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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재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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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컹리 Feb 17. 2018

상실의 시대
(원제 : 노르웨이의 숲)

#61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원제 : 노르웨이의 숲)]


   나는 녹색 펠트를 바른 당구대나 새빨간 N360, 책상 위의 흔 꽃 같은 것들은 모두 깨끗하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화장터의 높다란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경찰서의 조사실에 놓여 있던 펑퍼짐한 모양의 문진 같은 그런 모든 것들을.

   처음에는 그렇게 잘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잊어버리려해도 내 안에는 뭔가 뿌옇게 흐린 공기덩어리 같은 것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를수록 그 덩어리는 단순하면서도 뚜렷한 형상을 갖추기 시작했다. 나는 그 형상을 이런 말로 바꿔 놓을 수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었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말로 해버리면 평범하지만, 그때의 나는 그것을 말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공기덩어로서 몸 안쪽에서 느꼈던 것이다. 당구대 위에 나란히 놓여 있는 네 개의 빨간색과 하얀색 공 안에도 죽음은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마치 미세한 티끌처럼 폐 속으로 들이마시면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때까지도 나는 죽음이라는 것을, 삶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독립적인 존재로 파악하고 있었다. 즉 '죽음은 언젠가는 확실히 우리들을 그 손아귀에 거머쥐게 된다. 그러나 거꾸로 말하면, 죽음이 우리들을 사로잡는 그날까지 우리들은 죽음에 붙잡히는 일이 없는 것이다.' 하고.

   그것은 나에겐 지극히 당연하고 논리적인 명제로 생각되었다. 삶은 이쪽에 있으며, 죽음은 저쪽에 있다. 나는 이쪽에 있고, 저쪽에는 없다.

   그러나 기즈키가 죽은 밤을 경계선으로 하여, 나로선 이제 그런 식으로 죽음을(그리고 삶을) 단순하게 파악할 수는 없게 되어 버렸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저쪽에 있는 존재 따위가 아니었다 죽음은 '나'라는 존재 속에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것이며, 그 사실은 아무리 노력하다 해도 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열일곱 살의 5월 어느 날 밤에 기즈키를 잡아간 죽음은, 그때 동시에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다.

   나는 그런 공기덩어리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열여덟 살의 봄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심각해지지 않으려고도 노력했다. 심각해진다는 것이 반드시 진실에 가까워진다는 것과 같은 뜻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어슴푸레하게나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봐도 죽음은 심각한 사실이었다. 나는 그런 숨막히는 배반성 속에서 끝없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생각하면 확실히 기묘한 나날이었다. 삶의 한복판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미도리는 요쓰야 역에서부터 얼마쯤 걸어가면 나오는, 그녀가 다녔던 여고 앞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요쓰야 역 앞을 지나갈 때 나는 문득 나오코와의 그 끝없는 산책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모든 것은 이 장소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만약 그 5월의 일요일에 중앙선 전철 안에서 우연히 나오코를 만나지 않았던들, 내 인생도 지금과는 전혀 달라져 있었겠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곧 아니지, 만약 그때 만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 같은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나와 나오코는 그때 만나야 했기 때문에 만난 것이고, 만약 그때 만나지 않았더라도, 어딘가에서 우리는 만났을 것이다. 특별한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어려운 일이지"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그리고 연기를 바라보면서 얼마 동안 생각하는 듯했다. "아마도 너무 오래 기다린 탓일지도 몰라. 난 굉장히 완벽한 걸 원하고 있거든. 그래서 어렵다고 생각해."

   "완벽한 사랑을?"

   "아니, 아무리 내가 욕심쟁이라지만 거기까지 바라지 않아. 내가 바라는 건 그저 내 마음대로 하는 거야. 완벽하게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가령 지금 내가 자기에게 딸기 쇼트 케이크를 먹고 싶다고 하면 말이야, 그러면 자기는 모든 걸 집어치우고 그걸 사러 달려가는 거야. 그리고 헐레벌떡 돌아와서 '자, 미도리, 딸기 쇼트 케이크야' 하고 내밀겠지. 그러면 나는 '흥, 이런 건 이젠 먹고 싶지 않아' 그러면서 그걸 창문으로 휙 내던지는 거야. 내가 바라는 건 그런 거란 말이야."

   "그런 건 사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은데" 하고 나는 조금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관계가 있어. 자기가 알지 못할 뿐야" 하고 미도리는 말했다. "여자에겐 말야, 그런 게 굉장히 소중할 때가 있는 거야."

   "딸기 쇼트 케이크를 창문으로 내던지는 행동이?"

