들은 경험은 공유되지 않으면 가칙 없고 우리는 자기 안에서 의미를 발견할 필요가 없다(실은 발견할 수 없다)고 믿는다. 자신의 경험을 기록해 거대한 데이터의 흐름에 연결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알고리즘들이 그 경험의 의미를 알아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해줄 것이다.
데이터교는 인간의 경험을 데이터 패턴으로 여김으로써 권위와 의미의 원천을 파괴하고, 18세기 이래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위력적인 종교혁명을 예고한다. 로크, 흄, 볼테르 시대에 인본주의자들은 "신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 이제 데이터교가 인본주의자들에게 그들이 한 대로 똑같이 돌려줄 차례이다. "신은 인간 상상력의 산물이지만, 인간 상상력은 생화학적 알고리즘의 산물이다." 18세기에 인본주의는 신 중심적 세계관에서 데이터 중심적 세계관으로 이동함으로써 인간을 밀어낼 것이다.
인간 중심적 세계관에서 데이터 중심적 세계관으로서의 이동은 그저 철학적인 혁명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실용적인 혁명이 될 것이다. 진정으로 중요한 혁명은 모두 실용적이다. '인간이 신을 지어냈다'는 인본주의 사상이 중요했던 것은 그것이 실생활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라는 데이터교의 교의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일상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사상은 행동을 바꿀 때 비로소 세계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생명이라는 실로 장대한 관점으로 본다면, 상호 관련된 다음의 세 과정 앞에서 다른 모든 문제와 상황들은 작게 보일 것이다.
1. 과학은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하나의 교의로 수렴하고 있고, 이 교의에 따르면 유기체는 알고리즘이며 생명은 데이터 처리 과정이다.
2. 지능이 의식에서 분리되고 있다.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들이 곧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세 과정은 세 가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당신이 이 책을 덮은 뒤에도 이 질문들이 오랫동안 당신의 마음속에 남아 있기를 바란다.
1. 유기체는 단지 알고리즘이고, 생명은 실제로 데이터 처리 과정에 불과할까?
2. 지능과 의식 중에 무엇이 더 가치 있을까?
3. 의식은 없지만 지능이 매우 높은 알고리즘이 우리보다 우리 자신을 더 잘 알게 되면 사회, 정치, 일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