   "그래, 난 상대방 남자가 이렇게 말해 주면 좋겠어. '알았어, 미도리, 내가 잘못했어. 네가 곧 딸기 쇼트 케이크가 안 먹고 싶어지리라는 것쯤은 짐작했어야 했는데. 난 당나귀 똥만큼이나 바보스럽고 무지한 것 같아. 사과할 겸 다시 한 번 다른 걸 사다주지. 뭐가 좋아? 초콜릿 무스, 아니면 치즈 케이크?'"

   "그러면 어떻게 되지?"

   "난 그렇게 해서 받은 것만큼 어김없이 상대방을 사랑할 거야."

   "지극히 불합리한 이야기 같은데."

   "하지만 나도선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해.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하고 미도리는 내 어깨 위에서 살래살래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사랑이란 게 지극히 하찮은, 혹은 시시한 데서부터 시작되는 거야. 거기서부터가 아니면 시작되지 않는 거지."

   "미도리처럼 생각하는 여자앨 만난 건 처음인걸."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꽤 많아."



   "치료 효과가 있었나 보군요."

   "그래, 하지만 만병 통치일 수는 없고, 낫지 않는 사람도 많아. 그래도 다른 데서 못 고친 사람도 여기서 꽤 많이 회복되어 나간걸. 이곳의 가장 좋은 점은 모두가 서로서로 돕는다는 거야. 누구나 자기가 불완전하다는 걸 알고 있으니까 서로 도우려고 해. 다른 곳에선 그렇지가 못해, 유감스럽지만. 다른 곳에선 의사는 어디까지나 의사이고, 환자는 어디까지나 환자일 뿐야. 환자는 의사에게 도움을 청하고, 의사는 환자를 도와 주는 거야.

   그렇지만 여기서는 서로 도와 가면서 살아. 우린 서로의 거울이고, 의사도 우리와 같은 동료인 거지. 곁에서 우릴 지켜보고 있다가 뭔가 필요하구나, 하고 느껴지면 어느새 다가와서 도와 주지만, 어떤 때는 우리가 그들을 돕기도 해. 그 말은, 경우에 따라선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는 거야. 예를 들어 나는 어떤 의사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고, 또 다른 환자는 간호사에게 불어를 가르치거든. 말하자면 그런 것들이야. 우리 같은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중엔 전문적인 재능을 지닌 사람이 꽤 많은가 봐. 그래서 여기서는 모두가 평등해. 환자도, 직원도, 그리고 학생도. 학생도 여기에 있는 동안은 우리의 한 동료니까 나는 학생을 돕고, 학생도 나를 돕는 거지."

   레이코 씨는 온 얼굴의 주름을 부드럽게 펴면서 웃었다.



   나는 커피를 마시면서 레이코 씨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솔직히 전 잘 모르겠어요. 도쿄에 있을 때 제가 나오코에게 한 일이 정말 옳았는지…… 그 일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봤지만 아직도 모르겠어요."

   "그건 나 역시 몰라" 하고 레이코 씨는 말했다.

   "나오코도 모르니까. 그건 둘이 서로 잘 이야기해 보고 앞으로 결정지을 일이야, 그렇잖아? 설사 무슨 일이 있었다 해도 좋은 방향으로 이끌어 갈 수 있을 거고.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면, 그 일이 옳았는지 어쨋는지는 그후에 다시 생각해 보면 되지 않겠어?"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녀들이 나가고 나서 나는 옷을 벗고, 샤워를 하고, 머리를 감았다. 그리고 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면서 책장에 꽂혀 있는 레코드 중에서 빌 에반스의 것을 꺼내려다 말고, 그게 나오코의 생일날 그녀의 방에서 내가 몇 번인가 들었던 것과 같은 레코드임을 깨달았다. 나오코가 울었고, 내가 그녀를 안았던 그 밤이었다.

   반년 밖에 안 된 일이었지만 아득한 옛날처럼 생각되었다. 아마 그 일을 두고두고 몇 번씩이나 생각해 왔던 탓이 아닐까. 너무나 자주 생각했기 때문에 시간 감각이 늘어나 엉망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달빛이 매우 밝아서, 나는 불을 끄고 소파에 누워 빌 에반스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다.



   "나오코는 자주 저런 상태에 빠지나요?"

   "그래, 가끔은" 하고 그녀는 이번엔 왼손을 보며 말했다. "가끔 저렇게 되거든. 흥분하고, 울고, 그래도 차라리 그런 상태는 좋은 거야. 감정을 드러내 보이니까. 무서운 건 노출이 안 될 때거든. 그렇게 되면 감정이 몸 속에 쌓이고 점점 굳어 가는 거야. 온갖 감정이 뭉쳐 몸 속에서 죽어 가지."

   "제가 아까 뭘 잘못 말한 거라도 있어요?"

   "천만에, 염려 마. 잘못한 말은 아무것도 없으니 마음놓아도 돼. 무엇이든 정직하게 말해. 그게 가장 좋아. 혹 그 말이 서로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더라도, 혹은 아까처럼 남의 감정을 흥분시키는 결과가 되더라도, 긴 안목으로 보면 그게 최상의 방법이야. 학생이 진심으로 나오코를 회복시켜야겠다고 바란다면, 그렇게 해 처음에도 말했지만 나오코를 돕겠다는 생각은 버리고, 나오코를 회복시킴으로써 자기도 회복되기를 바라야 하는 거야. 그게 이곳의 방법이야. 다시 말하자면 학생도 여러 가지 일을 정직하게 말하도록 노력해야만 한다는 거지, 여거서는. 밖에선 모든 걸 다 정직하게 말하지는 않을테니까."

   "알았어요."



   하지만 그날 밤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이런 식으로도 생각했지. 그로부터 이미 2년 반이나 지났다. 그러나 그 녀석은 아직도 열일곱 살 그대로다, 하고. 하지만 그 말은 내 속에서 그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건 아냐. 그의 죽음이 가져다 준 건 아직도 선명하게 내 속에 남아 있고, 그중 어떤 기억은 그 당시보다 오히려 더 선명할 정도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나는 이제 곧 스무 살이 되고, 나와 기즈키가 열여섯 살과 열일곱 살 나이에 공유했던 것 중 어떤 것은 이미 소멸되어 버렸기 때문에, 그건 아무리 한탄해도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거야. 나는 더 이상 잘 설명할 순 없지만 나오코라면 내가 느낀 것, 말하고자 하는 걸 잘 이해해 주리라고 믿어. 그리고 이런 것을 이해해 줄 사람은 나오코밖에 없다는 생각도 들어.



   세 시반이 되자 그녀는 "이제는 가봐야지, 언니와 긴자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하고 말했다. 우리는 전철역까지 걸어가 거기서 헤어졌다. 헤어질 때 그녀는 내 코트 주머니에 네 번 접은 리포트 용지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집에 가서 읽어 달라고 했다. 나는 그걸 전철 안에서 읽었다.

   전략.

   지금 자기는 콜라를 사러 갔고, 나는 그 틈을 이용해서 이 편지를 쓰고 있어요. 벤치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편지를 쓰다니 나로서도 처음 있는 일이에요.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게 자기에게 전달될 가망이 없으니까요.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자기는 거의 아무 말도 귀담아듣지 않았어요. 그렇지요?

   저, 알고 있어요? 자기는 오늘 내게 몹시 가혹한 행동을 했다는걸. 자기는 내 머리 스타일이 달라진 것조차 까많게 모르고 있었죠? 나, 애써 조금씩 조금씩 머리를 길러 겨우 지난 주말에야 여자다운 머리 스타일로 바꿀 수 있게 됐다구요. 그런데 그것조차 의식하지 못했지요? 꽤나 예쁘게 되었으니 오랜만에 만나 놀라게 해주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알아보지도 못했으니 그건 너무했지 뭐예요?

   하긴 자기는 내가 오늘 어떤 옷을 입고 있었는지조차 기억에 없는지도 모르죠. 나도 여자예요. 얼마나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조차 기억에 없는지도 모르죠. 나도 여자예요. 얼마나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는지는 몰라도 조금쯤은 나를 똑바로 봐주면 안 돼요? 단 한마디 '그 머리, 예쁜데' 하고만 말해 줬던들 그 후에 자기가 뭘 했든, 얼만큼 다른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든, 난 자기를 용서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지금, 자기에게 거짓말을 한 거예요. 긴자에서 언니와 만날 약속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난 오늘 자기 집에 가서 잘 생각으로 잠옷까지 갖고 왔다구요. 그래요, 내 백 속엔 잠옷과 칫솔이 들어 있었죠.

   하하하, 참 어리석기도 하지. 그런데 자긴 자기 집으로 가자는 말 한 마디 걸어오지 않았어요. 뭐, 하지만 좋아요. 자기는 나 같은 건 아무래도 좋고, 혼자 있고 싶어하는 것 같으니까 혼자 있게 해줄게요. 열심히 마음껏 생각하고 싶은 걸 생각해 보라구요.

   하지만 내가 자기에 대해서만 화를 내고 있는 건 아니에요. 난 다만, 다만 외로울 뿐이에요. 오히려 자기는 내게 여러 가지로 친절을 베풀어 줬는데, 내가 자기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 같아서 힘들어요. 자기는 언제나 자기 세계에만 틀어박혀 있어서 아무리 노크를 해도 잠시 눈만 올려떠볼 뿐, 금방 제자리로 돌아가 버리는 것 같아요.

   지금 콜라를 든 자기가 막 돌아오고 있어요.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며 걷고 있는 것 같아서 뭔가에 걸려 넘어져 버렸으면, 하고 나는 생각했지만 넘어지지는 않았어요.

   자기는 지금 내 옆에서 꿀꺽꿀꺽 콜라를 마시고 있어요. 콜라를 들고 돌아오면서 "아니, 머리 스타일이 바뀌었잖아!" 하고 놀라워해 줄 걸 기대해 봤지만 허사였어요. 만일 그래 줬다면 이 따위 편지는 박박 찢어 버리고 "저, 자취방을 구경하고 싶어요. 맛있는 저녁을 지어 줄게요. 그리고 사이 좋게 함께 자요" 하고 말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만 자기는 철판처럼 무신경했어요. 안녕.

   P.S. 이 다음에 교실에서 만나도 내게 말 걸지 말아요.



   그러나 이윽고 썰물이 되자, 나는 혼자 모래밭에 남겨져 있었다. 나는 무력해서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슬픔은 깊은 어두움으로 나를 에워싸고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혼자서 울곤 했다. 운다기보다 마치 땀처럼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것이다.

   기즈키가 죽었을 때, 나는 그 죽음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그리고 그것을 체념으로 익혔다. 혹은 익혔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이런 진리였다.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 잠재해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은 지리였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동시에 죽음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만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어떠한 진리도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진리도 어떠한 성실함도 어떠한 강함도 어떠한 부드러움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 슬픔을 실컷 슬퍼한 끝에 거기서 무엇인가를 배우는 길 밖에 없으며, 그리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다음에 닥쳐오는 예기치 않은 슬픔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혼자서 그 밤의 파도 소리를 듣고,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며, 매일처럼 골똘히 그런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위스키를 몇 병씩이나 비우고, 빵을 씹고, 물통의 물을 마시고, 머리를 모래투성이로 만든 채, 배낭을 메고 초가을 해안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걸었다.



   나는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든 너와 이야기를 하고 싶다, 이야기할 게 너무 많다, 이야기해야만 할 게 산처럼 쌓여 있다, 온 세계에서 너말고 내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 너와 만나 이야기하고 싶다, 무엇이 됐건 모든 걸 너와 둘이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말했다.

   미도리는 한참 동안 전화 저쪽에서 말이 없었다. 마치 온 세계의 가랑비가 온 세계의 잔디밭에 내리는 것 같은 친묵만이 이어졌다.

   나는 그 동안 줄곧 유리창에 이마를 바짝 붙이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이윽고 미도리가 입을 열었다.

   "자기, 지금 어디 있는 거야?"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나는 수화기를 든 채 고개를 들고, 공중전화 부스 주변을 둘러보았다.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내 눈에 비치는 것은 어디랄 것도 없이 걸음을 재촉하는 무수한 사람들의 모습뿐이었다. 나는 아무데도 아닌 장소의 한가운데에서 계속 미도리를 부르고 있었다.



◎존재를 좇는 모험


   하루키의 소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전혀 만난 적 없는, 그러나 우리의 내면 속에 분명히 꿈틀거리고 있는, 또 다른 자아와 시대를 만나게 된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은 언제나 어떤 시대적인 이념이나 관념의 목표를 상실하는 것뿐만 아니라, 시대와 공간을 초월해서 자신과 혈육 그리고 친지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벌어진 소원과 이별, 그리고 죽음과 같은 자연적이며 사회적인 '상실'의 아픔과 서글픔을 머금고 길 위에 서 있는 자이다. '사랑'을 찾아, '양'을 찾아, 또는 '태엽 감는 새'를 찾아,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인 '나'는 어딘가 더 먼 곳으로 존재의 모험을 떠난다. 그러나 '나'가 찾아간 곳에서 발견하는 것은 텅 빈 세계이다. 그것은 다른 세상으로 향한 출구가 아닌 이 세계의 다른 모습에 불과하며, 여전히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그곳이 어딘지 나로서는 알 수가 없었다.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대체 여기가 어디란 말인가?

<상실의 시대> 중에서

   모든 게 다 그런 주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하여 존재를 좇는 모험을 끝없이 계속되고, 결국 하루키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그와 같은 뫼비우스의 띠를 '나'와 함께 계속 더듬어 가는 것이다. 목적도 없이, 아무런 해결도 없이.

   그러나 하루키는 그런 텅 빈 세계에서 체념하고 절망하지 않고 '재생'과 '재활'을 지향하며 다시 일어선다. 바로 그 점에 하루키 문학의 강점과 절대적인 매력이 있다는 게 비평가와 독자들의 공통적인 반응이다. 그러니까 허무의 터전에서 출발하는 재생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된다. 존재와 세계에 대한 자각은, 언제나 길의 끝이 아니라, 길 위에서 이루어진다. '나'에게는 모험을 떠나는 여정들 그 자체가 바로 재생을 위한 작은 통과 제의에 다름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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